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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페미니즘 7장 발제

정민 2022.05.14 04:55 조회 수 : 27

몸-페미니즘 7장 발제

  그로츠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반복적을 맴돌고 있는 핵심적인 질문은 개념적인 질서, 이성, 지식, 주체성, 내재성 등으로 인식되는 어휘가 육체성을 위한 적절한 이론틀과 어휘로 전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래서 이 장에서 이원론적인 논리를 벗어나거나 전복하거나 초과할 수 있으며, 이분법적인 사유에 의해 제공된 어휘와는 다른 평면성, 표면, 강도, 투자 등과 관련하여 육체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페미니즘과 리좀학

  남성이론가들 모두 두드러지게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여성이나 여성성에 관한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냄으로써 상당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다른 한편 그들 모두 남근중심적인 문화와 가부장제적인 재현 모델의 작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략적이고 잠정적인 유용성을 제공해줌으로써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와 반면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들뢰즈-가타리를 전반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앨리스 자딘은 여성과 여성성의 비유를 통해 존재, 대상, 질, 쌍, 상호 관계의 측면에서라기보다 평면, 강도, 흐름, 생성, 연계의 측면에서 재형상화된 들뢰즈의 급진적인 존재론에 의해 페미니스트들에게 제기된 불안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그녀의 불안은 ‘정체성’, 타자성, 젠더, 억압, 남성과 여성의 이항 대립적인 구분 등과 같이 페미니즘 사사의 핵심이자 주요한 열망인 그런 문제점들을 둘러싸고 곁길로 빠지거나 아니면 우회할까 봐 두려워하는 데서 기인한것처럼 보인다. 이리가레는 욕망, 기계적인 기능, 조립, 연결과 같은 개념적인 중립성 아래 여성은 다시 한번 포섭되어버리며, 그러다 보면 여성은 자신들과 인류에 관한 남성들의 환상을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데 또다시 동원된다고 주장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광범한 기획에 상당히 우호적임에도 다른 페미니즘 정치학이 보여준 추동력과 통찰을 그들이 가로채버린 점에 대해서는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유사하게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 엘리스 자딘, 이리가레, 로지 브라이도티의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우려(?), 불편함

  그로츠는 이와 반대 조항들을 간략하게 열거하면서 이런 반대 조항들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 같지 않다고 언급한다. 첫째, ‘여성 되기’의 은유는 여성의 정치학, 투쟁, 이론, 지식을 남성들이 전유한 것이라는 비판인데, 이 은유가 여성의 것들이 지닌 급진성을 탈정치화하면서 ‘차용’하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는 비판이다. 둘째, 이들 은유는 여성의 성적인 특수성을 중립화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음흉하게 남성의 특수성과 이해관계와 관점을 중립화하고 따라서 그런 것들 위에다 가면을 씌운다. 셋째,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두 저서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병, 정신분열증, 되기 등을 낭만적으로 고양하는데, 한편으로 이런 식의 고양은 고통받는 주체의 실재하는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주체의 고통을 타자를 위한 불편한 이상형으로 만든 것이다. 넷째, 기계적인 기능이라는 은유를 환기함으로써, 전문 기술적인 주문서의 용어를 이용함으로써, 그 밖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성의 배제와 비방을 통해서만 이런 비유와 어휘가 가능하도록 활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적인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그로츠는 그들의 저술들이 설사 남근중심적이라 하더라도 이 저술들이 페미니즘의 목적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으며 페미니즘의 목적과 상호 교차하고 중첩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구한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서구 사상에 그처럼 팽배한 이항 대립적인 양극화를 극복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와 공유되는 부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이 페미니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는 몸 개념, 즉 불연속적이고 비총체적인 일련의 과정, 기관, 흐름, 에너지, 육체적인 실체와 비육체적인 사건, 속도와 지속으로서 몸 개념은 마음/몸, 자연/문화, 주체/객체, 내부/외부의 이항 대립에 의해 몸에 부과된 이항 대립을 벗어나서 몸을 재인식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시도에 엄청나게 소중한 가치가 될 수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체성과 물질성에 대한 대안적인 개념으로 전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대단히 다르고 긍정적이며 능동적인 욕망 개념을 제안한다. 정신분석학이 획득 불가능한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시키려고 하는 결핍으로서의 욕망이나 부재로서의 욕망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욕망은 오히려 생산하는 것이 자 연결하는 것이며 기계적인 결합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 될 수 있다.

  욕망은 자신이 요구한 특정한 대상의 획득을 욕망 그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은 오로지 자기 증식 또는 자기 확장이라는 이상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욕망은 특이성으로부터 벗어나 사물을 분해하고 연결하여 다시 특이성으로 조합한다. 욕망은 움직인다. 욕망은 행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의 보관소이자 수호자였던 한, 전통적으로 현존/부재, 현실/환상 사이의 대립이 남성의 타자의 자리에 여성이 거주하도록 여성을 구속하고 규정해왔던 한, 욕망 개념은 페미니즘 이론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기관 없는 몸이 욕망과 연결 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살을 빼겠다는 것이 건강을 위한 것인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써서 살을 빼는 것인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몸, 기관 없는 몸, 되기

  여기서 그로츠의 목표는 들뢰즈의 작업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닌 그와는 반대로 작업의 의도를 뒤쫓아가면서 그들이 발전시키지 않았던 이론과 개념을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작업을 작동시키고 전개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로츠는 고도로 선택적인 독서가 될 것이 밝힌다. 그로츠는 리좀, 조립, 기계, 욕망, 다수성, 되기, 기관 없는 몸 등의 개념들에 집중한다고 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사물은 더 이상 엄격한 범주와 분명한 경계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없다.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모든 사물은 내재적으로 통합된 단일하고 온전한 전체로 간주될 수도 없다. 주체와 대상은 일련의 흐름, 에너지, 운동, 층위, 부분, 기관, 강도다. 이들 파편은 정체성으로 응결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서로 절단될 수도 있다. 생산은 파편들, 몸의 파편들과 대상의 파편들 사이에 연계를 창조하는 그런 과정들로 구성된다. 조립이나 기계는 결합으로 묶인 혹은 분열과 붕괴를 통해 절단된, 이질적이고 생판 다르고 불연속적인 제휴나 연계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립이 중심적이거나 위계적인 질서, 조직, 혹은 분배를 따른 넋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고안물이나 기계 장치처럼 동일한 차원에서 다른 요소들의 결합을 따른다는 점이다. 조립은 요소, 파편, 흐름의 잠정적인 연결이며 이질적인 위상과 실체의 일시적인 연계다. 사상, 사물-인간, 생물, 무생물-등은 모두 동일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 존재들 사이에 위계질서는 없다. 이들 다양한 파편들의 집합과 접속에 미리 예정된 질서는 없으며 이들이 동조해야 하는 핵심적인 조직화나 계획도 없다. 이들의 ‘법칙’은 다소 끝없는 실험, 변신, 상호 변이, 결합, 재결합에 대한 절박한 요청이다. 따라서 조립이나 다수성은 본질적으로 운동과 행동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만들어지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조립이나 다수성은 실천의 결과물들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통일성이나 일자의 개념과는 상반된다. 욕망하는 기계를 구성하는 요소나 불연속성은 잃어버린 원래의 총체성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완결하거나 완성하는 그런 총체성, 즉 텔로스(끝, 목적, 목표, 최종목적, 궁극의 목적)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실재를 다시-표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능은 의미화하는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산하여 스스로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구별 없이 개인적, 집단적, 사회적인 실재를 구성한다. 욕망은 영구적인 다수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실험하고 언제나 새로운 결합, 연계, 연결, 사물을 만들고 생산한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라 유목적인 것이며 우회하고 창조하며 비반복적이고 증식하며 예측 불가능 한 것이다.

  몸이 더 이상 생물학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집중된 그런 유기체로 간주되지 않는 한, 몸이 반영과 자기 반영을 위한 능력이나 의도를 통해 응결된 의식이나 무의식과 관련하여 조직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몸을 욕망하는 기계의 파편이거나 요소로 파악하며 또한 이런 파편들과 요소들 자체가 일련의 욕망하는 기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 없는 몸’이라고 부른다. 이 기관 없는 몸은 조직과 기관으로 가득 찬 몸이다.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간의 몸을 탈자연화하고 그것을 타자의 몸이나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하다시피, 기관 없는 몸은 정신적인 내부를 전부 비워버린 몸이 아니다. 기관 없는 몸은 그것의 조직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몸이 갈망하는 경향성이다. 기관 없는 몸은 기관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조직화 또는 구조에 반대하는 것이다. 계층화되고 규제되고 배치되고 기능적인 몸으로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며, 자질과 속성의 절박한 요청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몸에 반대하는 것이다. 기관 없는 몸은 강도와 그 강도의 퇴적의 융합 이전의 몸이며 그것을 초과하는 몸이다.

  기관 없는 몸은 통일되고 단일하며 정의할 만한 ‘유형’이나 구조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차라리 순환의 유형이나 양태, 즉 기관 없는 몸이 그 표면 위에서 허락하거나 생산할 강도의 운동과 흐름의 유형이나 양태와 관련하여 하나의 기관 없는 몸이 다른 기관 없는 몸과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은 무엇인가,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무엇을 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기능하며, 어떤 영향을 미치며, 무엇을 생산하는 가의 문제이다. 

  그와는 반대로 텅 빈 기관 없는 몸에 대한 설명도 덧 붙였다. 텅 빈 기관 없는 몸의 경우에 몸은 기관과 조직을 비울 뿐만 아니라 강도와 힘 역시 비워버린다. 이에 대한 예시로 건강염려증과 마조히스트가 있다. 이와 같은 몸은 결핍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 문제다. 이런 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순환할 수 없는 지점까지 극단적으로 자신을 채운다. 만약 몸이 증식, 연결, 연계로 만들어진다면, 텅 빈 기관 없는 몸은 흐름이 중단된 것이라는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텅 빈 것이다.

  결국 장소도 아니고 평면도 아니며 장면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이런 기관 없는 몸은 욕망의 생산, 순환, 강화를 위한 장이며 욕망의 내재성의 장소다. 자기 자신을 폐기 처분하지 않으려면 기관 없는 몸에서 최소한의 응집과 통합이 있어야 될 것처럼 보인다. 기관 없는 몸이 권력과 현실의 맹폭격에 직면하여 살아남으려면 최소한의 주체성과 의미화 작용은 남겨두어야만 한다. 완벽한 탈계층화는 오히려 기관 없는 몸을 단절되도록 만든다. 여기서 탈계층화는, 탈주의 선을 풀어주는 것, 연결의 생산, 기관 없는 몸을 넘어서서 그것을 통과하는 강도와 흐름의 운동 등은 따라서 고정된 상태이거나 궁극적인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방향이거나 운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단일하고 조직되고 자족적이며 유기체적인 몸으로부터 기관 없는 몸을 구분한다. 그들은 흐름의 몰적인 배치와 분자적인 배치를 구별하고, 소수집단의 조직 양태와 다수집단의 조직 양태를 구별한다. 되기는 언제나 분자적이며, 몰적인 통일체들을 가로지르고 재조정한다.

-결론적으로 기관 없는 신체는 하나의 관념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배치를 하자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여성 되기, 비육체적으로 되기

  되기는 언제나 무엇으로 되는 것이다. 되기는 언제나 특수한 운동이며, 동작과 휴식, 속도와 느림의 특수한 형식이며, 강도의 지점이자 흐름이다. 되기는 언제나 다수성이며, 어떤 ‘것’에서부터 그것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다른 것으로의 운동이거나 변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되기, 그 중에서도 특히 동물 되기는 동물도 인간도 아닌 제3의 매개항인 그 밖인 다른 관계를 포함하게 되는데, 이런 매개를 통해 주체는 동물과 결합하여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외투나 어떤 행위처럼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일종의 미개척지이자 예측 불가능성의 회전축이며, 궤도와 연결과 미래 관계가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는 요소들이다. 동물 되기는 정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중요한 탈주의 선이다.

  남성이 여성 되기를 해야할 뿐만 아니라 여성 또한 여성 되기를 해야한다.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여성 되기 과정은 몰적이거나 여성적인 정체성을 탈안정화하는 것과 연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여성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가부장제적 권력 관계가 요청하는 응집, 경직화, 강제성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의 하나로 여성 되기가 언제나 필요하다. ‘여성’은 다름 아닌 환상이 투사된 것이며 리좀학이나 여성 되기의 문제틀은 그와 같은 환상적인 형식을 붕괴시키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여성 되기는 기관 없는 몸의 다른 분자들과 흐름, 속도와 강도를 재투자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몰적인 실체의 관절과 속박을 풀어준다. 만연한 사회질서가 몰적인 섹슈얼리티, 몰적인 정체성, 명확한 성적인 위치를 정의할 때 여성 되기는 그런 것들의 해체를 대표한다. 여성 되기는 그 추상적 관념 안에서, 역사의 바깥에서 필요한 운동이 아니다. 차라리 여성 되기는 바로, 여성을 타자이자 남성의 대립항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원화된 모델에 대항하여 축적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흩뿌리는 용어로, 가루로 만드는 용어로 환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되기를 다수파이자 몰적인 것이라기보다 소수파이자 분자적인 것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소수는 양적인 개념도 아니며 그렇다고 통계적인 개념도 아니다. 이때 소수는 오로지 분자적이거나 종속된 과정을 언급하는 것인 반면, 다수는 만연한 권력관계와 관련하여 거대한 집단으로 분할된 것을 지칭한다.

  여성 되기는 구조를 넘어서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여성 되기가 남성에게 부과하고 의미하는 바와 여성에게 부과하고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남성에게 여성 되기는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성기 중심의 형태를 탈구조화하거나 재구조화하는 것을 암시하며, 행동의 미시적인 여성성을 작동시키는 것을, 또 다른 섹슈얼리티 혹은 많은 섹슈얼리티의 분자들을, n개의 성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른 곳에서 기술하다시피 ‘천 개의 미세한 성’의 분자들을 작동시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것은 특권적인 성인이자 남성 주체로서 남성들에게 거대한 지배 체계 아래 여태까지 억압되어온 다양한 힘들을 작동시키는 방식으로서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심지어 동물 되기를 환기한다.

  여성 되기는 결국 인간 되기의 전제 조건이다. 이제 인간 되기는 탈영토화하고 동물 되기를 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있기’, 완전히 식별 불가능한 익명성을 지향하는 통로다. 그렇다고 이것은 모든 특징의 말살이 아닌 모든 종류의 기계가 서로 공명하고, 특징, 성격, 정체성, 위치 등이 지각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사회적 관념이 요구하는 육체의 관념에서 벗어나자

 

1. 되기는 본질적 정체성을 지닌 대문자 인간(Man) 개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 -되기는 기존의 인간 범주에서 규정된 여성을 모방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 남성에 의해 재현되고 근대적 인간이라는 범주 내에서 정의되는 몰적 남성의 정체성과 몰적 여성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생각을 하자면 여성- 되기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용어가 신경쓰입니다. 결국은 여성, 남성의 구분을 없애자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그게 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인간- 되기 가 나은게 아닐까요?

1-1. (사회에서 제시하고 있는)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이 되기 인데, 생물학적인 것 조차 뛰어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여성(남성)이란 무엇이고, 여성(남성)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2. (p.403-404)에 써져있는 그로츠의 의견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3. (p.407) 동물 되기는 정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주요한 탈주의 선이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요?

 

4.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을 왜 생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이항대립이 왜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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