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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이 사람을 보라]① :: 2020.11.16(월)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결산하는 작품인 [니체전집15] 가운데,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는 성숙기-니체를 대표하는 단편이다. 이 텍스트를 통해 니체는 위대한 긍정의 정신을 보이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 텍스트 구성

부제 :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_니체의 자기 특이성 :: 데카당스 전문가, 가치전환 자, 건강한 자 - 니체 / 동정, 보복, 원한, 싸움, 잡것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 (.....한 자로서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_철학자 니체의 섭생법 :: 영양섭취의 선택, 풍토와 장소의 선택, 휴양을 취하는 방식 (..... 에 있어서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작품을 쓰는지'_자기 작품에 대한 해설서 :: 작품의 시대적 배경, 작품에 포함된 자기 한계와 철학적 성과 (..... 이런 작품의 작가로서 '나는 왜이렇게 좋은 작품을 쓰는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_자기운명에 대한 평가 :: 비도덕주의자로서 선한 인간ㆍ그리스도교 도덕을 파괴하는 다이너마이트 (로서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1. 니체가 이 책 [이 사람을 보라]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서문 > 내가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내 과제의 위대함과 동시대인의 비소함 사이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사람들은 내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았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의 신용(*신뢰, 믿음)에 의해서만 살아간다. ......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 ...... 우리는 금지된 것일수록 얻으려고 애쓴다. Nitimur in vetitum. 이런 표지 아래 나의 철학은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진리만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포도가 갈색이... > 오늘 나는 마흔네번 째의 해를 묻어버려도 된다. 이 한 해 동안 생명을 받았던 것이 구원을 받았으며 영구적이 되었으니까. <모든 가치의 전도>(*안티크리스트), <디오니소스 송가>, 그리고 휴양을 위해 쓴 <우상의 황혼>이 모두 이 해의 마지막 석달간의 선물이다! 어찌 내가 나의 전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삶을 이야기한다.

 

===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 니체의 자기 특이성 ===

 

2. 니체에게 정신(철학)의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오류는 왜 맹목이 아니라, 비겁인가?

서문 > 우상(‘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의 파괴, 이것은 내 작업의 일부이다. 이상적 세계가 날조되었던 바로 그 정도만큼, 실재의 가치와 의미와 진실성은 사라져버렸다. 참된 세계가상 세계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날조된 세계와 실재. 이상이라는 거짓말은 이제껏 실재에 대한 저주였고 인류의 심층적인 본능마저도 부정직하고 그룻되게 만들어, 인류는 그들의 성장과 미래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 금지된 것들 사이에서 방랑했던 경험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화ㆍ이상화를 행했던 원인들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던 모습과는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② (가치기준: 진리와 오류)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이것이 나에게는 진정한 가치기준이 되었다. 오류(이상에 대한 믿음)는 맹목이 아니라, 비겁이다.

 

3.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신체와 정신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1, 2, 3)

4. '가치전환'이란 무엇이며, 왜 니체에게서만 가치전환이 가능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1, 2, 3)

나는 현명한지 #1 구성 >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의 계보: 이중혈통  /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의 계기: 정신의 완벽한 명석함 vs 신체의 과도한 고통: 양립 / 니체의 퍼스펙티비즘, 가치전환의 근거

#1. 니체의 퍼스펙티비즘 계보: 이중적 혈통 > 내 삶의 행복, 내 삶의 유일성은 내 삶의 숙명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로서는 이미 사망했고, 내 어머니로서는 아직도 살아서 늙어가고 있다. 이런 이중적 혈통(생명의 사다리에서 제일 꼭대기와 제일 밑바닥으로부터의 혈통)은 데카당이면서 동시에 시작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혈통은 중립성과 편파성(삶 전체를 편파적으로 보는)으로부터 해방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이중적 혈통은 나를 특징짓는 점이다. 나는 어떤 인간보다 상승과 하강에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이며, 나는 양편 모두를 알고 있고, 나 자신이 양편 모두이다.

#3. 니체의 퍼스펙티비즘 계보: 이중적 혈통 > 그런 아버지를 가졌던 큰 특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아버지의 설교를 들었던 농부들은 천사는 그 같은 모습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는 혈통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나는 나쁜 피는 한방울도 섞이지 않고 독일피는 거의 섞여있지 않은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 나와 철저하게 대립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스러운 본능을 찾아보면, 언제나 나는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한다. 이런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에 대한 하나의 불경이리라. ......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하는 강력한 표시이다. 

#1.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의 계기: 정신/신체 모순의 양립 > ① (<아침놀> 1881 출간) 제노바에서의 첫겨울인 그 다음 겨울, 피와 근육의 극심한 빈곤이 야기시킨 안락함과 정신화가 <아침놀>을 탄생시켰다. ② (정신/신체의 모순상태 양립) 이 작품에 반영된 내 정신의 완벽한 명철명랑풍부함마저도 내게서는 극도의 심적인 약함뿐 아니라 과도한 고통과도 양립할 수 있었다. 힘들게 위액을 토하게 하는 사흘동안 지속되던 편두통의 고문에 시달리는 와중에 나는 변증론자의 탁월한 명석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사물에 대해 냉정하게 숙고했다. 그보다 양호한 상태였더라면, 나는 그렇게 숙고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예리하지도 냉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변증법을 데카당스의 징후로 고찰했다. ③ (지성의 열광상태와 신경의 안정상태) 지성의 온갖 병적인 장해(심지어 열광을 수반하는 반마취 상태)는 나에게 낯설며 그런 상태의 본성ㆍ빈도에 대해서 나는 알아보았다. 나의 피는 서서히 흐른다. 어느 누구도 내게서 열광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를 오랫동안 신경질환자로 치료해왔던 의사는 결국 말하기를 “당신의 신경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신경과민이오.”

#2. 생명력에 따른······> 적합한 수단 > ① (건강한 존재에게······> 병든 것은 삶을 위한 자극제) 그(전형적인 건강한 존재)에게는 병들어있는 것이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이다. ② (생명력이 낮을 때······> 낙담의 철학 금지) 내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그 해에 나는 염세주의자를 그만두었다. 나의 자기 재건본능이 나에게 비참과 낙담의 철학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1. 니체의 퍼스펙티비즘, 가치전환의 근거 > 파악ㆍ이해에 있어서의 섬세한 세공술, 뉘앙스에 대한 감지력, ‘구석을-바라보는심리, 나를 특징짓는 그밖의 것들을, 나는 이때 배웠다. 그것들은 내게서 모든 관찰기관이 섬세하게 되었던 그때 내가 받았던 진정한 선물들이다. 병자의 광학으로부터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를 본다든지, 역으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확신으로부터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내려다본다는 것, 이것은 오랫동안 나의 연습이었고 진정한 경험이었다. 내가 대가가 되었다면, 바로 여기서다. 이제 나는 관점을 전환할 근거를 거지고 관점을 전환할 도구를 가지고 있다. 왜 오로지 나에게만 ‘가치전환’이 도대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왜이렇게 영리한지 #9. 가치전도를 위한 기술 > 가치전도라는 과제를 위해서는 한 개인의 능력보다 더많은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로를 교란시켜서 파괴시켜서도 안되는 능력들의 대립이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능력들의 서열, 거리, 적대시키지 않으면서도 분리하는 기술, 그 무엇도 섞지 않고, 그 무엇도 화해시키지 않음 / 거대한 다수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오스와는 반대되는 것. 이것은 내 본능의 전제조건이자 비밀스러운 작업이자 수안이었다. 내 본능의 고등한 보호책은 무엇이 내 안에서 자리고 있는지에 대해 내가 예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내 모든 능력이 갑자기 성숙하여 궁극적인 완성형태로 하루아침에 튀어나왔을 정도로 말이다.

 

5.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데카당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2)

나는 내 자신을 떠맡아, 내 스스로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전제조건은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전형적인 병든 존재는 건강해질 수 없고 스스로 건강하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전형적인 건강한 존재가 그 반대인 반면에 말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며, 이것이 자연상태이며 병든 상태는 반자연적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힘의 상승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자연상태이며 힘의 퇴화의지는 반자연적인 것태이다. 생명이 혹은 사람이 ’생명력의 쇠퇴와 본능의 타락‘을 '의지하는 힘'를 데카당스라고 한다.)

 

6. 제대로 잘된 인간(건강한 존재)과 데카당(병든 존재)은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2)

내가 데카당이라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기도 하다. 나의 증거는 다른 무엇보다 ‘내가 불행한 사태에 대해 항상 적합한 수단을 본능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데카당은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수단을 선택하는 반면에 말이다. ...... / 전형적인 병든 존재는 건강해질 수 없고 스스로 건강하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전형적인 건강한 존재가 그 반대인 반면에 말이다. 그(전형적인 건강한 존재)에게는 병들어있는 것이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이다. ...... / 그러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떤 점에서 ‘우리가 제대로 잘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가! 제대로 잘된 인간은 우리의 감각에 좋은 일을 한다. 그의 육체와 정신이 천성적으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동시에 좋은 냄새가 난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을 맛있게 느낀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의 만족감과 기쁨은 중지해버린다. (*데카당은 우리 감각에 나쁜 일을 한다. 그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맛있게 느낀다. 자신에게 유익한 한계를 넘어서 그의 만족감과 기쁨은 계속된다.) 그는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을 알아맞힐 수 있다. 그는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7. 니체의 이러한 긍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2, 4)

#4. 나로하여금 반감을 품게 만드는 기술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반감을 품지 않는다. ...... 누구든지 나쁜 경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마저도, 내 경험은 예외없이 그것들에 유리한 말을 한다. ...... 언제나 나는 우연히 발생하는 일을 잘 견대낼 수 있었다. ...... 나는 무례한 행위들을 겪어야 했지만 그 원인은 악의가 아니었으며, 내 삶에 폐를 끼친 것은 선의였고 이것에 대해 내가 불평해야 했을 것이다. 

#2. 그는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6. 내게 가장 의심스럽고도 가장 위험한 것마저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며, 또 그로 인해 더 강해지는 나이기에, 나는 바그너를 내 삶의 큰 은인이라고 부른다. 

 

8. 동정(연민)은 어째서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시험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4)

내 경험은 내게, 소위 말하는 '사심없는' 충동들이나, 충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이웃 사랑'을 불신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가 나약함이고, 자극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의 특수한 경우이다. 동정은 데카당에게만 덕의 일종이다. 나는 동정하는 자를 비난한다. 그들에게서는 수치심, 경이감, 거리를 느끼는 민감함이 사라졌다. 동정은 순식간에 천민냄새를 풍기고 무례한 태도와 혼동될 것이다. 위대한 운명에-상처입은 고독에-중대한 죄에 대한 특권에 동정의 손길이 뻗치게 되면, 그것은 즉시 파괴적이 된다. 동정을 극복하는 것이 고귀한 덕목의 하나이다.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유혹'으로, 엄청난 비탄의 소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들려오고, 동정이 최후의 죄처럼 그를 엄습하여 그에게 자신을 등지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동정을 극복하는 것, 자기 과제의 드높음을, 소위 사심없는 행동들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비천하고 단견적인 충동들로부터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치러야하는 마지막 시험일 것이며, 그의 힘에 대한 진정한 증거일 것이다.

 

9. 니체의 보복책: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자에게, 니체는 어떻게 보복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5)

① (어리석음을 따라잡는 현명함) 자기와 동등한 자들 사에에서 한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평등권' 개념처럼 '보복' 개념도 모르는 자들처럼, 내게 어떤 어리석음이 가해질 경우, 나는 대응책이나 방어책을 금지하며 보호책이나 '정당화'도 금지한다. 내 보복책은 어리석음을 따라잡을 수 있게 가능한 빨리 현명함이 어리석음의 뒤들 쫓아가게 하는 것이다. ...... 내게 나쁜 짓을 한번 해보면, 내가 그렇게 '보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즉시 '나쁜 짓을 하는 자'와 나쁜 행동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포착한다. ② (침묵보다 거칠음) 거친 말gröbste Wort, 거친 편지gröbste Brief가 침묵Schweigen보다 더 선의에 차있고 더 예의 바르다. 침묵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마음의 섬세함과 정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침묵은 하나의 반박이다. 깊이 삼켜버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쁜 성격을 만들고, 위를 상하게 한다. 침묵하는 자는 모두 소화불량증 환자이다. ...... 조야함 거칠음GrobheitGrobheit은 가장 인간적인 반박형식이며, 유약해진 현대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의 최고덕목이다. (ex. 영화 '파이트클럽') 충분히 풍요롭다면(*힘의 넘침) 부당함 잘못됨 자체가 행복이다. 

 

10. 무저항의 숙명론(러시아적 숙명론)은 어떤 점에서 원한에 대한 오직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6)

원한을 신체의 강함과 약함으로 체험한다는 것 > 원한에서 해방되고 원한의 진상을 규명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오랜 병에 대해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원한을 자기의 강함과 약함을 통해 체험해보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누군가 병들어있다는 것이나 약하다는 것을 반대한다면(*거부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치유본능(인간의 저항과 공격본능)이 쇠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 인간은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고 어떤 것도 잘 처리해내지 못하며, 어떤 것도 퇴치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인간과 사물은 집요하게 그에게 접근하고, 체험들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원한에 대한 치유책, 무저항의 숙명론 > ① (무저항의 숙명론: 원한에 대한 치유책) 병들어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 이(*원한이라는 병)에 대해 병자는 오직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숙명론(행군이 너무 혹독하면 결국 눈 위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군인의 무저항의 숙명론)이라고 부른다. 도대체가 더이상은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어느 것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느 것도 자기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도대체가 더이상은 반응하지 않는다. ② (무저항의 숙명론: 반응하지 않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얺는) 이런 숙명론이 늘상 죽음에의 용기는 아니며, 오히려 무저항-숙명론의 위대한 이성가장 치명적인 상황하에서 신진대사를 감소시켜 일종의 겨울잠을 자게 만드는 의지로서 삶을 유지하게 한다. (*무저항의 숙명론은 항상 죽음에의 용기가 아니라, 한편 삶에의 의지가 된다.) 몆추간이나 무덤 속에서 잠을 자는 회교 수도승처럼. 일단 반응을 하게 되면 너무 빨리 소모되기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③ (원한감정: 급격한 에너지 소모와 해로운 배설의 증가) 그리고 원한이라는 격정에 의해 사람들은 신속히 자신을 불살라버린다. 노여움, 병적인 예민함, 복수할 수 없는 무기력, 쾌락, 복수에 대한 갈망, 모든 의미의 독살. 이런 것은 소진되어버린 자에게는 확실히 불리한 반응양식이다. 이것은 신경에너지의 급격한 소모나 해로운 배설의 병적 증가를(위에서 답즘의 병적인 분비 등) 발생하게 한다.

원한의 극복은 강자의 증거 > ① (원한: 약자의 자연적 성항, 강자의 불필요한 감정) 원한은 병자에게 그 자체로 악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병자의 가장 자연적인 성향이기도 한다. 불교를 위생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불교의 효력과 원한에 대한 승리는 상호의존적으로, 불교는 영혼을 원한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회복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서는 종결되지 않고, 우호를 통해서 종결된다." 도덕이 아니라, 생리학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유약함에서 생겨나고 무엇보다도 약자 자신을 가장 해롭게 하는 원한은, 풍부한 본성의 소유자를 전제하는 다른 경우에서는 불필요한 감정이다. ② (원한의 극복: 강자의 증거) 원한의 감정을 극복한다는 것은 풍요로움에 대한 증거이다. 복수심과 뒷감정에 대한 투쟁과 '자유의지'설에 대한 투쟁까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투쟁은 한 경우일 뿐) 받아들인 내 철학의 진지함을 아는 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내가 실행할 때의 내 본능적 확실성을 바로 여기서(원한의 극복) 드러내는지를 말이다.

병자의 위대한 이성: 원한감정 vs 무저항의 숙명론 > ① (원한감정의 금지) 데카당스 시기를 겪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이(*원한) 내게 해롭기에 금했다. 삶이 다시 풍부해지고 충분히 긍지를 갖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원한) 내 밑에 있는 것이기에 금했다. ② (무저항의 숙명론 수용) 언젠가 우연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장소-집-사회 속에서 몇년간 끝질기게 버티고 있을 때, '러시아적 숙명론'이 내게 나타났다. 그런 우연한 것들을 바꿀 수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우연한 것들에 맞서 반항하는 것보다, 러시아적 숙명론이 더 나았다. 이런 숙명론에 처해있는 나를 방해하고 나를 강제로 깨우는 일을, 그 당시 나는 치명적으로 나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것은(*무저항의 숙명론에 처해있는 나를 깨우는 것)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했었다. 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런 상황들에서는 위대한 이성 그 자체이다.

 

11. 싸움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 니체의 싸움방식 (니체에게 싸움이란 무엇이고, 적수란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7)

싸움적수는 강함의 본성 > 나를 특징짓는 또하나의 것은 싸움인데, 나는 기질상 호전적이며,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이다. 적수라는 것은 강한 본성을 전제하며, 강한 본성에서만 가능하다. 적수는 저항을 필요로 하며, 저항을 찾는다. 복수심과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인 것처럼, 공격적 파토스(*싸움ㆍ적수)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는 복수욕이 있든데, 이것은 그녀가 약해서 그렇고, 그녀가 타자의 곤경에 민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적수는 힘을 측정하는 척도 > 공격자가 어떤 적수를 필요로 하는지는 그의 힘을 측정하는 척도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좀더 강력한 적수를 찾는데서(좀더 강력한 문제를 찾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제 쉬운 적수, 웬만한 문제는 나의 전의를 자극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문제들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그의 과제는 적수를 이기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전 역량과 싸움기술을 힘껏 발휘하는데(그래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적수=대등한 적수를 이겨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대등함은 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번째 전제.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명령을 하거나 어떤 것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면 싸움을 이루어질 수 없다. 

니체의 싸움방식 > 내 싸움방식은 4가지로 요약된다. ① 첫째, 나는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② 둘째, 나는 나를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일은 한번도 공공연하게 해본 적이 없다. ③ 셋째, 나는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개인을 (*특정한 시대나 문화적 성향을 보이게 하는)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다. 이 확대경(*개인)은 살금살금 기어다니면서 잘 잡히지 않는 비상사태를 보이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공격했는데, 정확히는 낡아빠진 책 한권이 독일적 '교양'에서 거둔 성공을 현장에서 급습했던 것이다. (*다비드 슈트라우스: [반시대적 고찰1]의 주요 공격대상 1870년대 독일문화와 교양을 대표하는 인물) 그래서 나는 바그너도 공격했는데, 정확히는 교활한 자를 풍요로운 자로, 뒤처진 자를 위대한 자로 혼동하는 우리 '문명'의 허위와 본능의 불완전함을 공격했다. ④ 넷째, 온갖 개인적 차이가 배제되고, 배후에서 나쁜 경험을 할 것이 없는 자만을 공격한다. 내게서 공격이란 거꾸로 호의에 대한 증거이며, 경우에 따라 감사함에 대한 증거이다. 내 이름을 특정 일이나 특정 개인과 연관시킴으로써, 나는 그것에 경의를 표하고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싸움을 한다면, 내게 그럴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진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내게 항상 호의적이었다. 그리스도교에 꼭 필요한 적인 나 자신은 수천년간의 숙명을 한 개인의 탓(*그리스도)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12. 니체는 잡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더없이 높은 곳이란 어디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8)

순수에 대한 본능: 영혼의 내장을 지각할 수 있는 민감성 > 타인과 교제에 많은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내 본성의 특징은, 섬뜩할 정도로 완변하게 민감한 순수에 대한 본능이다. 나는 모든 영혼의 가장 내적인 것을 냄새맡을 수 있고, 영혼의 '내장'을 생리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이 민감성은 나에게 모든 비밀을 파악하는 심적 촉수를 제공한다. 몇가지 본성들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은폐된 오물들이 있다. 내 순수함에 해가되는 본성들도 알아차린다, 내가 구토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들의 냄새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순수함: 내 생존조건 > 나 자신에 대한 극도의 순수함은 내 생존조건이다. 나느 불결한 조건에서는 죽고 만다. 나는 어떤 완벽하게 투명하고 빛나는 요소들 안에 있다. 그래서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에 대한 시험인데, 나의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공감을 참아내는 데 있다. 내 인간애는 끊임없는 자기극복이다. (*자기극복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 나의 인간애이다!) 나는 고독이 필요하며, 회복, 내 자신에게로의 돌아옴,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공기의 숨결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의 잡것에 대한 구토로부터의 구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독에 대한 송가이며, 순수에 대한 송가이다. 인간에 대한 구토, '잡것'에 대한 구토는 언제나 내게 위험이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잡것에 대한) 구토로부터의 구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나는 어떻게 구토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나는 어떻게 어떤 잡것도 얼씬거리지 않는 높은 경기에까지 날아올라왔던가? 나의 구토가 나에게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날개와 샘이 어디있는지 알아내는 능력을 주었다! 여기 더없이 높은 곳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여기에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겠다고 하지 않는 생명이 있다. 기쁨의 샘은 다시 채우기 위해, 잔을 자주 비우고 있다. ......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높은 경지이자 고향이다. 더러운 자들이 올라와 갈증을 풀기에는 너무 높고 가파른 이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 미래의 나무 위에 우리는 보금자리를 튼다. 독수리가 우리 고독한 자들에게 먹을 거리를 날라다 준다,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 우리와 함께 맛봐서는 안될 그런 음식을! 우리는 이곳에 더러운 자를 위한 어떤 거쳐도 마련해놓지 않았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에게 우리의 행복은 차디찬 얼음동굴이 되리라. 우리는 거센 바람처럼 그들 위에 살고자 한다. ...... 나는 바람처름 그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 내 정신으로 그들 정신의 숨결을 빼앗고자 한다.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낮은 것들에게 거센 바람이다. 그의 적들에게, 침을 뱉은 모든 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리라. "바람 쪽으로 침을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 철학자 니체의 섭생법 ===

#1. 영양섭취의 선택 / #2. 풍토와 장소의 선택 / #3~7. 자기 휴양의 방식 (#3.철학, #4.문학, #5.6 바그너예술) / #8. 자기방어 본능(자기방어 기술, 이기심의 결의론) / #9.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 #10. 사소한 사항들의 중요성

 

13. '영양섭취의 선택'에서 니체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1. 영양섭취의 선택)

영양섭취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 문제거리가 아닌 것에 대해 숙고한 적이 없으며, 내 자신을 허비하지 않았다. ① (종교적 난점들) 이를테면 종교적 난점들에 대해 내 경험으로는 알지 못하며, 나를 비껴가버렸고 나는 '죄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신, 영혼불멸, 구원, 피안'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조차도 주목하지 않았다. 내게서 무신론은 결과이거나 사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의문이 많으며, 오만하여, 조야한(*유치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이란 하나의 조야한 대답이며, 우리 사유가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에게 조야한 금지를 한다,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를 말이다. ② (양심의 가책) 무엇이 양심의 가책인지를 판단할 기준도 내게는 없다. 양심의 가책이란 일종의 '사악한 시선'이다. ③ (행동의 나쁜 결과들) 나는 어떤 행동의 나쁜 결과들을 가치문제에서 배제하는데, 사람들은 나쁜 결과들을 보면서 자기 행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쉽사리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내 도덕은 실패한 것는 실패했다는 이유로 더욱 중히 여긴다. 

정신적 영양섭취(섭생)에 대해 > "네 힘의 극대화에, 르네상스양식의 덕의 극대화에, 허위도덕으로부터의 자유로운 덕의 극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너는 어떤 영양섭취를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한 내 경험은 최악인데, 어째서 내가 이 점에 있어 뒤쳐져 있었는가는 독일교육의 '이상주의'가 해명해준다. 독일교육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소위 '이상적인' 목표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현실을 보지 못하게끔 가르쳤다. .... 나는 가장 성숙한 시기에 이를 때까지 언제나 나쁜 식사를 해왔다. 도덕적으로 표현하면 '비개인적이고, 무사적이며, 이타적인' 식사를 해온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라이프치히 요리에 의해,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면서(1856), 나의 '삶에의 의지'를 부인했었다. 목적에 불충분한 영양섭취는 위도 망쳐버리는 법이다. 독일요리 전반이 이것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 독일정신은 암담해진 내장에서 나오며, 독일정신은 소화불량이며, 독일정신은 어느 것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영국식 섭생이란 것도 독일식이나 프랑스식과 비교하면, 일종의 '자연으로의 복귀', 식인주의로의 복귀이며, 내 본능에 깊이 거슬린다. 

육체적 영양섭취(섭생)에 대해 > ① (알콜) 알코올은 내게 해롭다, 하루 한잔의 와인이나 맥주는 내 삶을 '눈물 골짜기'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며, 그러니 뮌헨에는 나의 대척자들이 살고 있다. 소년이었을 때, 나는 와인을 마시는 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젊은 남자들의 공허한 허상에서 출발하여 나쁜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와인이 기운을 북돋아준다고 믿으려면, 그리스도교인이어야(불합리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어야) 했다. 나는 약하게 희석된 술을 약간만 마셔도 이상해지지만, 기묘하게도 나는 독한 술을 마시면 뱃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소년이었을 당시 밤을 지새면서 라틴어 논문을 작성하면서, 독한 그로크주를 라틴어에 약간 뿌리기도 했다. ② (정신적 음료) 중년기경에 나는 온간 부류의 '정신적' 음료에 대해 점점 엄격해지기로 했다. 내 행로를 바꾸어놓은 바그너처럼 경험에 의거해 반채식주의자가 된 나는, 정신적인 본성들의 소유자에게 알코올을 무조건 금지하라고 충고한다. 물만으로도 충분하며, 나에게는 정신이란 물위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③ (영양섭취에 대한 나의 도덕나의 도덕으로부터 몇가지 힌트. 든든한 식사가 너무 적은 식사보다 소화가 더 잘된다. 위 전체가 활동한다는 것은 소화가 잘되기 위한 첫번째 전제조건이다. 누구든지 자기 위의 크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래 질질 끄는 식사(중단된 희생만찬이라고 부르는 정찬식 식사)는 말려야 한다. 간식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라.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차는 아침에 마셔야 건강에 이롭다. 차를 마실 때는 누구든 자기 한도가 있는 법이다. 가능한 앉아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은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꾹 눌러앉아있는 끈기는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이다. 

 

14. '풍토와 장소의 선택'에서 니체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2. 풍토와 장소의 선택)

풍토와 장소의 선택이 갖는 의미 > ① (위대한 과제를 가진 자) 어디서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자기의 전 역량을 위대한 과제를 풀어야 하는 자에게 장소와 풍토는 제한될 것이다. 풍토는 신진대사에, 그 방해와 촉진이라는 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장소와 풍토의 선택에서 실패하는 자는, 자기 과제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아예 그 과제가 그에게 알려지지 않게 된다. 그에게는 동물적 활력이 충분치 못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밀려오는 자유(오직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 ② (천재) 나쁜 습관이 되어버린 미소한 내장의 태만은 천재를 평균적인 자로 '독일적인' 자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며, 강하고 영웅적으로 타고난 내장의 기를 꺾어버리는 데는 독일풍토만으로 충분하다. 신진대사의 속도는 정신의 발이 움직이느냐, 무기력하느냐와 정확히 비례한다. '정신' 자체가 신진대사의 한 측면이다. 파리, 프로방스, 플로렌스, 예수살렘, 아테네는 무언가를 입증한다. 천재는 건조한 대기와 맑은 하늘을 전제하고, 신속한 신진대사를 전제하며, 거대한 양의 힘을 다시 공급할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③ (내 경우) 내 병이 나를 이성으로 향하라고, 현실 안에서 이성에 대해 숙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런 경우(*풍토를 선택하는 섬세한 본능을 갖지 못해서 오그라드는 전문가, 유머감각이 없는 뚱한 자가 되는 경우)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의 연습을 거쳐 풍토와 기상의 영향을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정교해진 도구가 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제외하고서는, 항상 잘못된 곳에서 내게 금지된 곳에서 보냈다'는 끔찍한 사실을 생각한다. 나움부르크, 슐포르타, 튀링겐, 라이프치히, 바젤은 다같이 내 생리에는 맞지 않은 불운한 장소들이다. 

'이상주의'의 결과, 생리적 무지 > '이상주의'의 결과 생리적인 면에 관한 무지(저주스러운 '이상주의')가 내 삶의 진정한 숙명적 불행이고, 이 '이상주의'의 결과로서 나는 '내 삶의 과제에서 벗어나는 실책, 본능의 중대한 탈선, 겸손함, 예를 들어 문헌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할 수 있다. 바젤에서 지내는 동안 내 정신적인 섭생은 탁월한 역량을 무의미하게 소모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 소모를 충당해주는 힘의 공급없이 소모되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동일하게 설정하고,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나 자신의 차별점을 망각해 버렸다는 것들에 대해, 나는 내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내 삶의 그러한 근본적인 비이성성( '이상주의')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병이 나를 이성으로 인도했다. 

 

15. '자기 휴양을 취하는 방식'에서 니체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3. 자기 휴양을 취하는 방식_철학)

*니체에게 휴양이란 어떤 의미인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실책을 범해서는 안되는 선택 1.영양섭취의 선택, 2.풍토와 장소의 선택, 3.자기 휴양을 취하는 방식이다. 자기 휴양을 취하는 방식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독특한지에 따라, 그에게 허락되는 것(그에게 유용한 것의 범위)은 좁고도 좁다. 

휴양으로서 독서에 대하여 > 내게 독서는 휴양이다. 따라서 독서는 나를 내게서 떠나게 하고 나를 낯선 학문과 영혼들 안으로 산택하는 것이지만, 독서는 나로 하여금 나의 진지함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게 한다.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어떤 책도 곁에 두지 않는다. 누군가를 내 곁에서 말하게 한다든가 생각하게 한다든가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 이런 것이야말로 독서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잉태시(*일하고 산출하는 시간) 정신과 모든 기관은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데, 여기에 우연과 외적인 자극이 격렬하게 영향을 미치고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을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우연이나 외적인 자극은 가능한 많이 없애버려야 한다. 즉 일종의 자기 성을 쌓는 일은 정신적인 잉태에서 본능이 취하는 첫째가는 현명한 일이다. 어떤 낯선 생각이 은밀하게 성벽을 올라타는 것을 내가 허락할 성싶은가? - 이런 것이야말로 독서라고 불릴 말한 것이다. 일하고 산출하는 시간이 지나면 휴양의 시간이 뒤따른다. (*휴양의 시간: 일하고 산출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 일과 산출에 필요한 역량소모를 충당해주는 힘을 공급하는 시간) 내게 오라, 너희 편안하고 영민하며 수줍어하는 책들이여!

내게 휴양의 시간이 된 책들 > ① (빅토르 브로차드)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빅토르 브로차드의 <그리스 회의론자들>이라는 탁월한 연구서였는데, 나의 라에티아나 논문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이중적인 철학자 대중들 사이에서 회의주의자는 존경할만한 유형이다. ② (나의 독서방식) 나는 항상 몇권 안되는 똑같은 책들로 도피하는데, 이 책들은 내게 합당하고 입증된 것들이다. 잡다한 종류를 다독하는 것은 내 독서방식은 아니다. 열람실은 나를 병들게 한다. 잡다한 종류를 사랑하는 것도 내 방식은 아니다. 새 책들에 대한 신중함과 적개심도, '관용, 아량, 이웃사랑'보다 내 본능에 더 적합하다. ③ (프랑스적 교양) 내가 항상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은 옛 프랑스인들이다. 나는 오로지 프랑스적 교양만을 믿고, 다른 유럽적 '교양'은 전부 오해라고 간주한다. 독일적 교양은 말할 것도 없는데, 독일적 교양의 고급한 것은 모두 프랑스적 연원을 갖고 있었다. ④ (코지마의 취향) 무엇보다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는 취향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들어본 중에 단연 최고의 소리였다. "파스칼의 책을 읽지는 않지만, 그를 사랑한다." ⑤ (나의 취향) 몽테뉴의 변덕을 내 정신에 갖고 있다. ...... 내 예술가적 취향은 셰익스피어 같은 활량한 천재에 대해 통분하면서, 몰리에르-코르네유-라신 등의 이름을 옹호한다. 현재 파리는 호기심 넘치고 섬세하기도 한 심리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우리까리 말하자면, 나는 이 세대를 독일철학이 몽땅 망쳐버렸던 그들의 위해한 스승보다 선호한다. 예를 들면, 친애하는 텐은 헤겔이 망쳐버렸는데, 텐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시기를 오해했는데 이 오해는 헤겔 탓이다. 독일이 닿으면 문화가 부패한다. 전쟁이 비로소 프랑스에서 정신을 '구제'했다. ⑥ (스탕달)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연은 스탕달인데, 앞을 내다보는 심리학자의 눈과, 위대한 사실적 인물이 곁에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사실에 대한 파악력을 지닌 귀중한 존재다. 그를 우연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 삶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모든 것은 우연이 몰아댄 것이지, 결코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톱을 보고 나폴레옹을 알아차린다) 그는 프랑스에서도 드물고 거의 발견되지 않는 유형인 정직한 무신론자이다. 프로스페르 메리메(*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대표작은《콜롱바》,《카르멘》등 스탕달과 깊이 사귀었다)를 기리면서. 아마 나는 스탕달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내가 할 수 있었을 최고의 무신로자 위트를 내게서 빼앗아가버렸다. "신의 유일한 사과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디선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인간 삶에 대한 최대의 반증이었던 것은 무엇인가? 신이다."

 

16. 니체에게 바그너의 의미는 무엇이며,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5.6. 자기 휴양을 취하는 방식_바그너)

#5. 니체에게 바그너의 의미 > ① (니체 삶의 깊은 휴양) 나를 가장 심도있고 가장 가슴속 깊이 휴양하게 했던, 의심의 여지없이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교제에 감사하고 싶다. 나머지 인간적인 관계들은 유치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는 어떤 대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트립센에서의 날들을 내 인생에서 빼버리고 싶지 않다. 그 신뢰와 쾌활과 숭고한 행운의 날들을, 그 심오한 순간들을. 우리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지나간 적이 없었다. 나는 자기네들을 바그너와 유사하게 여겨 그를 숭배한다고 믿는 바그너주의자에게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경멸의 조소를 지을 뿐이다.  ② (독일적인 것에 대항한 혁명가) 내 심층적 본능에 독일적인 것은 모두 낯설고, 독일인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화가 잘 안되었기에, 바그너와의 첫 접촉은 내 삶에서 첫번째 안도의 숨을 쉬게 했다. 나는 그를 '독일적 덕목들'에 맞서는 외국으로, 대립으로, 저항의 화산으로 느꼈고 존경했다. 50년대의 눅눅한 공기에서 어린시설을 보냈던 우리는 '독일적'이라는 개념에 대해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리없이 혁명가일 수밖에 없다. 그가 오늘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지, 그가 진홍색 옷을 걸치고 있는지, 경비병제복을 입었는지는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 자 보라! 바그너는 한사람의 혁명가였다. 그는 독일인한테서 도망쳤었다.

#5. 바그너와의 결별 > ① (바그너예술이 속하는 곳: 파리) 예술가의 고항은 유럽에서는 파리뿐이고, 바그너의 예술이 전제하고 있는 예술적인 오감의 섬세함, 뉘앙스를 김지하는 손가락, 심리적 병증은 오직 파리에서만 발견된다. 형식문제에서의 정열, 연출에서의 진지함은 다른 곳에는 없는데, 그것은 전형적인 파리인들의 진지함이다. 어떤 파리예술가의 영혼에 살아있는 거대한 야망은 독일에서는 전혀 알려져있지 않다. 독일인들은 선량하다 - 바그너는 결코 선량하지 않다. 바그너가 어디에 속하고 자기와 가장 닮은 모습을 누구에게서 발견하는지에 대해 나는 <선악의 저편. 8장 민족과 조국 #256>에서 충분히 언급했다. ② (바그너예술의 숭배자들: 데카당) 프랑스 후기낭만파들은 들라크루아나 베를리오즈처럼 높은 창공을 날고 마음을 뒤흔드는 예술가유형이지만, 어느정도 병들고 치유불가능한 자들로서, 모두가 표현의 광신자들일 뿐이며 그런 면에서 철저한 거장들이다. 최초의 지적인 바그너 숭배자였던 샤를 보를레르는 들라크루아를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전형적인 데카당이며 최후의 데카당일지도 모른다. ③ (바그너와 결별) 내가 바그너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점은 무엇인가? 그가 독일인에게 응해주었다는 점, 그가 독일제국적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손이 닿는 한, 독일은 문화를 타락시킨다. 

#6. 바그너, 독일적인 것에 대항하는 독 > 바그너음악이 없었다면 유년시절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독일인으로 운명지어졌기 때문이다. 참아낼 수 없는 압박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면 해시시가 필요한 것처럼, 그래서 나에게는 바그너가 필요했다. 바그너는 독일적인 것에 대한 항독소였고, 독이었다. 바그너 이전 작품들은 너무 저속하고 너무 '독일적'이었다. 오늘날 <트리스탄>의 위험한 매혹과 전율스러운 무한성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없다! 나는 바그너주의자였다. <트리스탄>은 바그너 최고의 작품이다. 그는 <트린스타>부터 <마이스터징어>와 <니벨룽겐의 반지>와 더불어 휴양을 취했다.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성숙에 이르기 위한 시기에 살았고, 그것도 바로 독일인들 사이에 살았다는 것을, 나는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내게서 심리학자의 호기심이 멀리 뻗어나간 것이다. 그런 '지옥의 열락'에 이를 만큼 병들어 보지 못한 자에게, 세상은 빈약한 것이다. 

#6. 니체와 바그너의 공통점: 독일인들 사이의 하나의 오해 > 바그너만이 할 수 있는 거대한 일, 바그너만이 날아오를 수 있는 신기한 황홀경의 세계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내게 가장 의심스럽고도 가장 위험한 것마저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며, 또 그로 인해 더 강해지는 나이기에, 나는 바그너를 내 삶의 큰 은인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유사점은, '우리가 동시대의 다른 누구보다 더 깊이 고통받았으며, 우리가 서로에게도 고통받았다'는 점이다. 바그너가 독일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오해이듯이, 나역시 하나의 오해이고 언제나 오해로 남을 것이다. 친애하는 게르만 민족이여(*독일민족), 심리학적인 훈련(*니체에 의한)과 예술적 훈련(*바그너에 의한)을 두세기 동안 먼저해보라! 그래도 만회 못할 것이다.

 

17. 니체가 제안하는 현명한 자기방어 본능(기술)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7. 자기방어 기술 혹은 이기심의 결의론)

첫째,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고, 자기에게 접근하게 두지 말라. ex. 독일의 소도시와 대도시 > 영양섭취의 선택, 장소와 풍토의 선택, 휴양의 선택에서, 자기방어 본능으로서 자기본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두지 말라. 이것은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증거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듣고 접근한 것에 의해 구성된다) 자기방어 본능의 관용적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다. (*생명_힘에의 의지, 윤리_덕, 예술_스타일, 일상_취향) 취향은 긍정이 무사를 의미할 때는 부정하라고 명령하지만, 가능한 부정하지 말라고도 명령한다. '계속 부정이 필요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인 되며, 엄청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 우리가 하는 중대한 지출은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방어하는 것-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지출이며 부정적인 목적들을 위해 낭비되는 힘이다. 지속적인 방어의 필요때문에 더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고요하고 귀족적인 토리노 대신 독일의 소도시를 발견했다 치자. 내 본능은 이 무미건조해지고 비겁한 세계로부터 몰아닥치는 것을 튕기기 위한 거부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또는 내가 독일의 대도시를(축조된 악습이며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선하든 악하든 온갖 것들이 몽땅 끌려와 있는 곳) 발견했다고 치자. 내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가시를 갖는다는 것도 일종의 낭비이고, 가시가 아닌 너그러움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 때에는 심지어 이중의 사치이다. 

둘째, 가능한 드물게 반응하라. ex. 책을 대하는 법 > 또다른 현명함과 자기방어는 '가능한 드물게 반응한다'는 것, 자기의 '자유'(자기의 주도권)를 떼어내어 시약으로 만들게 하는 조건들을 피하는 것이다. 서적을 대하는 법을 비유로 들어보겠다. 서적을 그냥 '뒤적거리는' 학자(하루에 200권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는 문헌학자)는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그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할 때는 특정 자극에(읽는 생각들에) 응답하는 것이며, 결국 그는 반응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학자는 자기의 전 힘을 기존의 사고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판하는데에 다 쏟아부으며, 스스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반동적인 힘). 자기방어 본능(*자기 취향)이 약할 대로 약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책들에 저항할 것이다. 학자-일종의 데카당.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풍부하고 자유롭게 태어난 본성의 소유자들이 30대에 이미 '망쳐질 정도로 독서'했던 것을, 나는 보았다. (*망쳐질 정도의 독서는)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생각'을 주기 위해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만 하는 성냥개비였다. 아침 일찍 날이 밝을 때, 모든 것이 신선할 때, 자기 힘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을 나는 못된 습관이라고 부른다!

 

18.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9)

 

19. 니체는 왜 일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되는 '사소한 사항들'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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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 니체세미나 :: 더 아름답게! 거리의 파토스 [1] oracle 2019.12.19 350
744 청인지_자본을 넘어선 자본 7장 발제 file 공기 2020.11.28 15
743 청인지 자넘자 에세이 프로포절_재림 file jaerim 2020.11.28 14
742 [청인지후기]자본주의와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단상 [1] jaerim 2020.11.27 27
741 [니체_토론주제] 이 사람을 보라③ _11.30(월) [1] oracle 2020.11.26 30
740 자본주의는 왜 가장 비경제적 시스템인가? 테스형 2020.11.21 55
739 [니체_토론주제] 이 사람을 보라② _11.23(월) [1] oracle 2020.11.21 54
738 청인지 6장 발제 file 닉네임 2020.11.21 15
737 [니체_후기] 이 사람을 보라 11.6(월) [2] 김용아 2020.11.20 18
736 [청인지_자넘자_후기]자본에 포섭당한 노동자? 포섭당한줄도 모르는 노동자 [1] 필기체 2020.11.16 32
735 [니체_발제] 이 사람을 보라① _11.16(월) [1] 김경희 2020.11.16 27
734 왜 자본가는 한푼도 가져가선 안되는가? [1] 테스형 2020.11.15 54
» [니체_토론주제] 이 사람을 보라① _11.16(월) [1] oracle 2020.11.12 65
732 [청인지_후기] 성실한 나라의 근로자(생각해보니 노동자도 아닌데) cla22ic 2020.11.10 52
731 [니체_후기] 안티크리스트①~②_11.2(월) [1] 김경희 2020.11.05 44
730 [청인지_후기] 술집과 집술 hyobin 2020.11.03 70
729 [니체_발제] 안티크리스트②_11.2(월) [1] file 용아 2020.11.02 27
728 자본을 넘어선 자본 후기2 테스형 2020.10.31 63
727 [청인지] 3장 발제 file 필기체 2020.10.31 22
726 [니체_토론주제] 안티크리스트②_11.2(월) [1] oracle 2020.10.31 36
725 [청인지_후기] “그때 다들 너네 아빠 보고 병신이라 그랬어.” [1] 공룡 2020.10.29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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