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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_후기] 술집과 집술

hyobin 2020.11.03 14:39 조회 수 : 70

아주아주 오랜만에 시내 한복판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수유너머에서 마시던 백두산 맛과 매우 유사한 향 진한 에일이 있었고, 맥스와 맛이 비슷한 심심한 라거가 있었다. 모두 500ml가 안 되어 보이는 투박한 잔에 담겨 6~7천원에 팔렸다. 안주는... 별 수 없이 (닭을 튀겼던 기름에) 튀긴 두 가지 맛 막대 감자.

맛을 잘 아는 여러 종류의 맥주를 골고루 사고, 이것저것 재료를 넣어 만든 안주로 친구들과 어울리던 집술과는 맛이나 비용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매연이 들어오는 대로변 술집 구석 자리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음질 별로인 스피커로 볼륨을 높여 틀어대는 빠른 템포의 가요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난 그리 까다로운 취향을 갖진 못했으니까.

그런데 괜찮지 않은 게 있었다. 1.5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앉은 옆자리 두 청년(?)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부터 저기 있었던가? 첨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점점 목소리가 커졌고, 지금은 아주 편안하게 소리를 높인다. 친구 사이고, 둘 다 회사원인 듯하고, 각자 연애 경험도 있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옆자리 손님의 대화가 내게 괜찮지 않았던 원인은 커진 목소리나 그와 비례해 나오는 비말의 양 같은 게 아니었다. 대화에서 추측되는 그들의 사고방식, 자본가가 아니면서 자본가나 할 법한 염려를 자기 염려처럼 하는, 서구 근대를 내면화한 우리 시대의 통념. 그 통념에 매우 충실한 여러 주제의 대화 내용이 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았다. 앞자리에 앉은 친구는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귀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친구 귀에 꽂아주었다. 그의 얼굴이 좀 편안해지는 듯했다. 노이즈가 캔슬링되는 이어폰 기술이 이 순간 대단히 유용했다. 하지만 우리 대화도 절반가량 캔슬링되었다. 입모양을 보면서 내용을 보정해야 했다. 친구 귀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 내 귀에 꽂고, 폰을 열어 아까 걸으면서 들었던 음악을 틀었다.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에피톤 프로젝트 첫사랑, 정승환 이 바보야, 노을 청혼, 팀 기대도 돼...

‘전혀 돈도 안 되고, 돈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 있나요?’라는 청인지 세미나 발제문 질문이 생각났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하나의 척도로 대부분의 가치를 측정하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일상사를 시끄럽게 전해주는데, 첨단 기술을 입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주 오랜 기간 이어온 가치, 소중한 타자를 향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둘의 대조는 역시 자본주의 상업 시스템에 충실하여 생산된 것임에 틀림없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읽는 책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통념을 넘어 다른 세계를 모색한다. 2020년 이 땅에 통용되는 경제와 관련한 대부분의 가치를 넘으려 하고, 19세기 서구에서 통용된 ‘정치경제학’을 넘으려 하고, 그래서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지식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른바 ‘정통 마르크시즘’을 넘으려 하고, ‘코뮤니즘’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맑스를 다시 불러내려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여전히 통념의 그늘 속에 있다. 통념에 익숙했던 우리는 통념 아닌 생각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은 자주 통념 아닌 것을 통념과 섞어 보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지적해주어야 한다. “지금 그 생각은 우리가 넘으려는 통념인 것 같아요”라고. 이런 지적은 매우 기분이 나쁘다. 내 생각의 내용을 지적하는 것도 썩 유쾌하진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문제삼는 것은 아주 불유쾌하다. 이런 지적은 우리 감정을 건드리고, 감정은 우리의 ‘생각 수정’을 방해한다. 그래서 더 지혜로운 대화법이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항상 메타적으로 점검되어야 한다. 책읽기와 세미나는 우리의 지식을 넓혀주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감각을 바꾸어 주고, 우리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고, 결국 우리 삶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 줄 때에만 의미가 있을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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