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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3몸페미니즘_에세이

Siri 2022.05.28 14:19 조회 수 : 40

페미니즘이라는 모험

남성에게 있어서의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페미니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의 권력관계와 위계질서의 타파를 목표로 하는 이상, 남성중심주의적 질서에서 막대한 수혜를 누리는 남성이 바로 그 질서 속에서 일차적인 억압과 차별의 대상으로서 살아가는 여성과 같은 의미에서 그 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페미니즘을 대할 때 발생하기 마련인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남성중심주의라는 질서가 남성에게는 혜택을, 여성에게는 피해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남성은 실로 많은 것을 누린다. 남성을 위한 사회가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돌봄의 전담자로서 규정함에 따라, 남성은 도처에서 쾌락과 편의를 누리며 살아왔다. 여성이 남성을 위한 성적 대상이 됨으로써, 남성들은 여자친구나 아내에게는 (그들이 딱히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 섹스를 요구할 수 있었고, 성매매를 통해 손쉽게 쾌락을 누릴 수 있었다. 쾌락을 가볍게 누리는 이런 행동들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당연시하는 질서의 공고함 덕택에 용인되고 때로는 장려되기도 했다.

여성은 성적 대상이기만 하지 않았다. 여성은 그와 동시에 돌봄의 수행자이다.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사노동이나 양육만 생각해보아도 간단하지 않던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온갖 일들이 여성의 몫으로 떠넘겨지면서, 남성들은 상당한 편의를 누릴 수 있었다. 여성에게 돌봄노동이 할당되는 것은 비단 가정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직장에서까지도 여성들은 그러한 역할들을 부여받았고, 그 결과는 물론 남성들의 편리함이었다. 여성들이 귀찮은 일들을 떠맡음으로써 남성이 향유한 편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다.

여기서 핵심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을 다른 모든 다양한 정체성에 앞서 여성으로써 규정한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회사에서 여성은 직장인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대해진다. 그렇기에 ‘여성스럽게’ 꾸밀 것을 요구받고, ‘여성스러운’ 일들을 수행하기를 기대 받는다. 여성인 직원이 이러한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성다움’을 수행한다면, 그 덕분에 재미를 보는 것은 남자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남성은 수혜를 입어왔고, 맞은편에서는 여성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물론 많은 것이 바뀌었고, 현재에도 변하는 중이다.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수히 많은 여성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남성들이 자신들도, 아니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발악을 하거나 말거나, 너무나도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곳곳에서 차별받고 억압당하고 있음을 호소한다. 긍정적인 변화들을 통해 아무리 ‘전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었다 할지언정, 여성들에게는 이 사회가 ‘여전히도’ 힘겨운 세상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지금도 남성들이 권력을 누리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조금만 주위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쉽게 할 수 없을 테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페미니즘적 실천이 여성과 남성에게 같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면 필연적으로 지금까지 숱하게 누려온 쾌락과 편의를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은 보다 큰 자유를 얻고 삶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남성이 그런 ‘떡고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페미니즘으로부터 얻을 ‘이득’이 보이지 않는 만큼, 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일이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며, 또한 애써 여기에 몸을 내던져도 여성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그 진정성을 의심받기 쉽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남성에게 페미니즘이 좋은 것일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대체 남성에게 뭐가 좋은 것일까?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즐김으로써 누려온 쾌락도 포기해야 하고, 여성이 알아서 해주던 온갖 ‘허드렛일’도 함께 떠맡음으로서 편의도 내려놓아야 하는 데 말이다. 그 대신에 여성을 대등한 주체로써 대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대체 왜 페미니즘을 해야 한단 말인가?

만일 남성에게 페미니즘의 실천이 이렇게 포기와 단념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거기서 어떤 좋음을 발견하기란 어려우리라. 이런 식의 접근은 페미니즘을 도덕화하는 경향과 합류하기 마련이다. 도덕률이 된 페미니즘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그 도덕에 복종함으로써 얻는 뿌듯함이거나 그 도덕에 못 미치는 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얻는 우월감뿐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좋음이란 어쨌거나 도덕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충분히 내면화한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만큼, 페미니즘에 대해 의문(혹은 심지어는 적개심)을 품고 있는 남성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하지 않음’의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한계가 뚜렷하다. 이런 접근법을 통해 남성이 페미니즘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될 좋음을 찾기란 요원할 테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의 문제이며, 어떤 관계를 ‘맺을지’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이제는 부적절한 것이 되어버린 이전의 행동이나 관계 방식을 단지 부정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들이 아니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실, 애초에 단순한 부정이나 포기 따위는 없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려면 반드시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삶의 방식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대안을 건설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방식의 삶을 모색하며 살아갔을 때야 비로소 다른 방식의 좋음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에게 페미니즘이란 모험이어야 한다. 삶의 새로운 방식, 관계의 새로운 방식, 사고의 새로운 방식을 발명해나가는 모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을 부정이 아닌 생성으로서 이해한다. 우리에게는 그저 여성혐오를 거부하는 차원을 넘어선 발명이, 여성혐오를 대체할 다른 형태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발명이 필요하다. 남성중심주의의 오랜 수혜자인 남성들이 페미니즘으로부터 어떤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모험으로서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여기서 모험과 발명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모험이라는 말에는 발명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모험에는 실패와 고통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위험이란 개인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제법 실재적인 것이다. 단적으로, 남성이 페미니즘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낸 변화가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리라는 법은 없다. 심지어 때로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결과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과정에는 위험이 수반되며, 이러한 위험은 남성에게 페미니즘을 새로운 것을 단지 발명하는 문제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삶과 관계의 방식을 창안하는 과정은 남성에게 위험의 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의 부담까지도 끌어안으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모험에 나섰을 때, 남성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다른 삶과 관계란 우정에 다름 아니다. 남성은 우선 여성혐오를 벗어던지고 다른 방식으로 여성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그들을 비로소 친구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쾌락을 위한 성적인 대상도, 자신의 편의를 위한 돌봄의 종사자도 아닌 친구 말이다.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남성들은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남성연대’라 부를 만한 그들만의 영토성을 만들어왔다. 이 안에서 남성들은 서로를 여성혐오에 가담하도록 부추기고 감시하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통해 달라진 삶 속에서 ‘남성연대’를 위해 남겨진 자리는 없다. ‘남성연대’는 남성이 여성혐오의 수행에 가담하는 주된 경로 중 하나였던 만큼, 페미니즘이라는 모험은 ‘남성연대’를 대체할 만한 남성들 사이의 다른 방식의 관계를 제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남성들은 서로에게 여성혐오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함께 경계하고, 페미니즘적 실천에 나서도록 서로를 촉발하는 우정을 생성하는 친구가 된다.

남성이 페미니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음에 대해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은 이렇듯 친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늬만 친구였던 사람들이 우정 어린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성들이 여태껏 친구나 연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쾌락과 편의를 위한 수단이었거나 혹은 함께 그러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한 공모자에 지나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해낸다면, 그렇게 해서 여성혐오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진다면, 이를 통해 말만 친구였던 관계들에 우정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이런 우정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이것만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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