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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후기] 언더그라운드 니체 2주차

강한상 2019.05.22 00:38 조회 수 : 171

언더 그라운드 니체 2회차 5.2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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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그라운드 니체’ 세미나 2주차 후기

 

들어가며

 

1회차 후기 이후 느낀 것이 있다. 철학은 내가 내 용어로 정리하여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그 깨달음의 실천결과로서 세미나의 내용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서 진술하는 형식의 후기를 써보려고 한다. 기억을 되살리고 논의를 더욱 풍서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오라클님이 단톡에 올린 글이 떠오른다. 니체를 공부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폼나는 니체 명언을 소비하게 폼나게 읽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기위한 계기로 만들며 읽는 것이다. 후자는 기존 나의 몰락과 극복을 가져오기에 위험하다. 이제 어제 우리가 만들었던 위험한 세미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부디 위험한 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내 마음에 들어온 니체의 말을 먼저 화두로 던지고 더 논의하겠다. “즐거움과 자유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즐거움과 예속 사이에도 모순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인도 노예도 모순 없이 즐겁게 살 수 있다. 다만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세계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성공한 노예가 되었을 때 노예가 느끼는 환희를, 자유인은 견딜 수 없는 치욕으로 느낀다. 그들은 마주 보면서도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두 개의 길, 즐거움은 어디에도 있다. 당신은 어디에서 환희를 느끼고 어디에서 비참을 느끼는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충격적이다. 처음 세미나 공지에 올라온 이 글을 읽고 소름 돋는 전율을 느꼈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세계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내가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답답했던 이유는 다른 인간들의 세계에서 숨을 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한다. 천처히 그러나 담대한 걸음으로! 빠르지 않아도 된다. 지름길은 가짜이다. 나의 인생 절반이 병들어있었다면 기꺼이 남은 인생 절반은 치료에 쓸 각오가 되어 있다. 혁명이란 대담하고 단호한 걸음이다. 1주차의 논의와 이어진다. 내가 느끼는 환희와 비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이제 니체와 함께 나를 찾는 탐험을 하겠다. 나는 누구일까?

 

제3장 우리 자신에 대한 모독

발제 – 엇결과 순결 Wood U Read

 

     1) 도덕의 부도덕한 동기     

 

니체는 우리가 당연시하거나 믿고 있던 도덕이 사실은 근거 없는 것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인간이 도덕적인지를 판단할 때 범하는 세 가지 중첩될 수 있는 오류가 있다. 첫째는 결과에 주목하는 오류이다. 우리가 운전하다가 옆의 차가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어서 급정거를 했다면, 우리는 우리를 놀라게 한 결과를 보고 끼어든 운전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떤 행위의 결과가 우리에게 해로웠다고 해서 그 행위를 부도덕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운전자가 다른 차량 때문에 긴급피난 등의 이유로 깜빡이 없이 끼어들었을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어떤 행위가 행위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하는 오류이다. 행위가 있다고 해서 꼭 피해자가 생각하는 의도가 가해자의 의도일 수가 아닐 수 있음에도 우리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앞의 사례에서 깜빡이 없이 끼어든 차는 내가 경차 타고 다닌다고 무시해서 혹은 내가 여자라서 무시해서 끼어든 것이 아닐 수 있음에도 피해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의 행위의 결과를 보고 가해자의 의도가 피해자를 해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세 번째 오류는 가해자의 의도가 그 사람의 지속적 성질 즉 본질이라고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시기에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가 그 사람의 본성인 것은 아닌데, 우리가 비논리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깜빡이 없이 끼어든 차를 보고 그 운전자는 본성이 예의없고 나쁜 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극한직업’이라는 가벼운 영화에 몇 개 안되지만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살다보면 어떨 때는 남의 똥도 치우고 내 똥도 싸면서 산다”는 것이다. 참 저렴한 표현이지만, 인간과 삶의 실체를 잘 표현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본성과 무관하게 남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많다. 내가 게을러서 내가 피곤해서 내가 무신경해서 얼마나 남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자주 이불킥을 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본성적으로 나쁜 인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즉 의도와 본질을 연결하여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이런 식으로 니체는 우리가 도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근거없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짓말에 대해서 불쾌함을 느끼고 솔직함에 대해서 대체적 쾌감을 느낀다고 하면, 거짓에 대해서 불쾌하게 느끼는 마음이 먼저 존재하고 솔직함에 대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다음으로 온다. 그리고 쾌와 불쾌의 감정이 있는 것인데 이것을 도덕감정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솔직함 곧 정직이 도덕으로서 절대선의 위치로 등극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쾌와 불쾌를 느끼는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쾌 불쾌의 자기 판단은 할 수 있지만,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보편적 목표로서 인류에게 규범화되어서 의무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 니체의 견해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타인의 도덕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그릇되다고 가르치는 것을 위험하다고 느끼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하다고 느끼면 사고를 정지시키고 사회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도덕을 즉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한다. 그래서 주입된 도덕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듯한 태도를 취하며 산다. 즉 우리는 도덕을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천성으로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어릴 적에 익힌 판단들에 의해 평생동안 놀아나게 되는 어릿 광대에 불과하게 된다.

 

이에 니체는 확고한 답을 준다. 사회에서 위험하다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에 쫄지말자. 타짜에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다. “쫄리면 되지는 거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왜 쪼는가? 이런 저렴한 표현을 니체는 핵심을 찌르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한, 그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어떠한 지침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개인의 행복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들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이제 우리는 그만 쫄고, 무리에서 벗어날지 모른다는 추방의 공포에 맞서며, 이제 스스로의 삶을 강자로 살기 위한 자기 입법 즉 주체적 지침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고유성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다.

 

     2) 도덕 물신주의     

 

도덕은 화폐와 같아서 인간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소외시킨다. 인간을 피가 흐르지 않는 추상적 인간으로 상정한다. 화폐가 보편적이 되기 위해서 금이나 쌀과 같은 구체적 질료가 갖는 특수성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도덕은 보편적이 되기 위해서 인간들이 가진 모든 특수성을 배제한 추상적 인간을 가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에 의해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유하고 특수성을 가진 존재로 살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어떠한 지침에 의해서도 통제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각자만의 고유한 법칙을 통해 살아가야 한다.

 

도덕은 앞에서 살핀 것처럼 쾌와 불쾌라는 감정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것은 도덕은 이행과정 즉 의무 이행과 권리 주장에서조차도 쾌와 불쾌라는 감정을 따를 뿐이다. 우리는 도덕이 생성되고 이해되는 어느 과정에서도 절대성과 논리성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 유치원 때 배운 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어릿광대로 살게 된다.

 

     3) 하나의 주석 창작물로서의 자아     

 

세미나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화제가 등장한다. 자신/자기 selbst와 자아/주체 ich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 자신이란 느끼지만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내가 모르는 미처 만나지 못한 내 안의 모든 가능성의 총체이다. 우리가 행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자유로운 주체이다. 이는 한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아란 이와 달리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이며 한정된 존재이다.

 

엇결님이 말한 대로 요즘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너의 자아를 찾아 나서라”라는 의미의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는 오남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자아라는 것이 미지의 것일 수 있음은 동의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아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착각이며 고정성에 갇히고 만다. 니체는 자신을 자아라고 한정하는 순간 자신이 아니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즐거운 학문에서 나왔던 개념을 떠올랐다. 우리 자신 혹은 우리의 인생은 확정된 것이 아니고 변동된 것이다. 우리를 비유하자면 우리는 바다와 같다. 바다라는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의 겉모습은 파도처럼 매순간 변동한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 파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오류에 빠지게 되고 고정성의 함정에 갇히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정불변한 자신은 없고 자아/자유의지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는 고정된 실체는 없고 충동들 사이의 충돌들만 있을 뿐이다. 니체가 보기에 자아란 일시적 중심인 것이다. 결코 고정된 자아란 없는 것이다. 오라클님은 이런 우리의 selbst를 애벌레의 주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충동들이다. 우리 안에 마치 가능성을 무수히 가진 애벌레가 우글우글거리는 것처럼 미세한 충동들이 꿈틀거리는 것 그것은 가능성들의 움직임과 생명력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애벌레의 주체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행동의 주체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졸릴 때를 가정해 보자. 사실은 나라는 존재가 졸린 것이 아니다. 아데노신(adenosine)가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할 때 졸음이 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졸리는 것은 우리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몸은 피곤할 때 뇌에서 아데노신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은 분비시키고 아데노신이 신경세포의 아데노신 수용체에 붙으면 그때부터 두뇌와 근육 간 소통이 느려져 활동이 느려지고 졸음이 몰려오면서 수면이 촉진된다. 참고로 아데노신은 자는 동안 혈액공급의 원활함을 위해 혈관을 확장하는 역할도 한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면 졸음이 가시는 이유가 커피 속의 카페인이 아데노신 대신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하여 즉 길항제로 작용하여 졸음을 방지하고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높아지게 하고 신체를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아의 통제 아래서 일사분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애벌레의 주체들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간혹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애벌레의 주체 때문이다. 우리 안의 충동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신체 전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안에 흡연충동이 있다면 그 흡연의 꿈틀거리는 애벌레는 오직 흡연하고 싶다는 욕망을 발산하고 우리에게 담배를 피게 만든다. 그 충동은 우리 신체 전체의 건강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오라클님이 정리하시기를, 자신/자기 selbst는 큰 이성이며 힘들/미세한 충동들/미세한 지각들의 복합체이고 에너지가 우글거리는 애벌레 주체들의 장이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현재이며 자아 배후의 충동들이다. 자아/주체는 이러한 힘들의 잠정적 중심이고 현행화된 것의 주체이며 작은 이성이라고 한다.

 

우리 안의 잠재성은 개인 안에도 존재하지만 사회나 단체에도 존재한다. 정당을 생각해보면 자한당 내에도 여러 힘들이 존재하지만 보수성이 우위에 있는 것이고 민주당은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재와 맞서 투쟁하는 전투적 성격을 지니기도 했지만 요즘은 중도 보수 정도가 우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개인이든 단체들 그 안에 존재하는 힘들이 부글거리다가 어떤 힘이 우위를 점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대표적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역시 바다와 파도의 비유와 유사하다. 우리의 실체는 바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람과 달의 인력 등의 힘으로 무수히 많은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이다.

 

오라클님의 개인적 경험으로 라틴댄스를 7년간 춘 것이 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무엇인가가 있고 이에 귀를 기울이면 자기 해석과 행동패턴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애벌레의 주체를 만날 수 있다. 연두님은 니체를 만나고 무기력과 허무 속에서 자기를 세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적 존재로 서기가 너무도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연두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은 ‘자코메티’였다. 그가 천착한 스스로 서는 인간의 형상들! 너무도 가늘고 작은 몸이지만 의연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 우리는 스스로 서기 어렵지만 그렇게 위태롭게 위태롭게라도 걸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니체의 견해는 우리가 배치된 것 그리고 우리의 조건들을 긍정적으로 보기를 바란다. 우리 내부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조합이 많다. 이것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내버려두어야 한다(let it be) 이것이 세상의 실체인 우연에 대한 관점 즉 perspective이다. 세상에 가득한 우연을 가능성과 잠재력이 가득하게 펼쳐진 모습으로 인식한 사람이 강자이다. 그런데 우연의 세상을 불확실성으로 인식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약자이다. 우리는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는 자기를 극복할 수 없다. 고통을 자기가 상승하기 위한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강자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고,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은 약자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강자라면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도전도 일단 한번해보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환희를 느낄 수 있고, 노예로서도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환희를 느끼는 지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우리는 우연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엇결님이 화두를 던졌다. 우연을 긍정하고 싶으나 두려움을 주는 외부적 힘 혹은 중력장이 존재하는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억압하는 중력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것을 무한히 생성 가능한 가능성으로 인정하고 실험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자의 관점이며 태도이다. 니체는 근대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한다. 기존의 가치를 허물어버리고 위험 자체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엄청난 긍정의 존재이며 니체의 사상이 가진 위험이란 지극히 매혹적이며 가치있는 위험일 수 있다. 우리는 기꺼이 위험한 존재가 되어 니체가 말한 위험으로 몸을 던질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면 우리는 몰락하고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무수히 겪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엇결님은 지속적 문제 제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실패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난 공포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예를 들면서 조르바는 망했지만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재기불능에 빠지고 가정까지 파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뮤즈님은 선택했기에 위험에 처할 수도 있지만 선택하지 않았기에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용자의 부당한 모습에 자기를 던져서 위험을 감수했던 노조위원장은 위치를 인정받고 생존하지만, 이것저것 눈치 보면서 사용자 옆에서 숨죽이던 노동자가 퇴직을 당할 수도 있다고 사례를 이야기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사례를 목격한 경우가 있다. 고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간 여 학우가 대학 온 후 모든 위험한 도전을 거부하고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자기가 선택한 삶의 대립항인 위험을 감수하는 삶에 대해 쓸데없는 일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임용고시 서울 1등으로 교사가 임용되고 중고교 교과서 집필하면서 자기 능력의 범위 안에서 안전하게 성취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교사로서의 삶에 맞는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집안 출신의 가정적 남자와 만나서 가정을 꾸렸다. 좋은 시부모님들이 강남에 아파트를 한 채 사주었고 겉으로 보기에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그녀의 모습은 안전만을 추구했기에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자기 삶을 다 잃어버린 아이엄마의 모습.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부족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깊은 결핍과 허무에 빠진 모습. 어쩌면 그것이 안전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위험의 모습이 아닐까한다. 세상은 우연의 총체이다. 따라서 위험을 피할 수는 없는 듯하다. 내가 안전을 선택해도 위험하고 내 마음이 애벌레의 충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위험하다.

 

삶이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우연의 총체이기에 내가 안전한 길을 선택했는데 갑자기 닥쳐온 트럭에 치여서 죽을 수 있다. 실제로 시인 김수영이 인도로 가다가 달려드는 트럭에 치여서 죽었다. 세상의 어디에 안전한 곳이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곳은 위험하지 않은 곳일까?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라클님은 우리의 삶이 의도와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거의 없음을 말한다. 세상에는 우연적이고 낯선 것들이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협동조합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50년 간 노력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까지 노력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자본의 의도에 따라 협동조합을 합법화시켜버렸다. 우리는 우연하고 낯설게 다가오는 삶의 모습에 직면한 후 나중에 그것에 명분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즉 세상은 우연에 의해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이 그 주사위 결과에 필연적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위험이 있는 실험을 하다가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실패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곳을 갈 때 ktx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도보로 걷는 것이 옳은 것일까? 세상 모든 것은 장단점 모순된 속성을 함께 가진 양가적 존재이다. 각각은 장단점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각 선택의 긍정성에 주목하면 된다. 고속철을 타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장점이고 단점은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에서 소외된다는 것이 단점이다. 도보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다리도 아파서 힘들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의 모든 아름다운 존재들을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코끝을 스치는 나무의 향기와 갑자기 들려오는 새소리와 시야를 터지게 만드는 멋진 풍광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정답은 옳은 선택이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에서 긍정성에 주목한 것이 우리의 능력이고 역량이다.

 

이에 대해 규상님은 현실적 의미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관점으로 보면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제시대 혹은 군사 독재 시절에 일본이나 독재자에 협조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쥐고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일본이나 독재에 맞선 사람들은 고통받고 가난했다. 무엇이 성공일까? 이때 유시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행동의 목적이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실패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행동을 시작한 이유가 옳게 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는 희극도 비극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희비극을 긍정할 때 그의 삶의 가치가 고양된다.

 

어떤 맹인은 자기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인식한다. 자기는 눈이 없어서 세상의 더러운 모습을 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서초동에서 어떤 남자가 가족들을 살해하고 동반자살을 시도했는데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존재였는데, 퇴직을 당한 후 신세를 비관해서 그런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통장에는 6억의 돈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6억은 큰돈인데 그에게 6억은 생존을 이어갈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의미 없는 돈이었다.

 

제4장 탈주함으로써 도래하는 것

 

고대 그리스인들은 조금을 알았지만 그것이 자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에게 부합하는 말을 하고 실현가능성이 있는 말들을 한다. 그들은 많이 알지 않기에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이 행동한다. 이에 비해 근대 유럽인들 혹은 현대 한국인들은 많이 알지만 자기와 관련된 것만 모른다. 자기를 모르고 자기 삶과 분리되어 있다. 즉 그들은 진정성이 없는 허위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모르기에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어긴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 서약이다. 평생 지속될 수 없는 열정을 결혼제도로 평생 유지하겠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어긴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잡식성을 가지고 닥치는 대로 지식을 얻고 수집하지만 그 말은 곧 취향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기에 위험도 잘 알고 공포에도 예민하게 대응한다. 이는 자기를 보지 않고 끊임없이 손님을 주시하는 즉 타인에게 광적으로 집중하는 상인과 유사하다.

 

그리스인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자기를 정확하게 이해한 후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빼먹었다. 노인을 보고 그들의 노쇠함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숙함을 높이 평가하고, 아이를 보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진난만함에 주목한다. 즉 긍정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곳에나 얼음판은 존재한다. 그 얼음판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김연아처럼 얼음판 위에서 춤추는 무용수가 되면 된다. 그것이 긍정의 관점이다.

 

근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을 삶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니체는 자기가 이해한 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니체는 도래하는 것을 단순히 미래에 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예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도래하는 것이란 이미 와있는데 나만 모르고 나에게만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즉 이미 도래했지만 나만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 도래하는 것은 나의 때가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비시대성을 발견하고 맞이하기를 기다리겠다는 선언이다. 도래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용법을 찾고 내 안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줄기세포와 같다. 이를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꿈틀거리는 애벌레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에서 기존의 것 즉 시대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 즉 내 안에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는 것이 탈주이다. 이는 행복과 직접 관련은 없다. 노예의 삶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겁기 때문에 자유인만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노예적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수치를 느끼는 자기 내면을 발견했다면 그는 자기 안에서 도래하는 것을 발현 시킨 후 탈주해야 한다. 이는 생명의 탈주이다. 자기 안의 힘을 발견한 자는 반드시 이동해야 한다. 니체의 생각을 이해한 후 우리는 철학의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탈주하고 이동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많이 안다고 삶과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공부를 많이한 정치가나 교수가 실제 자기가 아는 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존에 앎과 삶이 연결되게 살았는데, 근대 데카르트 이후 철학은 인식론으로 바뀌었다. 이제 양생의 기술이었던 철학이 미시적 과목으로 분화되면서 인간은 미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많아졌지만, 마치 분업을 한 노동자들이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근대 철학은 삶과 직결되는 질문에 무감각해졌다. 이렇게 삶과 유리된 철학과 공부를 니체가 정확히 찔러버리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한 개인이 너무도 거대한 세계와 대면하면 실체와 접촉할 수 없고 적당히 겉만 보고 접근해야 참여가 가능하다. 우리는 분화된 세계 속에서 자기의 경험과 감각의 감옥에 갇혀있다. 예를 들면 재벌은 돈 만원으로 순대국을 행복하게 먹는 즐거움을 알 수 없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전면적으로 세상을 만나서 경험하고 사고하고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각 개인이 원자화되고 소외된 채 사회와 만나게 된다. 과거에는 철학이 모든 학문의 왕이었는데, 이제는 천문학자는 천문학만 공부하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할 때도 진화심리학 등의 심리학을 공부할 뿐이다. 앎이 끊임없이 분절되었기에 우리의 삶과 실천도 분절되었다.

 

진정성이란 삶과 앎이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응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긍정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곧 우리이다. 규상님은 우리가 땔감처럼 연소되거나 동전처럼 마모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동정심과 연대의식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를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의 고통 받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객관적 실체로 인식하고 그들의 아픔을 내것으로 인식한 후 서로가 동등한 주체가 되어서 각성으로 만나는 연대성이 연대의식이다. 이를 동정이라는 저급한 감정으로 폄하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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