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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6] 4주차 발제 8, 9장

수형 2023.05.12 17:20 조회 수 : 51

청인지 16 사랑할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8, 9장)

이수형

 

제 8장 민족의 생리학

1.  미래의 유럽인

  니체는 유럽의 민주주의화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유럽과 유럽인들이 모두 비슷해져 간다고 한다. 민족적 특질로 구별되던 유럽인들이 교류하고 뒤섞이며, 그 적응력으로 인해 평균적이고 동질화된 인간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를 평준화되고 평균화되며, 유용하고 근면하여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무리적 동물들이 출현했다며 부정적인 현상으로 봤다.

  그런데 니체는 반면에 이런 변화가 가장 유용하고 매력적인 성질의 인간을 발생시키기 적합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편견이 배제된 교육과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훈련과 가장(假裝) 때문에 이제까지 있었던 어떤 인간보다도 강력하고 풍부한 인간, 즉 정신적 의미, 긍정적인 의미에서 전제적인 지배자, 사람들을 이끌 더없이 강력한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제적인 지배자’ 라는 말에서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 다른 감각, 다른 사고, 다른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밀고 나감으로써 사람들의 감각이나 사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내는 인간을 뜻한다. 그런점에서 정치가보다는 오히려 예술가를 염두해두고 있는 듯하다.

  당시의 유럽은 민족주의적 분할과 대립이 강화되어 가는 중이었는데, 니체는 놀랍게도 반시대적인 시선으로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어가고 있다고 보고, 장차 유럽을 지배할 새로운 계급은 조국에서 벗어난 자들, 민족적 기질에서 벗어난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2.  민족성과 민족주의

  니체는 철학과 예술을 자원으로 삼아 몇몇 민족의 기질적 특성에 대해 썼다.

 

  1) 독일인은 심오하다?

    깊어 보인다고 하지만 독일인의 영혼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맞춰지고 겹쳐 놓은 것이란 점에서 혼합되고 뒤얽혀 있기 때문에 정체불명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이다.

 

  2) 영국인들은 철학적 종족이 아니다.

     우둔하기에 정신화되기 위해선 기독교라는 독(毒)이 필요하다. 편협함과 무미건조함, 부지런한 꼼꼼함이 ‘영국적인 어떤 것’이다. 철저한 평균성에 의해서 일찍이 유럽 정신의 전체적인 침체를 초래했다.

 

  3) 가장 정신적이고 세련된 문화의 중심지이며 높은 취미를 키워주는 학교, 프랑스

     ‘형식’에의 헌신이라는 천부적인 예술가적 정열이 있고,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심리학적 민감성과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는 ‘모럴리스트’ 문화가 있으며, 음울하고 음침한 북유럽과 밝고 유쾌한 남유럽이 반씩 성공적으로 종합되어 있다.

 

  일본인의 ‘꼼꼼함’, 한국인의 ‘빨리빨리’ 등 아마도 지리나 기후 등의 영향, 전승되는 문화적 습속의 영향으로 인해 생기는 기질적 특징, 민족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민족성을 말할 때는 그것이 개인에 대한 포괄적 판단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3.  민족은 언제 어떻게 태어나는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출현하는 것은 굉장히 난감한 위기에 몰렸거나 큰 패배를 경험했을 때이다. 한국(조선)에서 우리가 아는 ‘민족’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다. 외교권 박탈조약이란 위기 속에서 정신차리고 단결할 것을 호소하며 자국민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호명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민족을 뜻하는 말 nation이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프랑스인데,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왕국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향해 공격해올 때, 프랑스 정부는 인민들을 군대로 불러 모으기 위해 프랑스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며 민족이란 이름으로 호명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민족의 이름으로 모은 전국적인 스케일의 군대를 기반으로 정복 전쟁을 일으켜 유럽 전체를 제패하게되고, 이때 패배한 국가, 혹은 봉건 영주들은 다시는 패배하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국민/민족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하며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좀 더 보편화되고 본격화 되었다.

  결국 민족주의란 패배에 대한 설욕의 의지, 복수를 꿈꾸는 원한의 정신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패배한 영혼의 음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이들을 다시 부정하기 위해서, 패배의 역사를 딛고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위대성을 발명하는 게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민족적 동일성은 경쟁자나 적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란 점에서 민족주의는 부정적 영혼, 배타적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니체라면 분명 민족주의란 강자의 힘, 고귀한 힘과는 전혀 다른, 천민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제 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1.  니체의 눈으로 니체를

  어떤 나쁜 평판의 저자도 나쁜 얘기만 하는 법은 없고, 아무리 믿을만하고 훌륭한 저자라도 옳은 얘기만 하는 법은 없다. 이는 자신이 살던 시대라는 제약조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며 그건 자기 시대를 거슬러 ‘반시대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니체도 마찬가지다. 이를 ‘니체의 악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악조건을 감안하여 니체의 근본적 문제설정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그의 책을 읽어야 한다.

  니체는 인종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큰 정치’를 생각하면서도 정작 유럽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단일한 유럽을 꿈꾸는데 그쳤다. 이는 니체의 사유가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유럽이라는 ‘작은’ 관념에 제약되어있었던 것임을 보여 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동양’의 종교나 사유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했는데, 특히 불교에 대해 그가 가진 해석의 방향은 19세기 유럽인의 담론 안에 갇혀 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나 ‘공’이란 개념에 대해, ‘무의 종교’라고 이해했고, ‘염세주의’로 해석했다. 하지만 ‘무아’, ‘공’, ‘연기법’ 등 붓다의 실제 가르침은 니체의 사유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데 19세기 유럽이라는 제약에 의해 결국 니체 또한 불교를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할 수 밖에 없었다.

 

2.  니체와 생물학

  19세기는 생물학의 시대였고, 진화론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미쳤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이 넘어서는 자가 아니라 ‘적응하는 자’의 승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약자의 자연학이라고 비판했지만 ‘경쟁과 도태’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생각은 공유하고 있었다. 생명의 원리란 ‘생존경쟁’, 즉 약한 것을 먹고 착취하여 자기화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이 때문에 경쟁과 투쟁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19세기는 유기체가 생명의 실체를 담고 있는 존재자이고, 신체의 부분들을 유기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organ)라고 봤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세포가 발견되었고, 유기체란 분할할 수 있는 것들이 다수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세포의 미토콘드리아는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발생한 공생체이다. 진화는 이처럼 공생으로 시작된 것이고, 모든 생명체는 공생체이다. 그 이유는 홀로 싸우며 생존하는 것보다 좀 더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공생체를 ‘약자들의 연합’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역사는 ‘약자들로의 퇴화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실 생물학은 의외로 경제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다윈이 말한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이 그렇고, 그와 반대로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라는 관념으로 자연학적 현상을 찾아냈다. 자연에는 이기적 생존경쟁과 상호부조 모두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시대정신’은 생존경쟁이었고, 그에 따라 ‘생존경쟁’은 자연학적 사실이고 ‘상호부조’는 이념적 관념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니체 역시 19세기의 이런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생존경쟁에 함축된 착취와 폭력이 생명의 원리이며, 자기를 억제하고 공생하는 것은 생명의 원리에 반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생존경쟁’이라는, 경쟁과 전쟁의 모델이 생명의 원리라는 발상은 생명의 본성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19세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3.  자연학에서 강함과 약함

  니체에게 강함이란 양적인 것일뿐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이때 강함이란 시작할 수 있고 창안할 수 있는 능동성을 뜻한다. 그러나 대결적인 상황의 가정 속에서 강함은 종종 힘의 크기에 대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싸워서 이기는 것,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강함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손자는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싸워서 이기고 정복한다는 식의 관념은 상대방에 대해 과도하게 긴장해야 하는 자들, 즉 남들에 의해 자신의 생존이 좌우되는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강자란 어떤 상대를 대결적 상황, 적대적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고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 혹은 적대자 조차 내 편으로 승복시키는 능력,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는 자이다. 공격성이나 정복욕을 강자의 징표라고 생각하는 것은 투쟁이나 경쟁에 대한 ‘생존경쟁’ 모델에서 나오는 유치한 관념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는 ‘지배’도 그렇다. 지배하는 힘이 강한 힘이 아니라, 질적으로 강한 힘이 지배하게 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다른 생각이나 행동도 그대로 두지 못하고 공격하는 독재체제는 강한 사회가 아니라 약한 사회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정복하고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게 길들여 이질성이 최소화된 ‘순수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약한 자들이다.

 

4.  투쟁하는 자와 적응하는 자

  니체는 하나의 종이 나타나 유형이 확립되고 강화되는 것은 불리한 조건들과의 투쟁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다윈을 비판할 때 보이듯, 투쟁을 통한 극복을 ‘적응’이란 개념과 대립시킨다.

  그런데 불리한 조건과의 투쟁이란 무엇일까? 가혹한 환경과 ‘투쟁’한다 함은 가령 혹한에 자신을 노출시켜 더 추운 기후에서도 살 수 있게 단련시키는, 그런 강자가 되는 길을 의미할까? 이는 자연학자가 말하는 ‘적응’과 얼마나 다를까? 이처럼 ’투쟁’과 ‘적응’이라는 말에 포함된 문법의 환상 때문에, 적응은 약자, 투쟁은 강자라는 표상이 생겨난 건 아닐까?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변화된 환경에서 새로운 생존방식을 시작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자, 즉 일상어법에서는 투쟁보다는 적응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문제는 ‘투쟁’이니 ‘적응’이니 하는 말에 포함된 문법의 환상을 벗어나서, 진정 강함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강함은 자기 인근의 것들을 자기와 결함하여 다른 개체화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을 말한다. 경쟁, 투쟁과 정복이 아니라 이러한 수용과 결합이야말로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19세기와는 다른 이 변화된 자연학의 바탕 위에서, 그리고 아직도 잔존하는 그 시대 언어의 문법의 환상에서 벗어나 재정의되어야 한다. ‘투쟁과 협력’, 이런 것들을 대비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또 다른 것으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있다.

  니체는 ‘자랑할 만한 적을 가지라’고 하면서 ‘괴물과 싸울 때는 괴물과 닮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적과 싸우다 보면 적과 닮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여성들의 투쟁은 ‘미러링’이라는 위험한 방법을 통해 결국 대칭적인 ‘남성혐오’로 이어졌다. 이는 레닌이 말한 ‘막대 구부리기’이고, 니체 역시 이런 면이 있어서 그의 글을 그의 식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5.  생명과 도덕

  ‘고귀함’이란 말은 니체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니체는 고귀함과 대비하여 총괄하려는 듯, ‘비속함이란 결국 무엇인가’로 문장을 시작한다. 니체는 비속함의 요체란 ‘신속하고 용이하게 의견의 일치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것’임을 지적하며 남다른 것, 예민하고 희귀한 것을 평균과 일상 속으로, ‘패거리’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비속함이라고 말한다.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259절) 아주 강력한 통념인 ‘착하게 살자’에 대한 니체의 대항-도덕(counter-moral), 당혹을 야기하는 ’막대 구부리기’이고, 일종의 반어적 어법이다.

  니체는 한 사회에서 ‘정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출현하는가에 대해 말한다. 공동체 안에서 가해자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제어하고 원한의 감정 없이 가해자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하는 것을 ‘정의’라고 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우리의 신체든, 수용할 수 없어서 처벌하고 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의 한계와 능력을 드러낸다. 강함에도 위계가 있는데 밀쳐내고 싸우고 제거하는 수준의 강함이 있다면 방치하고 수용하는 수준의 강함이 있고, 더 나아가면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위해 이질성이나 차이를, 심지어 적조차 좋다고 긍정하는 종류의 강함도 있을 수 있다.

  니체는 ‘한 유형이 고정된다, 굳세어진다’라는 말을 강함의 징표라고 얘기한다. 과연 그런가? 부드럽고 유연한 아이의 신체와 경직되고 ‘굳센’ 고체적 성격의 죽은 신체 중 어떤 것이 더 강한 것인가? 자아가 확고해져 영혼의 패턴이 고정되고 굳세어지면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떨어지고 고집세고 변할 줄 모르는 단단함, 고체적 경직성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를 ‘늙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강한 영혼일까?

 

6.  청결함과 고귀함

  니체는 “깊은 고통은 사람을 고귀하게 한다, 이것이 사람을 구별해준다”고 말한다. 건강한 신체는 고통이나 자극에 더 민감하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면 고통 자체가 견디기 힘들어지기에 고통의 감각은 무뎌진다. 그러면 고통을 주는 원인에 대해 둔감해지게 되고, 결국 상태나 습관을 지속하며 몸이 더 망가지게 된다. 고통스러운 상태를 바꾸는 대신, 참고 견디는 신체, 즉 ‘참고 견디며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정신’이 나타나고, 니체는 이를 혐오했다.

  니체는 고통이란 내 신체나 영혼의 상태가 외부세계와 부조화상태에 있다는 표시라며, 고통에 민감할 때, 세계의 변화에 맞추어 내 신체와 영혼의 상태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영혼은 남들이 느껴 보지 못한 세계, 심연의 어둠을 봤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잠재적 고통에 대해서도 민감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고통뿐 아니라 남의 고통까지도. 깊은 고통은 신체와 영혼이 주파하는 ‘삶’이라는 이름의 길을 바꾸어 놓는다. 넘어선 고통의 깊이가 사람이 나는 자유의 높이를 규정한다.

  니체는 두 인간을 가장 깊이 있게 구분하는 것은 청결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청결은 혼탁과 고뇌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것, 깊이 있고 섬세한 것으로 몰아가는 어떤 욕망 같은 것이다. 반대로 세간의 통념,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것, 흔히들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더러움이다. 청결함이란 더러움 속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자신의 남다른 감각과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고, 이런게 바로 진정한 고독이라고 말한다. 청결함이 강할수록 더러움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청결의 힘에 물들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최고의 청결함이다.

 

7.  기다림, 혹은 우정에 대하여

  니체는 천재보다 더 드문 것이 ‘적절한 때’라고 하면서, 그 적절한 때라는 우연을 붙잡기 위해선 오백 개의 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다림이란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고, 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적절한 때가 되어도, 기다리던 사건이 도래했을 때에도 아무것도 못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 도래할 때, 그것은 찾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도래할 것이고, 필경 예상을 벗어난 지점에서 출현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찾아가고 만들어 가지 않는다면, 사건이나 때는 결코 오지 않으며, 와도 기다리던 것인 줄 모르는 채 그냥 지나가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때를 위해선 오백 개의 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친구’란 뭐고, ‘우정’이란 뭘까? 친구라는 게 이해관계나 이념, 원칙 등에 의해 갈라졌을 때, 혹은 감정적 충돌로 인해 싸우게 되었을 때 어느새 적이 되는 이들과 다르다면 뭐가 다른 걸까? 그렇다고 친구 얘기라면 원칙도 없고 이념도 없이 그저 따라가는 것을 지지하면 그거야말로 ‘의리’ 때문에 핵심을 망각하는 것이다. 친구란, 우정이란,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친구란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그래서 함께하거나 지지할 수 없는 경우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기다려줄 줄 아는 것이 아닐까.

 

8.  거리의 파토스

  다른 사람의 고귀한 점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천박하고 표면적인 점은 그만큼 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다. (275절)

  고귀함을 찾는 자라면 남에게서도 그런게 주로 보인다. 역으로 사람에게서 고귀함을 보려 하지 않는 자는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자, 천박한 자이다. 천박한 자는 천박함을 잘 찾는다. 아는 것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천박하다고 느끼기에,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남들의 천박함을 재빨리 찾아내고 어느새 공격할 틈을 노린다. 그러니 단점 잘 찾고 남들 천박함을 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반대로 남들의 장점을 잘 찾는 사람들 가까이 가면 좋다. 내가 모르는 나의 장점을 알아보고 찾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뒤집어, 나 스스로 내가 남의 단점을 주로 찾는지, 장점을 주로 찾는지, 즉 천박함을 보는지 고귀함을 보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그게 바로 자신의 ‘정체’다.

  니체가 자주 언급하는 ‘거리의 파토스’라는 개념에는 고귀함에 대해 니체가 하려는 말의 요체가 담겨있다. 남들과 자신 사이에 있는 ‘거리’를 긍정하고 그것을 확대하려는 감응 내지 기분이 바로 거리의 파토스다. 좀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좀 더 드문 무언가가 되려는 감응이다. 유행이나 소문, ‘대중성’에 민감한 남들과 다른 자신의 감각을 긍정하는 것이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생각을 더 멀리 밀고 가는 것이다. 남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애써 설득하거나 변명 같은 해설을 다는 대신,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 속에 머무는 것이다. 나아가 그 남다른 감각으로 다른 이들을 촉발하고 남다른 생각을 표현하며, 그들의 감각과 생각이 바뀌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촉발을 통해 남들이 고독의 장소로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다.

  거리의 파토스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건 천한 것을 비난하는 부정의 정신이 아니라 높은 것을 감지하는 긍정의 정신이다. 그 높은 것이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자신의 고귀함을 알아채는 것은 남들의 고귀함 또한 알아채는 것이며, 그 고귀함을 향해 좀 더 높이 올라가는 긍정이다. 천박함을 부정하는 비난은 남들에게 이길 수는 있어도 자신을 더 높이 올라가게 하진 못한다. 그래서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란 ‘지속적인 자기 극복’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넘어서는 자, 니체는 그걸 초인이라고 한다. 거리의 파토스는 바로 초인의 파토스다. 지속적인 자기극복을 통해 좀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의지, 그것이 고귀함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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