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사이의 투쟁에서, 그 노동력공급이 성인이 아닌 아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인간 개개인은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기능인자로서 조직되고 또한 자신의 지적 육체적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발휘하도록 독려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인간도 모든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원료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하여 기술시대에는 인간과 물질 사이의 차이가 소멸되고 만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이 하이데거의 시야가 떠올랐는데,
자연물이 원료의 대상이되고 , 제국주의 시대에는 아프리카 노예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으로 직접 원료의 대상이 옮겨 오는가 싶더니, 산업자본주의에는 급기야 아이들마저 원료의 대상이 되었다는 낯설음이 다가왔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 타자 내지는 객체화를 보는 시야가 어디까지 폭력적으로 확대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동시에 어떤 무엇을 통해서 타자와 쉽게 공감/연대로 서있을 수 있는 것인가 ?
딱 일년전 코로나 격리로 은평구 코로나 생활치료센터에 격리되어 12일간 생활한 경험이 있는데, 아이 확진으로 인한 (비확진)보호자 자격으로 같이 입소하여 배정된 공간에 들어가 보니 원룸 한 칸에 나란히 놓여진 트윈 침대였다. ^^;; 24시간 마스크에, 계속 소독약을 닦아내며 사는 패턴으로 그래도 버텨낼 만은 했는데, 식사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던 경험, 보호자 감염확진 시 다시 11일이 연장되어 총 22일가량을 원룸 공간에서 둘이 갇혀있어야 하는지라, 궁여지책으로 마스크를 벗는 식사시간에만 베란다에 혼자나가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데, 맞은편 소방연수센터에서 '감염자가 베란다에 나와있다'는 민원을 넣어 경고를 받았을 때, 극하게 전해 받은 진한 뼈저린 소외의 느낌... 세상에서 내쳐져 우주공간에 던져진 느낌. 공포 속에 타자를 밀어내는 순간이 내게도 (수시로 의도치 않게) 보일 터라 맞은편 건물에 있는 이의 신고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동시에 갖는 생각.
- 타인의 고통을 잘 느끼고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이들은 어떤 감각을 가졌기에 고통이 보이는 것이며, 그들을 행동하게 하는 동인은 무엇이며, 무엇이 나와 다른 것일까?
- 마음이 가난한자 행복하여라. 내가 진정 궁색할 때 내 옆에 연대로 있어주는 이들은 어떤 감각/경험/심장의 소유자들일까?
작년 이후 머리 한 구석에서 답찾기 하는 질문이 다시 떠오른 수업이었습니다.
// 2022 여름, 함께 책 읽기에 같이 발걸음 걸어주신 마라클님과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감염자가 베란다에 나와 있다" ㅎㅎ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흡사 "좀비가 나타났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누군가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감염자'로 감각될 뿐이라는 것! 마치 좀비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그런 일을, 내가 겪고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았을 때 "세상에서 내쳐져 우주공간에 던져진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이네요.
맑스의 [자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낯선 감각이 등장합니다. 바로 자본가가 바라보는 노동자의 존재에 대한 감각입니다.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면화나 방추처럼 하나의 자본(가변자본)으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19C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열살도 안된 아이들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15시간 노동을 하고, ...... 벽지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는 16시간 일하는데, 기계를 떠날 수가 없어 옆에서 누군가 떠넣어주는 음식을 먹으며 일합니다."
코로나감염자나 노동자 모두 인격체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감각된다는 점에서 동형적입니다. 하지만 전자의 감각이 낯선 만큼 후자의 감각은 이미 익숙해진 것같습니다. [북클럽자본]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는 감각변형을 요구하는 거 같습니다. 내가 인격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감각되는 낯선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