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야했던 평화의 언어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심아정(수유너머104 회원)

 

IE001291756_STD.jpg  사진_임재성.jpg

 

 

  이 책은 병역거부자의 인권침해 현황이나 대체복무제 개선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이제껏 병역거부자는 주로 권리를 침해 받은 ‘피해자’로서 대상화되어 왔기 때문에 관련 연구 또한 ‘몇 명이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는가’라는 식의 ‘피해’를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논조에 따라 감옥행을 멈추기 위해서 군사훈련이 배제된 방식에 기반한 대체복무제 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결론이 이어졌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기존의 연구는 병역거부자 개개인이 어떤 신념으로 살인훈련을 거부했는지, 그들의 언어와 행동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다루지 못했고, 병역거부자는 구제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공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저자는 피해자에 대한 권리 구제로 한정되는 병역거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청년들이 총을 들 수 없다고 했는지를 책 속에 담고 싶다고, 대체복무제를 넘어서는 병역거부운동의 시대적 의미를 다루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당사자가 쓴 글이지만 당사자 이야기를 넘어서는 맥락과 의미가 이 책에는 녹아 있다. 병역거부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무엇과 대결해 왔는지, 운동을 만들어 온 이들이 어떤 저항과 고민을 만들어 냈는지를 그들의 ‘언어’로 모색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징병제와 군사주의, 일상화된 폭력과 그 폭력에 저항할 가능성을 병역거부라는 창을 통해 고찰할 수 있게 해 준다.


  국방부에서 병역거부사유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 저자에게 관련 위원회 사람들은 “임재성씨, 이라크 전쟁, 반전, 뭐 이런 거 말고 본인 이야기나 하세요”라고 비아냥거렸다. 반전운동이나 종교 같은 거창한 이유 말고 왜 남들 다 가는 군대에 갈 수 없다고 하는건지 자신만의 ‘유별난’ 이유를 말해 보란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듣고 싶었을 게다. 병역거부자를 충분히 타자화시킬 수 있는, 혹은 아주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이유, 그 소수의 이유들을 통해 자신들이 다수임을 확신하고 안심할 수 있는 이유. 그러나 우리 사회는 “왜 병역거부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온전히 들을 준비도, 대답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병역거부의 계보와 변화 양상을 통해서 “왜 병역거부를 합니까”에 대한 대답, 즉 병역거부의 언어를 담아내고, 이 언어를 통해서 병역거부문제가 생경하게 여겨질 독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공감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사진_병역거부2.jpg

 

   병역거부의 언어란 무엇일까? 임재성은 도미야마 이치로의 사유에 기대어 ‘두려움’이라는 병역거부자의 언어에 대해 말한다. 전쟁과 군사훈련, 남성성과 위계질서의 폭력에 동화될 혹은 버텨낼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 두려움이란 임박한 폭력을 예감하는 것이다. 만약 폭력에 동화되거나 저항하는 것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라면, 평화학이 천착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두려움일 것이다. 도미야마는 “폭력이란 물리적으로 행사되면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암시된 시점에서 이미 작동하는 것”이라고 본다. 누군가가 폭력을 예감한 순간, 이미 폭력은 시작된 것이다. 병역거부자인 ‘겁쟁이’들은 특정한 주체라기 보다는 두려움을 다룰 수 있는 ‘공간’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그들의 두려움, 그들이 예감한 폭력을 그들의 ‘언어’로 읽어 낸다는 것은, 상식이라 불리는 체제의 질서가 품고 있는 폭력의 질서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폭력을 예감한다는 것은 “나의 일은 아니다”에서 “그러나 이미 남의 일도 아니다”로 이해의 벡터가 바뀐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체 옆자리의 생존자는 아직 살아있지만, 옆 사람의 죽음이 남의 일일 수도 없다. 공감은 두려워할 줄 아는 겁쟁이의 언어를 통해서, 두려움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말, 침묵을 통해서 시작된다.


  병역거부자의 존재 그 자체는 시민을 병사로 만드는 군사주의의 실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병역을 거부한다고 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는 물음이 종종 뒤따르곤 하는데, 이 질문에는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탄생한 근대국가의 본질이 그 배경으로 드리워져 있다. ‘사는 곳’이 아니라 ‘지켜야 할 곳’으로서의 근대국가가 적극적으로 적을 창출하는 ‘적대성’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


  칼 슈미트는 전후에 쓴 『파르티잔』(1963)에서 ‘적’이란 사실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적은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적은 어떤 이유에서 제거되어야 할, 혹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절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나 자신의 척도와 경계를 얻고 나 자신을 형성하기 위한 적과 투쟁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파르티잔의 싸움에서 ‘적’이라는 척도는 상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적’과 싸우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자신의 태도에 관한 것이며, 누가 적으로 현전(現前)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적’을 ‘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내부에 있다. 슈미트 식의 문제설정 방식은 미국에 의해 지역성이 재편될 때 수반되는 지정학적 감각 및 타자인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효하지 않을까? 누구를 ‘적’으로 대하고 싶은가, 혹은 ‘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은가?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적과의 관계는 결국 자기 현실과의 함수다. 병역거부자들은 바로 이 ‘적’이라 명명되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내가 죽여야 하는 ‘적’은 누가 결정하는가? 이들을 죽이는 것은 정당한 행위인가?


  살인과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신념이 거부 이유로 말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군대가 살인훈련을 받는 살인집단이며, 폭력이 작동하기 위한 비인간화가 내면화되는 공간이라는 명백한 진실에 대한 직접적인 폭로이기도 하다. 저자는 병역거부자들에게 공존의 대상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둔갑시키는 국가폭력의 마취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적에 대한 비인간화를 거부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병역거부자들은 국가폭력이 행했던 가해의 본질을 잊지 않고 가해자의 자리에 섬으로써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체화하고 현재화한다. 이들에게 군인이 된다는 것은 국가폭력에 동참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침략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를 명령에 따라 아무 판단없이 죽여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에서 권위에 의한 살인을 거부하는 힘, ‘아니라고 말하기’를 선택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사진_병역거부3.jpg


  그러나 ‘거부’는 반드시 강고한 신념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민감한 겁쟁이로서 두려움을 드러내고 나약함을 긍정하는 마음에서도 ‘거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특히 유정민석의 거부사유에 주목하는데, 그는 “남자가 이것도 못하냐”라는 성별 정치학의 비아냥거림에 대하여 “왜 잘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답과 함께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함으로써 병역거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의 병역거부는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했다. 운동 내부에서도 강고한 투사의 언어로 병역거부운동이 고정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있었다고 한다. ‘투사’의 언어는, 비록 군사적인 남성성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다른 남성적 ‘결기’로 이어졌고, 투사로서의 병역거부자는 어떤 의미에선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또다른 남성성을 표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유정민석은 소견서에 “겁이 많고 어리버리한 제 심약함을 병역거부의 사유라고 하기엔 미약할 지도 모르겠다”고 썼는데, 이 미약함이야말로 지금까지 병역거부의 언어가 담지 못했던 목소리가 아닐까? 나약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생의 감각으로 그는 의과사제대라는 매력적인 오답을 거부하고 감옥에 갔다.


  이처럼 병역거부는 끊임없이 ‘언어’를 만들어내는 운동이었다. 총을 들 수 없다는,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언어. 그러나 그 언어조차 멈출 수 밖에 없었던 문턱을 확인하는 작업또한 중요하다. 저자는 끝내 마음에 걸렸던 현민의 소견서의 한 구절을 언급한다.

  “나는 여든 살의 외할머니에게 손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심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할 수 없다. … 내가 했던 모든 공부는 나와 사랑하는 외할머니와의 사이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한국의 병역거부운동에는 병역거부자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조차 왜 병역거부를 하는지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언어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병역거부의 문제가 어떻게 당사자를 넘어서 ‘우리’의 문제일 수 있을까? 필자가 강의를 나가는 한 대학에서 한 여학생은 당사자의 논리에 반박하며 아주 명랑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병역거부의 문제는 나의 문제이기도 해요. 병역의 의무는 ‘연애권’을 침해하잖아요?”


  병역거부운동은 시민불복종의 권리, 더 나아가 ‘평화권’이라는 권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여러가지 권리를 현행화하기 위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될 때, 비로소 국가가 ‘안전’ 혹은 ‘안보’라는 담론으로 탈취한 우리의 ‘안녕’을 되찾아 오는 것의 가능성 또한 함께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 7월 4일 화요토론회에는 <삼켜야했던 평화의 언어> 저자 임재성 변호사와 함께합니다. 관심있는 누구나 오실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요기서 http://www.nomadist.org/s104/TuesdayDiscuss/1804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