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본》 1권, 다시 자본을 읽자 (6~10장) 발제 2022/5/26(목)
6장 비판①-정치경제학의 역사성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동안 인간은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품에 대해 해명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볼 때는 작은 차이에서 큰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 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상품의 교환으로부터 일반적 가치형태가 숨겨져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성의 문제 때문입니다. ‘동질화된 가치 공간’은 역사적 생산물입니다. 역사유물론은 각각의 사회형태가 지닌 고유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지, 결코 역사적 사회형태들을 가로지르는 영원한 법칙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법칙을 찾으려고 한 사람들은 정치경제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영속적인 사회 체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들, 부르주아적 사회관계들을 전제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데 이 전제들은 역사적 산물에 불과합니다. 《자본》 역시 초역사적 법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형태로서, 역사적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책입니다.
7장 비판②-정치경제학의 당파성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당파성’입니다. 과학을 둘러싸고 있는 의지에 대한 비판 말입니다. 그는 앎만이 아니라 앎을 둘러싸고 있는 의지, 앎에 투여된 욕망을 드러냅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정치경제학에 투여된 욕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론적 비판은 정치적, 사회적 혁명과도 깊이 관련됩니다. 그것의 정치적 의미는 혁명입니다. 비판가의 임무는 사물들의 관계를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그 구도의 특성을 읽어내는 것, 앎을 따라가면서 앎의 의지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무척 노골적으로 노동자계금과 프롤레타리아트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파성은 선동이 아니라 엄격한 비판의 결과입니다. 어떤 과학도 입장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8장 《자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
나는 비판의 이 두 차원을 《자본》을 읽을 때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본》을 역사적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 간주해야 하며, 어떤 ‘입장’속에서 읽어나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보편적 독해, 투명한 독해를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독해, 새로운 독해를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의 독해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정치경제학자들이 덜 본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가 더 본 것도 아닙니다. 둘은 ‘다르게’ 본 겁니다. 자기 당파성을 드러내지 않고 《자본》을 읽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독서는 나의 독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독서가 필요합니다.
9장 《자본》에 적용된 ‘나 자신의’ 방법
마르크스는 분명히 ‘변증법적 방법’을 ‘나 자신의 방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오히려 《자본》에서 헤겔에 대한 절묘한 비판을 느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내가 느낀 바를 네 가지 정도만 짧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변증법은 서술방법이지 연구방법이 아닙니다. 둘째,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채택하게 된 사연은 아주 우연이었습니다. 비데는 마르크스가 이론을 다듬어가는 과정은 헤겔 《논리학》에 의존했던 형식에서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직접 차용해 서술한 과정은 진리의 인식 과정이 아니라 허위의 형성 과정입니다. 넷째,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적 상황이 논리적 고양으로 이어집니다만 마르크스에게는 논리의 무력화 내지 실패로 드러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역설은 하나의 견해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역설의 상황에서는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집니다. 그의 부정은 긍정에 대한 제약이기는 커녕 긍정과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구조 변형과는 다른 차원에서 마르크스의 방법이 헤겔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가장 멀어지는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패러디입니다.
10장 추리소설 같은 《자본》, 탐정 마르크스
저자에게는 《자본》은 추리소설, 마르크스는 완전범죄에 가까운 사건을 파헤쳐가는 탐정 같습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범죄는 구조적 동기가 아니라 개인적 동기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관심있는 범죄는 합법적 절도와 강탈입니다. 그는 상품더미에서 ‘추상력’을 통해 가치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자본가가 어떻게 가치를 축적하는지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즉 완전범죄지요.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거래되는 시장에서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느 한 시점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빈곤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즉 《자본》은 광범위한 수준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범죄 보고서입니다.
질문
- 변증법이 어떤지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변증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마르크스의 연구방법과 서술방법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제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을 때는 자전거 도로에 보행자가 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걸을 때 저도 모르게 자전거 도로에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문제이겠지요. 두 집단의 렌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집단의 당파성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다른 입장들을 종합해 새로운 관점을 내세울 수 없을까요? 그것은 단지 절충주의에 불과할까요? 서로 다른 입장이 충돌하는 민주주의에서 당파성을 어떻게 작동하나요? (추가로 절충주의자였던 밀의 주장과 방법론이 궁금합니다)
질문이 많이 부족합니다. 목요일에 더 준비해서 구체화하겠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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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후기와 발제를 한꺼번에 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6장 / Q1) p90 “각각의 시대는 자기 시대의 인구법칙을 갖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때 언급되는 인구법칙 이란 게 무엇인가요?
7장 / O2) ‘당파성’(계급성)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각자의 입장과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는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관통하는 영원불변의 진리나 옳음이 있는게 아니라는 마르크스의 의도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친구들과 어떤 논쟁적 사안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래 정답은 없지뭐~ 라고 ‘대책없는 상대주의’로 결론 짓는 경험을 종종 하는데요. ‘당파성’(계급성)과 ‘대책 없는 상대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결국 잘 우겨서(힘/논리를 써서) 이기는 게 최종 승자일까요?
8장 / Q3) p114 “다른 것을 보려면 다르게 보아야 한다”
인상 깊은 문장입니다. 혹시 ‘다르게 보기’ 위해 강사님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있는게 있을까요? 저 포함해서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책을 좋아하고 정신을 쓰는 것에 익숙할 것이라는 추측이 됩니다. ‘신체는 큰 이성’이라고 작년 강사님의 니체 강독 시간에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고 했을때, (^^;;;) 그러면 책을 열심히 읽는 것 보다 육체적 활동을 통해 신체적 역량을 더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일까요? 그러면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 올라가나요?
9장 / Q4) p130 ‘서술방법’이 변증법적이다 p131 “현실과정을 따라 자신의 두뇌 속에서 관념들의 체계를 구축했으면서도, 나중에 구축된 것이 먼저 존재했고 마치 그것에 따라 현실 과정이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했죠. 효과를 원인으로 보았다고 할까요.”
이게 뭔가 중요한 문장인 것 같은데요...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변증법. 거꾸로 선 변증법이라고 마르크스가 헤겔을 공격하고요. 전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 듯 말듯 아리송합니다. 변증법 개념과 관련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10장 / Q5) p144 “은행을 설립하는 것에 비하면, 은행을 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참 멋지고 충격적인 문장입니다. 그런데 진행하는 역사의 그 한가운데에 있는 나(우리)가, 어떻게 시대적 통념(상식)과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실 그게 가능이나 한건지 의구심이 듭니다. 사후적으로 ‘달랐다’라는 평가가 없는 이상, 진행형일 때는(즉 그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게 얼마나 다른 건지, 맞기는 한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기는 수 밖에~??)
Q1. [1권 6장, 7장] 역사성과 당파성에 대해 :: 맑스는 정치경제학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맑스의 [자본]은 역사성과 당파성에서 자유로운가? 맑스의 [자본]은 초역사적이고 보편과학인가?
(1권>p74)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정치경제학의 2가지 한계를 드러낸다.
정치경제학은 초역사적 과학도, 입장과 무관한 과학(*보편과학)도 아니다.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에 한정된 과학이며, 부르주아계급의 입장에 서있는 과학이다.
Q2. (1권>6장) [역사에 대한 퍼스펙티브]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어떻게 다른가? 당신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pp84~88)
(1권>6장) [자본주의에 대한 퍼스펙티브]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어떻게 다른가? 당신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pp88~91)
Q3. (1권>7장) 기울어진 운동장(*특정한 퍼스펙티브/조명)은 반듯한 운동장(*보편적 퍼스펙티브/조명)을 꿈꾸는가? (p105, p114)
과학(논리, 법칙, 학문) 이전에 당파성(색조, 음영, 뉘앙스)이 있다? (p101~105) 모든 견해는 당파적이다? (pp105~107)
맑스는 왜 노골적으로 노동자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편을 들었나? (맑스의 당파성. pp101~104)
Q4. (1권>8장) "나의 독서는 나의 독서다!?" 다른 철학책과 비교하여, [북클럽자본]에는 작가(고병권)가 많이 드러난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