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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주제] 권력의지 > 1권 유럽의 니힐리즘 > 2장 유럽 니힐리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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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의 우울 :: 데카당스ㆍ니힐리즘의 현상들 "현대의 우울은 데카당스ㆍ니힐리즘의 현상이다!"

- 데카당스(신체. 힘의 퇴화ㆍ소진, 활력이 메말라가는)의 현상들 + 니힐리즘(가치. 지배가치의 탈가치화) 현상들 ······> ​ 힘에의 의지의 약화ㆍ변형

2. 최근 몇세기(17-18-19세기) :: 데카당스니힐리즘의 원인들 "최근 몇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 17-18-19세기의 시대적 특징 / 쇼펜하우어, 칸트, 루소, 볼테르 등 지배적 철학 / 독일문화, 독일정신, 바그너의 특징

3. 힘의 증대를 보여주는 신호들 :: 힘의 증대, 새로운 가치정립 "가치들은 어떻게 위계가 전도되는가?"

 *데카당스(힘의 퇴화), 니힐리즘(탈가치화) ······> 힘의 증대, 새로운 가치의 정립

- 퍼스펙티비즘(힘에의 의지를 통찰하는 사유의 방법론) / 지배적 가치들의 가치전환 / 새로운 가치원리로서 '힘에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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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의 우울 :: 데카당스ㆍ니힐리즘의 현상들

 

1. 현대인, 특히 젊은층의 고통은 우리가 태어난 시대 때문이다!? 한편 21C 현대와 현대인의 우울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p61_#57) 우리의 시대는 내적으로 엄청난 쇠퇴와 분열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붕괴, 말하자면 불확실성은 이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다. 단단한 토대나 건전한 신앙 위에 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내일(*현재)을 위해 살고 있는데, 모레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은 모두 미끄럽고 위험하다. 우리를 지금까지 떠받치고 있는 얼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이 얇아졌다. 우리 모두는 얼음을 녹이고 있는 바람의 부드러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숨결을 느끼고 있다. 

 

2. 다음의 현상들은 어째서 데카당스(힘의 퇴화소진, 활력이 메말라가는) 시대를 말하는가? 그리고 21C 우리시대는 어떤가?

[특정한 도덕감정, 도덕가치]

(p62_#59) 소진의 증상으로서 ‘선한 인간’. 힘에의 의지로서의 정의正義 (육성)

(p63_#60) 1) 정신의 우울 :: 고급문화의 경향(금욕적이고 경박한 모습이 함께 있는)은 점점 약해지고,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현상 / 2) 도덕적 위선 :: 동정ㆍ배려ㆍ절제 같은 무리동물의 도덕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현상 / 3) 고통과 기쁨에 진정으로 함께 공감하는 현상 (무리동물의 군중심리에 휩싸여 개인은 중요하지 않은 현상)

(p63_#62)  의무적 금욕주의자, 예술과 지식의 태도로 간주되는 무관심, 가장 정직하지 못한 형태의 이기주의로서 공리주의, 가장 감상적 형태의 이기주의로서의 이타심 

[고통에 민감한 태도] 

(p63_#62) 고통을 완화시키고, 고통에 경의를 표하고 고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예상하면서 고통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시대.

(p63_#63) 현대인에게 인간성(휴머니티)의 증대는, 현대인이 사소한 고통에 지나치게 민감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p65_#64) 동정의 증대, 정신적 소진, 모든 문제를 쾌락과 고통의 문제로 돌리는 현상

[낭만주의와 낭만적 태도] 

(p64_#62) 현대인의 낭만적 태도

(p73_#81)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이다."는 문장을 사랑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글 사람은 약자이며, 환멸에 빠진 사람이다. 모든 일에 용서할 무엇이 있다면, 경멸할 무엇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서 너무나 인간적 모습을 보이며 동정심으로 몸을 싸고 감미로운 눈길을 보내는 것은 낙담의 철학이다. 그들은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것을 '예술을 위한 예술,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3. 세상을 나쁘고 비참한 것으로 보는 눈은 (*약한 페시미즘)은 동시에 어떤 훌륭한 신호(*강한 페시미즘)를 보는가?

(p64,65_#63) 세상을 나쁘고 비참한 곳으로 보는 그런 눈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가 똑같은 것들을 보았다. 1) 도덕적 감정들에도 어느 정도 민감함(*자연스러움이 아니라)이 나타난다. / 2) 페시미즘의 괴로움과 우울이 어울려 작용하면서, 정반대의 관점(우리의 도덕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관점)이 우세해지고 있다. / 3) 과학이 도덕적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나고 있다. 이는 매우 훌륭한 신호이다. /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역사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72_#80) 나는 '이상'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아주 싫어한다. 나는 '고상한 감정'이야 말로 악의 원천이라는 것(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고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이 나의 페시미즘이다. 

(p109_#134) 지금은 위대한 정오의 시대이고 더 없이 눈부신 계몽의 시대이다. 나의 특별한 페시미즘, 그것이 위대한 출발점이다.

 

4. 이제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가치들은 어떻게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나? (지배가치의 탈가치화! 현대의 니힐리즘 현상)

(p65_#64) 종교가 교리와 우화(기적)로서는 더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p65_#65) 오늘날 가장 심하게 공격받고 있는 것은, 전통의 본능ㆍ의지이다. 전통의 본능에 기원을 둔 제도는 모두 현대의 취향반대된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전통의 정신을 뿌리뽑는데 맞춰지고 있다. 전통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을 유산으로 연구하고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전통과 관계맺는 일은 없다. 하나의 의지를 오랜 세월에 걸쳐서 확장하는 것, 즉 수세기를 좌우할 수 있는 조건과 가치평가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반현대적이다. 파괴의 원리들이 현대를 특징지을 것이다.  (*모던Modern과 앙시앙레짐Ancien regime은 하나의 태도이다. 모던Modern ‘새로운 것이 가치있다’고 보는 태도이고, 앙시앙레짐Ancien regime ‘오래된 것이 가치있다’고 보는 태도이다.)

(p66_#66) "단순하라!" 매사에 복잡하고 정교하게 접근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같은 요구는 모순이다. '자연적 존재가 되어라!' 하지만 사람이 '부자연'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66_#67) 오랜 세대에 걸친 수단은 재산상속이었지만, 지금 재산분할은 반대의 경향을 띠고 있다. 신문, 철도, 전신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의 영혼으로 집중시키려면 강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하나의 의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p66,67_#68) 도덕이나 법적은 만드는 것은, 삶과 일에서 완전성을 위한 본능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 도달했다. 우리는 인간과 역사를 통찰하는 극단적인 의식성에 닿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와 행위와 의지에서 완전성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다. 우리의 의지, 심지어 인식의지마저도 무시무시한 데키당스의 증후인 것이다. 우리는 강한 종족과 강한 본성이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추구하고 있다.

(p67_#69) 니힐리즘(무의미성.무가치성)적 특징 :: a) 자연과학 분야의 니힐리즘 : 인과론, 기계론, 합법칙성은 일종의 막간이며 일종의 유물이다. (*절대진리가 아니라) b) 정치분야의 니힐리즘: 아무도 자신의 무구(*정직)를 믿지 않으며, 거짓이 숭배되고 있다. c) 경제분야의 니힐리즘: 인간의 결함을 극복할 계층의 결여. d) 역사분야의 니힐리즘: 숙명론, 다윈주의(*적자생존), 이성과 신앙을 화해시키려던 시도의 실패. 과거에 대한 감상주의,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전기들(*신격화하는). 성격은 하나의 가면일 뿐, 거기에는 팩트(사실)은 없다! e) 예술분야의 니힐리즘: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낭만주의적 이상과 거짓말에 대한 반감).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은 도덕적으로는 진실하지만 염세적이다.  주제에 무관심한 순수한 예술가들(*자기 의지가 없는). ('인간'에 대해 순수하게 예술적 태도를 고집하는 시도도 낭만적이다. 누구도 정반대의 가치평가를 시도하지 않는다!)

 

5. 현대성에 대한 니체의 비판점은 어떤 것인가? (니체는 현대성의 어떤 점을, 어떤 관점에서 비판하나? :: 현대성의 비판대상, 니체의 비판관점)

(p68_#70) 니체의 관점주의 :: 나는 환경과 외부원인들의 영향에 대해 반대하는데, 내면의 힘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영향처럼 보이는 것도 내면의 힘에 순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환경이 정반대로 해석되는데, 거기에 사실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천재는 발생조건(*외부의 영향)으로부터는 설명되지 못한다.  

*관점주의 추가 :: "우리는 특정한 퍼스펙티브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ex. 생물학적ㆍ시대적ㆍ문화적ㆍ언어적 조명...... / 자본주의 : 자본의 조명으로 본 세계 / 모자장수는 모자를 통해, 치과의사는 치아를 통해 세상을 본다) 니체가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이는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관점주의를 말한다. 하나의 해석 이전에 하나의 해석으로서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p68_#71) '힘에의 의지' 관점에서 능동적 힘의 약화 :: 영양과 소화에 빗대어 본 "현대성" :: 감수성의 민감화(도덕이라는 예복 아래 동정심의 증대). 소화력의 약화(사람들은 무엇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는' 데 반대한다. 축적된 인상(새로운 인상이 아니라 예전부터 축적된)에 대한 순응이 시작된다. 능동적으로 행동(action, 작용, 시작)하는 기술을 잊고, 모든 것은 환경에서 오는 자극에 반응(re-action, 반작용, 반동)하는 것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부분적으로 동화과정에, 부분적으로 자신을 옹호하는데, 부분적으로 자극에 반응하는데 쓰고 있다. (*모두 힘을 반동적으로 사용한다는 뜻) 능동성의 약화가 심화되고 있다. 역사학자, 비평가, 분석가, 해설자, 관찰자, 수집가, 독자 이 모두가 반동적 재능에 불과한데, 모두가 과학이라니!

(p69_#75) '힘에의 의지' 관점에서 긍정 의지의 약화 :: 자신의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삶을 만족스럽고 유쾌하게 사는 유능한 장인이나 학자는 좋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순교자 같은 분위기로 자신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서투른 장인이나 선생을 보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좋은 것(*전자)은 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좋은 것이란 어떤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창조하는 데 사용하는 것(*긍정의 의지)이다.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의미에서 탁월함, 즉 비르투(virtu)이다.

(p70_#75) 스스로 나서지 못하며 자신의 대표자나 중개자를 내세우는 :: 오늘날 모든 영역에 실제 작업자 외에 '대표자들'이 있다. 학자 외에 저널리스트가 있고, 고통받는 민중계층 이외에 '고통을 대표하는' 수다스러운 허풍선이가 있다. 자신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의회에서 '가난을 대표하는' 뻔뻔스러운 직업저ㅇ차가는 말할 것도 없다. ...... 이에 반해 현대와는 달리, 고대도시에서는 자신이 손수 나섰으며 대표자나 중개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p79_#76) 지적인 영역에서의 중개자 :: 지적인 영역에서도 중개자가 지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국회의원, 역사학자(과거와 현재의 중개자), 자연과학과 철학의 중개자.

(p72_#79) 현대정신의 훈련결여를 보여주는 도덕적 미사여구들 :: 현대정신이 훈련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이 도덕적 치장을 한 미사여구 아래 숨겨져 있다. ...... 관용(예, 아니오를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 동정의 넓이(1/3은 무관심, 1/3은 호기심, 1/3은 병적 민감성), 객관성(인격과 의지의 결여,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 규칙으로부터의 자유(낭만주의), 허위와 거짓말의 반대로서 진리(자연주의), 과학성 ('인간의 기록', 말하자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첨가'하는 통속소설Kolportage-Roman), 무질서와 무절제를 대신하는 격정, 상징의 카오스를 대신하는 무거움.

(p75_#86) 힘에의 의지가 겪는 변형 :: 첫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의를 요구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자유를 말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원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평등의 권리를 말하는데, 자신이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는 한, 경쟁자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막기를 원한다. 

(p76_#90) 진보에 대한 허위 :: 진보ㅡ 속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앞으로 흐르며,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이라고 믿으려 한다. 그것은 아주 신중한 사람까지도 속이는 허울좋은 겉보기이다. 19세기는 16세기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낳았고, 1888년 독일정신은 1788년 독일정신과 비교할 때 퇴행하였다. '인류'는 발전하지 않았으며, 인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프랑스혁명은 사회가 대규모로 조직하던 본능(*힘에의 의지)를 파괴했다!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서 절대로 진보의 예가 될 수 없다.

 

2. 최근 몇세기(17-18-19세기) :: 데카당스ㆍ니힐리즘의 원인들 :: 최근 몇세기(17-18-19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p78_#91) 극단적인 페시미즘을 견뎌니기 위해, "신이나 도덕 없이" 홀로 살아기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반대의 지지대 같은 것(*웃음)을 발명해야 했다. 인간이 유일하게 웃을 줄 아는 동물인 것은, 인간만이 고통을 당하다보니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

 

6. 니체는 17-18-19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어떻게 데카당스니힐리즘으로 이어지는가?

(p80_#94) 프랑스혁명(*1789~1794)을 통해 기독교가 연장되고, 관능에 대한 저주가 오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최악의 악이라는 확신, 이타심이 도덕과 같다는 믿음, "전체의 행복"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그리스도의 하늘의 왕국)이 팽배해지고, 영혼이 가는한 자들의 하늘의 왕국이 시작되었다. 

(p81_#95) 17-18-19세기 (3개의 세기) 이 세기들의 감수성의 차이를 표현하면 :: 17세기 귀족주의: 데카르트, 이성의 법칙, 의지(*주체의 의지)가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 / 18세기 페미니즘: 루소, 감정의 법칙, 감각이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 허위 / 19세기 동물주의: 쇼펜하우어. 욕망의 법칙. 동물성이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 보다 정직하지만 보다 어둡다.

(p84_#97) 17세기와 18세기의 비교 :: 17세기는 온갖 모순들('모순의 축적') 못지 않게 인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17세기는 인간을 발견하고 조정하고 발굴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18세기는 인간을 유토피아로 동화시키기 위해 이미 알려진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피상적이고 약하고 인도적인 것'에 '인간애'에 열광한다. / 17세기는 작품이 최대한 현실과 똑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작가의 흔적을 이우려고 노력한다. 18세기는 작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을으키기 위해 작품을 이용한다. 17세기는 예술에서 예술을 구하고, 18세기는 사회정치적 개혁을 선전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한다. / '유토피아, 이상적 인간' 자연의 신격화, 자신을 과시하는 허영, 사회사상을 위한 선전에 순응, 허풍들이 18세기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17세기의 양식은 적절하고 정확하고 자유롭다. 자립할 수 있거나 신에게 열렬히 호소하는 강한 개인.

(p89_#102) 19세기와 18세기의 비교 :: 페시미즘이 존재하던 기독교 세기들이 어떤 점에서 18세기보다 더 강했으며, 어떤 면에서 그리스인들의 비극의 시대와 더 부합한다! 어떤 측면에서 19세기가 18세기보다 퇴행했는가? 정신과 취향이 더 빈약해졌다(*취향의 빈곤). 어떤 측면에서 19세기가 18세기보다 진보했는가? 더 우울해지고 더 현실적으로 변하고 더 강해졌다(*우울함의 진보).

 

7. 니체는 17-18-19세기의 지배적 철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러한 사유의 특징은 어떻게 데카당스니힐리즘으로 이어지는가?

(p82_#95) 쇼펜하우어 비판 ::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거나 기껏해야 스스로를 지우는 존재이다. 결정론이 성공을 거두고, 환경가 적응의 원리(*반동적 힘)가 강조되고 의지가 반사작용(*반응.반동)으로 환원되고, 의지가 하나의 동력인(힘을 움직이는 원인. 능동적 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진리와 아름다움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객관성의 원리(*관점없는 객관성),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고찰, 선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주체를 제거해버리는 자연주의도 있다. 

(p83_#95) 칸트 비판 :: 칸트는 '실천이성'과 도덕적 열광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18세기적 모습을 보이며, 여전히 역사운동에서 벗어나 있으며, 자기시대의 현실(ex. 혁명)을 보는 눈이 전혀없으며, 그리스철학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의무라는 개념에 충실한 공상가이며, 교조주의를 애지중지하는 관능주의자이다.

(p88_#101) 칸트 비판 :: 칸트는 심리학(*도덕감정)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이 약하며, 루소스타일의 도덕적 광신자이고 기독교적 가치를 갖고 있으며, 철저한 교조주의자이다. 지연시키고 중개하는 존재이지만,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

(p85_#98) 루소 비판 :: (*루소는 인간의 타락을 지적했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충분히 악하지 않다. '인간은 맹수'라고 말하는 루소의 반대자들은 틀렸다. '인간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지고 도덕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저주로 작용하고 있다. 루소가 맹렬히 공격했던 그 영역에서 강하고 좋은 유형의 인간이 발견되고 있다. (이 유형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열정이 깨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힘에의 의지, 향유하려는 의지, 명령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아직 살아있다.) 루소는 자기경멸과 악화된 허영의 징후이다. 자기경멸과 허영은 모두 지배하려는 의지의 결여를 보여준다. 그는도덕화하고 원한을 품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비참의 원인을 지배계급에서 찾고 있다. 

(p85_#99) 볼테르와 루소 비교 :: 볼테르의 결론- 자연상태는 무시무시하고 인간은 맹수이며, 우리의 문명은 자연 속의 맹수(*인간)를 상대로 거둔 장엄한 승리이다. 볼테르는 문명상태가 주는 위안, 섬세함, 정신적 즐거움을 의식했다. 또한 미덕의 형태로 나타나는 편협함을 경멸하고, 금욕주의자와 성직자 사이에 나타나는 섬세함의 결여를 경멸했다. / 루소는 인간의 도덕적 비행에 마음을 빼앗겼다. '불공정한, 잔인한' 같은 단어만으로도 억압받는 사람들의 본능을 휘저어놓을 수 있다. 루소 같은 해방론자들은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당파에게 보다 높은 특징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당파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p86_#100) 루소와 볼테르 비교 :: 루소는 감정에 근거한 규칙을 옹호하고 자연을 정의의 원천으로 여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에 가까워지는 만큼 완벽해진다. (한편, 볼테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엣 멀어지는 만큼 완벽해진다.) 그렇다면, 똑같은 시대가 한 사람에겐 인류가 진보를 이룬 시대가 되고, 다른 한사람에겐 불공정과 불평등이 심화된 시대가 된다.(*니체의 관점주의) / 볼테르는 르네상스적 의미의 인간(휴머니티)과 르네상스적 의미의 덕(높은 문화로서의)을 이해했다. 그리고 취향과 학문, 예술, 진보 자체와 문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제네바 시민(루소)와 페르네의 귀족(볼테르) 사이의 투쟁은 1760년경에 시작되었다. 루소의 성공에 대한 볼테르의 질투와 증오가 그로 하여금 앞으로 더 높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하층계급'에겐 보상하고 처벌하는 신이 필요하다. - 볼테르 문명의 가치를 보는 두관점에 대한 비판. 볼테르에겐 사회적 발명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회적 발명을 지키고 완전하게 다음는 것보다 더 큰 목표는 없다. 덕은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편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덕'으로 여겨진다. 문화의 전도자, 귀족, 의기양양한 지배계급과 그 가치들의 대표자. / 그러나 루소는 문필가로서도 한 사람의 평민으로 남았는데, 자기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뻔뻔스러울 만큼 경멸했다. 루소의 내면에 있던 병적인 것들이 존경받고 가장 많이 모방되었다. 루소를 닮은 바이러는 숭고한 태도를 갖춤과 동시에 복수의 앙심을 품는데, 이것은 상스러움의 신호이다. 루소가 틀림없이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반면, 볼테르에겐 특별한 건강함과 쾌활함이 있다. 병든자의 원한으로 루소가 광기를 보인 시기는 또한 그가 인간을 경멸하고 불신하던 시기이다. / 루소는 사회와 문명을 저주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했다.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선해야 했으며,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타락시켰다. 자연스러운 인간이란 '선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야말로 공상이다. 루소 스타일의 낭만주의란, 열정, '자연성' 광기의 매혹(어리석음이 위대성으로 여겨지는), 허약한 자의 터무니없는 허영, 심판자로서의 천민의 원한(100년동안 정치에서 병든자가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p92_#107) 바그너 비판 :: 독일과 독일문화가 지니는 가치로만 평가한다면, 바그너는 커다란 의문부호이다. 그는 독일의 불행일지 모르며 어쨌든 하나의 재앙이다. 하지만 그는 독일의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다. 독일인 사이에 그는 별난 존재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상태로 서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사람들은 너무 친절하고 너무 멍청하고 너무 독일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식이다. 그래서 독일정신은 한동안 바그너가 자신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애국심과 자화자찬의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는 오늘날 독일정신은 눈에 띌 만큼 흐릿해지고 거칠어지고 있다. 그런 독일정신이 바그너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

# 칸트의 "(*도덕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 자연과 역사의 비도덕성을 목도했던 칸트는 비관주의자였다. 칸트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 도덕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도덕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를 통해 도덕이 반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을 믿었다. [아침놀] 서문 #3.

 

3. 힘의 증대를 보여주는 신호들 :: 데카당스ㆍ니힐리즘 내부의 극복요소들 (힘의 증대, 새로운 가치정립)

 

8. 니체의 첫번째, 두번째 원칙이란 무엇인가? (힘에의 의지를 통찰하는 사유의 방법론 =관점주의)

(p93_#108) 니체의 두번째 원칙. 도래하지 않은 독일인(강자)에 대한 요청 :: 지금까지 독일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독일인들이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곧 모든 것'이라는 의미이다. 독일인들이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는 말은, 언젠가 '모든 것이 되는 것을 중단할 것'이라는 뜻이다. 독일인들은 지금까지 바라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자신들에게 바랄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 '독일인'에게- 현재 독일적 '교양 Bildung'보다 우월한 무엇인가가 도래한다는 것, 그래서 '생성을 계속하고 있는 모든 자들'은 만족을 느끼며 성취한 것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가지거나, 자기만족을 하려고 할 때, 이러한 것을 감지할 때마다 분노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두번째 원칙이다.

(p93_#109) 니체의 첫번째 원칙. 힘에의 의지를 통찰하는 관점주의 :: 나의 첫번째 원칙은 이것이다. 현대인을 규정하는 모든 특징이 쇠퇴의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 시도되지 않은 영혼의 힘과 강함을 보여주는 신호들이 있다. 인간들을 작아지게 만드는 바로 그 원인들이 보다 강하고 고귀한 개인들에게 위대함을 성취하도록 몰아붙이는 자극이 된다.

(p94_#111) 19세기의 문제. 19세기의 강한 측면과 약한 측면은 서로 맞물려 있고, 똑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 이토록 폭력적인 간장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위대함의 전제조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불만과 니힐리즘도 좋은 징조일 수 있다.

(p95_#112) 실제로 모든 중요한 성장은 엄청난 규모의 붕괴와 사라짐을 수반한다. 고통과 쇠퇴의 증후들은 큰 진전이 이뤄지는 시대에 속한다. 인간의 유익하고 강력한 운동은 예외없이, 니힐리즘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극단적인 페시미즘인 철저한 니힐리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성장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며, 새로운 존재상태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나는 이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p95_#113) 진보에 대한 퍼스펙티브 :: (A) 현재의 인류를 재평가하려면, 절대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된다. 현재 인류는 덜 효율적이지만 지구력을 발휘할 다양한 장치들을 확보하고 있다. 속도를 느리지만, 박자는 훨씬 강렬하다. 건강도 증대되고 강한 육체에 필요한 실질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있고, '금욕주의'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극단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옳은 길'에 대한 확신, 열광하지 않는 태도, 편협한 가치들(조국애, 학식)에 대한 순응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 전체그림은 모호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상승운동일 수도 있고 하강운동일 수도 있다. (B) '진보'에 대한 믿음. 지성의 보다 늦은 영역에서는 진보가 상승하는 삶으로 보이지만, 지성의 높은 영역에서는 진보는 하강하는 삶으로 보인다.

 

9. 지배적인 가치들은 어떻게 전환되는가? 가치전도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p94_#110) 가치감정과 시대의 불일치란? "우리의 가치감정은 언제나 시대에 뒤쳐진다" :: 전반적인 통찰은 현대세계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이다.(*미결정성) 똑같은 징후가 쇠퇴를 암시할 수도 있고, 강함을 임시할 수도 있다. 강함의 신호들은 부정적 가치평가의 측면에서보면 약함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요약하면, 가치를 결정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감정은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았다. 일반화하면, 가치에 관한 감정들은 언제나 시대에 뒤쳐진다. 가치감정들은 이미 오래 전에 흘러가버린 시대의 생존조건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치감정은 새로운 시대의 생존조건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하기 마련이며, 생존조건을 오해하면서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감정은 새로운 것을 의심하며 금지하는 것이다. (ex.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

(p97_#116) 강자와 약자의 위계의 전도 :: 우리들 사이에서 독실한 위조자들(*가치위조) 성직자들이 천민이 된다. 우리는 성직자들을 허풍선이 돌팔이, 화폐위조범, 마법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직자들을 사람들의 의지를 타락시키는자, 생명을 중상하는 생명의 적,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 사이의 반항아로 연긴다. / 한편 이전시대의 천민은 맨 꼭대기를 차지한다. 신을 모독하는 자, 비도적가, 온갖 유형의 방랑자, 예술가, 유대인, 음유시인들이, 즉 악명높은 나쁜 인간계층이 그들이다. / 우리는 자신을 고귀한 사상의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나아가 우리는 이 땅 위의 명예를, '고귀함'을 스스로 결정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생명의 옹호자이다. 우리 비도덕가들은 오늘날 가장 막강한 힘인데, 다른 중요한 힘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모습)을 본떠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우리는 '천민'이라는 개념을 내세의 교사인 성직자들, 성직자들과 함께 성장한 기독교사회, 거기에 더하여 똑같은 기원을 가진 모든 사람들(페시미스트, 니힐리스트, 동정의 낭만주의자, 범죄자, 사악한 중독자)에게로, 말하자면 '신'이라는 개념이 구세주로 상상되는 영역 전체로 넘겼다. 

(p97_117) '영혼'의 건강과 신체의 건강 :: 19세기가 18세기에 대항하여 이룬 진보. 1) 19세기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루소의 말을 정반대로 이해하여, "전원시와 오페라를 멀리하라!"고 외친다. 2) 19세기는 더욱 반이상주의적이고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용감하다. 3) 19세기는 신체의 건강문제를 '영혼'의 건강보다 확실히 우위에 놓는다. '영혼'의 건강은 신체가 건강할 때 당연히 일어나는 상태이며, 신체의 건강은 적어도 영혼의 건강의 조건이다. 

(p98_#118) 감각과 관능에 대한 태도 :: 무엇인가 성취된 것이 있다면, 감각을 대하는 태도가 보다 천진난만해졌다는 점, 관능을 보는 태도가 보다 유쾌하고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p98_#119) 동정심과 고통에 대한 태도 :: 우리 객관적인 자들. 우리에게 가장 멀고 낯선 존재와 문화를 열어주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친근하고 선입견이 없는 마음이다. 친근하고 선입견이 없는 마음이란, 예전에 고통을 야기했던 수백가지 일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예전에 고통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적의를 품게하고 냉담한 표정을  짓게 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고통의 현장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눈물을 흘리게 할 지라도 우리는 더이상 동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또 우리는 고통 앞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더 강하게 느끼지도 않는다. / 오늘날 고통과 실수를 이런 식으로 보려는 욕망이 18세기보다 더 강해졌는데, 그것은 우리의 힘이 증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는 과거의 보다 거칠었던 모든 시대와 계급이 원했던 것보다도 더 강한 감각기능을 원한다. 이것은 신경과민자들과 쇠퇴한 자들의 신랄함이나 잔인함에 대한 욕구와 혼동되어선 안된다. / 우리는 부르주아 도덕이나 성직자 도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한다. '좋은 사회'란 부르주아 사회에서 금지되거나 악명높은 것들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p99_#120) 자연, 자연성, 자연주의에 대한 태도 :: 19세기 인간의 자연성은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연적인 인간이 존재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형식적이고 비자연적이고 반자연적인 가치들이 원칙이고 시작이다. 인간은 오랜 투쟁을 거친 뒤에야 자연에 닿는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감히 '자연처럼 비도덕적인 존재(*선악을 넘어선 존재)가 되려 한다'는 뜻이다. 풍부하고 여가시간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의 사회가 더 자연스럽다.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 도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 정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 위대한 인간들과 위대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더 자연스럽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 / 요약하면 '19세기 유럽인들이 본능에 대해 덜 수치스러워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들이 있다. 19세기 유럽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무조건적인 자연성과 부도덕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먼 길을 걸었다. 이제 19세기 유럽인은 이런 관점을 홀로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 일부 사람들의 보기에는 이런 말이 타락의 큰 걸음을 떼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인간은 루소가 말하는 '자연' 쪽으로 조금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루소가 두려움을 느끼는 문명 쪽으로 더 나아갔다. 우리는 강해졌다. 

 

10. 새로운 가치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란 무엇인가? (니제적 진보 = 생명, 생성, 힘에의 의지)

(p102_#123) 니체적 의미에서의 진보(생성, 힘에의 의지) :: 내가 한번더 제기하는 미해결된 문제=문명의 문제. 루소와 볼테르 사이의 갈등. 인간은 더욱 깊고 더 불신하고 더 '비도덕적'이고 더 강하거 더 자신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따라더 '더 자연스런' 존재가 되었다. 바로 그런 것이 '진보'이다. ... '"다 강한 계층이 악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다 높은' 것으로 만드는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힘을 보여주는 신호임과 동시에 그들의 자제력과 매력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진보'가 일어나면, 그 즉시 강화된 요소가 '좋은' 것으로 평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p103_#125) 자연성=힘의 문제 :: '자연성'을 향한 진보. 모든 정치문제에, 정당들 사이의 관계에, 상인들과 노동자들, 고용자들의 단체들 사이에도 오직 힘의 문제만 작용할 뿐이다. 문제는 '무엇을 할수 있는가'이며, 그것에 기초하여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p103_#125) 인간적인 존재, 인간을 너머서는 존재 ::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소유해야 한다." 유산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한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오래되고 건전한 본능이며,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더 나은 존재가되기 위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 자체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하는 가르침이다.

(p103_#125)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 (관점적) :: (*부정적 평가) 사회주의의 가르침 안에 "생명을 부정하려는 의지"가 엉성하게 숨어있다. 실패한 자들과 실패한 종족들이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고안한 사람들이다. (*긍정적 평가) 어리석음에 빠진 사회의 토대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는 초조한 두더지 같은 것으로서, 사회주의는 유익하고 건전한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 사회주의가 "이 땅의 평화"를 지연시키고 민주적인 무리동물의 성격이 약화되는 과정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또 사회주의가 유럽인들이게 지성을 추가로 더 갖출 것을, 교활함과 경계심을 더 많이 품을 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주의는 유럽을 한동안 '활기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다.

(p105_#127) 신체성과 야만성의 긍정 :: 신체적 능력이 가치를 회복하고, 가치평가의 기준이 신체적인 쪽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 각자 내면에 있는 야만성과 야수성이 긍정되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철학자들에겐 미래가 있다.

(p105_#128) 나는 낙담할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넓은 마음과 함께 건강한 의지를 획득하고 지키는 사람(*강자)은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호의적인 기회를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연성이 민주적인 유럽에서 더 커졌고, 보다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가진 군집동물이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릴 사람은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p106_#129) 계몽과 진보에 대한 비판 :: 정신적 계몽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도움과 지지를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한마디로, 정신적 계몽은 인간들의 내면에 무리본능을 발달시키는 수단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통치의 기술자들이 정신적 계몽을 이용하는 이유였다. (중국의 공자, 로마 황제, 나폴레옹,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예를 들어, 정신적 계몽예 관한 대중의 자기기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인간을 보다 작게, 보다 온순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고 있다. 

(p107_#130, #131) 주권적 개인의 출현 :: 외적으로 보면, 무서운 전쟁의 시대, 반란의 시대, 폭발의 시대이다. 내적으로 보면, 인간들 사이에 약한 모습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으며, 사건들이 흥분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이런 존재들이 나타난다. (1) 야만인 (얼핏보면 지금까지 유럽을 지배한 문화와 일치. *문화적 의미의 야만인) (2) 주권적 개인들 die souveränen Individuen (야만적 힘의 집적과 현존하는 것들로부터 자유가 교차하는 존재. *문명의 관점에서 주권적 개인) / 높은 유형에 속하는 수많은 개인들이 사라지는 가운데, 그런 운명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는 악마만큼 강하다. 

(p107,108_#132) 주권적 개인의 새로운 기획들 :: 이러한 탁월한 유럽인(#131에서 말한 살아남은 자)이 바로 우리들이다. 무엇이 우리를 국가의 국민에게서 두드러지게 만드는가? (① 종교와 도덕에 대한 태도) 먼저 우리는 무신론자이고 비도덕가이지만, 당장은 무리본능과 연결돠는 종교와 도덕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종교와 도덕에 의해 어떤 인간 유형이 준비되고 있고, 이들이 언젠가 우리의 손길을 원하면 우리의 손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우리는 선과 악 그 너머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리도덕을 무조건적으로 엄격히 보존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 (② 철학과 사회운동에 대한 태도)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유형의 철학은 유보해두고, 사정에 따라서는 페시미즘 철학(철퇴로서)과 유럽적 불교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경향의 발전을 지원할 것인데, 그것은 의지의 약화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에서도 안일을 막는 가시 같은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민족들에 대해서 이종번식의 성과에 관심을 기울인다. 초연하고 부유하고 강력한 '언론'과 그 교양에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학문적 인간이 저널리스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신문을 읽고 기고하는 것과 타협하는 온갖 교양을 경멸한다. / (③ 새로운 힘들의 조직자로서 우리) 우리는 우리의 우연한 지위를 (괴테나 스탕달처럼), 우리의 체험을, 우리의 배경Hintergründe을 속이기 위한 전경Vordergrund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이 배경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한다. 우리의 배경은 방랑자가 필요로 하고 이용하는 대피소 같은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그 대피소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한다. 우리는 동시대인에 앞서, 의지의 훈련을 받고 있다. 모든 힘이 의지의 발달에 낭비되지만, 의지는 우리가 가면을 쓰도록 허용하는 기술이고 열정의 그 너머를 이해하는 기술이다.(초유럽적으로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의 입법자, 대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준비이며, 적어도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되기 위한 준비이다. 이것이 결혼에 관한 근본적인 고려가 될 것이다.

(p109_#133) 거대한 지각변동 뒤에 거대한 자각 :: 20세기 갈리아니 신부는 "앞날을 예측하는 일이야말로,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는 갈리아니의 평화주의적 관점에 반대하며 "미리 앞날을 예측함으로써, 전쟁을 유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율할 만한 지진 뒤에 거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법, 그것은 새로운 문제들을 수반한다. 

(p109_#134) 도덕적 가치평가에서 힘에의 의지로의 가치전환 :: 지금은 위대한 정오(*위버멘쉬의 시간, 인간의 자기극복의 시간)의 시대이고 더 없이 눈부신 계몽의 시대이다. 나의 특별한 페시미즘meine Art von Pessimismus, 그것이 위대한 출발점이다. 1) 문명과 인간의 향상 사이에 근본적 모순이 있다. 2) 도덕적 가치평가는 거짓말의 역사로, 힘에의 의지(강자들보다 더 높이 올라서려는 무리의지)에 이로운 비방의 기술이다. 3) 문화에서 모든 향상을 결정하는 조건들(군중의 희생에 의해 선별을 가능하게 하는)이 곧 모든 성장의 조건들이다. 4) 세상의 복합적 다의성은 곧 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은 그것의 성장이라는 퍼스펙티브에서 본 결과이다. 도덕적 기독교 가치들은(고대 귀족주의적 가치들과 비교하면) 노예들의 반란과 노예들의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 번역수정 등 =====

 

(p62_59) 현대의 우울의 역사

양육 ······> ​ 육성 :: 소진의 증상으로서 ‘선한 인간’. 힘에의 의지로서의 정의正義 (육성)

 

(p63_#60) 중류층과 하류층의 부상에 따른 여러가지 현상

중류층과 하류층의 출현ㆍ부상이 여러가지 현상을 낳고 있다.

1) 정신의 우울 :: 고급문화에 고유한 (금욕적이고 경박한 모습이 함께 보이는) 행복의 모습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감추고 참았던 고통을, 지금은 겉으로 드러내면서 들리도록 한다.) ······> 고급문화의 경향(금욕적이고 경박한 모습이 함께 있는)은 점점 약해지고,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현상

2) 도덕적 위선 :: 도덕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방식. 그러나 동정ㆍ배려ㆍ절제라는 무리동물의 도덕에 의해서이지, 무리동물의 영역 외부에서 인정받는 덕이 아니다. ······> 동정ㆍ배려ㆍ절제 같은 무리동물의 도덕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현상

3) 고통과 기쁨에 진정으로 함께 공감하는 현상 (Mit-leiden 고통을 함께 나누다. 동정 / Mit-sreude 기쁨을 함께 나누다) :: 모든 무리동물에게 고유한, 함께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요란한 감정(ex. 군중심리). ‘공공심’과 ‘애국심’을 비롯하여, 개인은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 (*개인은 중요하지 않은: 개인과는 별개인, 개인은 고려되지 않은) ······> 무리동물의 군중심리에 휩싸여 개인은 중요하지 않은 현상

 

(p64_#62) 현대인에 대한 비판

기술과 지혜로 여겨지는 무관심  ······> 예술과 지식의 태도로 간주되는 무관심(관조) Selbst-losigkeit

 

(p66_68) 약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데카당스 증후

모든 것이 배우적 연기가 되는 이유는, 현대인에게 본능의 확실성(한 부류의 인간이 오랜 기간 동질한 활동을 통해 얻은 특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도덕이나 법전은 만드는 것은, 삶과 일에서 완전성을 위한 본능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 도달했다. / 정말이지 우리는 인간과 역사를 통찰하는 극단적인 의식성에 닿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와 행위와 의지에서 완전성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다. 우리의 의지, 심지어 인식의지마저도 무시무시한 데키당스의 증후인 것이다. 우리는 강한 종족과 강한 본성이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추구하고 있다.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하나의 종말이다. 과학은 '생명의 자기방어와 보호본능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우리는 더이상 축적하지 못하고 선조의 자본을 탕진하고 있을 뿐이다. 

 

(p70_#75) 덕이란 어떤 것인가?

자신의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삶을 만족스럽고 유쾌하게 사는 유능한 장인이나 학자는 좋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순교자 같은 분위기로 자신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서투른 장인이나 선생을 보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좋은 것(*전자)은 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좋은 것이란 어떤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창조하는 데 사용하는 것(*긍정의 의지)이다.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의미에서 탁월함, 즉 비르투(virtu)이다.

 

(p72_#79) 현대정신의 훈련결여를 보여주는 도덕적 미사여구들

Kolportage-Roman / 인간의 기록 ······> ​통속소설 :: 현대정신이 훈련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이 도덕적 치장을 한 미사여구 아래 숨겨져 있다. ...... 과학성 ('인간의 기록', 말하자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첨가'하는 통속소설

 

(p74_#85)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문제. 정신적 질병이 데카당스 유형!

가혹한 ······> ​ 조잡한 ::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정신적 질병의 유형들로 보는 조잡한 시도가 있어왔다. 만약 이들이 표현하는 데카당스의 유형을 과학적으로 규명한다면,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단순히 정신질병의 유형으로 보아선 안되고, 데카당스의 유형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의미!)

 

(p42_#41), (p102_#122)을 비롯하여 '인간애'로 표현된 대부분의 내용들은 '인간성'으로 고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글뤼바인의 제안!)

독어Humanität, 영문Humanity / 인간애 ······> ​인간성 :: 쇠퇴의 본능들과 인간애의 본능들을 혼동하지 마라. ······> ​데카당스 본능과 인간성을 혼동하지 마라. (*따라서 '힘이 쇠퇴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본능들을 인간성 자체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

 

(p105_#127) 신체성과 야만성의 가치회복

육체적 ······> 신체적 :: 신체적 능력이 가치를 회복하고, 가치평가의 기준이 신체적인 쪽으로 바뀌고 있다. ('육체'는 정신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고, 니체적 의미에서 '신체'는 정신과 육체를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

 

(p107_#132) 우리 유럽인과 국가의 국민의 구분 (*글뤼바인의 제안)

Menschen der Vaterländer aus / 애국자 ······> ​국가의 국민 :: 우리 좋은 유럽인Diese guten Europäer과 국가의 국민Menschen der Vaterländer aus(직역. 조국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애국자'는 '국가의 국민'의 오역입니다. 글뤼바인이 쓴 것처럼, '한 국가의 국민'이 '우리 유럽인'으로 표현되는 세계시민주의와 구별되는 개념인 한에서 더 그렇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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