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친에 접근하는 세 가지 키워드: 소설, 민중, 그로테스크

-최진석,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그린비, 2017) 서평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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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그린비, 2017)은 미하일 바흐친의 ‘생성의 사유’를 탐사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질문은 애초 물음의 형식부터 틀렸다. ‘무엇what’의 자리에 ‘어떤which’이 놓여야 한다. 왜냐하면 ‘생성’이라는 것은 고착된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운동 중의 과정으로서, 운동의 동력학으로서만 파악되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사유가 철학의 영역에 자리매김 하느냐, 혹은 문학론에 기입되느냐하는 문제, 또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삶의 부침을 겪은 바흐친의 업적에서 어떠한 일관성을 발견해 내느냐, 일관성 속에서 부득이 사상되거나 소외되는 단편은 무엇인가 등 대가(大家)에 관한 연구라면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 관해서도 저자는 ‘무엇’이라는 규정대신 ‘어떤’이라는 상태적 질문을 던진다. 바흐친의 사유는 어떤 원리에 의해 추동되었는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 설정을 통해 그간 한 부분을 사상하면서 자리매김 되었던, 혹은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소외되었던 주제들을 모두 끌어 모아 사유의 장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최진석의 시각이기도 하고, 애초 바흐친 사유의 원리이기도 한 생성적 사유다. 대상과 맥락은 다를지언정, 바흐친 사유의 굵직한 키워드는 모두 규정적이고 고체화된 무엇이 아니라, 유동하는 힘으로 파악되는 어떤 것이다.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의 독해는 깊이 뿌리박힌 의문사를 갈아 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어떤은 무엇일까? 회귀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답은 복수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 답은 무엇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유동하는 힘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동적인 주제를 두고, 그것을 관통하는 사유의 원리를 간취함으로써 저자가 말하는 바흐친의 ‘생성의 사유’에 대해서 논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소설

먼저, 바흐친의 소설론을 살펴보자. 한국에서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때 소설론은 차라리 문학론, 혹은 언어관에 가깝다. 소설은 문학의 한 장르다. 흔히 장르style라 함은 외적 형식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바흐친은 이러한 규정 속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서 문학의 장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장르란 “표현의 형식으로서 특정한 강도를 지속하는 가운데 말하고 쓰여지는 어떤 스타일”, 따라서 “매번 창안되는 것”(233)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선험적으로 규정된 척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발화의 집합체”가 일정한 양식style을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이 바흐친에게 언어는 초역사적 원리라든가 문법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언어는 이미 이데올로기화되어 있는 기호이며, 그래서 사회적인 것이다. 말은 발화들의 상호 연관적 맥락 속에서 가동되고, 고정된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동하는 힘이기에, 발화는 항상 바깥을 향해서, 외부와의 관련 속에서 현행화된다. 즉, 발화는 말의 사건적 행위다. 그렇다면 “발화의 집합체”로서 소설은 고정된 양식일 수 없다. 소설은 사회적인 기호로 매개되기에 필연적으로 외부를 향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문체style가 어떤 유동하는 힘에 의해 양식style이 된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옮길 때 관건은 발화의 집합체에 공통성을 부여하는 힘으로서 강도와 벡터이고, 이를 문제 삼을 때 소설은 더 이상 고착된 양식일 수 없고 소설화 그 자체가 된다.

 

2) 민중

바흐친은 민중 역시 유동하는 힘으로써 파악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민중은 이러저러한 규정으로 포획되어 왔다. 가령, 인민주권론에서 ‘인민people’은 국가라는 형식을 지지하기 위해 소환된 가상적 대상이었다. 인민은 그 자체로 사유되기보다 근대적 주권국가의 범주와 결부된 채, 그것을 위해서 상상되었다. 한편, ‘대중mass’은 어원에서 알 수 있듯, 형태가 없고 구별되지 않는 것, 조밀하게 결합된 집합체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mass’가 사회적 집단에 대한 지칭이 되었을 때, 민중이라는 집단의 실존적 특징은 사회적·정치적 가치판단과 단단히 결합한다. 대중 정치의 시대를 맞아 이들은 주요한 정치 주체로 인식되었으나, ‘폭도’, ‘돼지 같은 다중’(‘개돼지’에서 ‘레밍’까지)등 조롱과 폄하를 동반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 프로젝트는 의식화, 계몽이었다. 이후 이는 자본주의 버전으로 갱신되는데, 대중은 자본주의 사회의 수동적 소비 주체로 간주되면서 역시 계몽되어야 할 객체로 위치지어 진다.

이에 반해 ‘계급class’은 민중의 집단적 역량을 부각하면서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계급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데올로기적 의식화를 통해 구성된 결합체이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선언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규정을 벗어나려는 정치 주체이자 힘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는 태생적 조건과 정체성 사이에 모순을 담지 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규정을 벗어나는 힘이라면 계급성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규정되어서도 안 되는”(273)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불러낸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학적 범주의 계급규정을 벗어난,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되어야 하는. 곧 생성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역사적 형성체로서의 대항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과 연관된 실재적 규정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다르게 파악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국민과 동일시되어버린)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 불명확한 집합체인 대중, 역사적 형성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길게 설명한 까닭은 바흐친의 ‘민중’이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자에 따르면 그간 민중은 근대적 포획 장치에 의해 한계적 이념으로 파악되어 왔는데, 인민, 대중,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예다. 반면, 바흐친에게 민중은 “특정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고, 개인의 산술적 총량으로도 셈해지지 않으며, 고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민중’이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 민중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카니발이라면, 전체로서의 민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은 –악당, 광대, 바보, 도둑이다. 카니발의 시간 속에서 민중들은 “개인이 자신이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임을, 민중의 거대한 신체의 한 기관임을 느낀다.”(276) 한편, 악당, 광대, 바보, 도둑이 민중의 이미지인 까닭은, 지배적 가치체계를 위반하고(악당), 성과 속을 전복하며(광대), 합리성과 이성의 법칙을 교란하며(바보), 소유 권력의 위계와 지배를 저지(도둑)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관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민중이라는 명석판명한 규정, 그리고 그 규정에 완전히 귀속되는 무엇이 아니라 경계 위를 살아가고, 경계를 교란하는 탈규정적 힘이다. 민중은 “개념과 범주를 끊임없이 이탈하는 원심적 운동을 통해 의미화되는 것”이다.(317) 운동으로 파악되는 민중이란, 완료되지 않는 변형의 차원, 이행과 전화의 과정 그 자체로서만 말해진다. 이때 민중성을 총체적인 차원에서 아우르는 힘을 저자는 ‘생성stanoblenie’이라 부른다.

 

이행과 변형, 생성을 통해 민중이 표현되는 한, 민중은 타자화와 주체화의 양가적 운동 속에서만 자신을 현재화할 수 있다. 따라서 민중은 타자로서의 주체이자, 주체로서의 타자라는 양가적 이미지 속에서만 드러나며, 이런 모호성이야말로 힘-능력으로서의 민중을 특징 짓는다. 그것이 생성의 관점이며, 이에 따를 때 민중은 차라리 비非인칭적이고 전前인칭적인 실체로서 변환과 변이의 탈형식적 과정을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329)

 

3) 그로테스크

비인칭적·비인격적 운동인 생성의 힘으로써 본다면 소설론은 민중론과 일의적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 바흐친의 사유를 관통하는 일관성은 유동하는 힘, 그 자체를 포착하는 시선이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이미지가 바로 그로테스크이다. 그로테스크는 동물과 식물,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뒤섞고 연결하여 조성해 낸 이미지다. 이는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정체불명의 상태, 모호하고 불안하며 불온하기까지 한 형상들이다. 바흐친이 이러한 이미지에 주목한 것은 이것이 “형태에서 형태로의 이행성” 그 자체를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281)

앞서 카니발 속에서 인식되는 민중의 신체를 상기해 보자.

 

개인은 자신이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임을, 민중의 거대한 신체의 한 기관임을 느낀다. 이러한 전체 속에서, 개인의 몸은 얼마간 개별적이기를 멈춘다. 서로서로 몸을 바꿀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의상이나 가면으로), 동시에 민중은 자신들의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물질적·신체적 통일성과 공통성을 느낀다.(바흐친, <라블레론>, 396-397쪽; 최진석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331쪽에서 재인용)

 

신체가 뒤섞이고, 바뀌고, 아무렇게나 결합되는 형상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로테스크가 민중의 이미지일 수 있는 것은, 민중(성)이 명시적 언어로 표명되지 않고 다만 ‘스타일’로서만 기술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행되고 변환되는 힘 그 자체를 포착한 것이 운동성의 이미지로서 그로테스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탄생한다. 사조로서 리얼리즘이란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다. 그렇다면 기괴한 형상을 지닌 그로테스크에 리얼리즘이 덧붙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복하지만 바흐친의 관점에서 세계의 실재reality는 운동하는 힘, 생성 그 자체이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근대적 인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생성 그 자체를 묘파하는 인식이자 실재론인 것이다.

 

소설, 민중, 그로테스크로 이 저서를 요약하는 것은 (혹은 바흐친의 사유를 탐색해 보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바, 바흐친 사유의 정수가 ‘생성하는 힘’의 포착에 있다면,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키워드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소설과 민중은 규정된 양식과 개념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던 것이었다. 이를 유동하는 힘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변환과 이행을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그로테스크를 이해한다면 최진석-바흐친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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