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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상징 [들뢰즈의 니체] *니체의 perspectivism

아폴론과의 관련성 ···········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 양자의 화해(비극적인 것)

소크라테스와 반대 ···········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 양자의 대립(변증법)

그리스도와 대립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 양자의 모순(종교)

아리아드네에 대한 보충 ···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 양자의 상보성(디오니소스 찬가)

차라투스트라와 근친 ········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 : 양자의 근친성(시련)

 

상징① 디오니소스적 비극성 :: 니체/아리스토텔레스/쇼펜하우어의 비극개념

(디오니소스적 비극성) 그 안에서는 고통마저도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는 넘쳐흐르는 삶과 힘의 느낌으로서의 주신제의 심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특히 우리의 염세주의자들도 오해했던 비극적 감정이라는 개념을 이해 할 열쇠를 내게 주었다. [⋯] 자신의 최고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비극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파악했다. [⋯]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자체이기 위해서 ―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도 역시 내포하고 있는 기쁨이기 위해서......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성)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나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를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 (쇼펜하우어의 비극성) 비극은 쇼펜하우어가 의미했던 헬레네인들의 염세주의를 입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비극은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와 반대절차로 간주되어야 한다.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 안에도 놓여있는 것이다. ‘비극적’이란 개념과 비극의 심리학에 대한 인식. <우상의 황혼> 내가 옛사람의 덕을 보고 있는 것 #5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은 삶에 위험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비극은 예술의 자기부정이 되는 한, 예술이 구상되는 셈이다. 그때 비극은 삶의 본능이 예술 자체의 본능 속에서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교, 니힐리즘, 비극적 예술은 생리학적 데카당스다. 서로 쇠퇴시키고 비극은 타락의 증후라는 셈이다. 이 점을 논박할 수 있는데, 역량계의 힘을 빌어, 비극적 정서가 야기하는 결과를 측정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알게 되는 것은 비극은 하나의 강장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일반적인 우울을 비극적 상태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편견 때문이고, 자기 철학 체계의 일관성(*염세주의 철학)을 지킬 필요성 때문이고, 체계주의자의 불성실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 #851

"모든 예술, 모든 철학은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삶의 치유수단이나 보조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 하나는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을 원한다.  / 또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 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삶 자체에 대한 보복, 이것은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걸맞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 삶을 비방하며, 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니체 대 바그너> '우리 대척자들’

 

상징②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박힌 자

비극적 인간(디오니소스적 인간) 가장 쓴 고통도 긍정하는데, 그는 충분히 강하고 충만하며 신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하는데, 그는 삶 때문에 고통받을 만큼 약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은 삶에 대한 저주이며, 그의 죽음은 삶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표시이다. 반면 토막으로 잘린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며,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되돌아온다.” <유고(1888초~1889.1월초)>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인 면(유전과 파괴에 대한 긍정, 대립과 싸움에 대한 긍정, 생성, 존재 개념에 대한 거부까지)”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 비극의 탄생#3

“나는 파괴의 즐거움을 내 파괴력이 상당하는 정도만큼 알고 있다. ...... 나는 부정하는 행위긍정의 말에서 분리시킬 줄 모르는 내 디오니소스적 본성에 복종한다.” <이 사람을 보라>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2

 

상징③ 다수성에 대한 긍정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기는 죽음)

“디오니소스는 나타나는 모든 것(가장 모진 고통조차)을 긍정하고, 긍정된 모든 것 속에 나타난다. 다수의 긍정ㆍ복수적 긍정은 바로 비극의 본질이다. 거기에서 복수주의의 노력과 천재성, 변신의 능력,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이 필요하다. 니체의 저작 속에서 불안ㆍ혐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다. 모든 것이 긍정의 대상=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은 자신이 긍정되고 부정이길 중단하는 특별한 수단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비극은 그런 불안혐오나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긍정 그 자체의 복수성다수성에서만 존재한다. / 비극을 정의하자면, 비극은 다수의 기쁨ㆍ복수적 기쁨이다. ...... 비극은 부정과 삶의 관계에 기초하지 않고, 기쁨과 다수, 긍정적인 것과 다수, 긍정과 다수의 본질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니체와 철학> 1장 비극, 8.비극의 본질

 

상징④ 그리스비극 (아폴론적 꿈과 디오니소스적 도취: 비극적인 것)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만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직관하게 된다면 미학에 큰 소득이 될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 적인 것이라는 위의 명칭들을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서 빌렸다. ...... 그리스세계에서는 조형예술가의 예술인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조형적 음악예술이 기원과 목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다. ...... 이 두 개의 충동들은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서로가 더 새롭고 힘있는 탄생물들을 낳도록 자극하면서 평행선을 이루어 나간다. 이러한 탄생물들 속에서 저 대립의 투쟁은 영원히 계속되며, ‘예술’이라는 공통의 단어가 이러한 대립을 단지 외견상으로만 연결시켜 줄 뿐이다. ...... / 그 두 충동을 더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우선은 꿈과 도취라는 서로 분리된 예술세계로서 생각해보자. 이 두 생리학적 현상들 사이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 같은 것이 발견 된다. / 이러한 인식에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비극을 아폴론적 형상세계 속에서 항상 새롭게 거듭해서 자신을 방출하는 디오니소스적 합창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비극이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는 저 합창단이 연극 자체의 모태이다. ...... 비극의 이러한 근원적 근거는 연극의 저 환영을 방사한다. 이러한 환영은 전적으로 꿈의 현상이며 따라서 서사적 성격을 갖는다.(*플라톤적)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객관화로서, 가상 속에서의 아폴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정반대로 개체의 파괴와 개체의 근원적 존재와의 합일을 표현한다. 연극은 디오니소스적 인식과 활동의 아폴론적 구체화이다.” <비극의 탄생> 1장, 8장

니체는 우선 아폴론을 꿈에 의해 특징짓고 있다. 즉 꿈의 진리로서의 상징적 예언성, 꿈의 한계로서의 절도, 아름다운 가상으로서의 개별화의 원리다. 다음 디오니소스를 도취에 의해 특징짓고 있다. 도취의 진리로서의 과도함, 원초적인 근원 속으로 개체의 해체(용해)다.

아폴론적 도취는 무엇보다도 눈을 자극시켜 환영을 보는 능력을 얻게 한다. 화가, 조각가, 서사시인은 환영을 보는 자들의 전형이다. [...]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는 그 반대로 아펙트의 체계 전체가 자극되고 고조된다 : 그래서 그 상태는 모든 종류의 표현수단을 한꺼번에 분출시키고, 재현과 모방과 변형과 변화의 능력, 모든 종류의 흉내와 연기를 동시에 내몰아댄다. 그 상태에서 본질적인 것은 능숙한 변신, 반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능력이다. 어떤 종류의 암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는 격정의 어떤 신호도 간과하지 않으며, 그가 최고단계의 전달기술을 갖고 있듯이,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데서도 최고단계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피부와 모든 격정의 내부로 들어간다 :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변모시킨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10

 

상징⑤ 여러 상징들

니체가 발견한 사랑의 도식 (아리아드네-테세우스-디오니소스 3항의 사랑의 도식) :: 니체는 아리아드네-테세우스-디오니소스의 3항으로 연결된 ‘사랑의 도식’을 코지마–바그너-니체로 변형시키다.

아리아드네의 실

아리아드네의 귀 :: "현명해라, 아리아드네! ...... 너는 작은 귀를 가졌으며, 너는 내 귀를 갖고 있느니" <디오니소스 송가> '아리아드네의 탄식' 미로의 상징

아리아드네의 왕관 ::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를 하늘로 인도한다. 아리아드네의 왕관의 보석들은 별이다. 바로 그것이 아리아드네의 비밀인가? 그 유명한 주사위 던지기에서 솟아나온 성좌인가> 주사위를 던진 자는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바로 그는 춤추고 변신하고, ‘폴리게츠 Polygethes’ 즉 무수한 기쁨들의 신으로 불린다.” <니체와 철학> 1장 비극, 8.비극의 본질

포도주의 신 (술과 축제의 신)

 


1. 죽음과 부활의 신 :: 디오니소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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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국립고고학박물관, 디오니소스의 탄생, 기원전 405-385>

[1-1] 두 번 태어난 자, 갈기갈기 찢긴 자 (파괴와 생성, 다수성의 긍정)

디오니소스의 탄생에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니체철학의 디오니소스는 갈기갈기 찢긴 자, 두 번 태어난 자의 상징이다. 고대그리스의 오르페우스교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지하세계의 여왕)의 아들이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인데, 제우스는 뱀의 모습으로 페르세포네에게 접근해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Zagreus, 위대한 사냥꾼)를 낳는다. 제우스가 자그레우스를 총애하여 통치권을 물려주려고 하자, 헤라가 거인족 티탄들에게 ‘자그레우스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거인족 티탄들을 피해 어린 자그레우스는 사자, 호랑이, 뱀, 황소 등의 모습으로 변신해 도망치려고 했지만 잡히고 만다. 티탄들은 자그레우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죽인 후 먹어치운다. 여기서 디오니스소가 ‘갈기갈기 찢긴 신’으로 불리게 된다. 다행히 아테나가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수습해 제우스에게 건네주었고, 제우스는 그 심장을 자기 허벅지에서 넣고 키운다. 이윽고 산달이 차자 아기를 허벅지에서 꺼내는데, 그 아기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에게 붙은 많은 별명은 이러한 탄생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Dio)-태어난 자(nysos)를 뜻하는 디오니소스(Dio-nysos)를 비롯하여, ‘어머니가 둘인 자’라는 디오메토르(Dio-metor)는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와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말한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네가 태어나듯,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다. 또한 ‘두 개의 문을 거친 자’라는 디티람보스(Dithyrambos) 역시 두 번 자궁 문을 열고 나온 자라는 뜻으로, 어머지의 자궁과 아버지의 허벅지를 말한다.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인 디오니소스 송가(Dionysos-Dithyramben)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1-2]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

디오니소스의 탄생에 대한 또 다른 전승이 있다. 제우스는 테베의 공주 세멜레(테베의 왕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여신의 딸)를 사랑하고, 세멜레는 디오니소스를 잉태한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사이를 질투한 헤라는 세멜레의 유모 베로에로 변장한다. “그분이 진짜 제우스라면,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가 스틱스강에 맹세하면,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제우스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번개의 신으로, 항상 변장한 모습으로 세멜레를 찾아왔던 것. 그러나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절대 어겨서 안되는 스틱강의 맹세로 약속을 받아냈다. 제우스는 번민에 빠졌다. 제우스의 본모습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던가. 어째서 스틱스강의 맹세까지 했을까. 후회와 고민 끝에 제우스가 번개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세멜레는 제우스가 뿜어내는 빛과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새까맣게 타죽고 만다. 제우스는 비통했지만, 이내 슬픔을 삼키고 세멜레의 배에서 7개월 된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키웠다. 이윽고 산달이 차자 아기를 허벅지에서 꺼내는데, 그 아기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1-3] 암펠로스와의 사랑, 포도주의 기원

제우스는 헤라의 분노를 피해 디오니소스를 니사산의 님프들 손에서 자라게 하는데, 그래서 니세우스(Nýseus, 니사에서 자란 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 디오니소스가 실레노스(Silenus, 반인반수의 요정, 사티로스의 아버지)에게 길러져,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설도 있다. 실레노스는 딸기코에 머리에 포도덩굴을 이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디오니소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 디오니소스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실레노스는 지혜로운 노인이지만, 술주정뱅이 고주망태로 항상 술에 취해 있다.

한편 성장한 디오니소스는 님프와 사티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미소년 암펠로스와 사랑에 빠졌으다. 암펠로스가 사고로 죽자, 슬픔에 잠긴 디오니소스는 야생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그의 무덤가에 꽂았다. 다음 날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리더니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지금도 ‘암펠로스’(Ampelos)는 그리스어로 포도나무를 뜻한다. 디오니소스는 어느 날 전날 따놓은 포도에서 나온 쌉쌀한 묘한 액체를 마시고 마법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디오니소스는 암펠로스 무덤에서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니사산 곳곳에 심고는, 사티로스와 함께 포도나무 재배법과 양조법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디오니소스는 이들과 함께 소아시아를 넘어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가는 곳곳에 포도나무 재배법과 포도주 양조법을 전파하며 신앙을 퍼뜨렸다. 인도에 간 지 3년 만에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트리기아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로마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를 포도주의 신 바쿠스(Bacchus, 포도나무 싹을 뜻하는 바코스Bacchos에서 유래)로 부른다. 또한 디오니소스가 술에 의한 광란과 도취의 신이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니사산 주변에는 나중에 마이나데스 혹은 바카라 불리게 되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사티로스들과 어울려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 “이오바코스(Iobacchos)!”라고 외치며 디오니소스를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으로 추앙했다. 그들이 행한 의식은 훗날 디오니소스(바쿠스) 축제로 이어졌고 그리스비극으로 상연되었으며 연극의 기원이 되었다.

 

[2]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 그리고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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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chus and Ariadne by Turchi Alessandro>

[2-1] 미노타우로스, 황소괴물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포세이돈(바다의 신)으로부터 지원의 증표로 흰 소를 받았다. 그러나 멋진 소가 탐이 난 미노스왕은 그것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대신 자신의 가축으로 삼았다. 그러자 이를 괘씸히 여긴 포세이돈은 저주를 내려 왕비 파시파에가 흰 소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왕비는 반인반우의 괴물을 낳게 되었다. 그 괴물이 바로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을 가진 미노타우로스이다.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 발굽과 꼬리를 가진 황소괴물.

미노스왕은 다이달로스를 시켜 미궁(라비린토스)을 지어 괴물을 가두고, 크레타의 속국인 아테네로부터 처녀총각들을 조공받아 괴물의 먹이로 쓰고 있었다. 이에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인질들 틈에 섞여 크레타섬으로 들어온다. 한편 늠름하고 아름다운 청년 테세우스에게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왕비 파시파에의 딸)가 첫눈에 반한다.

[2-2] 아리아드네의 실, 아리아드네의 귀(미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괴물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라비린토스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미궁을 설계한 다이달로스에게 도움을 청하자,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타래를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실을 미궁 입구에 묶고 천천히 풀면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세요. 괴물을 죽인 다음에는 실을 따라 다시 나오면 됩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주면서 말한다. “아무 조건은 없어요. 나를 아테네로 데려가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해주세요.”

테세우스는 일행에 앞장서 실을 풀면서 미궁 안으로 들어가, 이윽고 미궁 깊숙한 곳에서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치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모습에 모두 겁을 먹고 뒷걸음치는 가운데, 테세우스는 혼자서 용감하게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고 다시 실을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나온다. 이렇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이고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한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온다. 바로 여기서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어려운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뜻이다.

[2-3] 낙소스에 버려진 아리아드네

테세우스는 항구에 정박해있는 크레타의 모든 배 밑에 구멍을 뚫어놓고, 크레타를 탈출하여 아테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테세우스는 약속한 대로 아리아드네를 함께 데려갔고,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와 조국을 등지고 사랑하는 테세우스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아테네로 갈 운명이 아니었다. 아테네를 향하던 테세우스의 배는 식수를 조달하기 위해 잠시 낙소스섬에 들르게 되는데, 테세우스는 잠든 아리아드네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테세우스가 왜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떠났는지는 불분명하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가면 나쁜 일이 생길 거라는 아테나의 신탁을 듣고 테세우스가 그녀를 버렸다는 설, 테세우스가 낙소스섬에 잠깐 쉬다가 그만 깜빡하고 놓고 가버렸다는 설도 있다. 한편,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납치했다거나 테세우스에게서 강제로 빼앗았다는 설도 있고, 디오니소스의 명령에 따라 테세우스가 할 수 없이 아리아드네를 두고 갔다는 설도 있다. 이 밖에 크레타에서 함께 데리고 온 아리아드네의 여동생 파이드라(페드라)와 사랑에 빠져 아리아드네를 배신했다는 설도 있는데,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파이드라와 결혼한다.

[2-4] 하늘의 별자리가 된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의 왕관)

그 다음의 행적은 알려진 대로, 디오니소스가 나타나 깊은 슬픔에 젖어있는 아리아드네를 위로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디오니소스는 왜 아리아드네를 택했을까? 아리아드네는 어떻게 디오니소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완벽한 슬픔은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비극적 아름다움! 그것은 아마도 완벽하게 버림받은 그녀의 슬픔, 고통과 좌절 그 자체일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헤파이스토스(대장간의 신)에게 부탁하여 아홉 개의 루비로 만든 왕관을 아리아드네에게 선물했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는 12명의 자식을 낳았다. 아리아드네가 죽자 디오니소스는 결혼선물로 준 아리아드네의 왕관을 하늘로 던졌는데, 별자리 왕관자리가 되었다.

 

[3] 잔혹과 쾌락이 공존하는 도취와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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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들 펜테우스를 찢어죽이는 아가베와 마이나데스. 기원전 450-425년경>

[3-1] 디오니소스 신화 ::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외

디오니소스는 술과 축제의 신으로 인간들에게 포도주로 즐거움과 시름을 덜어 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를 박해하거나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복수를 서슴치 않는다.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신화들은 유독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해 박해하는 신화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펜테우스 신화, 리쿠르고스 신화, 아르고스 신화 등이 있다. 이는 디오니소스가 외부에서 들어온 신이어서 올림포스에서 침입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서는 소아시아의 니사산에서 자란 디오니소스가 사람들에게 포도생산법과 포도주제조법 전수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면서 고향인 그리스의 테베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박해와 극복과정을 그리고 있다.

펜테우스 신화 ::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디오니소스를 박해하다가 파멸을 맞은 펜테우스의 이야기가 있다. 디오니소스가 고향 테베로 돌아오자 남녀노소 뛰어나와 그를 환영하지만,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과 절제의 왕 펜테우스는 도취와 광기의 전도사 디오니소스와 신도들을 박해한다. 디오니소스와 여신도들은 펜테우스의 어머니 아가베를 광기에 빠뜨려 잔인하게 복수한다.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이 행하는 신성한 의식에서 광란에 휩싸인 아가베는 아들 펜테우스를 들판의 멧돼지로 착각하고, 두 명의 자매가 펜테우스의 사지를 잡아뜯고 자신은 머리를 뽑아 죽인다.

리쿠르고스 신화 ::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에 따르면,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도 디오니소스를 박해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리쿠르고스는 계집애 같다며 디오니소스를 모욕하고 배척한다. 디오니소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게 피신을 하고, 여신도들과 사티로스들은 포로가 된다. 분노한 디오니소스는 리쿠르고스에게 광기를 불어넣는다. 미쳐버린 리쿠르고스는 아들을 포도나무 가지로 착각하고 도끼를 휘둘러 아들의 사지를 절단해 죽이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디오니소스는 광기의 신답게 리쿠르고스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데, 리쿠르고스의 땅에 저주를 내려 땅에서 어떤 수확도 거두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리쿠르고스를 죽여야 대지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리쿠르고스는 백성들에 잡혀 사나운 야생마들에 갈기갈기 찢겨죽는다.

아르고스 신화 :: 비블리오테케 디오니소스의 자주받은 아르고스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르고스인들이 자신을 믿지 않고 박해하자, 디오니소스는 그곳의 남자들을 불구자로 만들거나 질병으로 죽게 만들고 여자들은 미치게 한다. 광기에 빠진 여자들은 자신의 갓난아이를 산으로 데려가 토막내 먹어치웠다고 한다.

[3-2] 디오니소스 신앙 ::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신앙은 희망없이 살아가던 하층민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남자보다 천대받던 여자들에게서 널리 퍼졌다. 초창기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던 신도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는데,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노예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디오니소스를 삶의 은인으로 여기고 열렬히 추종했다. 이들 여성광신도들을 바카(bacca, 바코스의 신녀) 혹은 마이나데스(Mainades, 미친 여자들)라고 불렀는데, 마이나데스(Mainades)는 광기를 뜻하는 매드니스(madness)의 어원이 되었다. (디오니소스의 별명 ‘브로미오스’ 역시 ‘미쳐 날뛰는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또 술을 마시고 도취의 상태에서 야간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횃불과 디오니소스의 지팡이 티르소스를 광적으로 흔들고 팀파논이라는 작은 북을 열정적으로 쳐댄다. 이어 마음속의 모든 한을 토해내듯 발악을 하고 광란의 춤을 춘다. 극단적인 광기의 폭발이었다.

이 바카들이 신들린 상태에서 내뿜는 광기가 공포와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바카들은 한 번 술에 취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 횃불을 켜고 산이나 숲을 배회하며 마주치는 것은 모두 찢어 죽였다. 광기와 이성 사이를 넘나드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이국적으로 여겨졌듯(실제로 와인 자체가 레반트지방에서 제조법이 전래된, 그리스 입장에서는 이국의 술이었다), 여성의 지위가 극도로 낮았던 그리스에서 광기와 폭력으로 무장한 여성 광신도들은 이국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비춰졌다.

마이나데스는 축제의 막바지에 이르러 황홀경에 빠져서, 대지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을 보게 되고 산 짐승을 갈기갈기 찢어 미친 듯이 살과 피를 먹어치운다. 때로는 소년이 제물로 바쳐지기도 한다. 그러고는 무아경의 절정에서 탈진할 때까지 춤을 추다가 쓰러진다. 이들이 맛보려는 것은 죽음이요, 한계의 넘어섬이다. 죽음은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개체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자연의 도도한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창조와 영원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로마공화정 말기, 트라키아의 왕자 출신의 검투사 노예로서 검투사들을 이끌고 로마에 대항하여 노예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아내가 디오니소스 신녀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스로마 말기에 이르면 열광적인 디오니소스 신자들은 ‘제우스가 디오니소스에게 신의 왕좌를 물려줬다’고 믿었다. 오르페우스교에서는 ‘디오니소스를 마지막으로 신들의 지배가 끝날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4] 그리스비극 ::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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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 과 <디오니소스>

[4-1] 그리스비극과 디오니소스 축제

광기와 폭력의 광신도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에, 그리스문명은 디오니소스 신앙을 체재 내로 편입시키려고 한다. 디오니소스를 아폴론신전 옆에 모시고, 2년에 한번씩 축제를 벌이는 형태로 받아들인다. 광기 역시 맹목적인 것이 아닌 정상적인 노동으로 회귀하기 위한 질서의 파괴로 포섭한다. 이로부터 그리스의 평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게 되어, 디오니소스의 위치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디오니소스가 헤스티아에게서 12신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전승도 이때쯤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그리스인들이 숭배하는 대표적인 신은 이성과 절제의 신 아폴론이었다. 도취와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신이었으며, 더구나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특이한 신분 탓에 가장 늦게 올림포스 12신의 반열에 오른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마찬가지로 예언과 치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인간의 미래를 예언하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함께 델피신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3월부터 10월까지의 델피신전의 주인은 아폴론이고, 이후 아폴론이 델피에서 잠시 떠나는 11월부터 2월까지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신전에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축제인 디오뉘시아 제전은 그리스 최대의 희극ㆍ비극 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한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였던 사티로스(Satyros, 반인반수, 숲의 정령, 실레노스의 아들)에서 나온 염소의 노래를 뜻하는 ‘트라고디아 Tragodia’는 비극을 뜻하는 영어 ‘tragedy’의 어원이 되었다. 고대 크레타에서는 디오니소스와 아내 아리아드네를 기리기 위해 남성들이 여장을, 여성들이 남장을 하며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디오니소스를 열렬하게 떠받치는 여성 광신도들이 남장을 하며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4-2] 디오니소스적 광기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개체가 해체되고 전체에 흡수된 채, 모두가 하나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광기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뜻하는 바는 단지 도취에 빠져 동물적 본능이나 분출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광기는 일상과 상식의 장막을 걷어내고 망아의 상태로 돌아간 뒤, 그 정점에서 모든 의식과 인식의 한계를 벗어버리게 한다. 자신을 에워싸고 구속하는 모든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형식과 틀을 거부하는 디오니소스의 광기는 해체의지요, 자유의지다. 그것은 이성이 만든 틀을 깨고 무한과 극한의 세계로 휘몰아치는 삶의 의지이다.

ㄸ라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마력 아래서는 개인과 개인 간의 벽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간의 벽 또한 허물어지고 서로 화해하는 대향연이 일어난다.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부터 공포와 전율이 환희에 넘치는 엑스터시와 함께 솟아오른다. 이제 인간은 개체들 사이에 놓인 모든 제한성이 파괴되어 대자연의 흐름에 동참한다. 인간 스스로가 자연이 되는 것이다.

[4-3]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그리스비극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광기 사이의 긴장ㆍ대립의 지배를 받는다. 이성이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순간 저 밑바닥에서는 광기가 꿈틀거리고, 광기가 뜨겁게 폭발하는 순간 어느덧 이성이 가까이 다가와 차가운 물을 퍼붓는다. 따라서 아폴론적 이성은 우리에게 안전한 보호막을 형성해 줄 수도 있지만 약동하는 생명력을 앗아갈 수도 있다. 이럴 때 인간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의 창조적 광기가 필요하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보호막을 확 찢어버리고 시들어 가는 육체에 원초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쏟아붓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태양의 신 아폴론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신이다. 아폴론의 이성은 조형의지다. 그것은 일정한 형식과 틀을 형성하고 과도함을 거부한다. 무엇이든 너무 넘쳐서도 안 되고 너무 부족해서도 안 된다. 아폴론의 이성은 항상 절제된 세계를 지향한다. 이에 비해 디오니소스의 창조적 광기는 해체의지요, 자유의지다. 그것은 아폴론의 이성이 형성한 형식과 틀을 깨뜨리고 찢어 버린다. 무한과 극한의 세계로 휘몰아친다. 아폴론의 이성이 빠져들 수 있는 박제화와 도식화를 과감하게 무너뜨린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조형예술로 대표되는 아폴론적 예술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대립ㆍ투쟁, 균형ㆍ조화 속에서 예술의 정수인 그리스비극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비극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예술충동이 다투는 듯 화합하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폴론의 정연한 꿈디오니소스의 근원적 도취가 합쳐져서 비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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