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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제3장 발제

마리주 2021.02.27 16:41 조회 수 : 40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2021.2.27.(토)

3장 종교적인 것

 

#1. (45)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2. (45)

 

지금까지의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3. (46)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4. (46)

 

어떤 유형의 인간 주변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불합리와 미신이 가득 차 무성했던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에게, 심지어는 철학자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어느 정도는 냉정해지고 신중함을 배우고 이를 더 잘 표현하다면, 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5. (47)

 

도대체 성자라는 전체 현상의 어떤 점이 모든 유형의 인간과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또한 철학자에게 그렇게 엄청난 관심을 갖게 했는지를 사람들은 자문하게 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 성자에게 뒤따르는 기적의 외관 때문이다. 즉 그에 따라붙는 직접적인 연속되는 모순이라는 외관, 도덕적으로 반대의 평가를 받는 영혼의 여러 상태가 직접적으로 연속되는 외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악한 인간’이 갑자기 ‘성자’가 되고 선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게 된다. 종래의 심리학은 이러한 지점에서 난파했다: 종래의심리학이 도덕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도덕적인 가치의 대립 자체를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을 원전과 사실 안에 넣고 보았으며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뭐라고? ‘기적’은 해석의 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문헌학의 결함 탓인가?

 

#6. (53)

 

왜 오늘날 무신론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아버지’ 신은 근본적으로 거부되었고, 마찬가지로 ‘심판자’, ‘보상자’도 거부되었다. 신의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설령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인간을 도울 수 없다. 가장 나쁜 것은 그가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모호한 존재인가? 이것이 내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묻고 경청하면서 유럽 유신론이 몰락한 원인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7. (54)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는, 반 그리스도적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관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이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8. (55)

 

희생을 바칠 만한 극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사람들은 결국 한번은 숨겨진 조화나 미래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모든 위안을 주는 것, 신성한 것, 치료하는 것, 모든 희망고가 모든 믿음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신 자체를 희생으로 바치고 자신에 대한 잔인함에서 돌과 어리석음, 중력, 운명, 허무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허무를 위해 신을 희생으로 삼는다는 것 – 마지막 잔인함이 이러한 역설적인 신비는 이제 막 나타나고 있는 세대를 위해 남겨졌다: 우리는 모두 이미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다.

 

#9. (56)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의 속박이나 망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아마 이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즉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는 것과 타협하고 화합하는 법을 배워왔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렇게 존재했고, 현재도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다시 갖고자 하는 것이다.

 

#10. (59)

 

세계를 심층적으로 통찰한 사람은 아마 인간들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에 어떤 지혜가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에게 덧없고 경솔하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보존 본능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철학자에게서나 예술가에게서 정열적이고 과장된 ‘순수형식’에 대한 숭배를 발견한다: 이와 같이 피상적인 것에 대한 숭배가 필요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언젠가 그 피상적인 것 아래의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11. (60)

 

신을 위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도달한 가장 고귀하고 통례에서 벗어나 있는 감정이었다. 신성시하려는 숨은 의도가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음이나 동물성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이러한 인간애의 성향은 더욱 고차적인 성향에서 자신의 기준, 섬세함, 극히 소량의 소금과 아주 작은 용현향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또한 그가 어떤 인간이었어도, 그러한 섬세함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얼마나 자신의 혀를 많이 더듬거렸을 것인가. 그는 지금까지 가장 높이 날아갔으며, 가장 아름답게 길을 잃은 인간으로 어느 시대에나 우리에게 성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남게 된다!

 

#12. (61)

 

우리가 이해하는 철학자, 즉 우리 자유정신은- 인류의 총체적 발전에 양심을 지닌, 가장 포괄적인 책임을 진 인간이다: 이러한 철학자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이용하는 것처럼, 인류를 육성하는 사업과 교육 사업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게 된다. 종교의 도움 아래 이행될 수 있는 선택하고 육성하는 영향, 즉 항상 파괴적이고도 창조적이며 형성하는 영향을 종교의 속박과 보호 아래 놓이게 되는 인간의 종류에 따라 더욱 다층적이고 다양하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2021.2.27.(토)

 

3장 종교적인 것

 

#1. (45)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2. (45)

 

지금까지의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3. (46)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4. (46)

 

어떤 유형의 인간 주변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불합리와 미신이 가득 차 무성했던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에게, 심지어는 철학자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어느 정도는 냉정해지고 신중함을 배우고 이를 더 잘 표현하다면, 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5. (47)

 

도대체 성자라는 전체 현상의 어떤 점이 모든 유형의 인간과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또한 철학자에게 그렇게 엄청난 관심을 갖게 했는지를 사람들은 자문하게 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 성자에게 뒤따르는 기적의 외관 때문이다. 즉 그에 따라붙는 직접적인 연속되는 모순이라는 외관, 도덕적으로 반대의 평가를 받는 영혼의 여러 상태가 직접적으로 연속되는 외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악한 인간’이 갑자기 ‘성자’가 되고 선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게 된다. 종래의 심리학은 이러한 지점에서 난파했다: 종래의심리학이 도덕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도덕적인 가치의 대립 자체를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을 원전과 사실 안에 넣고 보았으며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뭐라고? ‘기적’은 해석의 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문헌학의 결함 탓인가?

 

#6. (53)

 

왜 오늘날 무신론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아버지’ 신은 근본적으로 거부되었고, 마찬가지로 ‘심판자’, ‘보상자’도 거부되었다. 신의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설령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인간을 도울 수 없다. 가장 나쁜 것은 그가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모호한 존재인가? 이것이 내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묻고 경청하면서 유럽 유신론이 몰락한 원인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7. (54)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는, 반 그리스도적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관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이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8. (55)

 

희생을 바칠 만한 극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사람들은 결국 한번은 숨겨진 조화나 미래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모든 위안을 주는 것, 신성한 것, 치료하는 것, 모든 희망고가 모든 믿음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신 자체를 희생으로 바치고 자신에 대한 잔인함에서 돌과 어리석음, 중력, 운명, 허무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허무를 위해 신을 희생으로 삼는다는 것 – 마지막 잔인함이 이러한 역설적인 신비는 이제 막 나타나고 있는 세대를 위해 남겨졌다: 우리는 모두 이미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다.

 

#9. (56)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의 속박이나 망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아마 이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즉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는 것과 타협하고 화합하는 법을 배워왔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렇게 존재했고, 현재도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다시 갖고자 하는 것이다.

 

#10. (59)

 

세계를 심층적으로 통찰한 사람은 아마 인간들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에 어떤 지혜가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에게 덧없고 경솔하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보존 본능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철학자에게서나 예술가에게서 정열적이고 과장된 ‘순수형식’에 대한 숭배를 발견한다: 이와 같이 피상적인 것에 대한 숭배가 필요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언젠가 그 피상적인 것 아래의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11. (60)

 

신을 위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도달한 가장 고귀하고 통례에서 벗어나 있는 감정이었다. 신성시하려는 숨은 의도가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음이나 동물성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이러한 인간애의 성향은 더욱 고차적인 성향에서 자신의 기준, 섬세함, 극히 소량의 소금과 아주 작은 용현향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또한 그가 어떤 인간이었어도, 그러한 섬세함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얼마나 자신의 혀를 많이 더듬거렸을 것인가. 그는 지금까지 가장 높이 날아갔으며, 가장 아름답게 길을 잃은 인간으로 어느 시대에나 우리에게 성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남게 된다!

 

#12. (61)

 

우리가 이해하는 철학자, 즉 우리 자유정신은- 인류의 총체적 발전에 양심을 지닌, 가장 포괄적인 책임을 진 인간이다: 이러한 철학자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이용하는 것처럼, 인류를 육성하는 사업과 교육 사업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게 된다. 종교의 도움 아래 이행될 수 있는 선택하고 육성하는 영향, 즉 항상 파괴적이고도 창조적이며 형성하는 영향을 종교의 속박과 보호 아래 놓이게 되는 인간의 종류에 따라 더욱 다층적이고 다양하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2021.2.27.(토)

 

3장 종교적인 것

 

#1. (45)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2. (45)

 

지금까지의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3. (46)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4. (46)

 

어떤 유형의 인간 주변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불합리와 미신이 가득 차 무성했던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에게, 심지어는 철학자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어느 정도는 냉정해지고 신중함을 배우고 이를 더 잘 표현하다면, 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5. (47)

 

도대체 성자라는 전체 현상의 어떤 점이 모든 유형의 인간과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또한 철학자에게 그렇게 엄청난 관심을 갖게 했는지를 사람들은 자문하게 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 성자에게 뒤따르는 기적의 외관 때문이다. 즉 그에 따라붙는 직접적인 연속되는 모순이라는 외관, 도덕적으로 반대의 평가를 받는 영혼의 여러 상태가 직접적으로 연속되는 외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악한 인간’이 갑자기 ‘성자’가 되고 선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게 된다. 종래의 심리학은 이러한 지점에서 난파했다: 종래의심리학이 도덕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도덕적인 가치의 대립 자체를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을 원전과 사실 안에 넣고 보았으며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뭐라고? ‘기적’은 해석의 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문헌학의 결함 탓인가?

 

#6. (53)

 

왜 오늘날 무신론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아버지’ 신은 근본적으로 거부되었고, 마찬가지로 ‘심판자’, ‘보상자’도 거부되었다. 신의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설령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인간을 도울 수 없다. 가장 나쁜 것은 그가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모호한 존재인가? 이것이 내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묻고 경청하면서 유럽 유신론이 몰락한 원인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7. (54)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는, 반 그리스도적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관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이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8. (55)

 

희생을 바칠 만한 극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사람들은 결국 한번은 숨겨진 조화나 미래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모든 위안을 주는 것, 신성한 것, 치료하는 것, 모든 희망고가 모든 믿음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신 자체를 희생으로 바치고 자신에 대한 잔인함에서 돌과 어리석음, 중력, 운명, 허무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허무를 위해 신을 희생으로 삼는다는 것 – 마지막 잔인함이 이러한 역설적인 신비는 이제 막 나타나고 있는 세대를 위해 남겨졌다: 우리는 모두 이미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다.

 

#9. (56)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의 속박이나 망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아마 이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즉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는 것과 타협하고 화합하는 법을 배워왔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렇게 존재했고, 현재도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다시 갖고자 하는 것이다.

 

#10. (59)

 

세계를 심층적으로 통찰한 사람은 아마 인간들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에 어떤 지혜가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에게 덧없고 경솔하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보존 본능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철학자에게서나 예술가에게서 정열적이고 과장된 ‘순수형식’에 대한 숭배를 발견한다: 이와 같이 피상적인 것에 대한 숭배가 필요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언젠가 그 피상적인 것 아래의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11. (60)

 

신을 위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도달한 가장 고귀하고 통례에서 벗어나 있는 감정이었다. 신성시하려는 숨은 의도가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음이나 동물성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이러한 인간애의 성향은 더욱 고차적인 성향에서 자신의 기준, 섬세함, 극히 소량의 소금과 아주 작은 용현향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또한 그가 어떤 인간이었어도, 그러한 섬세함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얼마나 자신의 혀를 많이 더듬거렸을 것인가. 그는 지금까지 가장 높이 날아갔으며, 가장 아름답게 길을 잃은 인간으로 어느 시대에나 우리에게 성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남게 된다!

 

#12. (61)

 

우리가 이해하는 철학자, 즉 우리 자유정신은- 인류의 총체적 발전에 양심을 지닌, 가장 포괄적인 책임을 진 인간이다: 이러한 철학자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이용하는 것처럼, 인류를 육성하는 사업과 교육 사업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게 된다. 종교의 도움 아래 이행될 수 있는 선택하고 육성하는 영향, 즉 항상 파괴적이고도 창조적이며 형성하는 영향을 종교의 속박과 보호 아래 놓이게 되는 인간의 종류에 따라 더욱 다층적이고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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