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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세미나에서는 그로스의 『몸 페미니즘을 향해』의 5장을 읽고 논의를 나누어보았습니다. 이번 5장에서부터 저희는 책의 3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부에서는 정신분석학, 신경생리학, 그리고 현상학을 매개로 “정신적인 내부가 몸을 외재성의 형식, 말하자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향하는 외재성의 형식으로 만들었던 방식을 탐구”해보았습니다.(276) 말하자면 몸의 심층적인 깊이에 대해 고찰한 셈이지요. 이제 시작된 3부에서 저자는 탐구의 방향을 바꾸어서 “바깥에서부터 안으로의 운동”에 대해 다루고자 하는데요, 이로써 논의의 주제는 (2부에서 다루었던) 몸의 심층적인 깊이보다는 몸의 표면이 외부와 접촉하는 방식과 그렇게 “몸 표면 위에 새겨진 사회적인 각인이 정신적 내부성을 형성하는 방식”이 됩니다.(276)

이미 앞선 세미나들에서도 자주 이야기된 바 있습니다만,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정확하게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회와의 관계 맺기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이러한 어른들의 사회적 관계가 성별 구별에 기초해 구성되어 있는 만큼, 아이들은 사회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별화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아직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옷이나 장난감을 살 때부터 아이의 성별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출생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하지요. 아이들은 (보통 부모를 시작으로)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로부터 그저 인간으로서 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별화된 존재로서, 즉 여자 혹은 남자로서 대해집니다. 인간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바깥세상에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 성별화된 사회적 질서와 관계를 맺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런 성별화된 관계를 학습해 내면화하여 그런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저자 그로스는 책의 3부에서 이렇게 우리의 몸에 어떻게 사회적인 각인이 기입되어 정신의 내부성이 만들어지는지 고찰하고자 합니다.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써 저자는 드 세르토의 주장을 가져옵니다. 그에 따르면, “육체적인 각인(사법적, 의학적, 형벌적, 훈육적 각인)을 통해 육신, 즉 가공되지 않은 무정형적인 신체적 물질성이자 신비한 ‘원초 질료’로서의 육신은 구별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회적 봉인에 의해 표시되고 낙인찍힌 사회적으로 특수한 방식으로 특수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구별되는 몸으로서 구성된다”고 합니다.(281-282)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무정형적인 신체적 물질성이자 신비한 ‘원초 질료’로서의 육신”인데요, 여기서 드 세르토는 신체를 텅 빈 백지로서 이해합니다. 아직 아무런 표시 없이 앞으로 텍스트가 적히기를 기다리는 그런 백지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백지로서의 몸에 사회적인 각인이 새겨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텅 빈 백지와 같은 몸에 사회의 영향이 고스란히 작용한다고 하면, 사람들마다의 다양한 차이를 설명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죠. 교실에서 아이들은 선생님의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각자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한 사회에서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음에도 사람들은 가지각색입니다. 이런 차이는 심지어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에서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똑같은 사회에서 나고 자랐는데 누군가는 그 사회의 질서에 순응적인가 하면 누군가는 사회 질서에 저항적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각인이 어디서는 성공적으로 질서에 충실한 주체를 형성한 반면, 어디서는 기성의 질서에 대한 저항심으로 충만한 주체를 생산하는 현상은 신체들의 구체적인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몸을 백지라고 규정해버리면 이러한 차이들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곤란함이 생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백지로서의 몸이라는 관념은 한계를 갖습니다. 드 세르토도 분명 이런 지점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전히 불충분해 보입니다. 그는 “‘분명히 말해질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는 고통’, 각인에 선행하거나 각인에서 벗어난 육체성이나 육신을 설정”합니다.(283) 하지만 ‘분명히 말해질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는 고통’만으로는 신체들의 구체적인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아직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드 세르토의 주장이 “텍스트성에 대한 편협한 혹은 데리다의 어휘로 표현하자면 ‘조잡한’ 독법”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283)

따라서 사회적인 각인이 새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백지였던 것은 아닌 신체를 사고할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하는데요, 그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5장에서는 먼저 그들의 선배 격인 니체에 대한 논의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니체에게서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또 다른 사유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니체에게 몸은 권력의지와 능동적인 힘(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힘)의 운동을 위한, 내부 장기 혹은 세포질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통합된 유기체이자 활동하는 동물이자, 자원이며 장소”입니다.(290) 몸에서는 다양한 권력의지와 힘들이 지배권을 둘러싸고 서로 투쟁을 벌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몸을 그 위에 속성들이 첨가되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이해하지 않고, 힘들의 지배관계에 따라 상태를 달리하는 것으로 봅니다.

예컨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의 신체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 배가 고파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의지, 피곤하니 쉬고 싶다는 의지 등 다양한 의지들이 동시에 존재할 것입니다(여기서 의지란 의식적인 자발성을 의미하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충동에 가까운 의미라는 점에 주의합시다). 그런데 니체적인 사고에 따르면, 이들 의지들의 다툼 속에서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다른 의지들을 누르고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기에 저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만약 잠시 뒤에 뭘 좀 먹고 싶다는 의지가 지배적이게 되면 저는 쓰던 글을 제쳐두고 냉장고 앞으로 향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글을 쓰는 신체에서 먹을 것을 뒤적거리는 신체로의 변화)는, 니체에 따르면 제 몸에서 투쟁을 벌이는 다양한 힘들의 지배관계가 변화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니체는 더 나아가 우리 신체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이 그것인데요, 능동적 힘은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신의 복지와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데 이는 통치하고 확장한다는 점에서 고상하고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외부에서 행동의 원칙을 찾으려고” 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부정하고 능동적 힘에 따르거나 혹은 반작용하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292) 원한 감정이 대표적인 예시가 될 것입니다(각주1, 2). 원한 감정을 비롯한 반동적 힘은 자기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부정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 타자에 되려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능동적 힘을 지배적인 힘으로, 반동적 힘을 노예적이고 종속적인 힘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후자보다 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따라 살라고 가르칩니다. 반동적 힘에 따른 노예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 힘에 따라 살아가는 귀족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여기서 노예니 귀족이니 한다고 해서 혈통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봉건적 사회를 떠올리며 니체가 신분제 사회를 옹호했다고 오해를 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니체는 이런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의 구분에 따라 의식을 설명하는데요, 그에 따르면 “의식은 몸을 통치함에 있어서 반동적 힘의 직접적 산물이자 그것의 효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294) 우선 니체는 의식을 힘의 효과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령 영혼)라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몸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의식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힘들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의식은 믿음이자 착각”이기도 한 것입니다.(294) 그런데 니체는 의식이라는 착각이 반동적 힘의 산물이라고 하는데요, 그는 의식이 “타자의 몸과 다른 힘들을 굴복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굴복시켜 왔다”고 합니다.(295) 그러니까, 의식을 만든 힘은 자신을 확장해 나가며 다른 힘들을 굴복시키는 능동적 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반동적 힘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의식을 반동적 힘과 결부시킨 것을 보면 니체는 의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니체가 의식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니체는 의식이 반동적 힘의 산물로 보면서도 동시에 “의식은 생명에 유용한 것이며 편리한 허구”이기도 하다고 하니 말입니다.(294) 다만 의식이 신체의 다양한 힘들로부터 유래하는 효과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거꾸로 의식을 (자유의지 또는 영혼에 따라 몸을 지배한다는 식으로)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한 형이상학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은 “원인을 결과로 착각하고 도구나 연장을 제작자와 혼동”한 셈이지요.(296)

따라서 의식에 대한 니체의 이해는, 의식을 변하지 않는 실체로 상정하는 철학(이는 책의 1장에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몸과 마음의 위계적 이분법에 다름 아닐 겁니다)에서 벗어나 다른 유형의 지식을 생산해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시도에까지 확장할 수 있겠습니다. 형이상학과는 다른 지식은 무엇보다 몸을 긍정하려는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겠지요. 당장 니체의 사상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로스의 작업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저희가 이번 주에 다룰 6장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겠지요. 이번 주 세미나에서 논의하게 될 6장의 발제는 나래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매주 그랬듯이 이번 주에도 텍스트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앞으로 얼마 안 남은 기간 함께 열심히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4/30)에 뵙겠습니다.

 

 

각주

각주1) 이와 관련해 최근의 혐오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혐오는 외부의 적을 절멸하려는 부정의 감응인 만큼, 원한에 기초한 반동적 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미러링의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요, 혐오 미러링이 혐오의 재생산인지(반동적 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긍정적인 투쟁 전략인지(능동적 힘에 의한 것인지)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었지요. 페미니즘 진영의 일각에서는 미러링을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만, 우리의 맥락에서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여성의 능동적 힘을 창안하기 보다는 남성의 능동적 힘을 뺏어내려는 시도로서 반동적 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코미디에서 나타나는 풍자적인 양상의 미러링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 코미디에서는 원한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에게 통쾌함을 자아내는 것이 목적이니 말입니다. 코미디에서 미러링의 대상이 된 남성은 그것을 그저 웃어넘길 수 있다는 점에서(만약 반대였다면, 즉 미러링이 아니었다면 그러기 어려웠겠지요) 풍자적인 미러링은 권력관계를 돌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웃음으로써 혐오에 맞서려는 전략의 일부라고 이해한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니체적인 의미에서 능동적 힘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따져 봐야할 것 같네요.

각주2) 이와 관련해서 원한 감정(혹은 일반적으로 반동적 힘)은 단일한 경계를 설정하려 한다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도 생각해 볼만한 주제일 것입니다. 원한 감정은 타자를 부정하는 데서 성립하는 만큼, 자신과 타자에 대한 단일한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러한 경계가 바로 서지 않고서야 아무래도 원한 감정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테지요. 반대로 그런 경계에 집착하게 된다면 능동적 힘이라도 반동적 힘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겁니다. 초기의 미투운동에서 피해자다움에 집착했던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피해자성을 규정해 피해자의 경계를 설정하고, 피해자가 스스로의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며 자신을 피해자의 영역에 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능동적 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동적 힘에 갇히고 말 위험이 클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반대로 반동적 힘에서 능동적 힘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투쟁들 사이의 연대는 바로 이러한 경계 무너뜨리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협소한 테두리 속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종류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지점에서(여기서 ‘피해자’를 ‘소수자’라고 바꾸어도 무방하겠지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은 공통의 실천으로 종합되는데, 이는 사회 변화를 위한 긍정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8과 4.16의 연대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들은 개별적인 사건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며 연대의 목소리를 냈기에 5.18과 4.16이라는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서 국가폭력이라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각자의 사건에 집착을 했더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일이지요.

반동적 힘이 수행하는 경계 설정과 이에 맞선 경계 무너뜨리기라는 주제는 혐오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효할 것으로 보입니다. 혐오의 문제는 항상 정체성의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이지요.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혐오는 정체성이라는 경계를 설정하면서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반동적 힘이 혐오의 양상으로 나타날 때의 경계 설정은 정체성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고정불변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허구라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 사람을 둘러싼 배치가 달라짐에 따라서 함께 변화하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이 점에 주목해 경계 짓기를 거부하고 다른 방식의 관계 설정을 실천하는 것은 능동적 힘을 통해 혐오를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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