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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강좌시간에 앞줄에 앉아서 질문했던 출석번호 1번 심아정(큰콩쥐)이라고 합니다.

제가 진은영 선생님께 질문 드렸던 내용에 대해 늦었지만 다시 생각해보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절 때 노예적 인간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올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네요.

진은영 선생님께서 발언 시간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보다는 글로 차근차근 써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 ^

제가 질문했던 것은……

블랑쇼에 대한 여러 가지 인용이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던 프락시스적 고독과 문학의 사건성에 대해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힘을 가졌던 반면에, 아렌트의 노동/제작/행위,

그리고 그 논의에서 발전된 그녀의 예술론이 비판을 하기 위한 재료로 소모되어버리고 만 것 같은,

심지어 뭔가 부당한느낌이 든다고 까지 제가 표현한 걸로 기억합니다. ㅠ ㅠ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찬찬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대학원 첫 세미나를 아렌트로 시작했는데요, 그 때가 1999년이었습니다.

외교사 전공을 하는 저에게 당시의 아렌트는 낯설기만 한 존재였지만

1990년대 후반에 아렌트나 푸코, 그리고 데리다는 일본에서 매우 뜨겁게 논의되던 정치철학자들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1990년대 초반에 서구에서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가물가물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낡은 자료들을 뒤적여보니……

Magaret Canovan Ursula Ludz라는 두 학자의 연구(발표시기는 각각 1992,1993)

아렌트 해석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이들의 연구는 2002, 2004년에 각각 『アーレントの政治思想再解(아렌트의 정치사상의 재해석)

『政治とは(정치란 무엇인가)라는 표제로 일본에 번역되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차를 두고 일본으로 수입된 아렌트 르네상스 2000년대 초반에 저에게는 어떤 이상한 증상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일본의 대학원생들이 왜 그렇게 아렌트에 대해 많은 논의들을 하는지가 궁금했고,

그들의 문제의식의 소재(所在)를 곧잘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왜 아렌트인가?”

제 동료들의 대답은 냉전 종식 이후 그들(=일본인들 그리고 재일조선인들을 비롯해 일본에 의해 타자화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대일본을 규명하는 이론적인 틀로 아렌트의 시각을 가져오는 것이 적절한 학문적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구소련 붕괴 이후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대항과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와는 차별화되는 어프로치를 사용하여 근대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치적 활동(행위)을 논했다는 이유로

아렌트를 주목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 그리고 아렌트의 본질적인 주장이 결국엔 정치의 의미는 자유라는 것과

사람들의 복수성을 근간으로 해서 정치를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더랬습니다.

 

 

위의 두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기 이전의 아렌트 연구는 『인간의 조건』을 중심으로 ‘행위에 대한 논의들이었지만,

그 이후의 아렌트 연구의 흐름은 초기의 『전체주의의 기원』으로부터 1950년대의 초고들을 경유해서

만년의 「시민적 불복종」, 「판단력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

복수성(複數性)의 철학을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치철학자인 아렌트는 예술에 대한 연구를 하거나 혹은 예술이론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렌트의 예술에 대한 언급은 혹자에게는 보수적이고 깊이가 없으며,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로까지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예술에 대한 언급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꺼내어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의 예술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의 정치철학사상에 내재되어 있는, 예술에 대한 단편적이고 세부적인 언급을 음미하면서

그녀의 사유의 흔적을 통찰력 있게 되짚어 가는 작업을 통해

그녀의 예술에 대한 언급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술이라는 주제로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특히 그녀가 예술을 모델로 해서 묘사한 개념들, 즉 행위(action), 제작(work), 공적 영역(public realm), 판단력(judgment)등을

중심으로 재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지난 시간에 행위나 제작에 대해,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를 언급하셨던 이유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아렌트의 사유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술 개념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사색의 길목에서 예술 개념이 감당해내고 있는 일종의 역할 같은 것을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가 예술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그녀의 사유를 통틀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작가(시인/문학자)들에 대한 에세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에 수록되어 있는 에세이 『문화의 위기-그 사회적/정치적 의미』,

그리고 『인간의 조건』의 제4장과 제5장에서 제작과 행위를 언급했던 부분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저는 아직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렌트에게 있어서 칸트의 정치철학은 1957년부터 독자적인 관점으로 중시되었고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최종적으로 공통감각반성적 판단에 근거한 정치적 판단력에 대한 이론이라고 해석하게 되면서,

이러한 그녀의 문제의식이 1970년에 이르러 『판단력 비판』 해석의 강의로 이어지게 되어,

그녀의 사후 1982년에 출판물로 나오게 되면서부터 아렌트 연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조건』이 출판된 것이 1958년이니까 시기적으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 같아요.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까 저에게도 칸트는 필독해야 할 숙제가 되었네요. ^ ^

 

 

서구의 학계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이나 그들이 만들어낸 담론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늘 의구심을 가져왔던 저이지만, 

그들의 작업을 우리들이 지금-여기에서 살아내고 있는 세계를 논의하는 사유의 틀로써 사용할 때에는  

선행연구자로서 그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고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아렌트 사유의 전체적인 통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예술론을 채용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성급하고 부주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인간의 조건』에서 나오는 예술의 비유와 함께 반드시 논의되어야 하는 지점은

『판단력 비판』의 미학적 개념에서 아렌트가 정치적 판단력을 논의하고 연구했던 사유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렌트의 연구가 미학론(예술론?)의 경향을 띠게 된 지점도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저도 궁금해졌어요. 그녀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리고 제가 유학시절 참여했던 세미나에서는 아렌트의 예술과의 비유에서 행위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끝났었는데, 지금 그 미완성의 논의를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아서 반갑기도 합니다.

 

 

제가 보았던 아렌트의 글 중에서 예술을 오아시스에 비유한 것이 있는데요.

지난 강좌 시간에 예술에 대한 아렌트의 언급들이 수용된 방식과 비교해보면 왠지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그녀의 글들을 일본어로 읽었기 때문에 용어나 표제가 조금 다를 수는 있는데요,

아래의 인용문은 아렌트의 「사색일기」의 1952년 메모입니다. 제가 한글로 번역한 것이고요.

한국어 번역본 책들 어딘가에 수록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을 향한 배려가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자신을 배려한다.(자기자신의 발견).

근대가 시작된 이래로 그렇게 되었다. 이에 반해서 모든 정치의 중심에는 세계를 향한 배려가 있다.

사막과 오아시스. 사막을 오아시스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위험. 세계를 납치해서 사라져버리려는 것.

정치는 세계를 변경하고, 지속시키며, 근거를 부여하는 것을 의도한다.

세계라고 하는 것을 아직 믿고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며,

예술작품의 존속성은 세계의 지속이라고 하는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예술가는 세계소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세계를 납치하려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사막화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사실만이 인간을 해치지 않고 있는 유일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에게는 예술은 없고 키치(Kitsch)만이 있게 될 것이다. (중략)

사막: 유기체가 절멸되는 위험이 닥치면, 배려는 더 이상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다.

칸트는 ()를 단서로 하여, 공공성과 복수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미에 있어서 현상(現象)하는 것은 세계이며, 인류가 아니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등장에 의해서 첨예화된 인간의 역경/고통을 세계소외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위의 메모에서는 예술가를 세계소외에 저항하는 사람들로 간주하고,

예술작품의 존속성이 세계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아렌트의 예술에 대한 언급 또는 그녀의 예술관은

사막과 오아시스에 관한 메모에서 처럼

예술과 예술가를 세계소외에 대한 저항하는 존재로 인정했다는 측면에서도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아렌트는 부담스러운 철학가이고, 예술론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도 없습니다만,

이번 강좌를 통해서 아렌트의 예술에 대한 논의가 어떠한 맥락에서 주목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리고 제가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아렌트를 논하는 것의 의미를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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