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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발제

앨리스 2021.03.06 11:38 조회 수 : 59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204> 학문과 철학 사이의 부당한 순위 변경에 관하여 자신의 경험에서 논의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본능과 수치는 말한다. “아, 고약한 학문이여! 이것은 언제나 진상을 알아내는구나!” 

   학문적 인간의 독립선언(철학에서 해방되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것이나 그 괴물 같은 것이 남긴 미묘한 영향 가운데 하나이다. 학문은 오만과 무분별에 가득 차 철학에 법칙을 부여하고 스스로 주인 역할을 해본다. 즉, 철학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 자연과학자나 늙은 의사들은 때로는 전문가이자, 종합적 과제와 능력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방관자였고, 철학자로부터 스스로 침해당하고 왜소해짐을 느끼는 근면한 노동자였으며, 철학에 대해 편협한 색맹의 공리적 인간이었다. 철학자에 대한 경멸은 철학에 대한 경멸로 일반화되었다. 쇼펜하우어의 헤겔에 대한 비지성적 분노는 독일 젊은 세대를 독일 문화와 완전히 분리 시켰다. 무정부주의자 오이겐 뒤링과 융합론자인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예를 보면 그들은 모두 실패한 자이며 학문의 지배 아래 되돌아온 자들이다. 그들은 젊잖게 분노를 품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철학의 주도적 과제와 지배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다. 

 ‘인식론’으로 격하된 철학은 실제로는 소심한 판단 중지론이나 금욕설 이상이 아니다. : 이는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권리를 거부하는 철학이다.

<205> 철학자들의 발전을 막는 위험. 학문의 규모와 구조물의 거대한 성장으로 전망하고 둘러보고 내려다보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철학자의 시선과 가치판단은 더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지적 양심의 섬세함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고, 그는 애호가가 되거나 천 개의 다리와 천 개의 촉각을 지니도록 유혹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기 자진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한 사람은 인식자로서도 더이상 명령하지 못하고 더이상 지도할 수 없다. 철학자는 학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과 삶의 가치를 판단할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라는 것이 천박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럼 보고 좋지 않은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수단이자 기교처럼 보인다. 진정한 철학자는 ‘비철학적으로’ ‘현명하지 못하게’, 무엇보다도 영리하지 못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수백 가지 시련과 유혹에 대한 짐과 의무를 느낀다: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모험을 감행하며 종지 않은 그 게임을 한다.

<206> 천재, 즉 생산하든지 아니면 출산하는 존재에 비하면 학자, 즉 학문을 하는 평균적 인간은 언제나 늙은 처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 인간이란 고귀하지 못한 천성의 인간이다. 그는 근면하고 참을성 있게 질서에 적응하며 능력과 욕구에도 균형과 절도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와 유용성이 끊임없이 증명되는 것을-이러한 증명으로 모든 의존적인 인간이나 무리 동물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불신이나 동기를 거듭 극복-감지할 수 있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학자의 붙임성은 도도히 흐르는 것 같은 사람의 붙임성이 아니어서 위대하게 흘러가는 인간 앞에서 좀더 냉담해지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학자의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은 평범함의 본능에서 온다. 즉, 비범한 인간을 본능적으로 근절하려고 하고, 팽팽한 활을 꺾으려 하거나 이완시키려고 하는 평범함의 예수회 교의에서 온다. 즉, 배려하면서 부드러운 손길로, 친밀한 동정으로 활시위를 이완시킨다.

<207> 객관적인 정신을 맞이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그 감사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하며, 정신의 자기부정이나 비인격화를 마치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구제나 정화인 것처럼 찬미하는 과장도 제지해야 한다. ‘무관심한 인식’에 경의를 표하는 염세주의자처럼 더이상 저주나 비방하지 않는 객관적인 인간은 세상에 있는 도구의 하나이다. 그는 ‘자기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이다. 그는 인식되기를 바라는 것들 앞에서 복종하는 데 길들여져 있고, 인식하고 ‘비추는 것’ 외에는 다른 즐거움을 모른다. 그의 사고는 좀더 일반적인 경우로 방황하고 있고,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어제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내일도 알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의도적인 것이며 그의 미움은 인위적이고 오히려 힘의 기교이며 작은 허영이며 과장이다. 그가 객관적일 수 있는 한, 오로지 순수할 뿐이다. 오직 자신의 밝은 전체성에 있을 때만 그는 여전이 ‘자연’이며 ‘자연적’이다.(계몽주의???) 사물을 반영하며 영원히 스스로를 갈고 닦는 그의 영혼은 더이상 긍정할 줄도 부정할 줄고 모른다. 그는 명령하지 않으며 파괴도 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인간은 하나의 도구이며 노예일 뿐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유연한 항아리의 주형에 불과한데, 이 주형은 ‘그 형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이나 성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보통 그는 성분이나 내용이 없는 인간이며, ‘몰아적인’ 인간이다.

<208> 어떤 철학자가 회의를 거부했을 때, 사람들은 마치 멀리서 어떤 불길하고 위협적인 소음이 들려온 것처럼, 마치 어디선가 새로운 폭약의 실험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선한 의지’-실제로 활동하는 삶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 인정되는 회의, 즉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노래를 불러 잠들게 하는 아편 같은 회의보다 더 좋은 수면제나 진정제는 없다. 회의론자인 이 유약한 피조물은 너무 쉽게 깜짝 놀란다.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것은 그에게는 도덕에 반하는 것이다. 그는 기품있는 절제로 자신의 덕을 축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몽테뉴와 더불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또는 “이 점에서 나는 자신이 없으며, 여기에서 나에게는 문이 열려 있지 않다.” 또는 “문이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왜 바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 “.....시간에는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불확실한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스핑크스 또한 마녀의 한 사람이며, 마녀 또한 한 사람의 여자 철학자였다.” 라고 말한다.

회의란 속된 언어로 말해 신경쇠약이나 허약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생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정신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종속이나 신분이 갑자기 뒤섞이게 될 경우에 항상 일어나는 것으로, 서로 다른 기준이나 가치를 물려받게 되는 새로운 세대에서 모든 것은 불안이고 혼란이며 의혹이자 시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잡종의 인간들 속에서 가장 깊이 병들고 퇴화는 것은 의지이다. 그들은 꿈속에서도 ‘의지의 자유’를 회의한다.-의지 마비증 ‘객관성’, ‘과학성’, ‘예술을 위한 예술’, ‘의지에서 자유로운 순수 의식’으로 진열장에 전시된 것 대부분은 성장(城將)한 회의나 의지 마비증에 불과하다.-유럽의 병

의욕하는 힘(의지)의 여러 유형들 : 북부 독일, 영국-스페인-코르시카, 이탈리아, 러시아 의욕하는 힘이 오랫동안 비축된 러시아에서는 의지가-이것이 부정의 의지인지 긍정의 의지인지는 불확실하더라도- 위협적인 방식으로 방출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라는 위험은 유럽에 하나의 의지를 획득하려는 결의를 하도록 할 수밖에 없으며, 유럽의 소국주의라는 희극이, 그 왕정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의지 분열이 종결될 것이다. 다음 세기는 대지의 지배를 위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고-어쩔 수 없이 큰 정치를 하게 될 것이다.

<209> 유럽이 새로운 전쟁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유형의 회의가 발달하도록 한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남자다움이 부족하다는 의심을 품었고, 그 사이에 그의 아들의 내부에서는 좀더 위험하고 강인한 새로운 종류의 회의가 자라나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증오에 의해, 고독하게 만든 의지의 얼음같이 찬 우울증에 의해 얼마나 잘 조성되었는지 누가 알겠는가?-프리드리히 대왕의 모습으로 독일에 처음으로 진입했던 저 과감한 남성성을 지닌 회의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러한 회의는 경멸하지만, 그럼에도 강탈한다. 상대를 무너뜨리며 소유한다. 그로 인해 자신을 잃지도 않는다. 정신에 위험한 자유를 주지만, 마음은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유럽을 독단의 잠에서 깨우게 된 독일 정신의 남성성(메피스토페레스적 정신이라고 불리운)

“여기에 한 인간이 있다!”-괴테에 대한 나폴레옹의 말은 독일 정신이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는지를 드러낸다.

<210> 미래의 철학자들은 어떤 한 속성만 본다면 비판가로, 또는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실험의 인간으로 부를 수 있다. 그들을 회의론자와 구별하는 속성으로는 가치척도의 확실성, 의식적으로 통일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기지있는 용기, 독립성과 자기 책임 능력 등이다. 그들은 부정을 말하는 것과 해부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피를 토할 듯 아픔을 느끼는 경우에도 확실하고 정교하게 메스를 잡을 줄 아는 사려 깊은 잔인함을 스스로 시인한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비판적인 훈육과 정신의 문제에서 정확함과 엄격에 이르게 하는 습관을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내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비판자로 불리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철학 자체는 비판적 학문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선언은 철학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한다. 비판가들은 철학자의 도구이다. 아직 철학자 자체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211> 철학적 노동자와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인간을 철학자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그 스스로 비판가이며 회의론자이고 독단주의자이며 역사가이고, 그 외에 시인이며 수집가이고 여행가이며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며 도덕가이고 예견하는 자이며 ‘자유정신’이며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과업에 이르는 전제조건들일 뿐이다. 그의 과업 자체는 그가 가치를 창조하기를 바란다. 철학적 노동자들은 한동안 ‘진리’ 라고 불렸던 이전의 가치 정립과 가치 창조의 사실을 확정하고, 이것을 일정한 형식에 밀어 넣어야만 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를 규정하며, 이때 모든 철학적 노동자와 과거를 극복한 모든 자의 준비 작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를 향한 의지는-힘에의 의지이다.

<212> 필연적으로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는 그 자신이 사는 오늘과 모순된 상태에 있어 왔고 그의 적은 언제나 오늘의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제의 위대함이 시대의 나쁜 양심이 되는 것에서 발견해왔다. 그들은 시대의 미덕의가슴에 해부의 메스를 댐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을 알고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새로운 미답(未踏)의 길을 드러낸다. 그는 얼마나 다양한 것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얼마나 멀리 자신의 책임을 넓힐 수 있는냐에 따라 가치와 순위마저도 결정할 것이다. 의지의 강함과 준엄함, 오랫동안 결의할 수 있는 능력이 ‘위대함’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돌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하면서도 전체적이고 폭이 넓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이것이야말로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13> 철학자가 하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배우기가 나쁘다. :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아야’ 한다.-또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 ‘사유한다는 것’과 어떤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행할 때, 바로 그때 자유, 섬세함, 충만된 힘에 관한 그들의 감정이나 창조적 조정, 처리, 형성의 감정이 절정에 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간단히 말해 이 경우 필연성과 ’의지의 자유‘가 그들에게는 하나가 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들의 순위에 적합한 영혼의 상태의 순위가 있다. 최고의 문제는 자신의 정신성의 높이와 힘으로 해결할 만한 준비가 미리 되어 있지 않은 채 그 문제들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을 사정없이 밀쳐버린다. 사물의 근원적인 법칙이 이미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은 자신의 출신 덕분이며 조상이나 혈통이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철학자가 태어나기 위해 많은 세대가 미리 기초작업을 했음이 틀림없다.

철학자의 덕은 모두, 즉 사상의 대담하고 경쾌하고 부드러운 발걸음과 진행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커다란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각오, 지배자적인 눈길과 내려다보는 눈길의 고귀함, 대중과 그들의 의무나 미덕에서 스스로 격리되어 있다는 감정, 신이든 악마든 오해받고 비방받는 사람들을 상냥하게 변호하는 것, 위대한 정의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 명령하는 기술, 의지의 폭넓음, 좀처럼 찬미하지 않고 우러러보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서서히 움직이는 눈 등은 하나하나 획득되고 보호되고 유전되고 동화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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