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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6] 5주차 발제_『선악의 저편』 제 2장

노은석 2023.05.19 17:53 조회 수 : 74

[청인지 16_사랑할 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                                                                                          5주차 2023.05.19.(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역), 서울:책세상, 2002

제2장 자유정신

 

노은석

 

[ ] 안의 내용은 니체의 글에는 없는, 제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24

 우리는 생명을(삶을) 즐기기 위해 우리의 무지를 보존한다. 앎에의 의지 또한 이 무지의 기반에서 자라나기에 최고의 학문은 오류를, 즉 삶을 사랑한다. 

25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지 말라! 이러한 태도는 양심의 중립성을 훼손하고 고집을 세우게 만든다. 그 어떤 철학자도 [완벽히] 정당한 주장은 하지 못했으며, [진리를 위한] 긴 싸움은 사람을 악의에 찬 교활한 자로 만든다. 

26

 ‘인식하는 자’라면 자신의 은밀한 성으로 숨지 않고 대중 안으로 들어가 불편과 환멸을 겪는다. 이들 ‘철학자’ 중 행운아는 동물성, 비속함, 규준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냉소주의자를 만난다. 냉소주의는 저속한 영혼에게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인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나쁜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단, 분노로 하는 말은 예외다. 분노한 인간은 도덕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훨씬 저속하고 냉담하고 완고하며 거짓말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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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해받는다는 것은 어렵다. [자신을] 해석해주려는 호의에 감사하되, 편안한 친구들에게는 오해할 공간을 허용하고 웃어버리자.

28

 언어마다 다른 문체의 속도 때문에 번역이 어렵다. 문체의 속도는 해당 민족의 ‘신진대사’의 속도에 근거하며, 이 템포는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위험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독일인의 문체는 엄숙하고 지루한데 어떻게 경쾌하고 힘찬 [로마 작가들의] 바람의 걸음걸이를 번역하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그리스적인 것’의 용서와 신성한 변용..? 희극적 사유? 소크라테스주의 비판??)   

29

 독립은 극소수 강자들의 특권이다. 그들은 독립으로 강하고 자유분방하고 대담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적 독립을 시도하기에] 미궁으로 들어가 이미 삶에 수반되는 위험을 천 배나 불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에서 길을 잃고 고독에 빠지며 양심에 갈기갈기 찢기는지는 아무도 이해하거나 느끼고 동정하지 못하기에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

30

 들을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통찰이 바보소리나 범죄처럼 들리는데, 마땅히 그렇게 들려야만 한다! 통속적인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사물을 바라보지만, 비교적인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높은 영혼은 비극을 비극으로 보지 않고 어쩔 수 없는 동정심으로 고통을 배가시키지 않는다.(독일어 동정Mitleid-고통을 함께함.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연약한 자들만이 동정을 느끼고 동정은 불필요하게 고통을 배가시킨다고 말함.) 누가 읽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는 달라진다. 대중이 좋아하고 숭배하는 책과 장소에서는 악취가 난다.

<켄윌버 2층: 탈근대다원 이후 통합초기 위계인정>

31

 사람들은 젊었을 때 [30처럼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받아들여지는] 뉘앙스의 기술을 모르고 무조건적으로 존경하거나 경멸한다. 결국 이 값을 치르게 되는데,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취미는 조롱당하고 학대받게끔 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은 감정에 기교를 부여하는 법을 배운다(인생의 예술?). 이렇듯 [무조건적으로] 분노하고 숭배하며 인간과 사물을 변조시키는 젊음 자체도 이미 변조된 것이며 기만적이다. 훗날 이 영혼은 맹목적이고 자기 현혹적이었던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복수하려 자신을 고문한다. 이때 사람들은 양심과 정직성 때문에 자기를 은폐하게 되었고 이처럼 피로해졌다 느끼며 ‘젊음’에 반대하는데, 십년 후 이 모든 게 여전히 젊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아이와 사자. 한때 사회운동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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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도덕 이전의 시기’는 행위의 가치가 결과에서 추론되던 시기였다. 최근 만 년 동안 사람들은 행위의 유래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진보해갔으며 자기 인식을 시도하는 이 관점의 전환은 ‘도덕적인 시대’의 표식(징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체 행위의 유래를 [오로지] 의도로부터 유래했다고 편협하게 해석하게 되었고, 오늘날 ‘도덕 외적인 시대’로의 전환을 결심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우리 비도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 그 행위의 결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의도를 포함하여] 의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작해야] 행위의 겉피부가 아닐까? 따라서 의도란 한층 더 [깊은] 해석이 필요한 기호이며,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기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에 불과하다. 이제까지의 의미에서 [의도를 중시하는] 도덕은 선입견이고 경솔하며 일시적인 것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이것은 도덕의 자기 극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섬세한 양심에게 맡겨진 비밀스러운 장기 작업이다. 

<프로이트에게 영향!?>

33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다’는 헌신과 희생, 혹은 ‘무관심한 직관’의 미학(칸트와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사심 없는 미적 직관에서 비롯된다고 봄)에는 감미로운 매력이 있어 유혹일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즐거움을 조심하자.

34!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는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모든 철학에서 자명한 사실이다. 사물의 본질 안에 기만적 원리가 있다고 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와 정신에 책임이 있어 세계를 잘못 추론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모든 사유 자체를 불신하는 법을 배우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21번째 줄 ‘불신’이 아니라 ‘사유’, ‘사고’로 읽어야할듯.. 박찬국 번역: “사고는 이제까지 우리를 가장 크게 속이지 않았던가?”) 오늘날에도 순진한 사상가들은 의식에게 정직한 대답을 간청하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확실성’과 ‘도덕적 순박함’은 철학자들을 명예롭게 만들지 몰라도 우리는 결코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직접적인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어리석음이다! 시민 생활에서 모든 걸 불신하는 것은 나쁜 성격으로 여겨지고 어리석은 것이지만, 시민 세계와 긍정-부정을 넘어 어리석은들 어떠하며 철학자가 나쁜 성격을 가질 권리가 있다한들 무엇이 방해하겠는가(뭐 어때!!?). 철학자는 불신하고 의심의 심연에서 곁눈질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허위적 세계에게] 기만당하면 안 될건 뭔가?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있다는 건 도덕적인 선입견일 뿐이다. 관점적 평가와 가상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삶은 존립할 수 없다. 가상의 세계를 없애면 진리라는 것 역시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참/거짓의 본질적인 대립이 있다고 강요하는가? 가상의 단계는 그림의 음영과 색처럼 다양한 가치가 있다. 우리와 관계맺은 이 세계는 허구일 수 있고, 이 허구를 만들어낸 창작자가 ‘있다’는 것도 허구일 수 있다. [‘있다’라는 술어 때문에 주어인 ‘창작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문법적 믿음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자 가정교사..? 순진한 문법의 수호자??)

<기억에 대해서. 원본과 복제품에 대해서. 디지털트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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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간이 ‘진리 탐구’를 너무 인간적으로(선을 행하기 위해서만) 추구한다면 어떠한 진리도 발견하지 못한다.

36!

 우리 자신의 충동이라는 유일한 현실만으로도 물질적인 세계를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이 경우 물질적 세계는 우리 정서(정념)와 동일한 현실성을 갖고, 정서 세계의 '원초적인 형태=충동적 생=생명의 초기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 하나의 인과로 [모든 것을] 충족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보자. 그러기 위한 방법의 도덕에서는 의지의 인과성만이 유일무이한 인과성이라고 가정해야 하고 모든 기계적 사건에서 작용하는 힘은 의지의 작용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그런데 의지는 물질에는 작용불가..!) [따라서] 마지막으로 (생식과 영양 섭취 문제, 유기적 기능을 포함한) 충동적인 생 전체를 유일한 근본형태인 ‘힘에의 의지’로 환원해 설명할 수 있다면, [결국] 내부로부터 관찰되고 규정된 이 ‘세계’ 또한 ‘힘에의 의지’일 따름이다.

<데카르트 방법, 스피노자 사유(정신)와 연장(물질) 등 사전지식 있으면 좋을듯. 이렇게 이해하는 게 맞을지..?>

37

Q(대중): 너가 부정했던 신과 똑같은 유일한 원리(단지 신이 아니라 충동적인 ‘힘에의 의지=악마’)로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거 아냐?

A(니체): 니들이 오해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제발 좀 뉘앙스를 읽어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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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열광적인 관중들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원전(실상)이 해석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해석해왔다(헤겔, 마르크스). 이런 오해로 과거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우리의 방식을 이해한다면, ‘고상한 후대’의 오해는 끝나는 게 아닐까? 

39

 어떤 학설이 사람들을 행복하고 유덕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학설을 진리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이상주의자들을 제외하고). 하지만 [사람을] 불행하고 사악하게 만들기에 [학설이 거짓이라는] 반대 논거는 사람들이 기꺼이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어떤 진리는 아주 해롭고 위험할 수 있기에, 한 정신은 얼마나 ‘진리’를 [위조/은폐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가에 따라 그 강함이 측정된다. 또한 진리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는 데 온순한 성품보다 악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진짜배기] ‘철학자’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히 보아야 하는데, 혹독함과 교활함이 강하고 독립적인 정신과 철학자의 탄생에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40

 깊이 있는 모든 것은 가면을 사랑한다. [형상이나 비유가 아닌 대립이 그 깊이를 드러내기에 적합할 때가 있다. 행위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신의 기억을 학대하기 위해 사람들은 독창적인 수치심을 이용한다.] 간계로 숨기는 것은 [부정적인] 교활함 뿐만 아니라 귀중하고 손상되기 쉬운 [좋은] 것들도 있다. 심오한 정신은 본능적으로 가면을 필요로 하고, 주위의 천박한 해석으로 가면은 두터워진다.

<페르소나. 애니어그램 9가지 유형 자신의 분리감(수치)을 어떤 방식으로 감추는지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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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자신이 독립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자. 회피해서는 안될 이 시험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놀이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승리에 찬 조국, 귀중한 하나의 학문, 자기 자신의 해방이나 비상, 덕에도 매이지 않고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42

 미래의 철학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수수께끼를 남기는(가면 뒤 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유혹하는 자(Versuchung-실험하는 자,시도하는 자)이며, 이러한 이름 또한 하나의 유혹(이자 시도)이다.

43

 다가오는 철학자들은 ‘진리’의 친구들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진리로의 독단은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모두가 선하면 ‘선’이 사라지듯) 공동선은 모순적이고, 모든 귀한 것은 귀한 사람(개인)을 위해 존재한다.

<당시 독일 시대적 맥락? 전체성 강조??> 

44!

 미래의 철학자들은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자, 근본적으로 다른 그 이상의 존재다. 현재 ‘자유정신’은 전도되어 고독을 모르는 졸렬하고 천박한 '평균인'과, 민주주의적 취향/현대적 이념을 [따라] 표현하며 낡은 사회형태에 불행과 실패의 원인을 전가하는 노예들에게 잘못 쓰이고 있다.(75쪽 1줄 ‘다행히’ 대신 ‘안일하게’로 읽어야할듯) 그들(평균인들)은 고통 자체를 제거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기고 ‘권리의 평등’과 ‘고통받는 모든 자에 대한 공감’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인간과 그의 힘(정신)은 늘 인간이 처한 상황의 위험성이 증대되고, 압박과 강제가 있을 때 오히려 정교하게 발전하고 상승했다(반작용처럼 네거티브가 더 큰 포지티브에 기여해왔다). 진정한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은 이들(이데올로기와 군중)의 대척자로 존재한다.

...이하 니체가 그리는 미래 철학자들의 특징들 : 안온함에서 빠져나오고 의존성의 유혹에 분노하며 선입견에서 해방시켜주는 네거티브에 감사하는 탐구자.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모색하는 손가락, 소화할 수 없는 것을 소화하는 치아와 위장.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민한 감각, 모험을 마다않는 넘치는 자유의지. 숨겨진 영혼을 가진 은둔자, 낭비자처럼 보이는 정복자. 정리하는 수집가, 가득 채우는 구두쇠, 배우고 잊는 것에 능숙하고 자부심을 갖기도 현학자가 되기도. 올빼미나 허수아비조차 될 수 있는...

고독의 친구들, 너희는 어때? 나랑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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