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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 > 2권 지배가치들에 대한 비판 > 2장 도덕에 대한 비판② (2020.6.15)

*분홍색글씨는 번역을 수정한 것!

 

# 지난 세미나와 연결된 주제

 

1. 최고가치들(지배적인 가치들. 종교, 도덕, 철학)에 대하여 니체의 비판방식은 무엇인가?

(p19_#1)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최고가치들(종교ㆍ도덕ㆍ철학)의 세상에 대한 가치평가의 결과이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간이 추구해온 최고가치들에 대한 믿음의 상실에서 생긴다.)

(p34_#28) 지금까지 우리의 가치들을 재평가하지 않고 니힐리즘을 피하려한 시도들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2권에서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최고가치들을 비판한다!)

(p246_#329) 이렇게 함으로써(*니체의 가치의 비판, 가치의 재평가) 내가 미덕에 피해를 입혔는가? ... 아나키스트가 군주들에게 입힌 정도의 해를 입혔다고 할 수 있다. 군주들은 총을 맞고 난 뒤에야 권좌에 확실히 앉을 수 있었다. ... 어떤 것이든 심하게 박해해서 구멍 속으로 몰아넣는 것보다 그것에 더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은 없다. ... 내가 한 것이 바로 그런일이다!?

 

2. 도덕은 누구의 힘에의 의지인가? 현대사회에 무리는 누구이며, 예외적인 존재는 누구인가?

(p212_#274)  지금까지 지상에서 거대한 발전을 이룬 도덕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보면, 이 힘에의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 배후에는 3가지 힘이 감춰져있다. 즉 (1) 강하고 독립적인 자들에게 반대하는 무리본능(2) 탁월하고 행복한 자들에게 반대하는 실패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본능 (3) 예외적인 존재들에게 반대하는 평범한 자들의 본능이 그 힘들이다. 

 

5. 도덕적 이상 > A. 이상들에 대한 비판 

 

1. 도덕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도덕적 이상들은 어떤 게 있나?

*데시데라타 : 머리 속의 바람직한 이상ㆍ완전성, 이데아의 일상버전, 간절히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것들, 바람직성, 바람직한 것에 대한 이미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망ㆍ욕망, 충족되기를 바라는 모든 충동

(#353) 정직, 존경, 의무감, 공정, 인간성, 충성, 정직, 깨끗한 양심 <·····> 불성실, 거짓, 완고, 자신감 열여, 비인간성 

(#356, 358) 겸손, 근면, 자비, 온화한 존재

(p270_#360) 대중적 이상들: 선한 인간, 무아의 인간(이타적 인간), 성자, 현자, 정의로운 인간.

(p248_#332)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서의 인간. 이 말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서의 나무'처럼 아주 고약하게 들린다.

(p246_#330) '바람직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해야 하는데" (p249_#334)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p254_#339) '이상적인 유형', '완벽한 인간'

(p260_#346)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진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친 본능의 단순한 의식에 불과한다.

(p246_#330) '바람직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거나 이러해야 했었는데"라는 식의 표현에는 사물의 전체적인 걸음(흐름, 경로)을 단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걸음(흐름) 가운데 고립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며, 전체는 어느 작은 부분을 표적으로 한 비판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 도덕이 그런 판단을 할 권리를 어디서 끌어내는가? 부분(*도덕)은 어떻게 해서 전체(*사물의 전체 흐름)를 심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가? ...... / 이러한 도덕적 판단이나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근절하기 어려운 인간의 본능이라면, 이 본능은 인간의 근절하기 어려운 어리석음과 불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짓을 하고 있다. 바람직성의 관점(자격을 갖추지 못한 심판자의 관점)도 모든 불공정이나 불완전과 마찬가지로, 원래 사물의 걸음걸이 Gang der Ding의 한가지 성격이며 채워지지 않는 '완전성'이라는 우리의 개념이다. / 만족되기를 원하는 온갖 충동은 사물의 현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어떻게? 아마도 전체는 불만스런 부분들(머리 속의 바람직한 이상을 담고 있는)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사물의 걸음걸이'란 바로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이고 현실에서 떠난 길'인가, 영원한 불만 그 자체인가? '데시데라타'라는 개념 자체가 만물의 원동력인가? 그것은 신인가?

······> *머리속의 완전성(바람직성)의 개념은 현실에서 불완전성이라는 불만을 만들어내고, 여기에서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진다.

 

2. 도덕적 이상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나? 이상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를 회피하는 것이다!?

(p247~248_#330) '전체'나 '실체', 온갖 무제약적인 형태나 힘 같은 개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최고법정으로 간주하여, '신'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체는 산산 조각나고 전체에 대한 경의는 잊혀지며, 우리가 미지의 전체자에게 부여해온 것을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되돌려받아야 한다. / 칸트는 '영원히 외경할 만한 2가지 것이 있노라'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나의 위에 있는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법")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소화능력이 훨씬 외경할 만하다'고 말해야 한다. '전체'는 언제나 '어떻게 하여 악이 가능한가' 라는 낡은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라는 것은 절대로 없고, 위대한 감각중추나 힘의 저장고 같은 것도 절대 없다. 

······> '완전성'이라는 초월적인 기준(자신을 보편기준에 맞추는)을 추구하는 대신, '소화능력'(외부를 자신의 능력으로 만드는)이라는 현실적인 역량을 단련해야 한다. 

(p248_#333) 윤리(바람직성의 철학)는 "다른 것이어야 하는데, 다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불만에서 윤리학의 싹은 튼다. / 이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면, 첫째 이런 감정을 갖지 않을 상태를 선택해야 한다. 둘째 이 감정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달라지기를 바른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확립하는 것은, '그러해야 하는데'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진지한 일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인간적인 비판이나 월권으로서 웃음거리로 끝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자는 세계의 구조가 인간의 행복과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는 바람과 이런 조화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 '그러해야 하는데'(이상적 목표를 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확립하는 것(자신의 타고난 고유성을 실현하는 것)이 훨씬 높은 차원이다.

(p208_#269) 이것은 특정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며,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 

(p249_#334) 오늘날 우리는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때는 다소 빈정거리게 된다. 또한 우리는 교육ㆍ교화ㆍ환경ㆍ우연ㆍ재난 같은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오직 자신이 타고난 대로Was man ist으로 구성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확신한다.

(p259_#343) 나의 견해는 이렇다. 삶의 원천인 온갖 힘들과 본능들이 도덕의 금지 아래 묶여서 가만히 누워있다. 도덕이 삶을 부정하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 해방되려면, 도덕부터 폐지되어야 한다.

(p259_#344)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를 회피하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현명함이다. 이상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어둠 속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 

[도덕의 계보] 서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3. 도덕적 이상은 생리적 상태와 어떤 관련이 있나?

(도덕적 퇴화와 생리적 퇴화의 관계 / 악덕ㆍ미덕과 생리적 상태의 연관 / 악덕ㆍ미덕은 생리적 상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p249_#334) '도덕의 문제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우리와 낡은 도덕신봉자들을 구별하게 한다. / 우리는 '악덕은 인간의 생리적으로 멸망하는 원인'이라거나 '미덕은 인간의 번영과 장수와 행복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덕과 미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 도덕적 퇴화생리학적 퇴화로부터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도덕적 퇴화생리적 퇴화의 복잡한 한 증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아프듯이, 필연적으로 나쁠 수 있다. / '나쁘다'는 말은 여기서는 퇴화의 유형과 생리학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어떤 무능력을 나타낸다. 예컨데, 의지의 박약, 불안정하고 다면적 인격,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력함, 타인의 의지에 대한 예속. / 악덕은 생리학적 쇠퇴의 결과들을 자의적으로 요약정리한 것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인간은 악하다'는 주장은 쇠퇴한 인간유형을 정상적으로 볼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p251_#335) 실재성이 멈추면 꿈ㆍ나태ㆍ쇠약이 나타난다. '이상'이란 바로 꿈나태쇠약의 한 형식에 다름아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지배하게 될 때, 강한 본성과 무력한 본성은 서로 비슷해진다. 둘 다 '실재성'(노동, 투쟁, 격정, 긴장, 대립)의 정지를 신격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무구'는 우매화를 이상화한 것이고, '축복'은 나태를 이상화한 것이고, '사랑'은 더이상 적이 없는 무리동물의 상태를 이상화한 것이다.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왜소하게 하는 모든 것이 이상이 되고 말았다.

(p252_#336) 도덕적 가치가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면, 그것은 '도덕적 이상이 현실에서 가장 적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이상은 온갖 고뇌의 피안이고 축복의 수단이라고 간주되었다. 점점 커지는 열정으로 인간이 끌어안은 것은 뜬구름(*이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절망과 무능을 '신'이라고 불렀다.

 

4. '이상적 유형'에 대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p254_#339) 어떤 이상적 인간에게 다가선 거리를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려 드는 광학적 습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상적인 유형'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믿음은 이런 것이다. 첫째, 사회가 제시하는 '유형'에 다가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둘째, '이 유형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셋째, 이 유형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퇴행적이고 인간의 권력과 힘의 상실로 믿고 있다. ...... '신의 왕국'의 도래를 미래로 넘기고 거기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했지만, 낡은 이상에 의한 신앙이 확립된 것이다... 

 

5. 기독교적 도덕이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p255_#340) 기독교적 도덕이상의 숭배형식들. (1) 자연의 광신자들이 발명한 '자연'이라는 생기없고 소심한 개념 (이는 단지 자연에서 '인간성'이라는 도덕적이고 기독교적 개념을 읽어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2) 콩트와 스튜어트 밀의 생기없고 소심한 '인간'의 개념 (이것도 또다른 이름의 기독교의 도덕적 이상일 뿐이다.) (3) 생기 없고 소심한 '예술'이라는 개념 (이 개념도 고통받은 자들과 허약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과의 공감을 의미한다) (4) 사회주의적 이상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적 이상의 서투른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6. 이상에 의한 이상의 자기극복 :: 이상의 계보학. 이상의 생리적 토양에 따른 이상의 유형들 

(p256_#341) A. [힘에의 의지 이상세계가 충실하고 원숙하며 완전한 모습으로 보이는 '미적' 상태에서 출발한다면(이교적 이상), 거기에서는 자기긍정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나누어준다) 거기에는 최고의 양식이, 위대한 양식이 있다. 이 이상은 '힘에의 의지'의 표현 자체이다. B. [빈혈적 이상세계가 공허하고 퇴색되고 희박한 모습으로 보이며, '정신화'나 비관능성이 완전한 등급을 차지하며, 잔인하고 동물적이고 직접적이고 급박한 것은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계산하고 선택한다) '현자, 천사', 성직자적 처녀적 무지가 이런 이상주의자들의 생리적 특징이다. C. [반자연적 이상] 세계가 이상을 추정하거나 바랄 수 없을 만틈 부조리하고 사악하고 가난하고 기만적인 것으로 느끼는 상태에서 출발한다면(사람들은 부정하며 절멸한다), 이상은 반자연적 반사실적 반논리적인 것 속으로 투영되고 심판하는 자의 상태가 된다. 고통의 결과 세상의 '빈곤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받기만 하고 더이상 베풀지 않는다.

3가지 이상 A. 삶의 강화(이교적), 여기서 지복의 상태는 삶의 최고의 충실한 상태이며, B. 삶의 약화(빈혈적), 여기서 지복의 상태는 삶의 가장 날카로운 선택에 의해 성취되며 C. 삶의 부정(반자연적), 여기서 지복의 상태는 삶의 경멸이나 파괴상태이다. 

 

7. 이상에 의한 이상의 자기극복 :: 이상은 어떻게 극복(긍정)되는가? (특이적 이상을 통한 보편적 이상의 극복)

(p261_#349) 어떤 종류의 기괴한 이상을 추구한다하더라도(기독교도로서, 자유정신으로서, 비도덕가로서, 독일제국주의자로서), 그것이 이상 그 자체라고 고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그 이상이 특권적인 성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갖는 것은, 스스로를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함(*특이적 이상)이어야 하며, 스스로 남과 동일해지기 위함(*보편적 이상)이어서는 안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이상주의자들이 다수가 그 이상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 자신도 그 이상에 대한 권리가 없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왜인가? ...... 진정한 영웅주의는 자기희생, 헌신, 무욕(이타주의)의 기치 아래서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전혀 싸우지 않는데에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며, 나는 이와 같은 것을 욕구한다. 그러니 너희들 따워는 꺼져버려라!"

(p261_#350) 모든 이상이 사랑과 증오, 숭배와 경멸을 전제한다. 최초의 동기는 긍정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감정일 수도 있다. 원한에서 나온 이상의 경우에는 증오와 경멸이 최초의 동기이다. 

 

5. 도덕적 이상 > B. '선한 인간', 성자에 대한 비판 

 

8. 니체는 어떤 의미에서 '선한 인간'을 미덕을 갖춘 반신불수라고 부르고, 이들을 강하고 자연스러운 인간과 대비시키는가? 

(p261_#351) 강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에게 사랑과 증오, 감사와 복수, 선의와 분노, 긍정과 부정은 서로 상관적이다. 사람은 악할 줄 아는 경우에만 선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이 악한 것은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달리 선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ex. 예를 들어 자본가가 자본자로 행위할 때, 그는 노동자에게 악한 존재일 것)

그렇다면 이런 이중성을 부정하면서 일방적인 유능함을 최고로 가르치는 그럴 병적인 현상과 부자연스러운 사고는 어디에서 오는가? 미덕을 갖춘 반신불수로서 선한 인간의 날조는 어디에서 오는가? / 그것은 인간이 적이 될 수 있고 해를 가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복수할 수 있는 그런 본능들을 인간 스스로 잘라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어서 이 부자연성은 전적으로 선한 존재와 전적으로 악한 존재라는 이원론적 개념(신, 정신, 인간)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전적으로 선한 존재에서 긍정적인 힘과 의도와 상태를 발견하고, 전적으로 악한 존재에서 부정적인 힘과 의도와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선과 악의 대립이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악은 사라져야 하고 선한 것만 남아야 하며, 선은 존재할 권리를 가지나 악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식이다.

어떤 인간유형을 낳게 되는 이런 마음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가설로 시작한다. 선과 악이 상호대립적인 상태에 있는 실체들이고(선과 악은 상호보완적인 가치들이 아니라), 사람들은 선한 것들의 편에 서도록 조언을 받아야 하며, 선한 사람은 악의 모든 흔적이 완전히 뿌리 뽑힐 때까지 악에 저항하고 악을 부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으로 인해 실제로 생명이 부정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본능 안에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치평가는 생명의 완전성과 단일성과 강함(*힘들의 과소상태)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데, 상반되는 충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내면의 혼란과 불안상태(*힘들의 과잉상태)가 종지부를 찍을 때 축복의 상태가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같은 선의 의지보다 더 위험한 이데올로기나 악영향은 없는데, 더없이 강한 반감을 품는 유형의 인간, 달리 말하면 자유롭지 못하고 편협한 고집쟁이가 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먄 여기서도 삶(긍정과 부정을 구분하지 못하는)은 여전히 옳다. (*여기에서조차 삶(긍정과 부정을 구분하지 못하는)은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삶의 관점에서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의 구분은 없으며, 삶 자체의 원리=권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마당에 전쟁이 악이라고,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달리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모든 악을 부정하고 그런 욕망에 따라 미적의 반신불수가 된 선한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못하고 적을 만드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부정'의 말을 하거나 행동을 멈추지 못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신자는 '죄를 증오하지만, 이 세상에 '죄'가 아닌 것이 있기나 한가! 기독교신자에게 세상이 증오스런 것으로 가득하고 영원히 물리쳐야 할 것들로 가득한 곳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선과 악이 도덕적 적대관계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한 인간'은 종국적으로 자연은 악하고, 인간은 타락했고, 선하게 사는 것은 은총의 행위(인간에게는 불가능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요약하면, '선한 인간'은 삶을 부정하고 있으며, 최고의 가치로서 '선'이 삶을 어떤 식으로 비난하는지를 보고 있다. 

 

9. 정직, 존경, 의무감, 공정, 인간성, 충성, 정직, 깨끗한 양심. 이러한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가, 그 가치의 유용성에 있는가?

   '선한 본성만 살아남고 악한 본성은 사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아닌가는 취향과 미학의 문제이다!?

(p266_#353) 정직, 존경, 의무감, 공정, 인간성, 충성, 정직, 깨끗한 양심. 이 자질들은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는가, 아니면 이 자질들이 밝은 빛으로 옮겨지면서 가치를 얻게 되는가? 이 자질들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이 안겨주는 혜택이나 효용에 있는가? 이 자질들은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ㆍ환경ㆍ사회ㆍ'인류'에 안겨주는 결과 때문에 가치를 지니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가?

(p266_#353) 그것과 반대되는 자질들(불성실, 거짓, 완고, 자신감 열여, 비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러나 여기에 오류가 있고 단견이 있고 편협한 이기심이 있다. 모든 이익이 정직한 자의 편에 있으며, 이와 반대의 본성이 기력을 잃고 사멸해가는 상태는 바람직한 일일까? 기본적으로 이것은 취향과 미학의 문제이다. '가장 공경할 만한' 가장 권태로운 인간들만 살아남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10. 선한 인간은 어떻게 독재자가 되는가? 그리고 선한 인간은 어떻게 파멸을 맞게 되는가?

(p267_#354) 한 사람의 독재자로서 '선한 인간'. 인간은 하나의 중요한 척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언제나 삶의 척도와 기준으로 바꿔놓는다. 인간은 삶이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것에서 성장과 소진의 문제에서 그 표준을 추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어떤 종류의 삶을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것을 다른 종류의 삶을 배제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을 생명 자체를 비판하고 생명의 형태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 어떤 종류의 인간이 자신의 생존수단을 유일하게 합법적인 수단으로(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수단으로, '진리, 선, 완벽'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같은 인간이 사실상 전제 정치를 시작한다. 어떤 종류의 인간이 자신이 조건부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 다른 종과 관계에서 상대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 같은 상태는 신앙의 한 형식이고 본능의 한 형식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 관대해지고 평등권을 인식하며 더이상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들은 파멸을 맞게 된다. 

 

11. 선한 인간 혹은 선한 자질에 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

(p268_#355) 모든 선한 인간은 약하다!? "모든 선한 인간은 약하다, 악한 인간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인간이다."

(p268_#357) 종교와 도덕은 노예제도의 변형이다!? (p268_#358) '선한 인간'은 이상적인 노예이다!?

(p268_#356) 겸손, 근면, 자비, 절도는 선한 존재인가, 미래의 노예인가?

(p269_#358) 겸손, 근면, 자비, 절도는 그만큼 주권적 성향을, 위대한 창의력을, 영웅적 목표설정을, 고귀한 독립을 저해한다.

(p268_#358) 무아의 도덕 :: 스스로를 '목적'으로 설정할 수 없고, 대체로 자신의 내부로부터 목적을 설정할 수 없는자는 무아의 도덕der Moral der Entselbstung에 외경을 표현한다. 본능적으로 모든 것(그의 영리함, 그의 경험, 그의 허영)이 무아의 도덕에 따르도록 그를 설득한다. 게다가 신앙마저 하나의 무아이다. 

 

12. 선도자가 되는 것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p269_#358) 문제는 선도자가 되는 것ein Vorangehn(이것으로는 기껏 목동, 달리 말하면 무리의 최고필수품이 되는 데 불과하다)이 아니라, 홀로 행동할 수 있는가ein Für-sich-gehen-lönnen(*주권적 개인, 자기입법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가ein Anders-sein-können(*자기극복)이다.

 

13. 기독교 이상, 도덕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니체의 '대적할 만한 적' 개념)

(p279_#361) 내가 빈혈증세를 보이고 있는 기독교이상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기독교이상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이상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상(보다 강한 이상)을 위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이상이 지속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 중 하나이며, 기독교이상과 나란히 또는 앞질러 부상하려는 다른 이상을 위한 것이다. 다른 이상들은 강해지기 위해서 강한 적대자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리하여 우리 비도덕자는 도덕의 권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자기보존 충동은 우리의 적대자가 언제까지나 강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를 욕구하는 것이다.

 

5. 도덕적 이상 > C. 소위 악한 자질을 비방하는 데 대하여 

 

14.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동정.연민)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는 무엇인가?

(p271_#362) 이기주의 :: 라로슈푸코 "이기주의가 도처에 존재하며, 이기주의가 사물과 덕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니체 "이기주의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자기가 약한 인간은 사랑의 힘도 약해진다. 위대한 연인들은 자아의 힘 때문이다. 사랑은 이기주의의 한가지 표현이다."

(p274_#369) 이기주의 :: "사람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서 스스로의 자아를 촉진시킨다. 생명은 언제나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려는 노력에서 첫걸음도 떼지 않은 사람이다.

(p288_#389) 순수하게 비이기적인 행위는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p272_#363, 364) 이기주의 :: 이기주의는 이익이 아니라 습관(생리적 상태)의 문제이다. 이기주의! 그러나 아무도 '어떤 자기인가'를 질문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자기를 '모든 사람의 자기'와 동일시하고 있다. 

(p287_#388) 이기주의 ::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다리로 똑바로 용감하게 서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겐 타인에게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을 보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손을 뻗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과 타인의 관계 / 개인과 사회의 관계)

(p272_#365) 동정 :: 보다 높은 인간의 행위는 매우 복잡한 동기의 결과이다. '동정' 같은 단어는 이 복잡성의 어떤 면도 보여주지 못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나는 어떤장니가?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타인은 누구인가?"하는 감정이다. 가치판단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p273_#367) 동정 :: 내가 말하는 '동정'이란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귀중한 능력이 낭비되는 것을 볼 때. 혹은 어처구니 없는 우연 때문에, 자신이 될 수 있는 존재 이하로 머무는 것을 볼 때. 혹은 인류의 미래를 엮어내고 있는 현대 유럽의 정치를 불안과 경멸로써 바라볼 때.

(p273_#368) 동정 :: 동정은 감정의 낭비이고, 건강을 해치는 도덕적 기생충이다. 단지 동정에서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선행을 하는 것이다. 동정은 격언이 아니라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며, 병리학적인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우리에게 전염된다. 동정이란 일종의 전염이다.

 

15. 이기주의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생리학적 가치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누구의 이기주의인가에 의해 이기주의의 가치가 결정된다!)

(p275~373) 이기주의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생리학적 가치만큼의 가치를 기진다. 모든 개인은 인간의 진화과정 전체를 보여준다. 만약 개인이 인류의 상승과정을 대표한다면, 그의 가치는 대단하며 그 생장의 유지나 보호에 관해 극도의 배려가 행해져도 좋다. 좋은 자질을 갖춘 개인에게 이기주의의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그 개인 속에 약속되어잇는 미래를 배려하기 때문이다. ...... 만약 쇠퇴하고 하강과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거의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데 그는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들로부터 공간ㆍ힘ㆍ햇빛을 최대한 적게 빼앗아야 한다. 이 경우 이기주의를 억제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다. 

 

16. 이타적인 가치평가생리적인 가치평가일 뿐이다!?

(p276_#373) 이타적인 가치평가가 우세하게 된 것은, 자질이 나쁜 것을 좋다고 여기는 본능의 결과이다. 여기서 그 가치판단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나는 그다지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한 생리학적인 가치판단이며 좀더 명확하게 말하면 무력한 감정, 위대한 긍정적 힘감정의 결여(근육ㆍ신경ㆍ운동중추에 있어)이다. ...... 기독교도 죄인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은 곧 자신의 힘의 결여와 자신감 결여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인데,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나쁜 기분을 느끼기 보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끼는 쪽을 택한다. 이런 종류이 해석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퇴락의 징후이다. 

 

17. '이타주의에 대한 선호, 이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의 근친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p276_#373) 자신의 불행한 처지의 원인기독교도는 자신의 죄에서 찾고, 사회주의자는 사회에서 찾는다. 사회주의자가 자신들의 존재에 누군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때, 그들은 기독교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독교도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책임질 누군가를 발견할 경우, 불편하고 비참한 상황을 보다 쉽게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두 경우 모두에서 복수와 원한의 본능은 불행이나 실패를 끝까지 견디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보존의 본능으로 여겨진다. 요약하면 이타주의의 숭배는 특별한 형태의 이기주의일 뿐이며, 명확한 생리적 상황에서 나타난다. / 사회주의자가 분노를 느끼며 정의ㆍ권리ㆍ평등을 외칠 때, 그는 그런 외침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기독교도는 '세상'을 저주하고 비방하며 자기 자신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외침을 통해 좋은 기분을 느끼고 중상에서 위안을 발견하는 병약자를 보고 있다. 

 

18. 거짓말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생리)의 문제이다!

(p280_#378) 말이란 언제나 너무 많거나 너무 적다. 그런 상황에서 말 하나하나에 자기 속을 모두 털어놓으라는 요구는 유치하다. /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정직'하다. 그러나 오직 특별한 상황(동료들 사이에서 서로를 선의로 이해할 때)에서만 그럴 수 있다. / 사람은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를 숨기며, 어떤 것을 달성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거짓을 말한다.)

 

19. 욕망에 대한 도덕적 광신자와 니체의 퍼스펙티브는 어떻게 다른가?

(p284_#383) 욕망 위대한 욕망, 권력ㆍ사랑ㆍ복수ㆍ재산에 대한 욕망. 도덕주의자들은 욕망을 재앙으로 여기며, 악이며 비난받아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 창시자가 사도들에게 성적 흥분상태에 빠질 때 아픈 눈을 뽑아버리는 것을 권했다. 그 결과 신체 부위만이 아니라, 남자의 셩격 자체가 거세되었다. 마찬가지로 도덕 광신자는 열정을 통제할 것을 주장하지 않고 아예 열정을 근절할 것을 요구한다. 결론은 거세된 남자만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도덕성은 욕망의 위대한 원천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대신, 그 샘을 바싹 말리려 든다.

(p285_#384) 욕망을 정복하라고? 그것은 욕망을 약화시키고 근절시키는 방법이다! 욕망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에게 자유를 되돌려줄 만큼 충분히 욕망을 믿어야 한다. 욕망은 착한 하인들처럼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가 바라는 최선의 방향으로 자신하여 나아간다. 

 

20. 사랑, 선의, 동정, 정의, 관용, 영웅주의 욕망은 어떻게 긍정되는가?

(p286_388) 금욕적 무아의 도덕의 지배 아래에서 사랑, 선의, 동정, 정의, 관용, 영웅주의 욕망은 오해받고 인간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위대한 희생과 위대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격의 풍부함, 자기충실, 충만이나 나눠줌, 본능적인 건강함과 자기긍정이다. 이러한 욕망들은 강하고 신적인 자아성에서 나오며,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모든 것에 권리가 있다는 내적 확신에서도 나온다.

 

21. 도덕적 규범이 끼친 피해는 어떤 것인가?

(p287_#389)도덕적 규범('하나의 이상)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유럽에서의 자기비하의 우울증(파스칼, 라로슈푸코). 무리동물이 아닌 자들의 내면적 약화ㆍ의기상실ㆍ자학. 평균적인 자질이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영원히 강조되고 있다(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겸손, 도구로 전락해버린 본성). 양심의 가책이 온갖 독창적인 것과 연결되고 불행으로 이어진다. 보다 강하고 훌륭한 자질을 갖춘 강자들의 세계가 암울해진다. 무리의식과 소심함이 철학이나 종교 속으로 옮겨졌다. 

 

22. 바람직성에 의한 바람직성의 자기극복 :: 바람직성은 어떻게 극복(긍정)되는가?

(p285_#386) '좋은 날씨가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 유치한 민족ㆍ인간이 있다. 그들은 도덕문제에서도 '선한 인간만이 바람직하고, 다른 인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으며, 인간진화의 최종목적은 선한인간만 기주상에 남는 것이라고 믿는다. 탁월한 눈으로 보면, 반대의 것(더욱 커가는 악의 지배, 옹졸하고 성가신 도덕적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 자연의 위대한 힘의 성장, 욕망을 봉사하도록 만드는 생장)이 바람직한 것이 된다. 

(p288_#390) 나의 결론. 현실의 인간은 지금까지의 이상의 '바람직한' 인간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데시데라타(*바람직한 이상)는 부조리하고 위험한 일탈이며, 이런 방법을 통해 특정 종류의 인간이 자신의 보존과 성장조건을 인류의 머리위에 법칙으로서 내걸었다. / 사회를 지배해온 이런 종류의 '데시데라타'는 인간의 가치와 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켰다. 가치를 결정하는 인간의 능력이 지나치게 낮게 발달해왔기 때문에, 인간은 아직도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의 가치가 승인받지 못했다. 이상Ideal은 지금까지 세계와 인간을 비방하는 힘, 실재성을 은폐하는 독한 연기, 허무에의 커다란 유혹이었다.

 

5. 도덕적 이상 > D. 개선, 완성, 향상이라는 말에 대한 비판 

 

23. 니체는 도덕적 가치평가의 기준을 무엇으로 말하고 있나?

(p289_#391) 지금까지 간과된 근본사실은, '더욱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과 '인간유형의 향상이나 강화'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인 인간, 그것은 곧 '힘에의 의지'이다. 

(p289_#392) 도덕적 가치(*무리적, 보편적, 이상적)는 생리학적 가치(*특이적, 구체적, 신체적)와 비교하면 허울 뿐인 가치에 불과하다.

 

24. 인간의 개선, 도덕적 개선은 어떤 점에서 허구적인가?

(p289_#393) 철학자들에게 보편적인 주제에 대한 고찰(*도덕적 가치평가)는 언제나 시대에 뒤떨어진다. 예를 들어, 인간에 관한 종국적인 '데시데라타'가 문제로 제기된 적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의 데시데라타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인간의 개선'을 가정하고 있지만, '왜 개선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직관에 의해 해결해버린다. (*이미 직관적으로 해답을 갖고 있다고 간주한다.)

(p291_#394)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처벌의 속죄능력용서의 삭제능력만큼 강하게 믿고 있다. 그런데 처벌과 용서는 종교적 편견이 담긴 기만일 뿐, 처벌은 아무것도 지우지 못하고 용서는 아무것도 삭제하지 못한다.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그 행동이 처벌을 받았느지 여부나, 그 행동이 용서받고 지워지거나 잊혀졌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교회는 있을지도 모르는 것-'영혼'을 믿으며, 있을지도 모르는 작용-신의 작용을 믿으며,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죄ㆍ구원ㆍ영적 구원을 믿는다. 교회는 철저하게 궁리된 심리학적 화폐위조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25. 인류의 향상은 어떤 점에서 허구적인가?

(p291_#395) "병은 사람을 더 훌륭하게 만든다." 그러나 질병이 '유럽인들'을 더 훌륭한 존재로 만들었는가? 오히려 중국의 도덕과 비교되는 유럽의 자비로운 현대도덕이 생리적 타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역사가 특별한 영광과 권력을 누린 '인간'을 보여주는 대목마다, 그 인간들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충동적이고 난폭하고 인간성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유형이었다! "스스로 건강하고 간하고 부유하고 생산적이고 모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비도덕적이다." 이 같은 생각으로 앞으로 몇걸음만 더 떼면, 미래가 얼마나 멋져보이는지 모른다. 인간을 인간화시키고 향상시키고 인간의 '문명'을 성장시키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큰 희생을 안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미덕으로 인해 세계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병원이 될 것이고, 지혜의 종국적 결론은 "모든 사람은 자기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우리는 간절히 소망했던 '이 땅 위의 평화'를 이룰 것이지만, 아름다움과 방종한 정신, 위험을 추구하려는 대담성 같은 것은 전혀 없어질 것이다. 위대한 작품과 업적들은 비도덕이라는 단어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도덕적이지 않은가?

(p291_#396) 모든 시대의 성직자들과 철학자들은 교육효과가 나타나는 모든 가르침(향상시키는 가르침)을 언제나 진리라고 불렀다. 성직자들은 돌팔이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닮았다. 성직자들의 논거는 이렇다. "그 열매로 그 무엇인가(진리)를 인식해야 한다. ...... 무엇인가를 선하게 만드는 것은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진리임에 틀림없고, 진리의 기준은 그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향상'이 하나의 논거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악화'는 논박의 증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류는 오류를 대표하고 있는 자들의 삶(실수나 악덕)을 검토함으로써 증명된다. 성직자들은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적들의 은밀한 악덕을 염탐하며, 세상의 오물을 찾아 돌아다님으로써 기독교를 증명하고 있다.

 

26. 길들이기와 육성은 어떻게 다른가?

(p294_#397) 길들이기 :: 사람들을 도덕적 존재로 만들려는 사람은 반드시 비도덕적이어야 하는데, 도덕주의자의 수단은 가장 끔찍한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도덕의 전제는 '죄수들에게 자유보다 철창이 더 이롭다'는 것이며, '끔찍한 수단(시뻘겋게 단 쇠를 이용하는 데에 익숙한)도 마다하지 않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이다. 맹수와의 투쟁도 불사하는 이 무적의 인종은 '성직자'라 불린다. 오류들의 쇠창살에 갇힌 인간이 인간의 캐리커처가 되었다. 쇠창살 속의 인간은 병들고 쇠약하고 자신을 나쁜 눈으로 보고 삶의충동을 혐오하고 삶에서 아름다고 행복한 모든 것에 불신으로 가득하다. 

(p295_#397) 길들이기와 육성 :: 우리는 2가지 동물학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야수를 길들인다'는 개념과 '특별한 종을 길러낸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성직자들은 인간을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야수를 길들이는 조련사가 '향상시킨' 동물에 관해 말하려 하면 비웃을 것이다. 야수를 길들이는 것은 오직 야수를 약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도덕적 인간도 개선된 인간이 아니라, 약화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은 해롭지는 않게 되었다.

(p295_#398) 육성 :: (a) 육성과 길들이기를 잘못 아는 것보다 심각한 오해는 없다. 내가 이해(해석)하는 육성은 인간의 거대한 힘을 축적하는 수단이며, 이 때문에 선조의 토대 위에서 더욱 강한 무엇인가가 될 수 있었다. (b) 인류가 번영하고 강화되는 것은 개인이 유약해지고 평등해지고 평균적이 되는 것이라는 믿음에는 이상한 위험이 있다. 인류는 하나의 추상물인 반면, 육성의 목표는 개별적인 경우에도 언제나 더욱 강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육성되지 않고 있는 인간은 약하고 낭비적이며 불안정하다.)

 

6. 도덕에 대한 비판의 결론

 

27. 도덕의 권력의지 :: 도덕의 역사 속에 드러난 권력의지는 어떤 것이 있나?

(p296_#400) 3가지 주장이 있다. / 고귀하지 않은 것(비천한 것)이 보다 높다. (비천한 자의 항의) / 자연에 반하는 것이 보다 높다.(생리적으로 망가진 자들의 항의) / 평균적인 것이 보다 높다. (무리와 평균적인 자들의 항의) / (*보다 높다 = 고급하다, 고귀하다)

도덕의 역사에 하나의 권력의지가 드러나고, 이 권력의지를 통해 노예와 압박당한 자, 생리적으로 망가진 자, 자기에게 괴로움을 느끼는 평균적인 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가치평가를 관철하려고 시도한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이라는 현상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도덕은 지금까지 지배계급과 특이한 본능, 자질이 좋은 자와 아름다운 본능, 독립적이고 특권적인 자의 희생을 대가로 발달해왔다. 따라서 도덕은 보다 높은 유형에 도달하려는 자연의 노력에 맞서는 대항운동이다. 그 결과는 삶에 대한 불신(삶의 경향이 비도덕적이라고 느껴지는 한에서), 무의미성과 불합리(지상의 가치가 지상의 본능과 대립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한에서), '보다 높은 본성'의 변질자기파괴이다. 

(p297_#401) 지금까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가치는 도덕인데, 지배적인 가치로서 철학의 모든 단계에서 확인된다. 도덕의 지배결과,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참된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지상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는 원래의 도덕은 데카당스 본능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완수하고 지배자가 되는 것은 소진하고 물려받은 것이 없는 자들이다. (역사적 증거. 철학자들은 언제나 데카당이며, 항상 니힐리즘적 종교에 봉사하고 있다.) 권력의지로 나타나는 데카당스 본능의 수단은 전적으로 비도덕적이다. 총체적 통찰. 지금까지 지상의 최고가치(*도덕)는 권력의지의 특별한 경우이며, 도덕 자체가 비도덕성의 특수한 경우이다. 

 

28. 도덕이 다른 가치들을 지배한 이유는 무엇인가?

(p298_#401) 도덕에 적대하는 가치는 왜 항상 패배했는가? (1) 어떻게 해서 이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왜 생리학으로 좋은 자질과 생명은 도처에서 패배했는가? 왜 어떠한 긍정의 철학도, 어떠한 긍정의 종교도 없었는가? (2) 강자와 약자 (즉, 건강한 자와 병역한 자, 예외자와 규칙자) 누가 더 강한 자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약자의 수단은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었다. 우리의 정치적 본능, 사회적 가치판단, 예술, 과학 가운데서, 약자들의 지배가 증명된다. ...... 쇠퇴의 본능이 상승의 본능을 지배하고, 무에의 의지가 생명에의 의지를 지배하고 말았다. 약한 자와 평범한 자의 승리!

(p298_#401) 2가지 권력의지가 투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패배한 권력의지에 동의하고, 지금까지 승리를 거둔 다른 권력의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참된 세계'는 거짓된 세계이며, 도덕은 하나의 비도덕성의 형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이 지상의 가치를 결정해왔는가, 왜 그것이 적대하는 가치를 지배해왔는가를 이해했다.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것이 수적으로 더 강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적대하는 가치평가를 전염이나 변질로부터 순화시킨다. 도덕에 구속받지 않는 자연의 회복.

(도덕의 계보 #1:16) 다수의 특권이라는 원한의 낡아빠진 허위적 구호에 대해서, 인간을 저열하게 만들며 평균화시키고 몰락으로 가져가는 의지에 대해서, 소수의 특권이라는 무섭고도 매혹적인 반대구호가 강력하게 울려퍼졌다! 

 

29. 도덕에 의한 도덕의 자기극복 :: 도덕은 어떻게 극복(긍정)되는가?

'도덕적 가치평가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 당신의 도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p296_#399) 당신은 도덕적 가치평가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당신은 복종을 원하고 비판을 원하지 않는 도덕적 감정의 충동에, '왜 복종해야 하는가가?'라고 물어서 정지를 명령해야 한다. '왜?'에 대한 물음이,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도덕성 자체의 당신의 현대적 형식이며, 당신과 시대의 명예가 되는 가장 숭고한 종류의 도덕성으로 간주해야 한다. 

(p299_#402) 도덕은 유익한 오류이다. 

(p300_#403) 도덕적으로 삶을 판단할 경우, 삶은 반드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자연이나 야수와의투쟁에서, 인간은 자연ㆍ야수를 지배할 도덕-권력이 필요했다. 이제 자연을 지배할 권력이 획득되었다면, 인간은 자기향상을 위해 도덕-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 

(p300_#404) 우리는 도덕이 지금까지 성취한 것에 깊이 감사하지만, 지금 도덕은 하나의 압박일 뿐이다! 도덕 자체가 우리에게 도덕을 거부하라고 촉구한다. 

(p301_#405) 도덕의 자기파괴. 우리는 낡은 지반에서 완전히 이탈한 뒤에도, 우리가 '어디로?' 내몰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 시도하지 않은 가능성들과 발견되지 않은 것들로 둘러싸인 채,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것은 바로 선조들로부터의 힘 덕분이다.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며 '생존'할 수 있는 땅이 없는 지금, 우리에겐 더이상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부정Nein보다 더 강한 감추어져있던 긍정Ja이 우리를 앞으로 몰아세운다. 우리의 강함이 썩어빠진 낡은 지반에 머무는 것에 먼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히 원격의 땅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 일에 자기를 내건다. 세계는 아직 풍부해서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다. 반쯤 인간으로 살거나 독에 중독도어 사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나으리라. 우리의 강함 자체가 대양으로 태양이 항상 몰락하는 그곳으로 우리를 강제한다. 우리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알고 있다.  

 

# 번역수정 등

 

(p252_#339) 도덕에서의 화폐위조는 무엇인가? (*도덕이 위조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과 악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자신의 목적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 인간이 목적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 (*······> 이러한 도덕의 가치위조와 달리, 생명의지로서 인간은 선과 악, 자신의 존재목적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p252_#339) '인류는 하나의 총체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하며, 전체로서 어떤 목표를 행해 나아가고 있다'는 식의 애매하고 자의적인 사고방식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아마 인간은 이 같은 생각이 '고정관념'이 되기 전에 그 생각을 버리게 될 것이다. / 인류는 전체를 이루고 있지 않다. 인류는 상승하는 삶의 과정과 하강하는 삶의 과정이 풀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묶여있는 다수성Vieheit이다. 인류는 먼저 젊었다가, 다음에 성숙해지고, 마지막으로 늙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몇몇 층이 한데 뒤섞여 겹쳐져 있으며, 따라서 수천년이 지나도 지금 우리가 보는 인간보다 더 젊은 인간 유형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편, 데카당스는 인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속해있다. 도처에 찌거기와 썩는 것이 있으며, 쇠퇴하고 타락한 것이 배설되는 것은 삶의 과정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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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2권_3.철학비판 (6.22.월) file oracle 2020.06.18 49
667 [니체_후기] 권력의지 2권 2장 도덕에 대한 비판② [2] 2020.06.18 64
666 [니체_후기] 권력의지 2권 2장 도덕에 대한 비판② [4] 다비 2020.06.18 102
665 [니체_발제] 권력의지 2권 2장 도덕에 대한 비판② 재연 2020.06.15 40
» [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2권_2.도덕비판② (6.15.월) oracle 2020.06.12 47
663 [니체_후기] 권력의지 2권 2장 도덕에 대한 비판 [1] 아포리아 2020.06.11 96
662 [니체_후기] 권력의지2권_2장 도덕에 대한 비판 [2] 순우 2020.06.10 123
661 [니체_발제] 권력의지2권_2장 도덕에 대한 비판 [3] file 글뤼바인 2020.06.10 185
660 [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2권_2.도덕비판① (6.8.월) oracle 2020.06.05 57
659 [니체_발제] 권력의지2권_1장 종교에 대한 비판(후) 순우 2020.06.04 32
658 [니체_후기] 권력의지2권_1장 종교에 대한 비판 [3] 글뤼바인 2020.06.02 93
657 [니체_발제] 권력의지2권_1장 종교에 대한 비판(전) 아포리아 2020.06.02 35
656 [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2권_1.종교비판 (6.1.월) oracle 2020.05.30 54
655 [니체_발제] 권력의지1권_2.유럽 니힐리즘의 역사(2020.05.25) 정웅빈 2020.05.2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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