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5일
[신유물론 개념과 역사] 2장 2절 이분법을 횡단하기 (후기)
*이분법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횡단성이 필요하다. 횡단을 통해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차이화할 수 있다. 또한 회절을 만들 수 있다. 회절은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경계 자체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횡단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고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화하여 회절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회절적 독해라는 말은 수행적 독해를 말한다. 이분법 안에서 실체화된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모호하게 만들어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주체로서의 사유 실체를 도출해 내는 과정이 수행적 독해의 시도이다. ‘Je’는 여러 가지로 분열되어 있다. 이를 통한 데카르트적 이분법이 정념이라는 새로운 장 안에서 무너지는 것이 수행적 독해의 사례이다. 탈데카르트적 결과를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 헤라클레이토스의 글은 다른 사람의 기록 안에만 남아 있다. 그 의미화 과정이 회절화 과정과 일치한다.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로고스)을 신유물론적 방식으로 독해하면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화-자연의 이분법을 허무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이 로고스이고, 로고스는 이성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자연은 현대적 의미의 자연주의가 될 수 있다.) 자연과 이성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내재성의 평면 안에 함께 존재한다.
*플라톤의 <이온>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표면적인 것은 음성적-인식적인 것의 이분법을 허무는 과정이다. 담론으로서의 음성과 물질적인 효과로서의 변형 과정을 <이온> 안에서 길어올리고 있다.
*사이보그에서 회절은 혼종성과 연결할 수 있다. 물질적 측면을 건드린다. 신유물론의 주체는 관계가 있고, 그 안에서 힘들이 생기는 집합적 개체로서의 주체다. 관계망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주체다. 섹스-젠더-섹슈얼리티 간의 분할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때 회절은 새로운 신체를 갖는 주체이고 그게 바로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주체의 중심성을 무너뜨린다. 이 주체는 수행되는 과정에서 사건(물질, 담론)을 만들며 무수히 많은 새로운 신체성을 만든다.
*신유물론의 정치는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플랑가르드이다. 아방가르드는 앞서서 치고 나가는 것이라 쉽게 중심화된다. 플랑가르드는 측면에서 치고 나가며 측면을 주름 잡히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적 방식에서는 부차적이고 필요없는 것을 버리는데, 들뢰즈는 그것을 살려서 재등장시켰다.
*신유물론의 방식은 사태를 바라볼 때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다. 담론이 형성되고 쟁점이 되는 과정에서 분화되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분화된 개념 속에서 배제되는 담론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섹슈얼리티 안에는 항상 중산층-백인-남성의 섹슈얼리티가 강화되어 있고, 장애인은 배제된다. 이게 횡단성의 본질이다. 이분법적인 구별, 응결되어 반복되는 담론 안에 전제된 것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배제된 것을 호명하는 것이다. 변방을 치고 나가며 새로운 정치적-존재적 사유가 생겨날 수 있고, 회절적 독서가 바로 그 방법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도 배제된 기호와 상징을 봐야 한다. 신유물론 안에서 이분법을 횡단하는 것은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나가는 것이다.
*회절의 애매모호함에 관한 질문
과학적으로는 회절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엑스레이에서는 패턴을 보고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철학에서 말하는 회절은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하여 의문이 든다.
-> 과학에서 쓰는 회절과 철학적(인문학적) 회절은 다르다. 존재론적 방식으로 도약한 철학적 개념이다. 회절은 애매모호한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응결되기 전, 전체화되기 전의 주체성 상태에 있는 것이다. 유동적인 개념이다. 응고되지 않은 과정으로 주체성이 계속 생기도록 하는 것이 횡단이고 회절적 수행이다.
철학은 복잡하게 만들고, 대상을 문제시하는 학문이다. 과학처럼 단순 명쾌하지 않다. 세상이 단순명쾌하게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매모호함 가운데 생기는 게 새로운 개념과 실천이다. 애매모호함은 과정이고, 단칼에 잘라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애매모호함이다. 역사-개인사에서도 단칼에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애매모호함을 통해 무언가 발견-발명되는 게 신유물론 안에서의 사건이다. 예술적-정치적 실천 안에서 더욱 물질화되는 게 중요하다. (시공간의 재배치에 관련하여) 새로운 것이 발명-발견되면 그 새로운 것에 의해 시공간이 재배치된다.
메모하며 놓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ㅠㅠ 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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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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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영웅
스피노자의 전기를 쓴 콜레루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거미들의 싸움을 좋아했다고 한다<그는 거미들을 찾아 그것들을 함께 싸우게 하거나, 파리를 잡아 거미줄에 던져 놓은 다음 즐거운듯 그 싸움을 바라보곤 하였다.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왜냐하면 동물들은 우리에게 적어도 죽음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외재성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를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죽음은 자연 존재들의 질서에서 일어나는 나쁜 만남과 같은 것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내적인 죽음, 노예-폭군의 이러한 보편적인 사디즘-마조키즘을 아직 창조하지 않았다.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하게 될 비난, 즉 부정적인 것과 그것의 능력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스피노자의 영예이고 무구함이며, 그의 고유한 발견이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좀먹은 세계 속에서, 스피노자는 죽음, 인간들의 살인 욕구, 선악의 규범들, 정의와 부정의의 규범들을 의문에 부칠 만큼 삶과 삶의 능력을 확신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모든 유령들을 거부할 만큼의 삶에 대한 확신이다.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들, 파문, 전쟁, 전제, 반동 이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았다.
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 박기순 옮김/ 민음사 24쪽~25쪽에서 인용함
여러분도 다 아시는 들뢰즈의 명 문장입니다. '이분법을 횡단하기' 라는 말에 꽂혀서 저도 모르게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제 댓글이 단순한 선언이나 주장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승전-인간중심주의 비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인간주의를 만들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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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영웅
오해가 있을것 같아서 한가지 말씀드립니다.혹자는 신유물론 세미나에 참여하지 않고 자꾸 댓글로 신유물론에 대한 비판글을 남기냐며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저는 전체적으로 왜 신유물론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필요한지에 대해서 큰 방향성에서 설명하고 문의를 하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으로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 각자의 삶에 대한 적용과 성찰이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음부터 선택하는 이유와 목적을 명확히 할수 있는 문의와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어디까지가 문의할수 있는 내용이고, 토론할수 있는 내용인지는 좀더 협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비단 신유물론에 대한 경우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이상은 오해가 생길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제 이야기는 신유물론 세미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유너머104를 응원합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과 닮아가는것을 경계하라고 니체는 말했다. 역사적으로 자유,평등,박애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변하는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들뢰즈식으로 이야기하면 탈영토화하려다가 재영토화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역사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분법을 극복할것인지 토론해야 한다.
항상 반복되는 사태를 보며 아카데믹하게 지식을 위한 지식을 공부해선 안된다. 현실의 운동을 해석하지 못하고 자기 삶을 해석하지 못할때 어찌 철학을 사유한다고 말할수 있을까?
신유물론 세미나에 참여하시는 분들께 주제 넘게 이야기 드리는 것 같아서 대단히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