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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후기] 언더그라운드 니체 1주차

강한상 2019.05.14 18:56 조회 수 : 345

어제의 세미나 후 그 내용을 복기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후기를 써보았습니다. 일하는 틈틈히 써서 표현이 정제되지 못하고 내용도 미흡하지만, 그저 미욱한 자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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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그라운드 니체’ 세미나 1주차 후기

 

= 들어가며

한 달 간의 긴 휴식을 끝내고 다시 시작한 니체세미나. 새로운 책과 새로운 멤버로 시작하는 세미나를 참여하러 가면서 작은 설렘임은 느꼈다. ‘즐거운 학문’에 대한 세미나를 끝내고, 이제 ‘언더그라운드 니체’와 ‘서광’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한다.

언더그라운드 니체는 책 제목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니체는 지하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일단 책 표지에 나와있는 문구가 날 자극한다. ‘천천히, 그리나 대담한 날갯짓으로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하여’. 이규상님의 말처럼 니체는 경계 바깥에 있는 자이지만, 경계 내부의 핵심을 가장 잘 건드리며 그것을 누구에게나 매혹적으로 느껴질 문장으로 표현한다. 이제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삶의 근본적 자세를 바꿀 수 있는 대담한 날갯짓을 시작하려고 한다.

 

= 내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과연 확실한 것일까?

제목의 의미는 확실해 졌다. 니체는 모든 기성 가치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는 단계인 사자의 시기의 절정상태가 이 책에 나와있다. 그는 모든 기성 가치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던 그대로인지 가장 깊은 바닦까지 파헤쳐간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즉 니체는 광부처럼 기존의 가치에 대한 신뢰성의 근간을 파들어가서 궁구한다. 그 밑바닥까지 갔다가 온 자들 즉 사유의 잠수자들은 마치 심연을 다녀온 고래(향유고래는 수심 3km밑까지도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처럼 충혈된 눈을 갖고 있다. 그 눈은 가장 밑바닥보다 깊어서 깊이 자체가 사라진 곳을 다녀온 자의 눈이다. 심연의 세계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 지혜로운 눈을 징표로 갖는다.

내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확실하지 않은 것이었다. 삶이나 상황에는 고정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가 그것을 고정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던 것의 근원까지 고찰해봄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던 것 이면에 있는 ‘은폐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제1장 니체와 철학

 

     1) 타자로서의 철학          

우리가 어떤 사회의 프레임에 갇혀있으면 그 사회가 제시하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이 조선 사회에 속한 존재이면서도 자신을 방외자 즉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프레임을 벗어난 사유와 삶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당연시되고 있던 사회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와 사회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타자의 반대는 동일자이다. 동일자의 철학은 마치 왕립철학처럼 시대가 원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철학이다. 우리는 동일자의 철학 즉 기존 사회의 프레임에 의해 살아가라고 제시하는 철학에 의해 자꾸 자기 동일성으로 나아가려는 감각과 경향을 갖게 된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기존 사회의 시선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철학은 이성의 명석함을 깨워서 감각을 예민하고 기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동일성으로 나아가려는 감각보다는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는 감각을 갖는 것이다. 이 낯선 감각을 받아들이자. 내 안의 타자성을 깨워서 타자로서의 철학 즉 경계 바깥의 인간/방외자로서의 철학을 해야 한다. 자~ 이제 인식했으니 실천해보자.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음식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보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해보자. 그렇게 자꾸 경계 바깥에 서서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보자~

 

     2) 사자의 시대와 결별하며 생성의 철학으로 나아가기          

‘서광’에서 니체는 기존의 반시대적 고찰을 집대성해서 완성에 가까워진 후 이제 사자의 시대와 비로소 결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시대성 즉 어린아이의 시기/생성과 탈주의 시기에 접어들어갈 준비를 끝냈다. 기존의 것을 완전에 가깝게 몰락시킨 후 비로소 생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때 아닌 어느 때’란 비시대적인 때를 의미한다. 동시대가 알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는 것 즉 동시대가 식별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동시대에 존재하지만, 그 시대가 수용하기 어렵고 규정도 불가능한 것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가 광인이며 그러한 모습이 광기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시기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시대가 담을 수 없는 존재 양태를 생성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기를 갖고 광인이 되어서야 기존의 시대가 인식할 수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탈주와 생성을 감행할 수 있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서광- 아침노을’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내가 남과 다름을 많이 인식하면서 살았다. 남들이 흔히 즐거워하고 추구하는 것에서 나는 권태를 느꼈고, 내가 관심을 갖고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은 지루함 혹은 혐오 혹은 증오까지 느꼈다. 그러면 적절히 나를 숨기고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며 혹은 사회화되며 혹은 길들어지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간혹 만나게 되는 예술작품과의 아찔한 조우, 철학자가 명쾌하고 치열하게 고뇌한 산물과 만나며 소통과 공감에 대한 갈망을 달랠 뿐이었다. 니체에게서 ‘광기, 광인’의 개념을 들은 후 마음이 놓인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고뇌했떤 이유는 철저하게 광기에 몰입해서 완전히 광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광인이 되는 단계를 밟아보겠다.

 

     3) 계보학          

계보학은 니체적 방법론이다. 보통의 역사학이 현재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과거를 영광스럽게 끌어온 것이라면 즉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현재로 수렴한 것이라면, 계보학은 역사학과 목적 자체가 다르다. 니체는 무자비한 비판이 가능하도록 뿌리로 나아가 뿌리로부터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계보학에서는 선행 조건이 현재를 만든다고 본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왜 신이 존재한다고 해석했는지와 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를 근원부터 밝힌다. 신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라는 기존의 대립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유래를 찾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진정한 의지와 욕망을 규명하는 것이다. 화제 자체의 시시비비를 따지면 그 화제가 설정한 프레임에 갖히게 된다. 우리는 프레임 밖으로 나와서 그 프레임이 과연 정당한 프레임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4) 광부로서의 니체- 심연에 도달          

광부는 땅을 갈아엎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던 것을 다 무너뜨려야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가장 공포를 느끼는 자연현상이 지진이라고 한다. 땅을 흔들고 갈아엎어서 기존의 것들을 다 무너뜨려야 한다. 기존의 신성을 해체한 후 남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작업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실제로 니체는 그라운드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면서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죽을 뻔했다고 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그라운드 즉 기존의 믿었던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도달한 곳이다. 이곳은 카오스이고 모든 충동이 혼재된 곳이다. 심연과 심층은 구별되어야 하는데 심층이란 지표면이라는 기준 밑으로 파고든 것이다. 그러나 심연은 기준 자체가 없다. 기존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해체된 곳을 의미하기에 모든 근거가 몰락한 곳이며 기존 생각에 대한 근거들이 사실은 근거 없음이 드러난 곳이다.

 

이 심연을 경험한 사람은 극심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기존의 모든 것들이 해체되었기에 인간은 기댈 곳을 잃어버리고 자기 원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과 대면하게 되는 곳이 심연이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선택한 것이 가족에 대한 배신이거나, 혹은 이기적인 것이거나 센 척한 것이거나 허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자기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격렬한 기쁨과 그것도 사실 착각이나 거짓이 아닐까라는 상반된 충동이 충돌할 수 있는 것이다.

 

심연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의 욕망은 시대에 의해서 서열이 정해져있다. 가장이라면 가족 부양이 최우선의 욕망이며 그 다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에 따라 돈을 많이 버는 것이며 등등으로 서열이 정해져있다. 그렇게 질서지어진 지상에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거나 서열이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심연에 이르면 우리 안에 있는 무수한 욕망과 충동이 가장 밑바닥의 것들까지도 폭발적으로 드러나며 그것들의 우선 순위도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 심연의 단계는 지극히 위험하지만, 이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생성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

 

심연은 기존의 것의 모든 근거가 사라지는 곳이기에 기존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혹은 순위가 밀렸던 모든 가능성 나타나는 곳이다. 물론 이 심연은 엄청 괴로울 수 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 회사에서의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퇴사한 후 낮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꿈에 부풀지만 밤에는 자신의 선택이 진짜 옳은 선택인지 극심한 두려움에 싸여 공황장애 정도까지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심연에 이른 자는 아플 수 있다.

 

그러나 심연은 모든 것이 파괴된 고통의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생성가능한 생명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사자의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단계로 가기위해서 반드시 심연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광부의 자세로 지하까지 파고들어가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심연에 이르러서야 사유의 잠수자가 되고 충혈된 눈으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심연을 다녀온 고래의 충혈된 눈은 심연에 다녀온 사상가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연은 개인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1980년 5.18 광주항쟁이 일어났던 광주광역시라는 공간은 사회적 심연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가치체계가 사라진 일시적 해방공간이기에 인간은 그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사회적으로 거대한 심연이 생기면 그곳은 기존 가치가 붕괴된 곳이며 동시에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는 공간이다. 이렇게 붕괴와 생성이라는 모순된 속성을 갖고 있는 양가적 상태가 심연이기에, 심연에 다다른 자가 쉽고 빠르게 답을 찾으려고 하면 위험하다.

 

이규상님의 말대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섣부르게 답을 내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수심은 외부적 잣대로 판단이 가능하다. 이 깊이는 심층이며 고정된 것이고 경직된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심이 아무리 깊더라도 경직된 잣대로 측정하면 되기에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가능성과 위험함을 같이 갖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파멸할 수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는 양가적 존재이다. 니체의 말처럼 무의식은 캘수록 무의식의 폭이 넓어진다.

 

니체는 기존가치가 진짜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닐 것인지 연구하고 성찰하는 것을 지하에서 작업한다고 표현했고 그것을 계보학이라고 했다. 즉 계보학을 통해 기존의 가치가 가진 허구성을 밝힌 것이다.

 

제2장 수치스러운 기원

신성하다고 여기고 있던 이성 등 모든 것이 수치스러운 기원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떤 광학 없이(예를 들면 해석의 관점) 세계를 볼 수 없다. 만약 사회가 인간에게 설정한 프레임이 붉은 조명이라면 우리는 그 프레임으로 어떤 대상을 보면 전부 붉게 보이는 상태에서 명도와 채도의 차이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프레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의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다.

 

풍습이든 도덕이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생리적으로 사람을 둔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대하는 자신의 작동방식이 동일해진다. 즉 우리는 사회가 설정한 풍습과 도덕에 의해 길들여져서 본인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수봉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 화투나 카드가 50장이 들어있다면 우리는 사회가 설정한 프레임에 따라 2~3장 카드만 보이도록 길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즉 모범생이거나 무난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는 문제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나면 이제 내 안에 있는 카드 50장을 자유롭게 전부 드러내고 사용하며 살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보면 웃으면서 30살이라고 이야기해도 괜찮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꼭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에 내가 얽매일 필요는 없다. 광기는 자기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힘이다. 그것들을 부숴버릴 때 나는 자유로울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생명의 탈주를 할 수 있다.

 

     1) 힘의 감정          

힘에의 의지의 선구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덕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자기의 덕을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들이 온힘을 다해서 자신의 덕을 드러내면 그렇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시기한다. 그러나 힘을 가진 강자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리감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즐긴다. 자기의 덕을 드러내는 것에 몰입해서 마치 놀이에 빠진 어린 아이처럼 즐겁기 때문에 약자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시기심 따위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그가 힘의 감정을 가진 강자이다.

 

     2) 연두님의 의문들          

① 우리가 사회가 설정한 프레이 즉 인식 체계의 감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② 니체 세미나 등을 통해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식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감정은 그 바뀐 인식과 맞지 않을 때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힐까?

예를 들면 내가 인식이 바뀌었음에도 나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 예를 들면 어머니와 대화할 경우 나는 바뀌었지만 어머니는 바뀌지 않았기에 문제가 자꾸 생긴다.

 

이런 문제 상황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니체의 말을 빌려서 대답하면 다음과 같다. 지름길은 가짜다. 오직 정직한 혁명만이 답이다. 30년 동안 병이 들었다면 30년을 치료에 쓸 생각을 해야 한다. 조급해하는 이는 눈을 빼앗기고 영혼을 빼앗긴다. 때는 내가 생각하기에 와야한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오지 않는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 혁명이란 빠른 걸음이 아니고 대담하고 단호한 걸음이다. 맙소사! 니체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불면의 밤을 보냈기에 이렇게 훌륭한 답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것일까? 아름답다!

 

우리도 스스로 답을 생각해보자. 물론 니체의 지혜를 빌려서 사고할 수 있다. 놀이에 빠져서 노는 아이는 놀이가 너무도 즐거워서 밥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을 못 쓰고 타인의 시기심에도 주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모두 한때 어린 아이처럼 놀이에 몰입해서 즐거웠던 적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린아이의 시기처럼 삶이 놀이 같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가치 즉 기쁘고 즐거운 것에 집중하고 몰입하면 부정적이고 반동적 가치는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놀이에 빠진 아이가 너무도 즐거워서 슬픔을 느낄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과 닮아간다. 우리는 부정적이고 반동적 가치와 싸우지 말고 그들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과 싸우면 그들이 설정한 프레임에 싸이게 된다. 관종을 고통스럽게 하고 고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수봉님이 말한 대로 자기 내면의 카드 50장을 전부 거리낌없이 꺼내보일 수 있는 자유를 얻으려면 자기가 살아온 만큼의 훈련시간을 가져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면 체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힘의 감정과 충동과 욕구 즉 에너지들을 민감하고 섬세하게 느끼며 살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구체적인 것을 찾고 있다. 우리는 경상도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살아있네’라고 자주 말하며 살아야 한다. 특히 자기 자신을 보면서 ‘살아있네’ 와우 아주 멋진데라고 생각하며 살면 된다. 힘의 감정 즉 에너지를 민감하게 느끼자.

힘의 감정을 느끼면 두려움도 동반된다. 예전에는 도덕적 기준에서 판단하니까 모든 세계가 명확하게 질서가 있고 구획이 존재하는 안정된 세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는 노예의 마인드 약자의 마인드이다. 노예는 어떤 것도 자신이 결정할 필요가 없다.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강자에게는 억압과 구속으로 인식되지만 약자 즉 노예에게는 편안함으로 인식된다. 약자는 무리에서 벗어나는 두려움에 휩싸이며 방황 선회를 할 때 느껴지는 흔들림과 동요를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세상의 물리 법칙에는 관성이 있는데 이 관성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혁명이란 빠른 걸음이 아니라 천천히 걷는 것이지만 단호한 것이라고! 놀랍다. 그는 이 많은 의문과 고뇌들을 치열하게 하고 설득력있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개꿀이다.

 

     3) 강한상의 의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은 놀이일 수 없는가? ‘즐거운 학문’ 세미나 이후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있다. 니체를 접한 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은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져올 수 있는 인간성 말살의 요소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회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 허무와 무가치함과 소외를 견디기 어려웠다.

 

흔히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은 놀이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니체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가장 큰 도구가 내가 혹은 사람들이 당연히 ~하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진짜 그러한지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광부의 자세로 철학을 해야한다. 진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톱니를 굴리기 위한 소외의 한 형태로 머물 수밖에 없는가?

 

세상의 시선에 따라 내 삶과 노동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과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생성하고 싶다. 자본주의란 긍정이나 부정의 속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의 속성을 다 가진 양가적 존재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긍정과 부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의미없는 가치중립적 존재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선하거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저 돈 즉 자본의 확대를 위해 증식하는 존재, 판타지 게임 속의 슬라임처럼 무한증식하는 존재일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영혼 회귀 속에서 긍정의 긍정을 하고 확실하게 주어진 현재를 자기의 전존재를 던져서 사는 것! 이 니체 사상의 핵심을 자본주의는 포섭해서 대중에게 알린다. 그것의 구체적 예가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이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의 핵심을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흥겨운 리듬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아모르 파티를 알리는 것은 선의인가 악의인가? 그런 것따위 없다. 그저 돈이 되니까 생산되고 소비될 뿐이다.

 

니체를 공부한 후 세상의 많은 니체의 사상을 구체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리터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보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집안의 남자들은 대대로 시간을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이어받는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깨달으며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핵심 조언을 듣게 된다. 그 내용은 하루를 2번 살라고 조언을 받은 것이다. 첫 하루는 그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 사는 모습 그대로 어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혹은 취업을 위해 혹은 점수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그 하루를 다시 시작해서 새롭게 산다. 이 두 번째 하루는 과업 중심의 태도 즉 기존의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작은 감각적 경험들에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침 10시 내 얼굴을 스치는 봄바람의 촉각을 느끼며 기뻐하고 나를 위해 문을 열어준 사람의 눈을 마주보면서 웃어주는 기쁨에 주목하며 산다. 즉 두 번째 하루란 하루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한 자연상태 혹은 인간과의 관계에 섬세하고 기민하게 반응하며 사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니체가 말한 영혼회귀를 통한 선택의 의미이며 긍정의 긍정이다. 결국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크게 흥행하면서 자본 증식에 기여했는데 그렇게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은 악의도 선의도 없이 그저 자본을 증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제 니체에게 얻은 지혜를 가지고 나의 삶과 노동을 바라보자. 사실 나는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아모르 파티를 작사작곡한 사람와 유사하다. 세월호와 관련된 뮤비를 만들어서 노래했던 방탕소년단을 기획하고 전세계적으로 소비시킨 방시혁의 위치와도 비슷하다. 내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삶과 노동의 의미를 타인의 시선과 가치판단에 따라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은 니체세미나를 통해서 얻었다. 내가 만드는 삶과 노동이 어쩌면 놀이처럼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작은 실마리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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