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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5 세미나 에세이

 

“나는야 춤을 출거야, 우리는 투명한 가방끈!”

 

김정래

 

1. 투명가방끈은 현재진행형

사회단체 ‘투명가방끈’(舊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은 대학을 ‘거부’하는 운동과 함께 탄생했다. 2011년,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한 열아홉 살 및 고3 청소년, 대학을 자퇴하거나 진학하지 않은 청년 등이 모여 대학거부선언•대학입시거부선언을 했다. 대학거부선언은 “대학을 거부하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통해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며 대학을 압박하는 사회가 문제임을 알리며,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낙오자’라 비하 하는 학력학벌 차별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적 성격의 선언이다. 투명가방끈은 대학거부자, 청소년인권활동가, 대학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입시 경쟁 교육, 왜곡된 대학 교육, 학벌주의와 학력차별 등을 반대하며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함께 활동하고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고 있다." 투명가방끈이라는 단체명은 학력, 학벌, 스펙과 같은 소위 '가방끈'의 길이로 차별과 배제를 자행하는 사회에 맞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1년 이전에도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사건은 있었다.” 80~90년대 고등학생운동과 2000년대 이후 2010년까지 나타난 수능거부·대학거부의 사례다. 80~90년대 비리 사학 퇴진, 학생회 직선제, 한국 사회의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 중 상당수가 의식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동 현장에 뛰어들 때,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학력을 위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2002년 박고형준, 2007년 허그루, 2008년 엠건(김남미)과 또또(박상훈) 등 교육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에 기반한 개인들은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선언은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회단체와 더불어 수능일에 기자회견을 여는 등 공개적·명시적 형태를 띄었다. 이후 2010년, 고려대 재학생 김예슬의 ‘대학거부선언’은 대학을 자퇴한 후 대자보 부착, 1인 시위, 책 출판으로 자신의 대학거부 사유를 밝혀 사회적 주목을 끌었다.

공현은 투명가방끈의 대학거부운동이 ①비판적·변혁적 의식, ②거부의 운동성, ③거부의 집단성이라는 세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2011년 이전 이뤄진 다른 사회비판적·의식적 대학 비진학 움직임과 차이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이전의 움직임도 경쟁 교육,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적·변혁적 의식을 동반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상당수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음에도 대학을 거부하는 행위 자체를 운동으로 여기지 않은 점에서 거부의 운동성을 갖지 않았다. 또한 2000년대 이후 2010년까지의 수능거부· 대학거부는 거부를 운동으로 명명하였으나, 수능·대학을 거부하는 다수를 조직하는 운동으로 형성되기보다 거부선언자 개인에 이목이 쏠리는 경향으로 이어진 점에서 거부의 집단성을 갖지 않았다.

투명가방끈으로 조직된 대학거부자들은 스스로 “오로지 ‘명문대’라는 한 길만을 강요하는 교육, 수능과 입시라는 거대한 서열화의 장, 대학으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대학중심사회, 학벌사회의 폭력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라고 밝혔다(①비판적·변혁적 의식). 또한, 투명가방끈은 출범 당시 대학거부와 더불어 8대 요구안을 통해 교육 문제 해결, 학생 인권 보장, 학력·학벌차별 반대, 사회적 안전망 확보를 명백히 요구하고,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탑승해 홍보를 진행하는 등 시민사회계 및 다수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호소하는 동시에, 수차례 집회를 통해 “입시 경쟁과 대학 교육의 현실을 고발”했다(②거부의 운동성). 2011년 당시 마흔여덟 명이 대학거부에 참여한 이후 2020년까지 당해 수능 당일에 대학거부선언 행사를 열었다(③거부의 집단성).

투명가방끈은 2020년 이후 대학거부선언 기획을 쉬고 있다. 대신 2021년 수능 당일에는 청소년의 입으로 “입시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입시경쟁의 폐지를 원한다”라고 밝힌 ‘입시 경쟁 반대 청소년 선언’에 14개 공동제안단위 중 하나로 연대했고, 2022년 수능 당일에는 ‘제1회 대학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대학 밖에서 손을 잡자!’ 오픈마이크를 진행해 수능 응원 메시지에 가려지는 소외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하고자 했다. 단체 창립 10주년 토론회에서는 단체의 지향을 “결의가 필요한 거부선언 외에도 다양한 단계/수위의 활동”으로 운동을 이어가기로 밝혔다. 투명가방끈의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2. 소수자로서의 투명가방끈

통상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이들을 더러 대학을 거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학을 가지 않는 것과 대학거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많은 대학 비진학자가 자본주의 질서가 낸 결을 따라 욕망한다. 고졸 성공 신화를 추종하는 현상이 상징적인 예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음에도 ‘노력’으로 학력 콤플렉스를 ‘극복’해 끝내 사회경제적 성공을 이룬 이들의 일화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이가 따라야 할 전범으로 숭상된다. 낮은 학력은 결여된 상태, 극복해야 할 상태로 여겨진다. 고랑을 낸 물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이, 자신의 욕망을 기존의 척도에 맞출 때 대학 비진학자는 척도를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다수자의 척도에서 높게 평가받기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많은 대학 비진학자는 다수자의 ‘주변인’이다.

반면 대학거부자는 기존의 질서가 낸 결에 따르는 욕망은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짓밟거나, 누군가에게 짓밟히는 참극을 촉발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 인지의 과정은 상당수가 경험에 기반한다. 학교 현장에서 성적표를 받아들며 안도감 혹은 자괴감을 느낄 때,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에 대학 진학이 어려워 불안해할 때, 혹은 수능 시험 이후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누군가의 뉴스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하는 감각이 동반되곤 한다. 이때 대학거부는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의 상을 제시한다. 모든 존재를 경쟁시켜 양적 지표로 환원하는 질서가 굳건히 존재할 때, 질서를 교란하는 방법은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 지표를 받아들지 않는 것이다. 대학거부자는 대학 비진학을 택함과 동시에 대학거부를 통해 대학 비진학을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이들은 “조용히 경쟁에서 지쳐 떨어지는 대신, 경쟁에 뛰어들어 남을 짓밟고 뜀박질 하는 대신, 사회가 붙여준 루저라는 딱지를 버리고 스스로 거부자의 길을 택한다.”

“소수자란 자신이 결여한 권력이나 지위 등을 개인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자를 정의하는 척도 자체를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방향의 삶을 생성해 가는 사람들”일 때, 대학거부자는 다수자의 척도를 거부하고 척도 바깥의 삶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소수자’다. 대학거부자들이 대학에 가지 않은 피상적 원인은 다양하다. 정상성에서 이탈한 숱한 사건 혹은 조건이 그들을 대학 진학과 거리가 먼 삶으로 밀어냈다. 성적이 낮아서,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비인가 대안학교를 다녀 학력 인정이 되지 않아서, 자퇴 혹은 퇴학으로 학교를 벗어나서, 집을 나와 원가정의 지원을 받지 못해서 등. 물론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모종의 정치적 결기를 동기로 대학을 거부한 이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 ‘안’ 간 이와 ‘못’ 간 이를 무 자르듯 나눌 수 없을뿐더러, 이들이 대학거부를 선언하면서 ‘안’과 ‘못’의 이분법은 쓸모를 잃는다. 대학을 거부함으로써 기존의 척도 자체를 거부하길 지향하므로, 대학에 ‘안’ 갔느냐 ‘못’ 갔느냐 하는 기존의 척도에 기반한 분류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대학을 못 가서’, ‘대학을 못 갔기 때문에’, ‘대학에 못 갔음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모든 결여 낙인의 언표 앞에서 대학거부라는 방식으로 온몸으로 대답해버리는 대학거부자는, 결여를 개인에 속한 것으로 만드는 세계에 결여를 돌려주고 자신은 결여 아닌 생성으로 향한다.

대학거부자는 자신이 결여한 학력·학벌 자원이나 그에 상응하는 사회경제적 자산을 얻고자 하는 것을 넘어 왜 우리가 다수자의 척도에 맞추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학력·학벌을 한 지표로 삼아 자원을 분배하는 사회는 학력·학벌을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하는 사회이며. 개인의 능력에 비례해 자원을 '분배 가능하다'라는 현실 인식과 '분배해야 한다'라는 당위 설정을 공유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때 기존과 다르게 현실을 인식하는 행위, 기존에 설정된 당위에 고의로 반하는 행위는 기존 체제에 균열을 낸다. 대학 진학에 비견될 만큼의 노력을 투입해 '고졸 성공'을 도모하거나 대학 진학자가 누리는 자원을 대학 비진학자에게 나누는 할당제(예컨대 고졸공채 확대)를 주장하기보다, 학력·학벌사회의 근저에 작동하는 능력주의 메커니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능력주의 비판의 손끝은 자본주의 공리계의 핵심 공리인 노동의 공리("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를 정면으로 겨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노동의 공리는 특히 문제적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의 공리는 교환가치로 환원되는 노동에만 대가를 지불하는 식으로 실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과 ‘일 아닌 것’을 나누고 ‘일 아닌 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먹지도 말라”라고 말한다. 이로써 돌봄 노동과 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은 비가시화된다. 둘째, 노동 능력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신체조건, 성장 배경, 노동 환경, 운 등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노동 능력이 구성됨에도 능력이 개인에 속한 것인 양 호도하며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혹은 일할 능력이 없는 ‘자’의 구도를 그린다. 셋째, 임노동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임노동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코드에 매여 있던 개인들이 (토지로부터의) 탈영토화와 (신분으로부터의) 탈코드화라는 ‘이중의 해방’을 겪은 뒤 일반화되었음에도, 마치 항상-이미 임노동은 존재했으며 심지어 임노동이 '먹는' 행위와 뗄 수 없는 것인 양 호도한다. 당장 노동하지 않아도 유용할 수 있는 재화가 과잉 생산되는 사회에서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일까?

대학거부는 노동의 공리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대학거부는 교육이 규격에 맞는 노동자를 생산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대학 비진학자인 자신을, 서로를 낙오자가 아닌 거부자로 호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아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해도, 노동 능력이 부족해도, 심지어 노동하지 않아도 누구나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목소리 낸다. 대학거부자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공리, 특히 노동의 공리를 위배함으로써 공리계의 외부를 짓는 소수자다.

 

3.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없지만

“예전부터 ‘대학거부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간간이 있었다. 좋은 쪽의 관심은 아니었다. 대부분 ‘니들이 그러고도 어디 한번 잘 사나 보자’ 식의 달갑지 않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대학거부자로 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자본주의는 규격에 맞는 노동자가 되지 않은 이들을 생산성 낮은 규격 외 노동자, 저숙련 불안정 노동자로 편입시킨다. 대학거부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거부 그 후》는 대학거부 이후의 일상을 살아가는 거부자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로, 화장품가게 아르바이트로, 마트 제과 코너 판매 사원 노동으로, “최저임금이라 월급이 쥐꼬리만한 공장”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거부자들은 “무(無) 스펙자의 갈 곳 없는 현실을 실감”한다. 불안한 현실로 인해 “매년 대학을 가야 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노동의 공리를 거스르고자 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주의 공리계는 공고하게 현실로 작동한다.

다른 한편, 대학거부자는 ‘나름대로’ 살고 있다. 인권교육단체, 시민사회단체, 인문학 공동체 등에서 삶을 이어가는 대학거부자들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 나름의 비빌 언덕을 찾는다. 특히 김해솔은 사회운동을 자기 삶의 벡터로 놓으며 “알바는 부업”이라고 말한다. “2~3개월쯤 알바를 하다가 청소년인권운동활동이 바빠지면 그만두는 식으로 꽤 오래 지내”온 그는, 카페, 음식점, 약국 등 경험한 아르바이트 가짓수가 늘어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1순위가 되는 삶”을 지향하고, “임노동을 포함한 그 이외의 부분들을 언제든지 비교적 자유롭게 편집해 낼 수 있는 일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목민은 이동하기 위해 멈추는 사람”이라는 유목민의 정의를 그의 삶에 대입하면, 아르바이트 노동이라는 ‘멈춤’도 청소년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향으로 ‘이동’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거칠면서도 도발적인 언어로 “편하게 살려고 2011년 대학입시를 거부했다”라고 밝히는 그는, “나 혼자 편한 거 말고, 다 같이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며 사회운동을 이어간다. 자기희생적 결의나 전위의식이 아니라 ‘편하게’ 살기 위해 대학을 거부했다는 점도 특징적이지만, ‘다 같이 편하게’ 살기 위한 사회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다른 가치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목한다.

스펙을 위해 학교, 학원, 어학연수, 각종 대외활동을 수행하고, 취업 이후에도 커리어패스를 고려해 직무, 부서, 직장을 옮기는 삶은, 빈번한 이동을 동반함에도 유목이 아니라 지극히 정착에 가깝다. ‘돌아다니면서 하는 정착’이다. 물리적 위치는 바뀔지언정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는 재영토화를 일관되게 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착민에게 커리어패스(career path)는 커리어라는 점을 잇는 도로로서의 경로(path)일 뿐이다. 반면, 앞서 살펴본 김해솔의 일상은 언제나 사회운동으로 돌아오기에 표면적으로는 이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천착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은, 청소년의 실질적 권리를 창조하면서 창조를 통해 낡은 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옮겨간다. “오아시스는, 놔두고 떠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와 같은, 동화의 마지막 장 같은 완결은 없다. 대학 안 가도 되냐는 물음에 정열음은 “나처럼 산다면 한 달에 100만 원 이상을 벌기가 쉽지 않아. 그런 게 괜찮다면, 안 가도 됨!”이라고 답한다. 민다영은 “내게 자유와 해방 같았던 대학거부는, 일평생 단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용기를 내어야 지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대학거부자들은 대학거부를 선언하는 일보다도 매 순간을 대학거부자로 사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대학거부가 다른 어딘가를 재영토화하는 전제로서의 탈영토화로 수행될 때, 대학거부자는 마땅한 영토를 찾지 못하는 방랑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때 탈주가 필요하다. “생산자가 자본에 의해 재영토화되는 그러한 관계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다시 말해 자신의 활동능력을 화폐화하기를 거부하고 (‘노동거부’), 다른 활동의 방식을 구성하고자 욕망하는 순간, 자본주의적 생산의 배치에서 탈영토화되는 선이 그려지기 시작”한다면, 화폐화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활동을 환원하지 않고, 화폐화되는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놓은 뒤 활동능력을 화폐화되지 않는 영역에 쏟는 방식으로 탈주를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목과 탈주가 무조건적인 해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대학거부가 대학거부의 방식으로 삶을 견인해가기를 보장하지 않고, 화폐화되지 않는 모든 활동이 자본주의의 외부를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포섭되고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변환과 포획에 끊임없이 대응하는 방식으로만이 탈주는 혁명으로 이어질 테다. 수학에서 공리계에 공리를 추가해도 결정불가능한 명제는 생기기 마련이듯이, 자본주의 공리계가 탈주를 집어 삼켜도 탈주선은 언제나 새로 나타날 것이다. 탈주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어떠한 창조도, 어떠한 새로운 삶도 불가능”하다.

 

4. 나아가지 않기를 배우기, 혹은 ‘투명가방끈 챌린지’

이 글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을 ‘대학 비진학자’라고 일컬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 일반을 아우르면서도 차별적인 함의를 내포하지 않은 표현으로, 투명가방끈을 비롯해 학력·학벌차별에 반대하는 시민사회계를 중심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비진학자. 진학하지 않은 사람[非-進學-者]. 이때 비진학이란 상급 학교에 진학한다고 말할 때의 ‘진학’과 반대의 뜻이므로 ‘비-진학’이다. 한자를 직역하면 ‘배움으로 나아가기를 하지 않음’이다. 아닐 비, 나아갈 진, 배울 학.

여기서 비진학을 ‘비진-학’으로 띄어 읽는 데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다. 학문 분과를 지칭할 때, 해당 학문이 탐구하는 대상 뒤에 ‘학(學)’을 붙인다. 이를테면 생물에 관해 배워서 생물학, 사회에 관해 배워서 사회학 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비진-학으로서 비진학이 탐구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비진-학(非進-學)을 한자 그대로 풀면 ‘나아가지 않기를 배우기’가 된다. ‘어떻게 하면 나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비진학을 정의해보자는 것이다. 2018년 대학거부선언의 슬로건은 “멈춰서자,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자”였다. 이때 멈춰 서자는 말은 개인들이 체제의 톱니바퀴로 작동하기를 멈추자는 의미이며, 새로운 고민과 새로운 삶을 생성하기 위해 멈춤을 제안하는 손짓이다.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떠미는 사회, 심지어 앞으로 나아가라는 욕망이 나를 추동하는 현실에서 멈춰 서는 법을, 나아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은 분명 탈주의 한 방법이다. 비진학을 비진-학으로 상정할 때, 비진학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더 넓은 범위에서 상상할 수 있다. 이제 비진학자는 대학으로 표상되는 질서에서 삐걱거리다 끝내 탈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범주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뿐 아니라 나아가지 않기를 배우려 한다면 누가 되었건 비진학자다.

좁은 의미에서의 비진학, 즉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행정서류로 증명할 수 없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학력을 인증하는 행정서류는 ‘초중등학교 졸업(예정) 증명’, ‘대학(교) 졸업(예정) 증명’뿐이다. 학력이 높다는 사실은 대학교 졸업증명서로 증명할 수 있다. 반면 초중등학교 졸업증명서는 해당 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증명해줄 순 있어도 해당 학교‘까지만’ 나왔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가령, 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았다는 사실이 대학교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하리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없다. 국가는 누군가의 높은 학력은 보증해주지만, 다른 누군가의 낮은 학력은 보증해주지 않는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대학 진학 여부에 관계 없이 자신을, 서로를 비진학자로 부를 때 국가는 보증할 대상을 잃는다. 어떻게 하면 나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사람을 떳떳한 고학력자로 보증하려 들면 국가장치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학력, 학벌, 스펙, 커리어와 같은 ‘가방끈’의 길이를 재고 따지려는 질서에 맞서, 가방끈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학거부자들이 스스로를 ‘투명가방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묘하게 들어맞는다. 가방끈 따위는 보이지 않게,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비진학자-되기, 투명가방끈-되기. 이 유쾌한 생성에 함께하자고 제안해본다. 홍대입구역 어떻게 가냐는 질문에 “뉴진스의 ‘Hype Boy’요”라고 답하고는 춤추며 유유히 떠나는 시대, 이제 “대학 어디 나오셨어요?”.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학생이세요?”라고 누군가 물어볼 때, 이렇게 대답해보자. “투명가방끈이요”, 그러고는 유유히 춤을 추며 떠나보자. 춤추는 사람이 당신 혼자만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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