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Donna Haraway를 영화로 만나다.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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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가 Donna Haraway이야기를 할 때는 얼굴 표정까지 달라진다고 놀리곤 한다. 그녀는 나의 롤모델이자 스승이다.

물론 그녀는 날 알 턱이 없겠지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그녀를 찍은 다큐를 상영했다! 우리는 인터넷 예매 매진직전에아 슬아슬하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오 예~ (ㅋ 이건 효영이한테 배운 감탄사다^^)  효영이가 잽싸게 표를 사준 덕분에 많은 친구들과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현숙쌤, 수정감독님, 진경쌤, 나에게 해러웨이를 소개해준 성관쌤, 효영, 고산, 그리고 반려종선언 번역의 영어를 봐주신 이정기쌤과 영화를 봤다.

지금은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 안인데,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 질까봐 비행기 안에서 리뷰를 쓴다.

 

이 다큐의 제목은 “Story Telling for Earthly Survival”이다. “이야기”는 해러웨이의 사유에서 중요한 도구다.

이야기는 거창한 이론과는 아주 다르다. 어디서나 10분만 지나면 마치 오랜 전부터 알던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시끄럽게 수다를 떨어대는 아줌마들의 놀라운 능력을

생각해보라. “이야기”는 여성의 전유물에 가깝다. 이야기는 사소하고, 어떤 소재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고, 어디로든 퍼져나간다. 하지만 이야기는 쉽게 잊혀지고,

여성이 말할 때는 더욱 더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래도 그녀는 이론 대신 이야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사물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SF 이야기를 즐겨 가져온다.

이야기는 아줌마들의 수다처럼 바로 지금 여기의 삶에서 시작할 수 있고 그것의 역사를 추적하면 예기치 않은 연결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고, SF 이야기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제약 없는 상상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지구생존을 위한 가이드”로 한 것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해러웨이의 중요한 도구인 “이야기”가 제목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earthly survival을 지구생존이라고 한 점도 해러웨이를 강한의미의 생태주의자로 오인하게 한다. 영화에서 해러웨이도 이야기 했지만 인류가 멸망한다고 지구

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해러웨이는 인류의 생존을 지구의 생존과 동일하게 말하지 않는다.  earthly는 해러웨이가 잘 쓰는 worldly와 같은 의미로 “물질적”,

“세속적”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생존은 세속적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  정의와 부정의 등의 이분법으로 나눠질 수 없다.  이론이 정신적인(spiritual)것, 남성적인 것에

가까운 반면, 이야기는 세속적인 것이고, 비천한 것이고, 여자의 일이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이다.  한국어 제목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존을 위해서 이야기하기” 정도

가 적절 했을 뻔했다.

 

1. 치아교정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치아교정의 역사다. 이것은 사소한 계기에서 리서치가 시작된다. 그녀가 프린스턴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의 치열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쪽

고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그녀가 시술을 받았던 것처럼 모두 치아교정시술을 받았던 것이다.  19세기부터 유행했던 치아교정술의 교합의

모델은 그리스 조각상이었다. 사실 우리는 푸코의 작업을 통해 19세기에 서양남성을 모델로 인간이라는 개념이 태어난 것을 알고 그녀도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근사한 이론이 아니라 이빨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이빨은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다. 그것은 서양의 백인남성조차도 그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산적이 없는 그리스 조각상이라는 기준으로 재단된다는 것에는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 고른 치열의 형태로 그들의 몸에

강고하게 새겨진 역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기는 이론에 비해 현저하게 가볍게 취급되지만 그것이 말하는 구체적인 물질성은 단지 『말과 사물』을 읽을 때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웃을 때마다 무섭게 드러나는 역사이고 잊을 수 없는 역사다. 이 이야기가 세속적인 생존을 위해 가르쳐

주는 것은 비서양에 대한 차별과 비하, 혹은 지금 진행되는 이슬람에 대한 차별과 비하는 서양 백인들의 몸 깊숙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에파스테메의 문제

가 아니다. 그/그녀의 생각이 아무리 진보적이고, 그것에 맞서 싸우고 있을 지라도 그/그녀의 신체에는 끔찍한 역사가 새겨져 있고,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든 구체적 삶으로부터 이 끔찍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고, 이 이야기를 잊혀 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에  새겨져 있는  그 끔찍한 역사에 다른 역사로의  연결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가 우리의 세속적인 생존을 위한 것일 수 있는 이유다.

 

2. 나바호족의 바구니

인터뷰하는 해러웨이의 책상에는 나바호족의 아름다운 문양이 짜인 바구니가 놓여있다. 그녀가 집을 짓고 사는 캘리포니아는 원주민인 나바호족에게 빼앗은 땅이

다. 그녀는 스스로를 정복자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는 그 바구니를 볼 때마다 정복의 역사를 함께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개 카이엔페퍼도 캘리포니아에 메리노양이

보급될 때 목양견으로 수입된 오스트레일리언 세퍼트이다. 이 개들은 백인의 식민지개척의 역사와 골드러쉬, 그리고 남북전쟁이후 그 삶의 터전이 깡그리 파괴되어

버린 서부의 아메리카선주민의 피눈물 나는 역사에 결부되어 있다. 미국 서부의 선주민들은 일찍이 스페인 선교단에 의해 전수된 목양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골드러쉬로 사람이 몰리자 그들에게 공급할 양고기의 수요가 급증했고, 선주민이 키우던 양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동부로부터 메리노

종 양과 함께 목양견들이 이주해 왔다. 이 바람에  캘리포니아지역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양은 도살되었고, 선주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에서 내쫓겨서 나바호 근처에

수용되었다.

그런 침략의 역사가 그녀의 개 카이엔페퍼의 몸에 그대로 계승되어 있고, 나바호족의 바구니, 그리고 그녀의 개 카이엔,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그 지역에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 이 역사는 특별하게 탐욕스러운 어떤 악마에 의해 자행된 역사가 아니고, 골드러쉬를 꿈꾸던 49ners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고 인간만 결부된 것이

아니라, 금과 양과 개까지 결부되어 함께 만든 역사다.  해러웨이는 이를 실뜨기를 통해 설명하는데, 어디를 잡아서 실뜨기를 하느냐에 따라 실뜨기의 패턴은

예측불허하게 바뀐다. 뿐만 아니라 때로 실을 놓치는 실수를 해서 실뜨기 자체를 망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마 이럴 때는 많은 것들이 어이없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문제이거나, 혹은 의도성이 없었다고 쉽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실수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빨리 다른 매듭을 잡아서 대량학살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바호족의 바구니와 카이엔, 그리고 그녀의

캘리포니아 집이 결부된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야기로부터 우리를 책에서나 나오는 이미 잊혀진 침략의 역사라는

실뜨기에 단단히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 연결로부터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3. 친족을 만드는 이야기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중의 하나가 친족 만들기다. 해러웨이는 동성애자인 제이와 결혼하지만 그가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에 이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혼한 상태로 각자의 파트너들과 캘리포니아에서 집을 짓고 함께 살게 되고 그 기묘한 동 거는 전남편인 제이와

그의 파트너 밥이 에이즈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전남편 제이의 매우 보수적인 어머니조차 해러웨이와 그녀의 새로운 파트너 러스틴을

며느리와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혈연을 넘어선 친족으로 살았다.

해러웨이의 또 다른 친족에는 카이엔과 롤랜드가 있다. 둘 다 오스트레일리안 세퍼트로 해러웨이와 10년 이상을 함께 살고 있는 은퇴한 어질리티경기 선수들이다.

특히 카이엔은 노화에 의한 치매를 앓고 있어서 오후만 되면 심하게 짖어댄다. 해러웨이는 친족으로서 그에 대한 돌봄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지구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정치인들이 인구감소 대책을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지만 인구증가는 지구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단다. 해러웨이는 가이아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아마도 지금의 인류는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 불만스런 상황을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캐치 프레이즈 “Not Baby But Make a Kin”은 공상적인 제안이 아니다.

그녀는 생물학적 친족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친족과의 유대를 보장하는 도시의 새로운 설계, 제도적 장치 등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해러웨이가 직접 낭독한 카밀이야기는 SF로 짜인 친족 이야기다.

카밀이 사는 공동체는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지만 아이의 부모 역할은 공동체의 누구나 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성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선정한 다른 종과 공생관계를 이룰 수 있는 유전적 변형 시술을 선택할 수 있다.

카밀은 왕나비와 공생관계를 선택하고 성은 여성을 선택했지만 나비의 더듬이 같은 촉수가 나오는 수염도 같이 선택한다.

그녀는 왕나비와 더 친밀한 감각을 나누면서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길을 선탹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생물공학적인 처치가 카밀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고 실패한 성형수술처럼 두고두고 후회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밀이나 그 공동체의 사람들은 실패도 감당하기로 한다.

 

우리는 지금 생존이 극히 불안정한 위험수준에 와있다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곧 그녀가  강한 의미의 생태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강한 의미의 생태주의자는 원래의 자연과 그 질서의 복원을 말하기에 기술을 죄악시한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말하는 에콜로지는 원래의 질서, 되돌아가야할 질서를 말하지 않는다.  전면적인 복원은 있을 수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분적인 회복뿐이다. 혹 인류가 모두 멸종한다고 해도 지구에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박테리아들은 죽어버린 인간들과 그들과 결부된 생명체의 몸을 넘겨받아서

다른 에콜로지의 장을 펼칠 것이다. 그녀의 SF 이야기는 우리의 세속적 생존을 위해 잡종을 만드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온

테크노사이언스를 끌어들인다. 아마도 푸코가 말한 “인간”은 이런 식의 새로운 친족 만들기 실천들에 의해 점차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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