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동과 학살의 남성성

-후지노 유코, <도시와 폭동의 민중사 – 도쿄 1905-1923>, 유지사, 2015

(원서 藤野裕子『都市と暴動の民衆史 東京・1905-1923年』、有志舎、2015)

 

가게모토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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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폭동이 계속 일어난 도시였다. 그런데 이 폭동에 깔린 것은 ‘남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하층민들의 문화적 실천이었다. 이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반면,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학살을 일으킨 힘이 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목표가 이 책에는 깔려 있다. 기존 연구에서 1905년의 히비야 방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시작으로 규정된 바 있는데, 이 책은 단지 그러한 평가에 멈추지 않고 이 민중적 에너지가 가장 흉악한 방식으로 노출된 1923년의 학살 사건으로까지 포함해 논의해 나간다. 민중의 폭력 행사가 가지던 힘의 의미를 다양한 층위로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도입된 시각이 ‘남성성’이다.

1905년, 도쿄의 민중은 일본정부가 러일전쟁강화조약에서 너무 양보했다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폭동으로 발전하기 전에는 ‘국민대회’가 있었다. 이 ‘국민대회’라는 ‘옥외집회’는 당시로는 새로운 전술이었다. 일본에서의 남성보통 선거권이 1925년(치안유지법과 같은 해)에 실시된 것을 상기하면, 이때의 ‘국민’은 선거권이 없던 이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들은 선거의 외부에서 ‘집회’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동원된 것이다. 이들이 폭동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러시아 간접 찾기’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러일전쟁 중에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이지만 이 규정이 강화조약 체결에 나선 구체적 정치인들에게 향했다. 즉 강화조약 반대의 폭동에 깔려 있던 민중들의 심성은 ‘간접 찾기’의 그것과 겹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방화 등 폭력행위로 연결되진 않는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유가 필요해진다. 필자는 그것을 폭동참가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게다가 어느 때의 폭동이든 20세 전후의 남성들이 검거자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얽히지 않은 순수하게 분자화한 군중이 아니라 “노동의 유대에 의해 부분적으로 연결된”(76쪽)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유대는 어떤 종류에 것이었는가. 필자는 그것을 지방출신의 젊은 남성들이 도시 생활에서 습득한 문화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토목사업 등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 네트워크에서 그것을 찾는다. 노동의 소개를 통해 뭉친 그들이 없이는 도쿄에서 토목사업을 할 수 없었으며, 그만큼 그들의 유대는 강했다. 그들은 자신들 내부에서 복지사업 같은 것도 하고, 경찰과 같은 제도도 가졌다. 소위 오야분/고분 관계가 그것이다. 폭동에도 그들(즉 네트워크로서의 그들)이 참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참가가 왜 ‘폭동’이 된 것인가? 필자는 그 네트워크 내부에 있는 남성노동자들의 ‘대항문화=유탕적(遊蕩的) 생활실천’에 대해 분석해 나간다.

필자가 논의하는 육체노동자들의 ‘남성스러움의 가치체계’는 술, 도박, 매춘, 폭력, 싸움, 문신 등이다. 일본근대는 그러한 문화를 없애려고 애썼지만 육체노동자들은 감히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항하듯 유탕적 실천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독신노동자였으며, “단성(單性)적 생활구조”(173쪽)에서 생활했다. 그들의 생활의 장은 생산 영역도 재생산 영역도 모두 남성만으로 구성된 것이다. 자위를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공연하게 하고나 동성간의 성적 접속도 발달하고 있었다. 혹은 여성에 대한 강간도 자주 있었다. 여성의 존재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독신 남성들만의 재생산을 하는 장이 형성되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사회적인 상승이 매우 어려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찰나적인 생활실천이 범람한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문신은 아픔에 대해 견딘 증거이기에 신체적인 강함을 보여준 표시가 되어 완력이 강한 것과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 강함의 정도는 문신 면적으로 표현된다. 이렇듯 다양한 찰나적 실천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하층을 살아가는 소외감과 열등감, 그에 인한 인정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들이 있다고 필자는 논의한다. 이는 생생한 활력이 넘치는 실천이었으나, 그들보다 아래에 있던 하층의 여성을 디딤돌로 삼음으로써 획득된 것이었다.

그들의 실천은 상층계급이나 순사들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문화’적인 층위에 멈추지 않고,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폭동하는 신체를 드러내면서 발생한 것이 도시폭동이다. 찰나적인 남성스러움을 중요시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신체, 여기에서 도시폭동은 생겨나간 것이다.

한편 하층남성이 아닌 사람들 중 도시폭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떠한 자였을까? 하층 남성들과 유사한 남성성을 지닌 문화로 ‘고학생’의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화려함을 동경했다는 점에서 하층남성들과 연결되었다. 이들에겐 소외를 위로해주는 것으로 남성성이 있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즉 육체노동자와 고학생은 각자 다른 소외감을 가졌으나 각기 다른 소외감과 인정욕구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도시폭동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이는 도시폭동을 만들어낸 남성노동자의 대항문화가 20년대 이후의 조직적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도시폭동에서 노동운동으로’라는 도식은 종래 역사 연구에서 유지되어온 시각인데, 이는 재고되어야 할 과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역사상 최대 폭동인 쌀폭동을 ‘도시폭동’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물론 쌀폭동은 일본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전체적으로 ‘도시’적인 것은 아니나 이 책은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폭동의 성격을 지닌 부분에 한정해서 논의하고 있다. 도쿄에서는 택시회사, 제약공장, 음식점, 종이 가게, 세탁 집, 전차, 자동차, 유곽 등 쌀과 별로 관계 없는 곳도 습격되었다. 특히 유곽을 공격했다는 부분에서는 그때까지의 폭동에서 보인 남성성을 읽을 수 있다. 도쿄의 쌀폭동에서 방화로까지 나아간 지역은 요시와라 유곽뿐이었다. 그곳은 상층계급 남성들이 매춘하는 상징적인 고급 유곽이고, 자동차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움직임을 10년대 후반에서의 일본 노동운동은 어떻게 흡수했는가? 필자에 따르면 노동운동은 이러한 하층남성들을 노동자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로 취급해 배제했다. 즉 일용직 등을 배제하면서 가족주의적 노동자 통합을 했다는 것이다(260쪽).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20년대 노동운동의 폭력행사에서 ‘남성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는데, 30년대의 노동쟁의로까지 가면 그러한 야쿠자적인 말투는 없어진다고 한다(262쪽). 노동자 계급은 이 무렵 성립이 되는데, 이때 그어진 선은 노동자/자본가뿐만 아니라 정규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사이에도 있었던 것이다. 25년의 남성보통선거 실시는 공간적인 정치를 질서화 시켜, 이후 도시폭동이 일어날 조건을 없앨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공간 정치는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도 일어나던 것이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인 것’이 상승해간 일본의 1920년대와 겹쳐 논의할 수도 있다. 이 의미로 단지 ‘질서화’라는 관점만으로 이 시대를 정리할 수 없다. 그런데 ‘폭동->사회’라는 구도로 이 시대를 파악해버리면, 단지 ‘생활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밖에 보이지 못하게 된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소외감이나 인정욕구를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깔린 ‘남성성’을 놓칠 수 없다. ‘사회적인 것’ 혹은 ‘질서’로 봉합된 것처럼 보인 폭동의 힘은, 그러나 1923년 9월의 조선인 학살을 통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는 도쿄 미나미 아야세(현재의 아다치 구) 지역의 학살을 사례로 논의가 진행된다. 조선인의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언비어가 만들어졌으며, 그 유언비어는 새로운 ‘공포’를 만들어갔다. 그곳에 사는 조선인을 무두 학살하려고 했는데, 놓친 조선인이 있다, 그 놓친 조선인이 다시 습격해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전멸시켜야 한다, 는 식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민중 스스로가 조선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살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조선인으로 오인될 의심이 있는 일본인은 일본인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아래쪽에 있었다. 민족적 위계뿐만 아니라 일본인내부의 권력관계가 겹치고 있었다. 남성노동자의 가치체계는 남성에 지켜져야 할 누군가를 지켜야한다는 심성을 근거로 하면서 이때는 조선인을 죽인 것이다.

도시폭동 속에서의 배타적 발언은 항상 있었는데, 그것은 1923년 관동대지진 속에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 폭력은 권력에 향하기도 했으나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여성, 조선인)에 향하기도 한 것이다. 필자는 그들보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주체로 역사서술이 시도되어야 하며 그것을 앞으로의 과제로 삼겠다고 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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