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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발제] 언더그라운드 니체 5장~6장

숲속옥탑방 2019.05.28 10:39 조회 수 : 42

제5장 배우의 철학

 

     1. 우리, 배우들     

-- 당신은 예술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잣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은 당신이다.  당신은 거짓이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진실에도 미달했지만 거짓에도 미달했다.  맨 얼굴을 두는 한에서 모든 분장은 거짓이다.  그러나 맨 얼굴을 두는 한 모든 분장은 충분한 거짓이 못 된다.  훌륭한 배우는 분장할 때 얼굴을 가리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는 얼굴을 변형시킨다.  그는 얼굴에서 벗어난다.  예술가여, 존재와 가상 그 어느 쪽도 가짜다.

 

-- 두려움 때문이든, 그 무엇 때문이든, 우리는 타인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칠지 몹시 신경을 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볼 때도 타인의 눈을 통해 본다.  우리는 어떤 '눈'이 우리를 보고 있으며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방향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우리를 꿰뚫어보는 하나의 커다란 눈"),   그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힘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직접 기쁜 것보다 타인을 기쁘게 한 것에서 더 많은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 도덕적 행위 뒤에 숨은 부도덕안 충동들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제4권 곳곳에서 니체는 우리의 '외관'과 '내면'이 아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심을 항상 엄격히 지키는 사람들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양심에 도전하는 감각들("자신 안에 있는 비참한 감각들")을 매번 의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 "자신의 내면을 가능한 한 숨기고자 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성을 멀리하고 자기 육체를 고문해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감각적인(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적들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은 비겁함의 표시"일 수 있으며,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그 경멸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아주 관대한 신의 연기를 펴는 영리한 야심가도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헌신과 희생 속에서도 우리는 연기한다.  오로지 희생하는 모습으로 자신이 비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안에는 매우 '강한 이기주의자'가 숨어 있을 수 있다.

 

-- 물론 겉모습으로만 보면 희생자들은 이기적이지 않다.  니체 역시 그 헌신과 희생의 '진정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희생에 대한 촉구가 도덕적 구호로서 제창되는 경우이다.

 

-- 복종이니 합리성이니 의무니 하는 것들을 일거에 뛰어넘는 희생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고양됨을 느낀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 희생이 자기 마음 속에서 '상연'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희생자들은 그 마음 속에서 신처럼 숭고하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희생자가 빠져드는 도취란 그것을 연기하고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바로 그것을 믿는 일이다.

 

-- 예컨대 시인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자기 안에서 상연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일어날 것, 일어날지 모르는 것을 미리 행하고, 미리 향락하고, 미리 괴로워하고, 기대하던 사건과 행위가 마침내 일어나는 순간에는 이미 지치고 마는 상상력"을 가졌다. 

   역사학자도 그렇다.  어떤 점에서 세계사란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실재의 깊은 안개 위에" 투사되어 상영되는 "환영들의 지속적인 출산과 잉태"인지 모른다.  역사가가 다루는 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다시 말해 그렇게 추정되는 사건들이다.  세계사란 역사가가 추정하는 행위 또 그 행위의 배후에 있다고 추정된 동기들이며, 이 동기들에 대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아(에고)와 그의 소유     

 

-- 가면을 쓴 자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이 쓴 것이 '가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가면 뒤에 진정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연기 속에서 자신이 쓴 가면은 어느덧 그 자신의 얼굴로 고착되기도 하고, 항상 가면 뒤에 숨겼다고 상상하는(어떤 가면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상상 속의 얼굴(그것 또한 가면이 아닌가)에 고착되어버리기도 한다.

 

-- 배우로서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정말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아는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고,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오독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 니체에게 '여성'은 남성이 그린 이미지에 따라 그것을 연기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남자들이 여성이미지를 만들고 여자들이 그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여성의 첫 번째 위험은 그 이미지에 고착되는 것이다.  그가 쓴 것은 하나의 '가면'이었지만 그것이 '얼굴'이 되고 말 때(더 이상 바꿔 쓸 가면이 없을 때) 여성은 '남성의 이미지'로서 죽음을 맞는다.  연기하는 여성의 두 번째 위험은 그가 '남성'을 흉내낼 때 나타난다.  '남성이 그린 이미지'가 아니라 제 스스로 '독단적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남성'이 될 때 '여성'은 '남성'이 되면서 죽음을 맞는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의 여성들은 각각 '거세된 여성'과 '거세하는 여성'에 해당한다.

 

-- 그러나 '거세와 무관한 여성'도 있다.  아니 여성은 본래 거세와 무관하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여성 특유의 무술'은 '계몽'이나 '교육' 반대편에 위치한다.  계몽되고 교육받은 여성은 '본능으로서의 여성'이 약화된 여성이다.  여성은 '계몽'되거나 '교육'될 수 없는 것 속에 큰 힘을 갖는다.  계몽과 교육은 남성적인 것이고 또한 독단적이거나 최소한 어설픈 것이다.  여성은 계몽과 반대편에 있는 '자연'(본성), 계몽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이고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연(본성)'을 통해서만이 '계몽'은 자신의 不妊性("남성은 실례되지만 '不妊의 동물'이다")을 넘어설 수 있다.

 

-- 여러겹의 동물인 '고양이'로서의 여성이 남성에게 소유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니 불가능하다.  여성은 항상 '거리'를 두고 계속해서 미끄러져나가는 유령선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은 남성의 성급함과 허영심을 이용한다.  이를테면 남성들은 여성을 부양하는 것으로(가부장의 책임을 떠맡는 식으로) 자신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 더 현명하다.  남성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활용해 그를 이용하고 부려먹을 줄 아는 여성 말이다.  "여성들은 종속됨으로써 압도적 장점은 물론이고 지배권도 확보하게 될 것을 안다."  이들이 종속을 감내하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다.  이는 "최고 지배자"의 "영리하고도 냉혹한 요구"이다.

 

-- "여성은 줌으로써, 몸을 내맡김으로써, 소유의 지배력을 위장하고 소유의 지배력을 확실시한다." - 자끄 데리다

 

-- 우리가 가면을 벗기면(화장을 지우면, 옷을 벗기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그 '어떤 것'은 결코 우리 손에 잡히지 않은 채 계속해서 도망간다.  '자물쇠'를 채워 가두어두려 하지만 그것들은 좀처럼 갇히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잡히지도 않으면서' 그것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불행한 조건인가.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인가.  자신이 아무것도 제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에 스스로 절망해 세계 또한 멸망으로 이끄는 파괴자가 될 것이다.

 

     3. 철저한 배우 - 오디세우스의 경우     

 

-- 진정한 얼굴이 가면 뒤에 있다고 믿는 한, 다시 말해 우리의 본래의 고유성과 소유를 믿는 한, 우리의 연기, 우리의 가면은 '가짜'이고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때 배우로서 우리는 기껏해야 '모방하는 원숭이'일 뿐이다.

 

-- 사실 예술은 속임수의 기교가 아니다.  설령 예술가가 위장이나 거짓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와 무관한 어떤 무구함 때문이다.  예술은 위장하거나 은폐한다기보다 변형시킨다.  어떤 결점이 있을 때 예술가의 역량은 그것을 가리고 속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힘과 덕으로 인도하는 통로로서 그것을 변형시키는 데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매우 두드러지게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베토벤 음악에는 거칠고 초조한 음색이,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정신이 참고 견뎌내야 하는 우직한 패거리의 쾌활함이, 바그너에게는 집요하게 밀려오는 불안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약점을 통해 그들의 덕에 대한 갈망과, 정신과 아름다움과 선의의 그 모든 울림에 대한 열 배나 민감한 혀를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 예술은 배후에 진정한 '존재'를 둔 일종의 '가상'으로 존재하는 한 '도덕'의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귀중한 선물 하나는 우리의 삶이 '무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즉 그들은 흥미로운 추함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예술의 양심이란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구함'에 있다.  예술은 '죄인'과 '사형집행인'을 추방함으로써 자기 양심을 회복한다.  예술은 '죄'도 '벌'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아이처럼', 궁극적 의미로부터 자기 행위의 무구함을 되찾게 한다.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렇다고 지금 쓴 '가면'이 진짜라고 믿는 순진함에서도 벗어나는 것, 한마디로 예술은 배후에 '존재'를 둔 '가상'이 아니다.  예술에는 '존재'도 '가상'도 없다.  예술은 존재의 '은폐' 내지 '위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 '존재'의 '생성'으로의 무한한 근접에 있다.  철저한 배우가 '분장'을 할 때 그는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한마디로 '생성'이고 '되기'라고 할 수 있다.

 

-- 나쁜 배우는 존재를 배후에 두고 가상을 연기한다.  그러나 좋은 배우는 존재와 가상의 대립을 해체한다.

 

-- 니체는 '심층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 결코 표면의 '가상'에 대한 옹호로 읽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우상의 황혼>의 다음 구절을 보라.  "우리는 참된 세계를 없애버렸다.  어떤 세계가 남는가?  가상세계?.....천만에!  참된 세계와 함께 우리는 가상세계도 없애버린 것이다.!"

 

-- 그렇다면 좋은 배우란 누구인가?  니체는 오디세우스를 한 예로 들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거짓밀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존재로 돌변한다.  이때 오디세우스의 거짓말과 변신은 그 자신에 대한 은폐가 아니라 드러냄이다.  참된 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변신의 귀재인 그가 바로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참된 그이다.  "필요하다면 가장 고귀한 사람보다 더 고귀하게 보일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능력, 영웅적인 집요함, 모든 수단을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런 그의 재기에 신들은 경탄했다.  그에게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가상들'과 '존재'의 대립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윤리적으로도 평가되지 않는다."  그의 예술, 그의 거짓, 그의 변신은 도덕을 넘어선 변신을 보여준다.

 

     4.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 순수 특이성에 이르기까지     

 

-- 계보학의 목표가 결국 자기 인식에 이르는 것이듯, 예술의 목표는 자기생성의 체험에 있을 것이다.

 

-- <도덕의 계보> 서문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계보학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일이다.  이 점에서 참고할만한 푸코의 언급은 이것이다.  "해석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해석해야 하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누차 말했듯이 니체는 대단한 상징주의자이며 자신의 독자들을 까다롭게 고르는 문체를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니체가 스스로에 대해 "나는 나쁜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고 독일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은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의 부모가 독일인아 아니라 폴란드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가 말한 '피'는 친족구조를 밝힐 때 쓰는 그 피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시대와 민족을 넘어서 '격세유전'되는 어떤 정신이다.

 

-- 니체가 272절에서 '종족'(인종)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은 어떤 '본래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순수한 종족은 없고 순수하게 된 종족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준다.  '순수한 인종'이란 주어진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순수성은 끊임없는 시도의 결과("수많은 적응과 흡수 그리고 분리의 최종 결과)이다.  나는 여기서 '순수성'을, 앞서 니체가 근대인을 가리켜 비판했던 '잡식성'(특이성 없음, 취향 없음)과 대비해서 이해한다.  기묘하게도 여기서 니체가 말한 '순수성'은 이질적인 것들을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엮어낼 수 있을 때 달성되는 특이적(유일무이적) 아름다움이다.

 

-- 그는 '너는 네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이것이 또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은 유럽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위대한 예술적 사명이다.

 

제6장 정신의 비행사

 

     1. 침묵으로 하는 말     

 

-- 출산은 언제나 임신을 우회한다.  시간으로 하여금 얼마간 품어달라고 하라.  기다림 없이 태어나는 것들은 죽은 채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못한 채 죽는다.  우리 안에 자라는 것들을 돌보는 시간, 그것이 철학하는 시간이다.  철학은 삶의 정신적 우회이며 임신이다.  니체는 말했다.  철학은 부드러운 태양과 밝고 생동하는 대기, 바다의 숨결, 가벼운 식사, 따뜻한 음료, 조용한 산책, 신중한 독서, 청결하고 질박하며 거의 군인 같은 생활습관의 정신적 번역이라고.   철학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 우리의 건강을 정신의 우회를 통해 추구하는 본능이라고.  그렇다면 왜 우리의 삶은 이런 우회를 필요로 하는가.    왜 그것은 철학을 에둘러 가는가.  왜 그것은 고독과 침묵에서 잠시 맴도는가.  아마도 다시 태어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 바다는 무엇보다도 도시의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아베마리아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도시에서 먼 곳, 바다.  거기서는 하늘도, 절벽과 바위들도 모두 '무언극', 즉 침묵으로만 말한다.  그곳은 '아름답고 소름끼치지만 가슴은 충만해지는 곳'이다.  우리 역시 거기서 침묵해야 한다.  말도 사유도 중단해야 한다.....우리에게 친숙했던 말과 사유가 중단될 때만 '새로운 진리'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 사상가로서 중요한 '떠남'은 일종의 '천성'에 가깝도록 익숙해진 하나의 사상으로부터의 떠남일 것이다.  .....정말로 철학자 내지 사상가를 못 견디게 하는 것,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해로운 것은 "자신의 본성에 역행해서 사유하도록 강제된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사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의 직책, 규정된 시간의 구분, 자의적인 종류의 근면이 의무로 강요되는 사상"을 따른다면, 사유의 타락 이전에 생리학적으로 그들 신경의 힘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 정열로 모든 의심과 학문, 비판, 이성을 잠재우려 하고, '역사가 자신들을 위해 증언하도록 역사를 왜곡'해야 하는 사람들, 정열을 진리의 논거인 양 제시하고 끝내는 그것을 하나의 양심이자 무구함으로 믿어버리는 사람들로부터 니체는 떠난다.

 

-- 즉 "인간은 자신들의 도덕 때문에 괴로워하는 동물이 되었다.  특히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질병이다.  그들은 도덕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조차 오만하다.  자신들이 세계의 너무나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로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받아들이거나, 그 사실을 고통에 대한 진통제로 받아들인다.

 

-- 고독은 이처럼 하나의 '떠남'이지만 달리 보면 다른 방식의 '돌아감'이기도 하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신경을 파괴하는 사회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배려하는 법을 모른다......니체는 자기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로 나아간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주변의 타인들과 사물들에 다르게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 고독한 자는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활습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이는 뭔가 피하고 떠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보고 가꾸는 일이다.  자기 안에서 새로운 진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2.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 철학자 내지 사상가로서 우리는 인식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다.  인식하는 자로서 우리는 '인식'에서 행복을 발견한다......우리가 '야만 상태'로 복귀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야만인들보다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덜 행복한 상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무지하고 미개한 상태를 혐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식 없는 행복이나 강하고 확고한 망상의 행복.....그러한 상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낀다."  인식충동은 심지어 세계의 희생까지 요구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인식의 후퇴보다는 차라리 인류의 몰락을 원한다!"

 

-- '진리가 칼로 살을 베어내지 않았다'는 것, 그런 체험이 없다는 것, 이는 학자들이 만들어낸 진리들이 '보잘것 없는'이유이다.(학자들 스스로가 그 진리들에 대해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것을 체험하지 않았다."

 

-- 기꺼이 자기의 존재 변형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 진리의 추구는 기껏해야 자기 몸을 가리고 치장하는 지식을 늘릴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위장이고 과장이다."

 

-- "사람들에게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것에 질서가 잡힌 것처럼 보였으므로, 사람들은 사물들의 인식 가능성조차 인간의 시간 단위를 척도로 질서가 잡혀 있다고 믿었다."  즉 우리는 70년 정도의 짧은 생애에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할 정도가 되었다.

 

-- "위대한 정신들조차 오직 그들의 다섯 손가락 넓이만큼의 경험을 가질 뿐이다.  바로 그 옆에서 그들의 생각은 멈춘다.  그 다음에는 그들의 무한히 텅 빈 공간과 어리석음이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의 중심'에 인간을 두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래 사상의 문에는 '나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씌여 있다."

  이런 망상에서 벗어난 뒤에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이 남는데 그것은 바로 '피로'이다.  피로는 '정신의 비행사'의 날개를 짓누른다.  피로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의 '인식충동'은 '안식충동'으로 뒤바뀐다.  우리는 쉽게 체념하거나 함부로 판단한다.

 

-- '황혼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에서 철학의 시간을 발견했던 헤겔과는 반대로, 니체는 "저녁에 낮에 대해 판단하는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녁은 피로가 몰려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피로가 판관이 되어선 안 된다.

 

-- 노년에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통찰력을 갖게 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의 업적과 역정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지혜가 아니라 피로가 존재한다."

   정신의 노쇠함에 빠진 賢者들은 자신에게 예외적 지위를 쉽게 허용한다.  그는 "이제 사태들을 보다 가볍게 취급하고 증명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천재로 선포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여긴다."  그러고는 외견상으로는 과거 자기 사상의 문제들을 고치면서 자기 업적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솎아내고 자기 사상을 향유하려고 한다.  이제는 더 나아가기보다 적당히 즐기면서 쉬고 싶은 것이다.

 

-- 그래서 그(賢者)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도화된 기관을 세우려 하며 더 이상 사상의 건축물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위대한 노인'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의 사원이다."  그는 사유의 격랑이 되느니 그것을 막는 "방파제로 영구히 남으려 한다."  그러나 사상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聖人의 명부에 올림으로써", "자신의 사망증명서도 발급"하는 것이다.

 

-- "등급-- 첫 번째로 피상적인 사상가가 있다.  두 번째로 심오한 사상가, 즉 사태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세 번째로 철저한 사상가가 있는데, 이들은 사태의 바닥[근거]까지 내려가는 사람들이다--이는 심층에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진흙에 처박는 사상가들이 있다.  이는 깊이[심층]나 철저함[근거성]의 표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지하인들이다."

 

-- 나는 니체가 서문에서 자신을 묘사한 말,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사랑스러운 지하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바닥에 구멍을 뚫었으며, 우리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신봉해온 낡은 신념을 조사하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근거까지 내려가서 바닥에 구멍을 뚫는 사람, 나는 그것이 446절에서 말한 네 번째 사상가의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 바닥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더 아래에 있는 바닥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니체가 358절 제목에 쓴 표현을 이용하자면, '근거들의 무근거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 니체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를 오가면서, 시각을 전도시킬 줄 알았다.  그가 '병을 앓을 때조차 병적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이동성을 상실한 순간 니체는 다른 등급의 사상가로 귀착하거나 사상가이기를 그만두게 된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 니체의 비판을 통해 '깊이'가 전복되고 '근거의 무근거성'이 드러나면 그동안 근거에 의해 베제되던 모든 것이 복원된다.  '악인'조차 자신의 덕의 기초에 존재의 무구함을 인정받는다.

 

-- '긍정'이란 나쁜 점을 그대로 감내하는 일이 아니다.  예컨대 '병'을 앓으며 스스로 '아프지 않다'고 허위 긍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자신이 아프지 않았을 때조차 몰랐던 삶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는 것, 그것이 '병을 앓을 때조차 병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 다양한 건강 상태에서 다양한 통찰을 얻어낼 수 있는 사상가라면, 그리고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이들에게조차 하나의 '좋은 이성'을 발견해내는 사상가라면, 진리의 조건이 '다양성'에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정치만이 아니라 철학도 사상도 '아곤'(경쟁)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아곤'은 초월적인 것의 지배, 어떤 '참된 진리'의 전제적 지배에 반대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니체의 민주주의이다.  허위, 오류, 부당성의 지배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참된 것의 지배일 때조차, 훌륭한 엘리트들의 지배일 때조차, 그것이 전제적인 경우에는 거부해야 한다)

 

-- '진리'를 위해서도 다양한 '진리들'이 필요하며, '진리'를 위해서도 '비진리'가 필요하다.

 

     3. 위대한 사상가는 소박한 것을 대변한다     

 

-- 위대한 사상가들은 적은 비용으로 검소하게 산다.  빈궁하게 살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바로 '가치의 전도'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비싸게 치는 것들에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 대신 사람들이 내다 버리는 것들 속에서 귀중한 것을 발견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다.

 

-- "자신의 고독을 좀 더 사랑스럽게 포옹하기 위한 사교 외에는 어떠한 사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는 자들 대신 죽은 자들과 사귄다."  위대한 풍경화가는 "소박한 풍경"으로 충분하지만, "주목할 만하고 희귀한 풍경은 시시한 풍경화가들의 몫"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소박한 사물을 대변한다."

 

-- 니체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라 전제하고, 오히려 다른 이의 사상에 압도되는 것 그리고 그때 일어난 은밀한 변화를 기뻐한다고 말한 뒤, 그럼에도 '정신이 궁핍한 이들'에게 사상을 전한다면 어떤 형상일 수 있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정신이 궁핍한 사람들이 찾아올 경우 그들의 손과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고 불안한 혼을 달래주는 존재, 그러나 어떤 명성도 감사도 받기를 원치 않는 존재.

 

     4. 서서히 그러나 끝까지 가라     

 

-- 우리의 병은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는가.  니체는 그것을 "단번에", "성급하고 폭력적으로" 성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사소하고 작은 문제들과 시험들을 무시하고 지름길을 원한다.  그러나 한 번 믿음을 주는 것으로 永生을 약속하는 기독교처럼 그런 지름길은 우리를 속인다.

 

-- "[병에 걸린 몸을] 가능한 한 깊숙이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약을 극소량으로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천천히 가야 한다.  우리는 우회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사유의 진행은 무자비하며 대담해야" 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온화하고 유연해야한다."

 

-- 우리가 낫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방식을 고쳐야 하며, 영혼도 예외일 수 없다.  위대한 사상은 스펙터클한 사건으로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비둘기 걸음'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꾸준한 기다림의 실천 속에서 조용히 찾아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것은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작은 실험국가들을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실험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자!"

 

-- 천천히 그러나 우리가 갈 수 있는 끝까지, 실험을 멈추지 말자.  물론 우리도 언젠가는 피로 때문에 멈춰 서게 될 깃이고 사람들은 그곳을 우리의 끝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인류의 모든 태양이 침몰했던 곳을 향해 가는 새들의 군단이고, 우리 중 어떤 새는 분명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

 

--  창공과 대지에 소리 없이 그어진 선 하나,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며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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