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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라이스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

 

서문

 이 책은 극소수의 독자를 위한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정직한 사람들, 정치와 민족주의 등 시대적 헛소리를 발밑의 것으로 내려다 보는 사람들, 진리라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 눈먼 귀와 눈을 열고 새로운 것을 위한 사람들, 자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만이 이 책의 정당한 독자가 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간을 능가할수 있다. 힘과 영혼과 경멸을 통해서..

 

  1. 우리는 유럽의 북방인, 히페르보레오스인으로서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연의 한계, 생각의 한계, 시대의 한계를 너머 새로움을 찾아가는 곳에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던 사람들. 언젠가부턴가 ‘현대인’의 시대로 접어 들면서 그리스도교에 의해 우리는 그러한 기지를 잃어버렸다.복종에 길들여지고 어두워졌다. 

 

2. 좋은 것이란, 행복이라는 것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힘을 증대시키는 모든 것. 반대로 나쁜 것은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곧 그리스도교.

 

3. 존재자의 열에서 분리보다는 가치있는 인간의 표상은 무엇이고 무엇을 원해야하는지가 더 중요. 그러나 그동안은 존재자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가까워질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두려움으로 만들어서 패배자로 사육시켜왔다. 가축, 병든 인간, 그리스도교인.

 

4. 현대적 이념인 ‘진보’와 별개로, 인간 개인이나 집단의 개별적 성공은 늘 있어왔고 미래에도 가능하다. 그것이 실제로 추구되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결과이다.

 

5.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강해지고 싶은 본능을 그리스도교는 추방시킨다. 나아가 약자, 실패한 자를 옹호하고 응석을 받아주며 강한 삶의 보존 본능에 대한 반박을 이상적 가치로 만들어냈다. 

 

6.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도덕은 허위도덕이므로, 그 허위도덕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 ‘신성’이야 말로 가장 타락한 모습이다. 성장을 위한 본능, 지속을 위한 본능, 힘의 축적을 위한 본능 자체가 삶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 본능들을 쇠퇴시키고 허위도덕과 신성 외에는 모두 죄로 만든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데카당스들의 가치관을 만들어내었다.

 

7. 동정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동정은 스스로의 힘을 상실시킨다. 동정은 결국 허무주의의 실천이다. 그 허무주의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피안, 신의 나라, 참된 삶, 구원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인 철학의 칼로 이 병든 생각들은 고쳐내야한다. 

 

8.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없다. 무와 부정에 대한 옹호가 결코 진리일수는 없다. 

 

9. 신학자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 본성문제에 눈을 감아버리고 광학 속에 자리한 관념을 ‘신성함’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 외의 것은 다 죄이고 거짓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광학적 관념은 모든 가치판단을 뒤집고 결국은 허무적 의지가 권력을 원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10. 독일 철학은 교활한 신학의 다른 형태이다. 그들은 칸트를 옹호하며 교활한 그리스도교 의회 덕분에 실재가 가상이 되고, 날조된 존재자의 세계가 실재가 되어버렸다. 

 

11. 덕은 고안물이어어야만 하는데, 칸트가 원했던, 덕개념 자체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 덕은 위험하다. 덕, 의무, 선, 비개인성과 보편 타당성이라는 성격을 갖는 선은 환영들에 불과하다. 삶의 본능이 강요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바로 기쁨이다. 

 

12. 몇몇 철학자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너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고상한 요구를 하는 철학자들은 신성함과 인간적 사이에 기생하는 사제와 다를 것 없다. 피안의 명령을 대변한다는 사제는 결국 자기 기만적 거짓들만 내세우며 사제 스스로가 진리와 비진리를 결정했다.

 

13. 우리 자유정신들은 이미 모든 가치의 전도이고 진리, 비진리를 나누는 옛개념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승리의 선언이다. 인류는 진리라는 허상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효과를 바랬다. 이 점을 그르스도교인들은 정확히 알아차리고 진리를 내세워왔다.

 

14.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최고의 실패작이다. 자신의 본능에서 가장 벗어나야만 신성함을 얻을 수 있는 동물이기에.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정신이 우리 스스로에 대해 오산하게 만들었다. 

 

15. 그리스도교는 실재성과 가장 멀리있는 종교이다. 공상적인 원인들 (신, 영혼, 나, ) 공상적인 효력들 (죄, 구원, 은총)이 공상적 심리상태(후회,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실재성 없음으로 인해서 고통 받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실패한 실재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불쾌가 쾌보다 우세하는 허구적 도덕이 데카당스의 공식을 제공한다. 

 

16. 어떠한 민족의 신이 감사를 받을 때는 억압이 없고 평화로운 시절일테다. 반대로 억압이 있을 때는 기다리면 신이 구워을 주시겠지 하다가, 끝내 신이 무력할때, 자신들의 신에 대한 믿음과 자유와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껴졌을때, 복종이 가장 이롭다고 여기게 된다. 그 지점에서 민족이 섬기는 신은 바뀐다. 좋을때 신은 힘에의 의지가 되고, 반대일땐 힘에의 무기력이 된다. 

 

 

18. 신이 삶에 대한 미화나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이 되지 못하고 삶에 대한 반박으로 변질 되었다. 신안에서 무가 신격화되고, 무에의 의지가 신성시되었다.

 

19. 북유럽의 강한 종족들이 그리스도교 신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병들고 노쇠하게 되었다. 2000년간의 그 결과 무와 개념과 모순이 혼성되어 있는 타락상의 데카당스에서 인간의 영혼은 비겁과 피로에 의해 재가를 받고 있다. 

 

20.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허무종교라는 점에서 관련이 있지만, 불교는 실제적이며 실증적 종교이다. 불교에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그리스도교가 본능이 올라오는 것을 죄인된 속성이라 규정지어버린다면 불교에서는 그 본능을 어떻게 다스리고 극대화 시킬 것인지 말한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 종결되지 않으므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두고 내 감정에 집중하여 싸움이 되지 않게 한다. 

 

21.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와 증오, 신성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인간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 가까워지라고 경쟁 시킨다. 본능에 충실한 자유도 죄이다. 감각에 대한 증오, 감각의 기쁨에 대한 증오가 그리스도교적이다. 

 

22. 그리스도교에서는 자기 본능이 강한 인간을 실패작으로 본다. 또한 통치와 다스림을 위해 율법을 정리하고 율법에서 어긋나는 자 또한 실패작이며 죄의 결과로 본다. 이러한 길들이기를 통해 약화되고 병든다.

 

23. 불교는 백배나 더 냉정하고 진실되고 객관적이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지만, 불교는 ‘나는 괴롭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뿐에 그친다. 그 죄를 용서받으려면 절대적 믿음이 필요하고, 그 길을 참아내고 가기 위해선 각성 상태인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를 것이라는 소망이 필요하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세가지 덕목인 믿음, 사랑, 소망같은 조종 장치들은, 너무도 실증적인 불교에서는 필요가 없다. 

 

24. 유대인의 신인 야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의 궁극적 귀결에 불과하다. 

 

25.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을때, 억압과 지배의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당시의 사람들. 야훼를 신으로 섬기던 사람들은 야훼의 실체적 형상이 눈 앞에 메시아로서 나타나 자신들의 절박함을 해결해 주길 바랐다. 여기서 사제들이 끼어들어가며 도덕적 잣대로 인간에게 죄와 벌을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사라지고 도덕이 변질되어 본능을 쇠퇴시키고 양심이라는 거짓 선에 중독된 상태를 만들어 내게 된다. 

 

26. 신과 도덕의 개념이 변조되어버렸다. 유대의 사제들은 더욱 형식화하고 세분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였다. 신에 대한 복종 아니면 불복종이라는 이분법적 백치상태로 단순화 시켰다. 그러기 위한 장치로서 ‘성서’를 발견해낸다. 메시아가 올것이라는 과거로부터의 약속과, 율법을 통해 인간을 정죄하며 인간을 ‘성스럽게' 만든다. 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 

 

27. 이렇듯 모든 자연가치와 현실성이 왜곡된 지반에서 그리스도교는 자라났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작은 봉기 운동이 신의 아들이라는 추상적 존재 형식이 되는데에는 사제들의 억압자체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계급과 특권과 질서와 정식에 대항한 봉기였다. 많은 경우 예수는 다른이들의 죄때문에 대신 죽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 시대의 정치범으로서 죄명을 받고 죽었다.

 

28. 복음서라는 문제. 복음이 전승되어져 온다는 성자들의 말은 애매한 문헌들에 불과하다. 배운 자들의 한가로운 짓거리일뿐이다.  

 

29. 복음서가 아무리 훼손되고 낯선 특성들도 과부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정말 어떻게 죽었던가에 대한 사실여부 보다 중요한것이있다. 오히려 그라는 유형이 표상 가능한가? 그가 전승된 것인가?의 여부이다. 복음서로부터 한 사람의 영혼의 역사마저 끄집어내려고 하는 여러 시도들은 혐오적이다. ‘기쁜 소식, 참된 삶이 약속되지 않고  너희 안에 있다.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서 누구든지 다 신의 자식이다 ‘라고 말하는 예수가 영웅이나 천재라고 말하는 오해는 백치일뿐이다. 

 

30. 현실성에 대한 본능적 증오. 다 접촉하면 너무 괴로우니까 피해버린다. 이것이 데카당이다. 

 

31. 복음서의 예수의 모습 선지자, 구세주, 미래의 판관,도덕의 설교자, 기적을 행하는 자. 실제의 모습이 어떠하였건, 그를 어떻게 해석을 하건, 그 모습은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필요해 의해 편집된 모습임에 틀림없다.

 

32. 하늘 나라는 아이들의 것이다. 이 신앙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노하지않고 탓하지 않는다. 신앙자체가 매순간 기적이고, 신앙에 대항 보상이자 증거이며 신의 나라이다. 이러한 신앙은 공식화하지도 않고 공식에 저항한다.

예수를 자유정신이라 부를 수도 있을것이다. 그에게 고정된 것은 없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언어마저도 그에게는 비유의 가치를 지니는 한가지도구일 뿐이다.

 그는 세상을 부정하지도 부정할 이유를 가져보지도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그 근거에 의해 입증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없다. 그의 빛은 내적인 빛, 자기 긍정이며 온통 힘의 증거이다. 자기 스스로 빛을 보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33. 복은 약속되지도 않고, 조건들에 묶여 있지도 않다.나머지는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한 기호일뿐이다.

 신에게 향하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의 기도도 아닌, 오로지 복음적 시ㄹ천만이 신에게 인도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

 자기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심층적 본능, 이것이 구원이라는  심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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