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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자본 시즌1] 에세이

기생충과 가난의 문법

김 혜 영

기생충3.png[영화 기생충]

 

도시의 물난리, 영화와 현실 사이

 애도를 표하는 기사도 아니었다. 팩트 전달에 충실한 발달장애인 가족 사고기사의 어떤 댓글 하나였다. 장애인 시설이 싫어 거기를 나와 살다 당하는 사고까지 국가에서 나서서 다 책임져야 하는지 반문한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페이스북 프로필을 눌러봤다. 중년 남성. 그 아래 아래 댓글엔 이런 기사는 쓰레기이며 작성자는 기레기 란다. 또 프로필을 찾아보니 젊은 남자이고 전장연을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라 마크해 놓았다. 

서울 신림동 반지하 침수 사고로 사망한 가족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여성 노인, 여성 장애인, 여성 청소년과 이들을 부양하던 여성 노동자. 70세가 넘은 어머니는 입원중이라 화를 면했다. 면세점 판매부에서 근무하던 내 또래 여자는 가장으로 딸로 동생으로 엄마로, 생계와 돌봄을 모두 떠맡다 폭우 속 반지하 방에서 가족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영화 기생충 같은 일이 현실에 일어났다며 뉴스는 앞다퉈 기사를 냈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들도 몇 명은 죽었다. 폭우 때문이 아니라 계급차별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남과 나를 동시에 학살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반지하 방에 살던 그 가족의 물난리와 분노에 공감했고 한국적 풍자와 리얼리즘을 논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반지하 방에 살다 침수로 자기 집에서 죽은 2022년 현실의 가족 - 세 여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지불할 사회적 비용을 미리 걱정하는 이가 많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결국 죽은 사람 탓을 하고 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탓, 여성인 탓, 그리고 가난해서 반지하방에 살고 있던 탓. 가난은 무능력의 당연한 결과라 여겨지는 세상에서 반지하 방에 대한 평가는 영화 속 보다 훨씬 더 참혹하기 그지 없다. 

 

도시 속 평균의 삶

 30평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은 서울의 평균을 대표한다. 아파트 값은 매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경마보도 식으로 릴리즈된다. 전국민의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아파트값은 평균 10억원 수준이다. 그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은 보통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고 보통의 결혼을 한 맞벌이 남녀, 혹은 그 수준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는 가장 - 대부분 남성의 경제력에 기반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혹은 대중매체에서 평범하게 그리는 가족의 전형이다.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사는 사람은 3대가 모여사는 주말 드라마 주인공들뿐인 것 같다. 

그러나 서울 전체 가구의 아파트 주거율은 40% 수준이다. 아파트가 아닌 다세대 주택인 빌라 혹은 일반 주택에 사는 가구가 더 많은 것이다. 미디어에서 표상되는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란 공간 이외의 삶은 평소에는 거의 조명 받지 못한다.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이 절반이 넘지만 우리는 그 나머지마저도 드라마 속 청춘의 상징인 옥탑방으로, 혹은 은퇴한 노부부의 여유로운 전원주택 정도로만 떠올린다.

서울 인구의 반이 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다세대 빌라 주택과 원룸 오피스텔에 산다. 그 중에서 가방 취약한 계층이 빌라나 원룸의 반지하 방이나 고시원에 살고 있다. 이들이 관심을 받는 때는 재해사고나 강력범죄 사건이 발생할 때 뿐이며, 그럴 때 마다 처치곤란의 골칫거리라는 시선을 받있다. 이번 사고로 서울시는 반지하방을 없애겠다 선언했다. 반지하 방을 없애면 모든 것이 해결 될 수 있을까? 반지하방은 정말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비참한 곳일까? 

 

침수현장.png
[신림동 사고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평균에서 탈락한 기생충, 그리고 지워진 사람들

일 때문에 촬영을 하거나 취재 중 인터뷰한 취약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반지하 방이나 고시원에 살고 있었다. 노량진 고시원은 공시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량진에서 가장 저렴한 곳은 남성 전용 고시원인데, 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거주한다. 그들은 창문도 없는 단칸방에서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일당을 받고 그 하루를 산다. 최저시급을 받는 청소업체 하청노동자, 전동 휠체어를 타는 뇌성마비 장애인도 반지하 방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 노동자이거나 활동가였다.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되기 전 흑석동 쪽방촌에는 저소득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가 완공된 지금 그들이 반지하 방에라도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성, 장애인, 노인처럼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아파트의 그늘 속에 투명인간으로 존재한다. 투명인간들은 투명인간 다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인정받는다. 청소 미화원, 텔레마케터, 쿠팡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처럼 보통의 신체건강한 여성들까지 종사할 수 있는 일자리처럼 말이다.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노동하되 공식적 일자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 최악의 노동자 군상을 당사자들 인터뷰를 통해 설정했는데, 그것은 도시의 ‘폐지줍는 할머니’였다.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게으르고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인간 최후의 대명사이다. 필자는 실제로 이렇게 적고 있다.

재활용품 수집은, 노인들에게 허용된 몇 안되는 생계 방편이다. 이 현상에는 재활용품이 과다하게 배출되는(행정력이 부족한) 도시와 돈이 필요한 노인, 그리고 재활용 산업이 맞물려있다.

가난한 노인들에 대해 ‘열심히 살지 않는 젊은 날의 결과’ 라거나 ‘부양해 줄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어 저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만다. “역시 가난한 노인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인들의 삶이 순전히 개인의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걸까? 가난하고 싶어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쌓여있는 상품 그 자체의 현신인 현대 도시에서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폐지를 줍고 있는 노인들은 우리에게 저렇게 되면 안된다는 공포의 알람이다. 출근길과 퇴근길 마주치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더 오래 더 나이 들어서도 일할 방법을 고민한다. <가난의 문법>에서 빈민노인을 ‘할머니’로 특정한 이유는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부류에서도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재활용품을 줍는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포식자 관계가 있다. 여성 노인들에게 남성 노인들은, 남성 노인들에게 젊은 청장년층은 일종의 상위 포식자와 같다. 여성 노인은 이 생태게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존재이다.

노동력의 등가교환 법칙을 설명할 때 <북클럽 자본3 : 화폐라는 짐승>은 매춘 여성을 예시로 이야기했다. 노동자는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의 신체까지 판매하는 현실의 가장 노골적 사례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교환 시장 자체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계수단은 아예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논란적 기사와 리포트는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재활용수집 여성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치열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적은 거의 없다. 윤리적 문제를 떠나, 물리적으로 팔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여성에 비해 교환할 상품성이 전혀 없는 여성노인의 지극히 현실적 처지이다. 쓰레기를 줍는 할머니들은 도시의 재활용 분류 시스템안에서 일종의 버그 - 기생충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스템 매뉴얼에 프로그래밍되지 않아 존재하면 안되지만 존재하는, 처치 곤란의 문제. 

버그와 같은 존재는 빈민여성 뿐만이 아닌 장애인도 마찬가지 이다. <북클럽 자본 6 : 공포의 집>에서 공장의 탄생을 가능케 한 구빈원에는 애초에 빈민과 장애인이 모두 섞여있었다고 한다. 대공업 시대가 도래하며 구빈원을 통한 노동자공급이 이뤄지며 장애인은 그렇게 노동할 수 없는 최하위 계층으로 다시 분류된 것이다.

구빈원은 이처럼 다양한 집단의 쓰레기 처리장 기능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일할 수 있지만 의욕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분리해내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효과적인 훈련과 통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그 당시 사회가 바라는 대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그들은 더 철저하게 격리하고 전문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장애화의 정치 - 마이클 올리버>

장애인은 정상적인 노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설에 격리당해 사는 것이 당연한 현대사회에서, 시설이 아닌 장소에서 일어난 장애인의 사고를 사회적 국가적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주장한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낸 특수한 역사의 한 단면일 뿐이라면, 현대사회에 태어난 장애인들이야말로 가장 불운한 존재가 아닐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가정내에서 노약자와 장애인 가족을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제활동이 공동체사회 단위로 구성된 시대에는 돌봄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들이 온전히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가령 농사꾼들의 본업 외 산업(outwork industries) – 부업으로 하는 장인 분야나 가내 수공업 – 이 가내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면서, 가난한 가정 특히 여성들이 노인과 광인을 집안에서 돌보는 게 더 어려워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Ignatieff 1932, p.172) / <장애화의 정치 – 마이클올리버> 재인용

반지하방 침수사고를 전하는 뉴스의 가장 첫번째 헤드라인은 ‘발달장애인 가족’이었다. 도시 방안의 익사사고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프레이밍이다. 시설기관에 의탁하지 않고 있던 여성장애인은 시스템에서 일탈한 존재이니 사고를 당한 확률이 높고, 그것은 우리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사고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반지하방 침수가 10여분만에 순식간에 일어났고, 신고를 받아 3분만에 출동한 경찰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발달장애인 뿐만이 아닌 비장애인 여성가족들이 함께 있었지만 이러한 자세한 이야기는 ‘장애인가족의 비극’, 즉 가난한 개인들의 비극으로 정당화되었다.

요즘은 평생 회사를 다녀도 아파트를 살 수 없는 신체 건장한 남자들이 세상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삶의 목표나 미래가 안보인다고. 자기들은 기성세대보다 가난해 졌다고. 그들의 투덜거림은 이제 뉴스의 주요 기사거리가 되어 매일 회자된다. 그러나 건강한 보통 남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존재감 없이 살고 있는 여성, 장애인, 노인, 소수자의  말에는 여전히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낼 앞으로의 가난까지도 자본주의 세상에선 너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반지하방 참수사고 보도 이후 페이스북의 몇몇 친구들이 어린시절 가난했던 반지하방의 기억과 수해경험담을 쓰며 가난은 슬픈 것이라 인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행히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을 나와 결혼을 했으며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내 또래 세대까지 반지하방 가난은 지나간 서글픈 추억이자 미래에 대한 지금의 가열찬 노동자로의 다짐을 새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홍수지씨의 죽음, 그러나 유쾌했던 삶

지금은 반지하방에 살고 있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안도하며 가난의 무서움을 간증하는 여러 얘기들 중 유독 한 사람의 글이 눈에 띠었다. 서울 반지하 방에서만 2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영화감독 이송희일은 반지하도 사람 사는 방이고, 자기 삶의 터전이라 썼다. 그는 그 곳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채식요리를 해먹으며 애인과 데이트도 한다. 이송희일은 평균적 삶에서 아주 멀게 벗어나 독립영화 감독일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 - 게이이다. 이송희일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무렵, 신림동 반지하 사고 피해자 홍수지씨에 대한 민주노총 동료들의 추모글이 올라왔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확인한 순간이었다. 홍수지씨는 백화점 면세점 판매서비스 노동자 였으며 일하던 직장의 노조 총무부장이었다. 동료들은 함께 일해온 후배들과 노동자들에게 언제나 다정했으며 늘 유쾌했던 그녀를 기억하며 추모했다.

홍모씨라 표현된 뉴스 속 그녀의 삶은 너무 비참했다. 발달장애인 언니를 집에서 돌보는 일은 어땠을까? 혼자 벌어 장애인 언니, 늙은 노모와 어린 딸, 자기까지 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너무 힘들었을 텐데 결국 폭우에 휘말려 이렇게 순식간에 죽어버리다니, 며칠 내내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고 동정해온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의 감정 또한 그녀의 가난한 반지하 방이 그녀의 전부인양 보아온 연민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노동자 동료들에 의해 이름이 제대로 씌여진 수지씨는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에 잠겼던 반지하 방의 작은 창문 너머 그녀의 삶이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구들 또한 그녀를 다정했고 행복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했다.

 주춤주춤 공장에 들어갈 때 우리의 노동자는 혼자인 줄 알았습니다. 공장에 자본가만 있는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의 구원자는 그의 모습을 하고 그의 곁에 있었던 겁니다. 자본가의 권리에 맞서는 권리, 자본가의 힘에 맞서는 힘이 ‘동료’의 모습을 하고 그의 곁에 있었던 겁니다. <북클럽 자본6 – 공포의 집, 고병권>

물론 사고를 함께 당한 수지씨의 장애인 언니와 어린 딸은 여전히 노동자들 밖의 무명씨 여자들이다. 하지만 수지씨의 삶을 통해 그녀들이 우리가 그리는 가난의 전형적인 비극모델의 잉여인간이 아닌  행복했던 가족의 일원으로 추억될 것이다.

 

여전히 살쾡이 같은 가난의 문법

폭우로 죽은 것은 홍수지씨 뿐만이 아니다. 홍수지씨의 사고가 일어났던 저녁,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유택이 연락을 해왔다. 폭우속 작업을 하던 조선족 노동자가 감전을 당해 심정지 상태로 실려왔는데 결국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유난히 마음이 무겁다는 그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위험하게 작업을 꼭 계속 해야만 했는지 속상해 했다. 조선족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아마도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장 위험한 육체노동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다음날 한줄 기사로 처리되었다. 조선족 노동자의 죽음을 목격한 응급실 의사는 아직 너무 젊은 생명의 꺼짐을 안타까워 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해 주고 기억해 줄 동료들은 없었다.

같은 날 경기도 공장부지 노동자 휴게 컨테이너에서도 폭우로 인한 산사태 피해가 일어났다.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거하던 중국인 노동자 한명이 매몰되어 사망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및 주거문제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은 이런 사건을 가르켜 ‘내부식민지 이야기’라고 명명한다. 그의 글에는 항상 마지막 해시태그 문구로 ‘#선진국 #코리아 #식민지’ 가 씌여진다. 그로 인해 뉴스로 릴리즈된 많은 사건들의 피해자는 주로 여성 이주노동자들이였다. 농사일에 투입된 동남아계 외국인 여성들은 화장실이 없는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고용주에게 숙식비까지 떼이고 있는 실정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탈의실에 공장주가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문제제기 직후 탈의실 화재사고로 증거가 모두 인멸되어 밝힐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버렸다.

노동자들이 연대할수록, 자본가들은 연대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더욱 집요하게 찾아낸다. 마르크스가 교활하다 했던 자본개들은 여전히 살쾡이의 눈으로 가난의 문법을 더욱 어렵고 정교하게 수정해 나가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그리고 하청노동자로, 혹은 일용직 노동자로 우리는 노동의 위험을 계속 외주의 외주화하고 있으며, 그 마지막에는 한명의 인간으로 기억해줄 동료조차 부족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유쾌한 예비 잉여인간이 되기 위한 발걸음

노동자투쟁을 위한 과학적 기술서로 <자본>을 남긴 마르크스의 바람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동등한 노동자여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정규직 노동자이며,  치안과 침수 걱정을 해야만 하는 반지하 방이나 고시원이 아닌 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자본>이란 책을 읽을 여유가 있는 상대적 자유인이구나란 생각이 들어 문득 씁쓸해 졌다.

홍수지씨 가족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 주장하는 댓글을 쓴 남성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할까 고민해 보았다. 우리 사회는 평균적으로 60세가 되면 노동현장에서 은퇴할 수 있다. <가난의 문법>의 노인들처럼 60세가 넘어서도 생계를 위해 노동을 계속하는 것은 무능력으로 인식되었다. 마찬가지로 60세가 안된 노동자가 일을 못하고 있다면 그 또한 무능이다. 노동시장에서 은퇴나이에 가까운 노동자들은 젊은 신체의 노동자들에게 금새 밀리기 일쑤이다. 이러한 경쟁상황에서 우리는 60세가 되기도 전에 먼저 해고되어 무능력한 잉여인간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을 두려워 한다. 그 두려움과 경쟁의식이 사회적으로 함께 부양해야 하는 잉여인간들에 대한 혐오의식을 만들고 있는 듯 하다. 이런 댓글러들에게는 타인에게 공감할 여유와 자유가 너무 부족할지도 모른다.

요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목받는 잉여의 삶도 있다. 최근 MZ세대 삶의 목표로 회자되는 잉여의 삶이란 이미 축적된 자본을 기반으로 노동하지 않는 삶을 뜻한다. 노동하지 않는다는 점은 똑같지만 국가나 사회 혹은 타인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된 새로운 삶의 모델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잉여로운 삶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여야 한다. 반지하 방을 모두 없애 우리의 눈앞에서 그들을 치우는 것이 아니다. 반지하 방을 주거 부적합 공간으로 만든다면, 그 자리에는 불법체류 이주 노동자 같이 더 보호받지 못할 최하위 노동자들이 들어찰 것이다. 이미 농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자는 예비 잉여인간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신체가 노쇠하면 노동을 할 수가 없다. 정규직 노동자가 해고되면 비정규직 노동자로 임금을 벌어야 할 수도 있다. 비장애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될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완벽하게 개인적인 나도, 완벽하게 개인적인 타자도 존재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축적된 자본이 없더라도 배고파 굶지 않고 물난리에  죽지 않을 서로서로를 돌보는 삶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이것은 현대 도시에서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삶을 함께 기억하고 가난의 문법을 풀어보기 위한 연대이기도 하다.

도시에서의 쓸쓸한 죽음 뒤에도 인간의 행복한 삶은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가난의 문법이란 자본주의 공식으로 묻혀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으면 안된다. <자본>에서 시작되어 150년 이상 노동자들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어온 그 ‘발걸음’ 처럼 우리는 또 다시 나아가야 한다. 비단 노동자뿐만이 아닌 잉여로울 우리 모두를 위한 전진을 위하여.

 

 

[참고문헌 및 자료]

<북클럽 자본 1~ 6 > 고병권 , 천년의상상

<가난의 문법> 소준철, 푸른숲

<장애화의 정치> 마이클 올리버, 대구DPI

영화 <기생충> 봉준호

<나는 가난을 대상화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이일희송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ifbdJPuxcwi5EyN5RqcggpGv8mWuxppRtrBUiPTAgjc5SBywTTVJT6M6ELzEtS7Pl&id=100001956842325&m_entstream_source=timeline

<발달장애 언니 돌보며 ‘신림동 참변’ 당한 면세점 노동자 추모 물결> 세계일보, 양다훈, 2022.08.10  

https://www.segye.com/newsView/20220810503446?OutUrl=naver

<내부식민지사람 이주노동자 불법기숙사 사망 연속 , 말하는 동물로 보고 취급하니…> 김달성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8Kc4wjYmA4v4qjPSuvNpeAn8favrQjxcU2dsrrsg7nBjdRPNh4v9pQqxPvFHouB7l&id=100001530963113&m_entstream_source=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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