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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방법/#466~469

19C는 과학적 방법이 도리어 학문을 압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데카르트, 콩트가 이 위대한 과학적 방법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언제나 마지막에 발견되기 마련인 가장 소중한 지식이란 것도 결국 ‘방법’일 뿐이다. 오늘날 과학이 의존하고 있는 방법과 가설들은 오랫동안 경멸당했고 그 주창자들은 미친놈으로 여겨져 추방당하고 불태워졌다. 보통 인간들은 진리에 대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환상성을 믿고 심지어 요구했는 바, 그런 미적취향의 전례를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에 갑작스레 큰 도약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외려 도덕적 과장이나 종교적 절제력 등에 따른 교육 덕택에 자연스레 우리 마음에 과학적 태도가 배양된 것이다.

 

2. 인식론적 출발점/#470~480

나는 한 가지 집단적 세계관에 영원히 안주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반면, 미지의 것들에 잠들어 있는 자극을 포기않는 것은 매력적으로 느낀다.

인식론 영역에서 확실한 그 무엇으로 주로 거론되는 ‘의식의 사실들(인간의 의식 활동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은 모순투성이다. ① 관찰은 너무나 어려우며, 심지어 그 과정에 오류는 필연적 조건이다. ② 지성(=오성)은 ‘진짜 현실’에 의거해서만 발현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비판할 수 없다. 그러려면 우리가 절대적 인식을 갖춘 존재로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이나 지각 같은 사물에 대한 인식행위 과정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즉 사물에 대한 믿음의 심리학의 시원은 ‘물 자체’와 같은 논의를 금한다. ③ 주체와 객체를 주체로 보는 사상은 선의의 발명품으로 형편없는 의식이다. 따라서 마치 의식의 사실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성엔 현상이 없는 것처럼 여긴 현대철학은 출발점부터 잘못된 것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대단히 피상적인 것이며, 내면세계도 마찬가지로 단지 현상일 뿐이다. 우리 의식에 닿는 모든 것은 조정‧단순‧도식화된다. 내부 지각의 실제 과정-생각, 감정, 욕망들의 사이, 주체와 객체의 인과적 연결-은 우리가 볼 수 없도록 꼭꼭 숨어 있어서 그저 상상할 뿐이다. 우리는 사실들을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 ‘인과관계’는 우리를 피한다. 논리학에서 두 개의 생각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개입할 여지가 있음에도 즉시적 인과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참으로 거칠고 서툴기 짝이 없는 관찰 결과이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가 그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런 감정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한편 인식론자들이 이해하는 순진한(naive) ‘사고’ 작용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사고는 그저 한 가지 요소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해버리는 자의적 허구과정이자 이해를 위한 인위적 조정일 뿐이다. 생각하는 그 무엇으로서 ‘정신’에 대해서도 혹간 절대적이고 순수한 정신이라는 따위의 말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사고’를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파생되는 현상인데, 먼저 사고를 상상하고, 다음으로 주체라는 실체를 상정한 뒤 이 주체에 사고작용의 기원을 두게 된다. 일종의 자기복제, 자기인용의 과정이라 할만하다.

내면의 감각을 가지고 관찰되는 내면세계는 현상적인 것이며, 그래서 기만적이다. 우리의 습성은 어떤 경험의 원인으로 쉽게 의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정신 안에서 연쇄되는 생각들이 인관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쉬이 믿는 경향이 있다. 마치 현실과 괴리된 예만을 논하는 논리학자의 머릿속이 원인이라는 편견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인간은 오랜 동안 쾌락과 고통을 행위의 동기로 여겨 왔다. 하지만 그것을 배제하더라도 모든 사태는 문제없이 전개된다. 쾌락과 고통을 들어 자기행위를 목표하는 자는 자기 꾀에 속고 있는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그저 반응효과일 뿐이다. 요약하자면 의식된 모든 것은 최종적 현상이자 결론이지 그 어떤 것의 원인이 아니며, 서로 완전히 별개다. 그럼에도 지금껏 우리는 마치 사고, 감정, 자유의지 같은 게 진정한 것이라는 역전된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내면세계’ 현상의 본질은 시간적 전도(傳導)다. 즉 결과가 의식에 기록되고 난 뒤에라야 그 원인을 상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세계에 의해 발생된 효과가 의식에 기록되고 나면 외부 세계의 단편적 조각이 그 효과의 원인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찾는 과정인데, 그 기억이란 것도 옛날의 잘못된 인과관계에 따른 엉터리 해석구조에 놓여 있다. 내면의 경험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할 때에만-그가 잘 아는 조건으로 번역될 때에만-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이해한다는 말뜻이며, 다시 말해 이해란 새로운 어떤 것을 기존에 익숙하거나 오래된 무언가를 빌려서 표현하는 것을 이른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난 기분이 좋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과, ‘이러저러한 것이 날 기분 나쁘게 만들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후자는 자신의 기분 나쁜 원인을 찾은 뒤에라야 자기 기분을 인식한다. 이것이 ‘문헌학적 지식의 결여’라는 것인데, 어떤 텍스트를 해석의 개입 없이 그 자체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발달하는 내면 경험의 형식으로 아마 거의 불가능하다.

마음, 이성, 사고, 의식, 영혼, 의지, 진리는 모두 허구이며, 단지 특정 종의 권력 도구로 작동된다. 따라서 인식기관 발달의 원동력은 보존의 유용성일 뿐, 이론적 욕구에 의한 것이 아니다.

 

3. 자아”에 대한 믿음, 주체/#481~492

실증주의자들은 오직 현상만이 사실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현상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실도 ‘그것 자체로’ 사실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지 못한다. 그런 식의 접근 욕망 자체가 맹랑한 것이다.

‘주체’는 실체가 아니며 단지 발명된 것이다. 이 세상은 수백 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필요이다. 우리는 더 이상 보지 못하는 무지의 시점에 단어를 제시한다. 그 특정 언어개념들은 인식의 한계를 드러낼 뿐 ‘진리’가 아니다.

‘의심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은 모든 행동에 어떤 행위자를 가정하는 습관에 불과하다. 모든 행동을 자유의지의 결과로 여기는 습관 탓에 주체에 관한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가정이나 상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를 따라가면 확실한 것에는 절대 닿지 못하고 강력한 신앙의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정작 생각의 실체는 건드리지도 못한 채, 유령 같은 생각의 성격만 확인할 뿐이다.

실체라는 개념은 주체를 전제하여 성립하는데, 만약 영혼 개념을 포기한다면, 주체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등급정도만 얻고 존재는 상실하게 된다. 그랬을 때 현실에 대해 우리가 믿는 존재등급의 변화는 우리가 느끼는 생명과 권력의 크기에 따라 존재, 현실, 비현상의 기준을 제시할 것이다. ‘주체’라는 용어는 현실감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다양한 순간에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실체에 대한 우리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어진다. 우리는 아주 강한 이 믿음을 근거로 진리, 현실, 실재성을 상상한다. 주체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 비슷한 상태들을 어느 한 가지 토대의 결과로 믿도록 하는 허구지만, 이 상태들의 유사성을 처음 창조한 것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그 상태들을 조정하여 서로 비슷하게 만들지만, 그 유사성은 사실이 아니다.

의식의 사실들이 진정한 것인지 결정하려면 먼저 존재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 확실성과 인식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식의 기능에 대한 비판은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도구로 비판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으로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이 어찌 가능한가? 그 도구는 자신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데 말이다.

‘현실’과 ‘존재’라는 개념은 주체에 대한 느낌에서 비롯된다. 주체는 우리 내면에서 자아가 모든 행위의 원인으로서 하나의 실체이자 행위자로 해석된다.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가정들, 즉 시체, 우연성, 속성 등에 대한 믿음과 그 강력한 설득력은 모든 행동을 우리의 의지의 결과로 여기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성의 모든 범주가 전부 감각에 기원을 두고 있는 한, 물 자체로서의 세계를 현상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범주는 절대 없다.

하나의 통일체로 의식에 닿는 것은 이미 대단히 복잡하다. 도리어 육체의 현상이 더욱 풍성하고, 더욱 명확하며, 확실한 현상이다. 따라서 육체의 현상을 조직적으로 전면에 부각시켜야 하며, 그 의미는 강조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주체를 가정하는 것을 필요치 않다. 일종의 지배력을 가진 세포들의 귀족정치로서 주체는 다수이다. 육체와 생리학을 바탕으로 하면 우리의 주체와 통일체의 본질을 더 정확히 그릴 수 있다.

 

4. 인식 본능의 생물학, 원근법주의/#493~507

진리란 그것이 없으면 어떤 종의 생명이 보존되지 못하는 불가피한 오류지만, 결정적으로 생명에 이로운 가치가 중요하다. 진리감각은 사물들을 우리 취향에 따라 다듬을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오직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처한 현상태가 우연적이고 절대 근본적이지 않으므로 모두 달리 다양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 인과관계의 법칙을 포기하는 것은 종의 파멸을 의미할 정도로 매우 강한 믿음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지성도 생존조건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다. 사고(생각하는 것)의 본질은 새로운 것을 오래된 도식에 맞추고, 낯선 것을 동화시키는 것이다. 감각 인식은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과거의 기억을 기초로 동화된다. 모든 사고와 판단, 지각은 동등을 사실로 여기며, 동등화의 행위를 전제한다.

우리의 지각들은 유기체의 전체 과정에 유익하고 근본적인 지각들의 총합이다. 명백히 선택된 지각에 대한 감각만을 갖고 있으며, 이때 선택되는 지각은 우리의 보존과 관련 있다.

“나는 이것과 저것이 그러하다고 믿는다.”는 식의 가치평가가 진리의 본질이다. 모든 가치평가에는 보존과 성장의 조건이 표현되고 있으며, 모든 인식기관과 감각들은 그 조건에 유리한 쪽으로만 발달해 왔다. 즉 무엇인가가 반드시 진리일 필요는 없고 진리로 여겨질 필요만 있으면 된다.

 

5. 이성과 논리의 기원/#508~522

원래 우리의 생각은 카오스였다. 세속적 욕망 때문에 논리가 발달했는데, 그 배경에는 군집본능이 작용한다. 비슷한 것들을 가정하는 것은 ‘비슷한 영혼들’을 전제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상호동의와 지배권이다. 논리는 사물들을 동등하게 보려는 근본적 경향으로 유용성과 해로움, 성공에 대한 고려에 의해 조절되어 왔다. 우리 정신의 속성은 감각인상을 기존 인상 속에 포함시키는 동등을 원한다. 이와 같은 동등 추구는 일종의 권력의지다. ‘무엇인가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은 가능한 한 동일해지려는 어떤 의지의 결과이지, 진리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범주들을 발명했던 힘은 우리의 필요성-안전할 필요성, 기호와 소리를 바탕으로 신속히 이해하려는 필요성, 축약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실체, 주체, 객체, 존재, 생성은 형이상학적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물들의 이름을 법으로 정한 사람은 강력한 사람들이었고, 범주를 창조한 사람들은 그들 중에서도 추상개념에 탁월한 예술가였다.

도덕이 오랜 테스트를 거쳐 효율성을 지닌 하나의 삶의 법이자 지배적 힘으로서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성의 범주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성의 범주들도 수많은 암중모색과 실수를 거친 뒤에야 유용성을 획득해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 어떤 사람이 범주들을 모두 떠올리고 믿으라고 명령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 이후로 범주들은 선험적인 것으로 반박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목적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용적 필요가 요구하는 만큼 카오스에 규칙성과 형태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의 범주의 형성에서 가장 결정적인 힘은 우리가 내적으로 느끼는 필요이다. ‘알’ 필요가 아니라, 이해와 추측을 위해 분류하고, 도식화할 필요가 바로 그 힘이다. 모든 것을 비슷하고 동등하게 만들 목적으로 조정되고 해석하는 것, 즉 모든 감각적 인상이 거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이 이성의 발달과정이다. 오직 실용적 사실, 말하자면 사물들을 대략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볼 때에만 그것들을 헤아리고 관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사실만 작용하고 있다. 이성의 최종 형태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논리학의 공리들(ex: 모순율)은 존재의 절대기준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한 일종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논리학이 진리에 대해 무엇인가 선언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한편 개념에 어떤 모순도 허용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개념을 형성할 수 있고, 그 개념이 어떤 사물의 특성을 밝힐 뿐만 아니라 그 사물의 핵심까지 포착해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이다. 그러나 사실 논리학은 우리 자신이 고안안 존재의 도식에 따라 실제 세상을 더 용이하고 공식이 잘 통하는 세상으로 만들려는 시도일 뿐이다.

생각하고 결론을 끌어내려면 존재들을 전제해야 한다. 논리학은 오직 일정불변하고 동일한 것들을 위한 공식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같은 전제가 절대로 현실의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존재들’은 우리 견해의 일부일 뿐이다. ‘에고’는 하나의 존재(생성이나 진화의 영향을 받지 않음)로 여겨진다. 주체나 실체, 이성 등 가상세계가 필요하며, 조정하고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어떤 힘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 진리는 의식에 닿은 다양한 감각들의 지배자가 되려는 의지다. 또한 진리는 현상들을 명확한 범주에 따라 분류하려는 의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들의 본질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시작한다.(우리는 현상을 진정한 것으로 여긴다)

생성 상태에 있는 세상은 공식 같은 것으로 압축되지 않는다. 그것은 허위이고,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식과 생성은 서로를 배척한다. 따라서 인식은 다른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인식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사물들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생성 자체가 존재라는 환상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 때문에 우리는 ‘개체’ 따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존재들의 숫자가 늘 변화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들의 앞뒤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사물들이 있다는 식으로 대충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간과 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빈 공간’이라는 엉터리 사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일률도 똑같은 것이 있다는 현상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엄격히 말해 생성 상태에 있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고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식’이란 것은 오직 ‘이해하고, 인식하는’ 지성이 대략적으로 조정된 어떤 세계를 이미 발견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 세계는 단순히 현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꽤 고착되며, 이런 종류의 현상도 생명보존에 이롭게 작용한다. 인식은 이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최근에 있었던 오류와 그 전의 오류들을 서로 비춰가며 평가하는 것으로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논리적 외형에 대하여: ‘개체’라는 개념과 ‘종’ 개념은 똑같이 거짓이고 오직 표면적이다. 종은 단지 비슷한 생명체들이 한꺼번에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 생명체들의 추가적인 성장과 변화속도가 오랫동안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속도가 거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성장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와 증가는 전혀 중요치 않게 된다.(그도 그럴 것이 발달하는 과정에 진화의 단계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형상태가 이뤄진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어떤 실질적 목표가 성취되었다고 짐작하는 실수를 저지를 길이 열린다). 형태는 오래 지속되고, 따라서 소중한 그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형태조차도 단순히 우리에 의해 발명되었을 뿐이다. 또 ‘똑같은 형태’가 아무리 자주 성취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똑같은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무엇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이 서로 닮았을 경우에 그 둘을 놓고 비교‧평가하면서 두 가지에 형태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마치 어떤 유형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자면 그 형성과정에 어떤 유형이 실제로 의도되고 또 그 유형이 형성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즉 형태나 종, 법칙, 생각, 목적 이런 것들에서도 똑같은 오류가 저질러지고 있다. 말하자면 허구의 한 조각에 엉터리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현상이 무언가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모든 현상과 관련해서 행위를 하는 것과 그 행위가 향하는 것 사이에 인위적인 구분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적 의견에 따라 상정된 것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따라서 개념과 종, 형태, 목적, 법칙 같은 것을 구성하려는 충동을 마치 우리가 진정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나 서 있는 것처럼 으스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세상을 우리에게 이로운 쪽으로 배열하는 충동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성을 뒷받침하는 감각들의 기능에도 이와 똑같은 충동이 존재한다. 감각의 활동에도 단순화하고 대략적으로 다듬고, 강조하고 구성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사람의 모든 인식과 이해력은 바로 이런 것들에 의존하고 있다. 논리를 믿으려 드는 우리의 주관적 충동은 단지 논리 자체가 우리의 의식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논리의 기본 원리들을 사건들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원리들은 지금 우리가 사건들 속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그런 가운ㄷ에 우리는 논리를 믿으려 드는 충동이 진리와 연결된 무엇인가를 보증한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건들 속에서 그 원리들을 발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왜냐하면 ‘사물’과 ‘동일한 사물’, 주체, 속성, 행위, 대상, 실체, 형태를 창조한 것이 바로 우리이며, 이 창조가 오랜 세월에 걸쳐 동등화하고, 대충 다듬고, 최대한 단순화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이뤄졌다. 이제 세상은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인다.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논리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답: 우리는 이성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모호한 개념들의 철학이다. 언어는 더없이 순진한 편견들에 의존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사물들에서 불일치와 문제들을 읽어내고 있다. 불일치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의 형태로만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언어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사고를 그만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같은 한계를 한계로 보면서 회의를 품는 단계까지 좀처럼 이르지 못한다. 합리적 사고란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식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6. 의식/#523~529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을 똑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으로 보는 것은 중대한 실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현상에 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움직임이나 변화 원인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면서 인과관계를 날조해내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하는 역할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은 우리와 외부세계의 관계이며, 우리의 의식을 발달시킨 것은 오직 외부세계이다. 의식된 것은 우리의 인식이 완전히 모르고 있는 그런 인과관계에 연루되어 있다.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 감정들, 관념들의 순서는 결코 인과관계의 순서가 아닌데도 겉보기에 꼭 인과관계의 순서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성과 이성, 논리 등-이런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상상 속의 가공물이며, 실체다-에 관한 우리 생각 전부를 이 같은 표면상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표면상의 진리를 만물 속으로, 뒤로 투여시킨다. 사람들이 사물들을 더듬다가 통일체 같은 것을 관찰하는 곳마다 그와 같은 조정이 이뤄지는 원인으로 언제나 정신을 들었다. 이것을 근거 없는 가정이다. 복합적 사실이라는 생각이 이 사실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복합적 사실이라는 개념이 그 사실의 원인으로 선행되어야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최종적 상태를 정신을 빌려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정신에게만 돌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신경계의 영역은 그보다 훨씬 넓으며, 의식 영역은 거기에 보태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응과 체계화의 집단적 과정에서 의식은 전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식을 과대평가하여 실체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정신을 하나의 원인으로 여기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신으로 분류하고, 효과가 관찰되는 곳마다 자유의지가 개입하는 것으로 여기고, 진정한 세계는 의식의 사실들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세계로 여기고, 절대적 인식이 의식의 기능인 것으로 여기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의식은 전진하는 걸음으로 여겨지고, 변증법을 통한 진정한 존재에 가까이 가는 접근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인간을 하나의 신으로 만들고, 모든 선의 뿌리를 정신적 경향에 두는 인식이 생겨났다.

 

7. 판단, 진리냐 거짓이냐/#530~544

칸트는 인식이란 것이 ‘판단’들로 이뤄져 있으며, 그런 판단들을 끌어 모아 보편타당한 인식체계로서 학문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런데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진리는 경험이 아닌 다른 원천(순수이성)에서 나온다 한다. 과연 그런 단언들이 진리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인식에 있어 믿음은 심리적 시원일진대, 매우 편협한 경험을 한 경우 자주 그런 믿음을 낳는다.

그 믿음-이데올로기적- 자체가 이미 후험적이면서 선험적 자료들 모두에 기초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런데 필연과 보편타당성이라는 개념은 경험과는 무관한 것이다. 과연 판단이란 것이 완벽하게 고립된 그 무엇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립판단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그건 인식이 아니다. 오로지 많은 다른 판단들과의 연결 속에서만 어떤 판단이 진리일 수 있다.

하나의 판단은 종합적이다. 말하자면 다양한 생각들을 연결한다는 뜻이다. 어떤 판단이 ‘선험적이다’라는 말을 모든 연결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필요하며, 그 판단은 감각을 통한 인식이 아니라 순수이성에 의해서만 이뤄진다는 뜻이리라. 만약 선험적 종합판단 같은 것이 있으려면, 이성이 연결을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줘야 한다. 연결은 하나의 형태이고, 그렇다면 이성은 형태를 부여하는 능력도 가져야 한다.

판단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이다. 판단은 이것이 진실이거나 거짓이라 믿거나, 어떤 것이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긍정 혹은 부정하는 우리의 습관이며, 또 우리가 진정 ‘알고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모든 판단에서 진리로 믿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단순히 변화로 보지 않고, 우리가 ‘인식’할 뿐인 그런 낯선 ‘물자체’로 여겼다. 그것들을 현상으로 분류하는 대신 존재로, 속성으로 분류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속성이 결합할 실체까지 발명해냈다. 즉 우리는 결과를 그 같은 효과를 낳은 원인으로, 이 원인을 하나의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라는 개념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확실한 변화의 경우에도 우리 자신이 그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이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변화에는 변화의 장본인이 있다’는 식의 믿음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신화이다.

판단은 인식이 아니라 신앙이다. ‘이것과 저것은 이러이러하다.’라는 식이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에는 ‘동일한 예’를 경험했다는 인정이 수반된다. 그래서 판단은 기억의 도움으로 어떤 비교를 당연히 행하게 되어 있다. 판단은 똑같은 예가 거기에 있는 같다는 생각을 창조해내지는 않는다. 그보다 판단은 그런 예를 실제로 지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판단은 동일한 예 같은 것이 있다는 가설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모든 감각들 안에서 일종의 평등화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떠한 판단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억이란 것이 이미 경험하고 학습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이 이뤄지기 전에 먼저 동화의 과정이 마무리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상처에 수반되는 통증과 똑같이 의식에 들어가지 않는 어떤 지적 활동이 관찰된다. 말하자면 정신적 현상들이 동화와 배제, 성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제아무리 강할지라도 그 믿음의 정도가 진리의 기준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란 말인가? 진리는 삶의 한 조건이 된 신안의 한 종류인가? 그렇다면 인과관계에서는 틀림없이 힘의 기준이 될 것이다.

진리의 기준은 권력 감정의 강화에 있다. 나의 사고에 따르면 ‘진리’가 반드시 오류의 반대를 의미하진 않고, 다양한 오류들의 상호관계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어떤 오류는 다른 오류들에 비해 더 오래되었고, 더 깊고 더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오류가 없었다면 인간 같은 유기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반면 다른 오류들은 삶의 조건으로 우리를 광범위하게 압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다른 ‘압제자들’의 기준과 비교하면 옆으로 제쳐둘 수도 있고 ‘반박될’ 수도 있다.

단순한 모든 것은 단순히 상상일 뿐이며, 절대로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인 모든 것은 하나의 통일체도 아니며, 통일체로 환원될 수도 없다. 무엇이 진리인가? 타성(惰性)이다. 만족을 안겨주면서 정신적 힘의 소비를 최소화하는 가설이 진리다. 첫 번째 명제, 보다 쉬운 사고방식이 언제나 어려운 사고방식을 누른다. 단순함이 진리의 신호라는 독단, 명쾌함이 진리를 뒷받침하는 증거라 주장하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두 번째 명제, 존재와 사물들, 온갖 항구적 실체들에 대한 가르침이 생성과 진화에 관한 가르침보다 백배는 더 쉽다. 세 번째 명제, 논리는 사고를 용이하게 할 방법으로, 표현의 한 수단으로 쓰일 목적이었다. 진리로 여겨질 목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논리가 진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눈이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종류도 많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리란 없다.

기본적으로 허위의 세상에서 정직성은 자연에 반하는 경향이다. 그런 경향은 보다 높은 수준의 허위에 닿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와 존재의 세계가 발명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직한 인간이 만들어져야 한다. 단순하고, 투명하고, 자기자신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지긋하고,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실수나 급변, 위선, 형식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부류의 사람이 어떤 존재의 세계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그린 ‘신’으로 인식한다.

생물체들 사이에서 위계가 높을수록 '위장'도 늘어난다. 무생물의 세계엔 위장이 전혀 없으며, 힘과 힘이 꽤 거칠게 맞선다. 계략은 생물들의 세계에서 비롯되며, 식물들은 계략의 고수다. 케이사르와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인간들은 보다 높은 민족들(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오디세우스)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교활하고, 그 특성은 인간의 고상함의 핵심을 이룬다.

배우의 문제. 나의 디오니스소의 이상, 모든 유기적 기능의 관점, 생명력 강한 모든 본능들의 관점,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 나아가 오류를 사고의 첫 번째 원리로 삼으려는 태도, '생각'이 가능하려면 먼저 공상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동일한 예들을, 정체성이 비슷한 것들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8. 인과론에 대한 반대/#545~552

힘의 바탕으로 절대적 공간을 믿으며, 제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시간은 영원하다. 다만 공간과 시간은 물 자체로 존재하진 않는다. 변화는 겉모습일 뿐이다. 어떤 현상을 하나의 행위로 해석하거나 행위를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든 변화는 행위자아 그 영향을 받아“변화하는” 누군가를 전제한다.

시각화되는 육체와 사물, 전체는 행위자와 행위가 구분된다는 생각을 일깨우고 마침내 주체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종국적으로 하나의 원인으로 여기는 터무니없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 주체와 객체, 속성 같은 구분이 날조되었으며, 모든 현상들에 하나의 도식으로 적용되고 있다. 근본적인 엉터리 관찰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판단에는 주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에 대한 깊은 믿음(모든 결과는 하나의 작용이고, 모든 활동은 행위자를 전제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무엇인가에 주목하게 되면 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인과관계에 대해 특별한 믿음을 갖는 것은 과정의 순서를 찾으려고 하는 투박한 습관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계획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ㄴ 우리의 무능력이다.

우리는 원인에 대한 어떠한 경험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원인이라는 주관적 확신에서 원인의 개념을 끌어내고 있다. 어떤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그것이 일어난 방식에 대해 책임질 주체를 날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현상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현상의 예상가능성은 거기서 어떤 규칙성이 발견되거나, 필연이 작용하거나, 우리가 모든 현상들에 인과성의 법칙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예상가능성은 바로 동일한 예들의 회귀에 있다. 칸트가 우리로 하여금 믿게끔 한 인과성의 감각 같은 것은 절대 없다. 소위 인과성의 본능은 낯선 것에 대한 공포에 지나지 않으며, 또 낯선 것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인과성의 본능은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찾는 것이다.

무슨 일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로부터, 그래서 짐작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그 일이 반시 일어난다는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 사물들 안에 있는 충동은 증명불가능하다. 필연은 확립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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