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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 > 2권 지배가치들에 대한 비판 > 3장 철학에 대한 비판 (2020.6.22)

 

  # 전체맥락과 연결고리  (니힐리즘의 생성매커니즘 2경로)

 

(1) 니힐리즘의 생성매커니즘1. (가치평가의 결과로서 니힐리즘 :: 역사적 유래, 종교와 도덕)

*최고의 가치들이 탈가치화되는 것 : 시대의 지배적 가치들이 가치(권위, 믿음)를 잃어버리는 것!.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최고가치들이 세상을 해석한 결과이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간이 추구해온(지켜온) 최고가치들에 대한 믿음의 상실에서 생긴다.)

①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평가가 ······> 허위로 드러나면서 니힐리즘이 생긴다.

② 세상에 대한 도덕의 가치평가에 ······> 회의가 일어나면서 니힐리즘이 생긴다.

(2) 니힐리즘의 생성매커니즘2. (심리적 상태로서 니힐리즘 :: 본질적 조건, 철학)

"이성의 범주들(목표ㆍ전체성ㆍ존재)에 대한 믿음이 니힐리즘의 원인이다." 
"우리는 세상을 평가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결국 인간 자신을 위해 동원했던 가치(목표ㆍ전체성ㆍ존재)가 적용불가능해지자, 세상을 평가절하시켰다."

① 어떤 사건에서 있지도 않은 '의미(목표)'를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낙담하게 될 때, 우리는 니힐리즘 상태에 이른다.

② 자신의 가치를 위해 '전체성(ex. 보편적 이상)'을 고안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니힐리즘에 빠진다.

③ 심리적 필요에 의해 '참된 세계'를 발명하고, 그것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니힐리즘이 생겨난다.

 

  1. 일반적 고찰   (철학자들의 미신=선입견에 대하여)

 

1. 철학자들이 혐오하는 것과 믿고 있는 것, 그리고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p302_#407) 철학자들은 가상, 변화, 고통, 죽음, 신체적인 것, 감각, 운명이나 부자유, 목적없는 것에 반항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1. 절대적 인식, 2. 인식을 위한 인식, 3. 미덕과 행복의 연결, 4. 인간 행위의 인식가능성을 믿고 있다. 

(p303_#408) 철학자들에게 1. 역사적 감각, 2. 생리학 지식, 3. 미래를 향한 목표, 그리고 모순이나 도덕적 비난 없이 비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2. '인식에 있어서의 도덕' 혹은 '인식론적 독단'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니체의 방식은 무엇인가?

(p303_#409) 인식에서의 도덕 :: 철학자들은 언제나 감각을 무조건적으로 불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였다. 철학자들이 최후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개념을 증여받거나 순화하고 해명하기만 해서는 안되며, 개념을 제작하고 창조하고 제공하여, 그 개념으로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치 어떤 경이의 세계로부터 불가사의한 하사품처럼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믿었다.  ......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믿음은 인식의 도덕적 요소(*개념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속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전승된 개념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이다.

······> 개념=가치에 대한 니체의 방식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개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방식(그 개념에 대한 가치를 전환하고 용법을 달리함으로써) 

(p304_#410) 인식론적 독단 :: 인식론적 독단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기 때문에, 나는 때로는 이쪽 창을 통해, 때로는 저쪽 창을 통해 보기를 좋아하고, 그러한 독단에 고정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내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오히려, '인식론적 회의나 독단은 어떤 저의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근본적인 저의(힘에의 의지)에 비하면 인식론적 회의나 독단은 부차적인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 인식론적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니체는 관점의 이동을 통한 가치평가 방식(때로는 이쪽 창을 통해, 때로는 저쪽 창을 통해 보기=퍼스펙티비즘)을 취했다.

 

3. '철학이 도덕의 지배 아래 놓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러한 철학은 어떻게 지배권력(국가)의 수단이 되는가?

(p305_#412) (*도덕에 대한) 절대적 권위에 익숙해지면, 마지막에는 (*도덕에 대한) 절대적 권위에 대한 욕구가 생겨났다. 도덕적 권위의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 칸트 시대와 같은 비판시대에서도차, 도덕적 권위의 욕구는 비판의 욕구를 압도했다. 도덕적 권위의 욕구는 헤겔의 진화철학(역사학이 이을을 바꿔철학이 된)까지도 굴복시켜, 역사는 도덕적 이념(*절대정신)이 진보를 계속하는 자기계시, 자기극복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 플라톤 이래 철학은 도덕의 지배 아래 있다. 플라톤의 선행자들에게 있어서도 도덕적 해석은 결정적으로 깔려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만물의 소멸은 순수존재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대한 벌이며, 헤라클레이토스에게 현상의 규칙성은 총체적 생성이 도덕적으로 올바른다는 증거인 것이다.) 

(p306_#413) 지금까지 철학의 발전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도덕적 저의이다.

(p306_#414) 어느 시대에나 '아름다운 감정'은 주장의 논거로, '벅찬 가슴'은 신성의 정신적 환희로, '확신'은 진리의 기준으로, '반대자를 제거하고 싶은 욕구는 지혜에 대한 의문부호로 여겨졌다. 이러한 허위, 화폐위조가 철학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 지적 정직성의 본능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p307_#415) 헤결의 통속적인 측면은 전쟁과 위인에 대한 가르침이다. '정의는 승리자에게 있는데, 승리자는 인류의 진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의 지배를 역사로부터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 칸트의 도덕적 가치의 왕국(*칸트의 비판주의)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철수했고, 그 왕국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참되다. / 헤겔의 진화(*헤겔의 역사주의)는 입증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도덕의 왕국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 우리는 칸트나 헤겔의 수법에 속지 않는다. 우리는 더이상 그들처럼 도덕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의 권리를 위한 어떤 철학도 필요하지 않다. 이점에서 비판주의(*칸트)나 역사주의(*헤겔)도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지니지 못한다.

(p307_#416) 그런데 이 장업한 계획(*헤겔철학)이 어쩌다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의 타당성을 승인하는 것처럼, 기존의 권력들(국가등)에 의해 악용되었다.

 

4. 당시 지배적인 철학적 가치에 대한 니체의 관점은 무엇인가?

(p307_#416) 추함에 대해 :: 나 자신은 이 세상의 추함에 대해, 미학적 정당화(*[비극의 탄생])를 위해 노력하였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를 일시적으로 삶을 보존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나에게 고통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영원한 파괴의지영원한 창조의지이다. (*영원히 파괴하지 않을 수 없는 것das ewig-Zerstören으로서의 영원히 창조하는 것das ewig-Schaffenda이다.) 추한 것이란, 의미를 상실해버린 것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p308_#417) 개체적 몰락과 일반적 생성의 동일화 = 생명의 원리, 영원회귀 ::  나의 첫번째 해결책은 디오니소스의 지혜. 현존하는 가장 고귀한 것의 몰락에서 느끼는 쾌감은 사실상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느끼는 쾌감에 다름 아니다. 디오니소스적이란, 생명의 원리와 일시적인 동일화(순교자의 환희도 포함)를 말한다. 나의 혁신은 페시미즘을 더울 발전시켜 지성의 페시미즘이 되게 하고, 도덕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지막 위안을 제거한다. ...... 1) 쇠퇴와 인격의 약화에 맞서 새로운 중심을 추구했으나, 2) 이 같은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3) 그래서 나는 해체의 길을 따라 더 멀리 나아갔다. 그 길에서 나는 개인들을 위한 힘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했다. 우리는 파괴자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개인적 존재의 해체상태는 일반적 생존을 복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 해체와 미완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감각에 맞서, 나는 영원회귀를 붙들었다. 

(p309_#418) 사람들이 세계의 상을 찾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충동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철학 속에서이다. 나의  철학도  그와 같은 기분을 갖게 할 것이다. 

 

5. 철학자와 과학자(학자)는 어떻게 다른가?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 사실에 대한 굴복과 가치평가)

(p311_#420) 나는 누구에게도 철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 철학자가 진귀한 식물이라는 것은 필연적이며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네갈이나 키케로 같이, 철학을 교훈적이라고 칭찬하는 것보다 나에게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철학은 미덕과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감히 말하건대, 과학자der wissenschaftliche도 철학자Philosophen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p311_#421) 나는 철학자의 가장 곤란한 이상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워서 터득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학자der Gelehrte란 인식영역의 무리동물이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명령받고 있고 모범이 있기 때문이다. 

(p311_#422) 철학자들에 대한 미신. (*철학자와) 과학자와의 혼동. 마치 가치는 사물들 안에 고유하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오늘날 권력은 과학자들에게 넘어갔다. '사실'에 대한 굴복이, 일종의 숭배가 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가치평가를 소멸시키고 있다. / 이같은 오해를 설명하자면, 명령하는 자는 드물게 나타나며, 그는 자기 스스로를 오해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그것을 상황으로 돌린다.

(p313_#423) 이론과 실천. 이것은 숙명적 구분이다. 마치 이로움ㆍ해로움과 상관 없이 맹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인식충동이 있으며, 그와 는 별도로 실천적 관심의 어떤 세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이에 대해 내가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은, 순수이론가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어떤 충동인가, 어떻게 그들은 숙명적으로 그 충동의 주문에 묶여 진리인 어떤 것을 겨냥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양한 인식체계 사이의 투쟁은 (인식론적 의혹 사이의 투쟁을 포함하여), 특정한 본능(생명력과 쇠퇴, 계급, 종족 등의 형식) 사이에서의 투쟁이다.

 

6. 도덕이란 무엇이고, 도덕주의자는 어떤 존재인가?

(p314_#423) 도덕은 대단히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기묘한 학문이다. 이 때문에 도덕이 해답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거나, 순수인식의 입장과 과학적 정식성은 곧바로 포기된다. /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도덕적 질문의 긴박성을 가지고 최고로 진화한 유형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어느 종이 자신의 규범을 영구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제시하는 것이 바로 도덕이다. / 도덕적 양심(행위의 가치들을 의식하는 것)의 출현은 어떤 병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강한 시대와 민족은 스스로의 권리ㆍ행위의 원리ㆍ본능이나 이성에 관하여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한다는 것은 곧 본래의 도덕성(행위의 본능적 확실성)이 허사가 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도덕주의자는 새로운 의식의 세계가 창조될 때마다, 언제나 손상ㆍ빈약ㆍ혼란의 징후이다. / 도덕주의자는 도덕성이 쇠퇴하고 있는 시대에 출현한다. 도덕주의자는 그가 도덕의 복구자라고 믿고 있더라도, 도덕적 본능의 해소자이다. 도덕주의자의 행동은 도덕적 본능이 아니라 데카당스 본능을 촉진하고 있다. 강한 종족이나 시대의 도덕본능을 지배하고자 하는 데카당스 본능은 (1) 약자와 체질적으로 형편없는 자들의 본능이고, (2) 예외자, 은둔자, 이탈자, 다양한 결함을 지닌 자들의 본능이고, (3) 자신의 처지를 고상하게 해석하고, 따라서 생리학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습관적으로 고뇌하는 자들의 본능이다.

 

7. 철학자들의 객관성은 무엇이 문제인가?

(p315_#424) 객관성이 냉정한 비인격성을 요구할 때, 가소로운 허영심을 갖고 있다. 생뵈브가 그런 예이다. 그는 때로 흥분과 열정을 가지고 '찬성'하거나 '반대'한 일이 있음을 평생동안 근심했고, '그 일을 없었던 일로 그 생애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p316_#425) 철학자들에게 '객관성'이란, 스스로에 대해 도덕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뜻이고, 좋거나 나쁜 결과에 무관심하다는 뜻이고(결과의 옳고 그름에 대한 맹목성), 위험한 수단의 사용에 있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격의 완고함(도착)이나 다중성은 장점으로 여겨진다. 

 

8. 철학자들은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이것과 [도덕의 계보] 서문과 비교해보자!)

(p316_#425) 나는 자신에 대한 깊은 무관심. 내는 나의 인식으로부터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으며, 나의 인식에 수반되는 어떤 손실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성격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나의 성격을 이해하려고도 변화시키려고도 노력하지 않는다. 덕을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는 생각은 한순간이라도 나의 염두에 떠오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우에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인식의 문이 닫힌다고 생각된다. 스스로의 도덕성을 너무나 중요시하여, 반대되는 도덕성을 요구할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 여기서는 일종의 도덕성의 유산이 전제되고 있다. 대부분을 낭비하고 내던져도, 그것 때문에 가난해지는 일도 없음을 눈치채고 있는 까닭이다. 한번도 '아름다운 영혼'을 경탄한 일이 없고, 항상 그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덕의 괴물에게 마음으로부터 조소하는 일, 미덕을 능욕하는 일의 은밀한 즐거움! /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해야 하며, '더욱 선하게' 되거나 일반적으로 '다르게' 되는 것조차 바라지 않아야 한다. 온갖 도덕의 촉수나 그물을 사물들 쪽으로 던지지 않을 만큼 강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p317_#426) 우리들 미래의 심리학자는 자기 관찰에는 너무나 성의가 없다. 우리는 어떤 도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쇠퇴의 신호로 여긴다. 우리는 인식의 도구이며, 도구로서 순진성과 정밀성을 갖고 싶어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분석'하거나 '알아서는' 안된다. / 위대한 심리학자의 자기보존 본능의 첫째 특징은 결코 자기를 탐구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에 대해서는 어떤 눈도 어떤 관심도 어떤 호기심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 의지의 위대한 이기주의는 우리 자신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을 것을, 그리고 우리가 '비인격적'이고 '냉담하게' 보일 것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극단적으로 그 반대인가! / 우리는 '영혼의 구원'에, 우리 자신의 행복에, 우리 자신의 미덕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걱정해야 할 만큼 시간도 없고 호기심도 없다. 좀더 깊이 관찰하면 여기서도 문제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배꼽의 관찰자Nabelbeschauern 따위를 철저히 불신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관찰을 심리학적 천재의 변질형식이라고, 심리학자의 본능에 붙여진 의문부호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기 위해 본다'는(오직 보겠다는) 의지를 그 배후에 지닌 화가의 눈을 두고 쇠퇴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도덕의 계보. 서문]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2. 그리스철학에 대한 비판   (도덕적 가치에 의한 철학적 가치의 지배)

그리스철학 계보.jpg

 

8. 소크라테스 이후의 그리스철학자 가운데, '소피스트'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적이며, '철학자'는 어떻게 반동적인가?

('소피스트'와 '철학자'의 표현은 어원적 대립에서 나온 것. 소피스트의 어원은 지혜로운 자를, 철학자의 어원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의미한다.)

(p318_#427) [1. 그리스철학 일반] 소크라테스시대 이후 그리스철학자들은 데카당스의 징후이며, 반 그리스적 본능이 지배하기 시작한다.(상위를 차지한다) [2. 소피스트] '소피스트'는 꽤 그리스적이다. 과도기적 형식으로서만 그리스적이다(*과도기적이란,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있으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그리고 이오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포함된다. 폴리스는 문화의 통일에 대한 믿음을, 다른 폴리스에 대한 지배권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문화가 말하자면 '신들'이 교환되고, '토착신'의 독점적 특권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다. 다양한 기원을 가진 선과 악이 서로 뒤섞이고, 선과 악을 나누던 경계가 점진적으로 허물어진다.  ...... 이것이 '소피스트'이다. [3. 다른 철학자들] 한편 '철학자'는 반동적이다. 옛날의 미덕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도의 쇠퇴가 쇠퇴의 원인이라고 인식하며, 그래서 옛날의 제도를 살리길 원한다. 그는 권위의 쇠퇴가 쇠퇴의 원인이라고 인식하며, 새로운 권위를 찾아구한다(외국에 대한, 외국문학에 대한, 외국종교에 대한 여행......) 그는 '폴리스'라는 개념이 전성기를 지나버린 후, 이상적 폴리스를 의욕한다. (마치 유대인이 노예상태에 빠젼든 후, '민족'으로서 스스로를 유지했듯이) 그들은 온갖 전제군주에 대해 관심을 품으며, 불가항력으로써 미덕을 재건하려고 의욕하기 때문이다. 

[4. 그리스철학의 반그리스적 본능] 진정한 그리스적인 것에 쇠퇴의 책임이 지워진다.(예언자들이 다윗이나 사울에 대해 배은망적한 것처럼, 플라톤은 페리클레스, 호메로스, 비극, 웅변술에 대해 배은망덕하다.) 그리스의 쇠퇴그리스적 문화의 기초에 대한 이의라고 이해되는 것은, 철학자들의 근본오류이다. 결론은 그리스적 세계가 철저하게 몰락한다는 것이며, 그 원인은 호메로스, 신화, 고대의 습속도덕으로 여겨진다. 철학자들의 가치판단의 반그리스적 발전이 이미 플라톤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반그리스적 발전이란) 즉 이집트적인 것(심판으로서의 '사후의 삶'), 셈sem적인 것('현자의 존엄, 족장'), 피타고라스학파, 지하적인 것의 숭배, 침묵, 피안이라는 공포수단, 수학 / 즉 종교적 평가, 삼라만상과의 일종의 교제(승려적인 것, 금욕적인 것, 초월적인 것), 변증법(메스껍고 현학적인 개념의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 뛰어난 정신적 취미가 쇠퇴하고, 모든 노골적인 변증법이 지닌 추악이나 요란함에 이미 둔감해지고 있다. [5. 데카당스 운동의 양극단] 데카당스 운동의 양극단이 서로 병행하여 나아간다. (a) 매력적이고 사치스러운 종류의 사치와 예술을 애호하는 데카당스와 (b) 종교적 도덕적 파토스의 우울, 스토아적 자기경직, 플로톤적 관능비방, 기독교에 대한 지반의 준비가.

 

9. 도덕은 그리스철학을 어떻게 타락시켰는가? 당시 지적 정직성(소피스트)과 플라톤의 정직성은 무엇인가?

(p319_#428) 고대철학자 중에 '부자유 의지'이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제기할 기력있는 자는 없었으며, 모든 종류의 쾌감의 전형적인 것('행복')을 힘감정으로 정의할 기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었다. 왜냐하면 힘으로 느끼는 쾌감은 비도덕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덕을 종족ㆍ폴리스에게 봉사하는 비도덕성(권력의지)의 결과라고 파악할 기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었다. 왜냐하면 권력의지는 비도덕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도덕의 전체 발전 가운데에는 아무런 진리도 나타나지 않는데, 모든 개념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심리학은 위조이며, 이 거짓말의 나라에 억지로 끌려드는 이론의 온갖 형식은 궤변이다. 도덕철학자들 자신을 특징짓는 것은 지적인 명료함과 자제력의 결여이다. 즉 그들은 '아름다운 감정'을 논거로 간주하고, '벅찬 가슴'을 신성의 외침으로 듣는다. 도덕철학은 인간지성의 역사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시기이다. 

최초의 커다란 본보기는, 도덕의 이름으로 도덕의 보호자로서, 실제로는 데카당스에 지나지 않는 전대미문의 불법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위대한 그리스철학자들이 모든 그리스적 데카당스의 능력을 대표하며, 그것을 전염성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처럼 완전히 추상화된 '덕'이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추상화시킨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실속없게 만든 최대의 유혹이었다. 

이 순간은 극히 주목할 만한데, 소피스트들이 비로소 도덕에 대한 비판에, 비로소 도덕에 관한 통찰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소피스트들은 도덕적 가치판단의 다수성(도덕적 가치평가가 현지의 조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든 도덕이 변증에 의해 시인된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도덕의 모든 기초가 필연적으로 궤변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헤아린다. 이는 나중에 플라톤 이래(칸트에 이르거니와) 고대철학자들에 의해 대규모로 증명된 명제이다) 그들은, "도덕 그 자체, 선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속임수다"라는 최초의 진리를 세운다. 

도대체 당시의 지적 정직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그리스문화 전체의 그리스적 본능에서 생장해온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문화가 페리클레스 시대의 문화에 속하는 것은, 플라톤이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다. 그것은 그 선구자를 헤라클리에토스와 데모크리투스와 고대철학의 과학적 전형 속에 그 표현을 가지고 있다. 마침내는 이 문화의 올바름이 명백해졌다. 인신론적인 또한 도덕주의적인 인식이 진보할 때마다, 소피스트들은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우리들의 사고법은, 고도로 헤라클레이토스적이며 데모크리투스적이며 프로타고라스적이다. 그것은 프로타고라스적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데모크리투스 양자를 한몸에 겸비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어쩌면 플라톤의 정직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플라톤은 육체체서 유리된 '영혼'의 존재나 불멸이라는 것을 절대적 진리로 가르치려고 의지했다)

(p321_#429) 소피스트들은 현실주의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가치들과 실천들을 정식화하여 가치의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강한 정신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비도덕성을 알 기력'이 마침 있었던 것이다. 

분노하고 질투한 나머지 서로를 먹어치울 것 같은 작은 그리스 자유도시가 인간성과 정직의 원리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고 도대체 믿을 수 있을까? 아테네의 사자들이 '멸망이냐 항복이냐'를 두고 멜로스 섬사람과 협의했을 때, 그들의 입을 통하여 하게 한 연설을 두고 투키디데스를 비난할 수가 대체 있을까?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긴장의 한복판에서 덕에 관해 말할 수 잇는 것은 완전한 위전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실로부터의 이탈자, 은둔자, 도망자, 이주자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그리스인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미덕이나 공정을 두둔했을 때, 그들은 유대인이나 다름 없었다. 조지 크로트가 소피스트들을 변호하고 있는 논법은 잘못된 것이다. 그로트는 그들을 명예로운 인간이나 모범적인 도덕가로 높이고자 원했겠지만, 그들의 명예는 호언장담이나 덕으로써 아무런 속임수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10.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어째서 반그리스적인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니체의 '대적할 만한 적', 맑스의 '내재적 비판'과 비교해보자!

(p322_#430) 모든 도덕교육의 밑바탕에 작용하고 있는 합리성은 '본능이 확실성을 확보하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좋은 의도도 좋은 수단도 그 자체로서 먼저 의식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병사가 훈련받는 것처럼, 인간은 행위한 일을 배워야 한다. 사실 이 같은 무의식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완전성에 속한다. 수학자조차도 계산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반작용(변증법을 덕에 이르는 길로서 추천하고, 도덕이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합리화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롱했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바로 '논리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도덕의 뛰어난 점에 속하고 있다. 무의식성 없이 도덕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도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증가능성이 미덕에서 개인적 탁월함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었을 때, 그것은 그리스적 본능의 해체를 의미한다. '덕이 높거나' 말이 많은 사람은 모두 해체의 유형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 그 조건(거기로부터 생장하고 거기에서만 의미를 갖는, 그리스적이고 정치적인 지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순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외관을 꾸며 그 자연성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이라든가 '공정'이라든가 하는 위대한 개념은, 그것이 속하는 여러 전제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된 '이데아'로서 변증법의 대상이 된다. 사람은 그러한 이데아의 배후에서 하나의 진리를 탐구하고, 그들 이데아를 실체나 실체의 기초로 간주한다. 즉 그것들이 거주하고 있고, 그것들이 유래하는 하나의 세계가 고안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불법은 플라톤에 있어서 이미 그 절절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추상적이고 완전한 인간ㄷ이 그 위에 덧대어 날조할 필요가 있었다. (선량한ㆍ공정한ㆍ현명한 변증가를, 요컨대 고대철학자들의 허수아비를, 온갖 토양으로부터 풀려난 식물을. 지배하려는 본능이 완전히 결여된 종류의 인간이며, 근거를 들어 스스로를 '증명하는' 덕이다. 완전히 부조리한 '개인' 그 자체! 최고급의 부자연.

요컨대, 도덕가치의 자연성이 박탈됨으로써, 변질되어가는 인간유형이, '선한 인간 그 자체', '행복한 인간 그 자체', '현명한 인간 그 자체'가 창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치의 역사에 잇어서 가장 깊은 도착의 한 계기이다. 

(p324_#431) 소크라테스, 변증법에 유리하게끔 그리스의 취향을 변화시킨 그는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변화를 일으킨 평민 소크라테스가, 그것으로써 고귀한 취향을 극복하기에 이르렀다. 천민이 변증법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변증법적 방법은 모든 우월한 사회에서 거부당했다. 그것은 (*상대의 약점을) 폭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청년들은 그런 방법에 대해 경고를 받고 있었다. 명령, 이것으로 충분했으며, 동료들 사이에는 내려져오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도 또한 하나의 권위이며, 최후에는 '서로 이해했다.' 변증법이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논거를 공공연하게 대려는 태도는 신뢰받지 못하였다. 모든 건실한 사물은, 근거를 그런 식으로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섯손가락을 죄다 펴보인다는 것에는, 뭔가 야비한 데가 있다. '증명해야 하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 모든 연설가는 본능적으로 '변증법은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설득력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변증가의 효과만큼 소실되기 쉬운 것도 없다. 변증법은 오직 정당방위에 지나지 않는다. 곤혹 속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강탈당할 때가 아니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변증가이고, 여우 르나르가 변증가이고, 소크라테스도 그러했다.

변증가들은 무자비한 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데, 그것으로 압제할 수가 있다. 그들은 승리함으로써 상대를 폭로한다. 그들은 희생자인 상대편에게 백치가 아니라는 증명을 맡긴다. 그들은 상대편을 격분시켜 어쩔줄 모르게 만들거니와 반면에 그들 자신은 냉정한 득의만만한 이성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의 지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변증가의 아이러니는 천민의 복수의 한가지 형식이다. 삼단논법의 칼날 같은 예리함에 억압당한 자들의 흉포함이 숨겨져 있는 까닭이다. 

플라톤의 경우, 그는 과민한 관능성이나 도취벽을 지닌 인간이었으나 개념의 마력이 지극히 컸던 까닭에, 자기도 모르게 개념을 이상Ideal형식으로 외경하고 신성시하였다. (*플라톤의 '이데아'개념) 변증법의 도취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의식에 다름아니었다. 변증법 역시 권력의지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니체의 대적할만한 적 :: 기독교 이상, 도덕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 (*니체의 '대적할 만한 적' 개념)

(p279_#361) 내가 빈혈증세를 보이고 있는 기독교이상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기독교이상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이상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상(보다 강한 이상)을 위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이상이 지속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 중 하나이며, 기독교이상과 나란히 또는 앞질러 부상하려는 다른 이상을 위한 것이다. 다른 이상들은 강해지기 위해서 강한 적대자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리하여 우리 비도덕자는 도덕의 권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자기보존 충동은 우리의 적대자가 언제까지나 강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를 욕구하는 것이다.

맑스의 내재적 비판 :: 자본의 공식(가치증식) & 노동가치론(등가교환) ...... 이율배반의 해소 [자본을 넘어선 자본]

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치경제학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해결해 주려한다. 상대방을 작게 만들어서 쉽게 비판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잠재성까지 따라가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논지를 비판하는 방법. 니체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자랑할 만한 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맑스는 적을 자랑할 만한 것으로 키우면서 자산의 능력을 더욱더 키우고 있다.

 

11. 본능에 맞서는 동일설(행복=미덕=이성)이란 무엇인가?

(p326_#432) 나는 소크라테스의 문제가 어떤 편파적이고 특이한 상태에서 비롯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소크라테스가 이성과 미덕, 행복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p327_#433) 본능들의 난폭함에 맞서는 무기로서, 지성과 명확성, 엄격성, 논리. 본능은 위험함에 틀림없고, 또 파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성을 폭정의 수준으로까지 발달시킬 이유가 없을 테니까. 지성을 폭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먼저 본능이 폭군이라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 시절에는 이것이 매우 적절한 문제였다. 이성이 미덕이 되었고, 미덕은 행복과 동일시되었다. 

(p328_#434) 행복을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미덕이다. 미덕이 최고의 합리성이고, 합리성은 절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의 형태로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p332_#437) 피론의 삶은 위대한 동일설(행복=미덕=인식)에 맞서는 항의였다. 올바른 삶은 과학에 의해 촉진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현명'하게 만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삶은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며, 행복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3. 철학자들의 진리와 오류   (도덕에 의한 철학의 지배 / 진리와 오류 / 이론과 실천)

 

12. 철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 철학에 대한 당신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p339_#448, 449, 450) 칸트가 밝힌 철학의 정의가 "이성의 한계에 관한 과학"이라니!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철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탐구라는 정의에 반발하면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철학은 "삶의 기술"이라고 반박한다.

 

13. 인식의 3가지 입장은 왜 순진한가?

(p339_#450) 인식을 행복의 수단으로 보는 입장 / 인식을 미덕의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 / 인식을 삶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보는 입장

(p340_#451) 어떤 방법(수단)으로 접근가능한 '진리'가 있다는 듯이!

 

14.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에 대한 당신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p344_458)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위험스럽게 구분하는 것... 나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는 방법 외에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삶의 가치를 이론의 가치와 달리 판단할 수단을 갖고 있는가? ...... 자기 자신을 순응시키고, '보통사람'이 사는 방식대로 살고, 보통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 그것은 무리본능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 순응을 불명예로 여기는 것을 배울 만큼 스스로의 기력과 엄격함을 갖춰야 한다. 사람은 두가지 기준에 맞춰 살아서는 안된다. 사람은 이론과 실천을 구분해서는 안된다. 

 

15. 진리란 무엇인가, 오류란 무엇인가?

(p340_#452) 오류와 무지는 치명적이다, 진리는 오류와 무지보다 더 치명적이다!?

(p341_#453) 인간이 자신에게 현실을 숨기고 현실을 왜곡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선한 의지 또는 나쁜 의지로 힘들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선의(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감정과 고상한 충동)에서 일어난 오류가 인류에게 가장 심한 피해를 안긴다. 

(p341_#454) 인류가 지금까지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은 진리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두 생리학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p342_#455) 믿음에 대한 욕망진리의지와 혼동되고 있다. 불신에 대한 욕망진리의지와 혼동되고 있다. 진리로부터 기대했던 이익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 이익이었다. ...... 진리체계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아니라, 권력의 동기(더 탁월해지려는 욕망)에 의해 발명되었다. 진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증대된 힘의 감정에 의해서, 유용성에 의해서, 불가결함에 의해서, 요컨대 이익(우리에 의해 승인받기 위해서는 진리는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전제)에 의해서, 진리는 증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선입견이다. 즉 문제는, 전혀 진리가 아니라는 징후이다. 

예를 들어 공쿠르 형제에게, 자연주의자들에게 '진리의지'란 '객관성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왜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속는 쪽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러나 필요했던 것은 언제나 믿음이었지, 진리가 아니었다. 믿음은 연구방법과는 반대의 수단에 의해 완성된다. 믿음은 연구 그자체를 배척한다. 

(p343_#457) 진리(즉 과학적 방법)는 그 방법에서 전쟁의 무기와 파괴의 도구를 예상한 사람들에 의해 이해되고 촉진되었다. 

(p345_#459) 예전에 진리로 여겨졌던 것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다. 예전에 신성하지 않고 금지되고 비열하고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이, 지금 가장 매력적인 진리의 길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낡은 도덕은 더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도덕은 지금도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은 단 하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 도덕을 견뎌냈다. 우리는 낡은 도덕을 따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덕을 갖추었다. ... 그리고 만약 낡은 의미의 진리가 진리인 것은 단지 낡은 도덕이 그것에 대해 긍정하고 허락받고 있는 까닭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이전의 어떤 진리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기준은 확실히 도덕이 아니다. 어떤 주장이 도덕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 주장의 허위가 증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교 - 도덕 - 진리 :: 도덕의 원형은 종교(절대적 믿음)이고, 진리의 기준은 도덕(도덕의 승인, 도덕적 진리)이다.)

(p346_#460) 이들 모든 가치는 경험적이며 조건적이다. ..... 철학의 전체 역사에 지적 정직 같은 것은 절대로 없으며, 오직 '선에 대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이 가치들의 가치를 테스트하는 방법은 전혀 없다. 또 이 가치들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거나 조건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가치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반과학적인 본능들은 모두 이 영역에서 과학을 배제하려는 노력이다.)

 

 4. 철학자에 대한 비판의 결론   

 

16. 철학의 지배에 대한 니체의 제안은 무엇인가?

(p346_#461) 철학자들이 비방가인 이유. 철학자들은 감각에 대해 맹목적으로 적대감을 품는다. 얼마나 많은 천민이나 속물들이 이 모든 증오 가운데 있는가? ...... 인간이 인간을 경멸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원리를 찾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이야기다. 인간은 이 세상을 중상하고 헐뜯기 위해서 어떤 세상을 발명한다. 실제로 인간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면서도, 그 무를 '신'이나 '진리'로, 어쨌든 이승의 존재를 심판하고 험담하는 존재로 해석한다. 

철학의 전체 발달을 이끈 '핵심동기'는 이런 것이었다. 현실을 상대로 한 일종의 보복, 인간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과정, 훈련의 조건을 고문으로 느끼고 그런 조건과 연결된 끈을 끊는데서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는 불만스러운 영혼. 철학의 역사는 삶의 전제조건에 관한 삶의 진정한 가치들에 이바지하는 감정들에 관한, 삶의 이로운 모든 협력에 관한, 은밀하고 광적인 중오의 이야기이다. 철학자들은 공상적인 어떤 세계가 이 세상과 모순되면서 이 세상을 중상할 무기를 자신들에게 제공하기만 하면, 그런 공상의 세계를 옹호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현재까지 철학은 중삼을 가르치는 위대한 학교였다. 철학의 권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의 과학은 철학자들의 중상에 담긴 뜻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을 '가상'으로 삼아 이 세상의 인과적 연쇄를 단순한 현상으로 다루고 있다. 

거기에서 증오하고 있는 것은 본래 무엇인가? 나는 두려워한다. 어느 시대에나 철학자들이 비방가가 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에게 장난질을 해온 것이, 언제나 철학자들의 마녀 도덕이 아닌지! 철학자들은 도덕적 '진리'를 믿었으며, 거기서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였다. 철학자들이 생존을 이해하면 할 수록 생존을 부정한다는 것 외에 무엇이 그들에게 남아있는가? 왜냐하면 이 세계의 생존은 비도덕적인 까닭이다. 또한 이 세계의 삶은 비도덕적 전제에 기초해 있으며, 모든 도덕은 삶을 부정한다. 

우리는 '참된 세계'를 폐기하자.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최고가치를, 도덕을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덕도 비도덕적(지금까지 비도덕적인 것이 단죄되어온 것과 같은 의미로)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도덕의 압제가 타파되어버린다면, 우리가 '참된 세계'를 폐기해버리면, 가치의 새로운 질서가 자연히 발생할 것임에 틀림없다. 가상의 세계와 허위의 세계, 이것이야말로 대립적인 것들이다. 허위의 세계가 지금까지 '참된 세게, 진리, 신'으로 불려왔다. 이것을 우리는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구상의 논리 1) 최고가치로서의 도덕. 그 결과 이 세계는 아무 가치도 없으며, '참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여기서 최고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이란 본래 데카당스 본능이고 이런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은 소모되고 퇴락한 자들이다. 역사적 증거는 철학자들은 언제나 데카당이라는 점에 있다. 그들은 니힐리즘적 종교에 봉사하고 있다. 3) 권력의지로서 나타난 데카당스 본능. 증거는 도덕의 전체 역사에 있어서의 수단의 절대적 비도덕성이다. #) 전반적 통찰: 지금까지의 최고가치는 권력의지의 한가지 특수한 경우(*도덕은 권력의지의 데카당스 본능)이다. 

(p349_#462) 원리적 혁신. 즉 '도덕적 가치' 대신에 자연주의적 가치. 도덕의 자연화. / '사회학' 대신에 지배형태론. / '사회' 대신에 문화복합체. 이것이 나의 우선적 관심이다. / '인식론' 대신에 욕망의 퍼스펙티비즘(욕망의 계급제도. 전환된 욕망, 그런 욕망의 높은 순위) / '형이상학'과 종교 대신에 영원회귀론 (이것은 육성과 정신의 수단이다)

 

## 오늘날 우리시대의 최고가치는 무엇인가? (지수님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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