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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계열33

재림 2021.02.18 15:38 조회 수 : 46

계열 33 엘리스의 모험들 발제입니다(헤이즈)

 

신조어의 세 종류(재론)

-루이스 캐럴에게 세 종류의 신조어는 세 종류의 계열들에 상응함(들뢰즈는 이 동일한 원리들로 시간의 종합에서도 사용).

① 한 계열의 합언적 종합을 수행하는 ‘발음 불가능한 단음절어’ (예: your highness를 축약하는 y’reince’)

② 두 계열의 수렴을 보장해주고 또 그 연언적 종합을 행하는 ‘phlizz’나 ‘snark’같은 말.

(이 알수 없는 요소는 소설에서 다시 발생, 각각의 절節은 통접의 의미를 산출하는 스나크에 대한 어떤 것을 반복함)

③ 이미 다른 둘에 있어 작용했었고, 발산하는 계열들의 선언적 종합을 행하는, 그들을 그렇게 공명하고 가지 치게 만드는 말-손가방. ‘제버워크Jabbrwock’(jabber재잘거리다+wocor과일)라는 괴물이름, 말=x.

(두 상이한 의미 사이의 무규정성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 즉 그것은 그 의미들을 결합하는 분기하는 감정을 갖게됨)

이런 조직화 아래, 어떤 모험이 펼쳐지는 것일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의 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장소 변화를 통해 세 부분으로 구성됨.

① 첫 번째 부분(1-3장). 앨리스의 끝없는 추락. 전적으로 심층의 분열적 요소 내에서 허우적거림. 모든 것이 양분, 똥, 시뮬라크르, 내적 부분적 대상, 유해한 혼합물. 앨리스 자신은 그녀가 작을 때 이 대상 중 하나이며 클 때에는 스스로 그들의 용기의 역할을 함. 사람들은 종종 이 부분의 구강적, 항문적, 요도적 특성을 지적함.

② 두 번째 부분(4-7장). 정향의 변화를 분명하게 드러냄. 새로운 잠재력과 함께 엘리스에 의해 가득 채워진 집이라는 테마가 존재. 앨리스는 토끼를 막고, 도마뱀을 몰아냄(어린아이-페니스-똥이라는 분열증적 계열). 엘리스가 이제 내적 대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녀가 너무 큰 한에서임. 게다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은 이제 심층의 세 번째 항과 관련해 이루질뿐만 아니라 서로간에 그들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공기에 처함. 즉 상층에 처함.

이 부분에서 캐럴은 우리에게 여기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 앨리스를 커지게 만드는 것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 즉 그 고유의 순환성 위에 대안을 정초하는 버섯 위에서 재결합함. 이 인상은 양의적인 버섯이 상층들의 대상으로서 명시적으로 제시된 좋은 대상에 자리를 내주는 한에서만 확립됨. 체스터의 고양이가 이 역할을 함. 이때 고양이는 좋은 대상, 좋은 페니스, 우상 또는 상층들의 목소리임. 그것은 무사하거나 상처입은 고양이임. 이는 현존하거나 부재함. 미소만 내보이거나 좋은 대상의 이 미소에서 출발해 형성됨으로써 현행화되기 때문(성적 충동들로부터의 해방과 관련한 일시적 배려). 그 본질에 있어 고양이는 스스로 물러나는, 스스로 우회하는 존재. 그것이 앨리스에게 함축하는 선언(새로운 대안)은 이 본질이 부합해 두 번 나타난다는 것. 한번은 공작부인의 부엌에서 어린아이나 새끼돼지로서, 또 한 번은 산토끼와 모자 장수 사이에서(땅의 짐승과 머리를 다루는 장인 사이에서 내적 대상들의 편을 취하거나 상층의 좋은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요컨대 심층과 상층 사이에서 선택하는) 조는 루아르로서.

③ 세 번째 부분(8-12장). 역시 변화를 포함함. 이 부분은 두께 없는 카드들, 평평한 모양이 붙어다니는 표면의 정원 안으로 이행함. 이는 앨리스가 스스로를 고양이와 동일시하는 것. 앨리스가 재판받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마주들을 분배시키는 것은 이 표면 위에서임. 그러나 앨리스는 새로운 요소의 위험들을 누름. 그녀의 좋은 의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거세로 귀결하는 방식. 표면이 파이고, “카드 더미가 날아가고 또 앨리스 위로 떨어졌다.”

 

<거울의 이면>은 똑같은 이야기 또는 똑같은 시도를 첫 번째 계기를 버리고 세 번째를 더 전개 시킴으로써 탈구된 방식으로 재시작함,

체스터의 고양이가 앨리스를 위한 좋은 목소리가 되는 대신, 앨리스가 실제의 고양이를 위해 좋은 목소리, 꾸짖고 사랑하고 후퇴하는 목소리를 가짐. 그리고 그 상층으로부터 앨리스는 거울을 순수표면으로서, 외부와 내부, 아래와 위, 안과 속의 연속성으로서 이해함. 그리고 이 거울에서 두 방향으로 동시에 ‘제버워키’가 펼쳐짐. 앨리스는 거울과 관계를 맺은, 여왕이 되려는 시도에 돌입하는 장기판의 표면에 속함. 가로질러야 할 장기판은 분명 생식대들을 나타내며, 여왕이 되는 것은 접속의 심급으로서의 팔루스에 근거함. 이제 곧 이에 상응하는 문제는 복수적인 파롤들의 그것이 되기 위해 유일한 물러난 목소리의 그것이기를 그침.

말할 수 있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모든 장들은 이런 질문을 던짐. 이 때 말mot은 때로 하나의 유일한 계열에(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축약된 고유명사들로서), 때로 수렴하는 두 계열에(더 이상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수렴하며 또 연속적인 튀위들둠과 트위들디처럼), 때로 발산하고 가지 치는 계열들에(의미소들의 주인이자 말들을 지불하는 사람인 험프티 덤프티처럼) 우리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며 또 더 이상 겉과 속을 구분하지 못함.

그러나 파롤들과 표면들의 동시적인 이 조직화 내에서 이미 앨리스가 지적했던 위험은 더 날카로워지고 더 뻗어감. 역시 앨리스는 부모 이마주들을 표면에 분배함. 하얀 여왕, 상처입은 슬픈 어머니, 붉은 왕, 4장 이 후 줄 곧 잠자는 아버지. 그러나 심층과 상층 전체를 가로질러 도달하는 것은 붉은 여왕, 거세의 심급이 된 팔루스임. 다시 최종적인 와해 발생, 이번에는 앨리스 자신에 의해 의도적으로 완성됨. “조심해요!....무엇인가 지나가려 해!” 그러나 무엇인가? 결국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할 정도의 항문적 구강적 심층들로의 후퇴인가? 아니라면 영광스럽고 중성적인, 다른 표면의 이끌어 냄인가?

 

정신분석학과 문학 (*변성찬 선생님 번역 수정 반영 부분)

루이스 캐럴에 의한 정신분석학적 진단: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직면할 수 없는 불가능성, 아버지 앞에서의 도피와 어머니의 포기, 팔루스와 동일시되는 동시에 페니스(이로부터 나오는 구강적-항문적 소급)를 결여한 존재로서의 작은 여자아이로의 투출.

정신분석과 예술 작품(문학적-사변적 작품)간의 조우가 이런 식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음. 작품을 “정신분석하는 것”을 달성되지 않음. 작가는 환자라기보다 의사, 진단학자들, 놀라운 징후학자임.

- 징후들의 묶음을 만드는 것grouping, 특정한 징후가 또 다른 징후와 분리되고, 제3의 징후와 병치되며, 장애나 질병의 새로운 형상을 형성하는 하나의 진단표table을 조직화하는 것에는, 언제나 많은 예술/기예art가 있음.

- 징후학적 진단표를 새롭게 할 줄 아는 임상학자들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 역으로 예술가들은 임상학자들임. 즉, 문명의 임상학자들.

- 환자 스스로가 소설romance을 제공하고, 의사가 그것을 평가함.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문명의 환자이자 동시에 문명의 의사로서의 예술가라는 특정성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임.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가의 소설과 신경증자의 소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임. 신경증자는 자기 소설의 항들terms과 이야기를 현행화할 수 있을 뿐임. 징후들이 이러한 현행화이고, 소설은 다른 의미meaning를 가지 않음. 반대로, 징후들로부터 순수사건의 현행화될 수 없는 부분을 추출하는 것(또는 블랑쇼의 말처럼,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끌어 올리는 것), (먹기, 싸기, 사랑하기, 말하기, 또는 죽기 등과 같은) 일상의 능동들 및 수동들을 그것들의 노에마적 빈위 및 그것들에 상응하는 순수 사건Event으로 끌어 올리는 것, 징후들이 풀어내어지고played out 현행화들이 결정되어 있는 신체적 표면으로부터 순수 사건이 머물고 풀어내어지는played out 형이상학적 표면으로 나가가는 것, 징후들의 원인들로부터 저작/전작前作oeuvre의 준-원인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의 목적이고, 그것을 가족 소설과 구별시켜주는 것임.

< >2) 체험된, 신경증적인 ‘가족 소설“과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징후는 언제나 하나의 소설 안에서 포착되나 소설은 때로 그것의 현행화를 결정하고 대로 반대로 그것이 허구적인 인물들 내에서 반현행화하는 그것의 사건을 이끌어낸다(중요한 것은 인물들의 허구적 성격이 아니라 허구를 설명해주는 것, 즉 순수 사건의 본성과 반현행화의 메커니즘임). 예컨대 사드나 마조크는 사드주의자들이나 마조크주의자들이 신경증적이고 ’가족적인‘ 소설에 있어서만 만들어내는 것을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로서 만들어냄.

달리 말해, 탈성화의 적극적이고 매우 긍정적인 적극적 특성은 사변적인 투여에 의한 심리적 퇴행의 대체replacement of psychic regression by speculative investment 속에 있음. 이것이 사변적 투여가 어떤 성적 대상을 향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않음. 왜냐하면 그 [사변적] 투여는 그 성적 대상으로부터 사건을 해방시키고disengage, 그 대상이 상응하는 사건의 [필연적인] 동반물concomitant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임. 작은 소녀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물음으로 만들어주는 독특한 사건을 이끌어내고 구성하기 위해서, 어떤 전체 저작oeuvre이 필요함. 예술가는 문명의 환자이자 의사일 뿐만 아니라, 그 문명의 도착자pervert임.

- 이 탈성화의 과정 및 한 표면에서 또 다른 표면으로의 도약과 관련해서, 우리는 아직 거의 말한 바가 없음. 단지 캐럴의 작품 속에서 그 힘power이 나타남. 그것은 기초 계열들(캐럴의 신조어들이 포괄하고 있는 것들)을 먹기/말하기라는 양자택일을 위해서to the benefit of the alternative to eat/to speak 탈성화되게 하는 바로 그 힘force 속에서, 그러나 또한 그 성적 대상, 작은 소녀가 유지되게 하는 그 힘force 속에서 나타남. 정말로, 이 도약 속에,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의 이 이행 속에, 그리고 두 번째 표면에 의해 가장자리가 둘러싸인 채 첫 번째 표면이 [변해서] 되어 가는 것what the first surface becomes, skirted over by the second 속에, 미스터리가 놓여 있음. 신체적 장기판에서 논리적 다이어그램으로, 또는 예민한/상처받기 쉬운sensitive 표면에서 초-감각적인 판ultra-sensitive plate으로, 저명한 사진가인 캐럴이 우리가 도착적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는 어떤 쾌락을 체험하는 것, 그리고 그가 천진무구하게 선언하는 것(그가 “통제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아멜리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멜리야 양, 저는 어떤 부정/거절a negative을 위해서 당신에게 다가가는 명예를 저 스스로에게 베풀기를 희망합니다...아멜리아여, 당신은 저의 것입니다!”)은, 바로 이러한 도약 속에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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