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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아리송

 

아이가 죽었다.

2014년 2월. 졸업식을 하고 삼일 뒤의 일이었다.

2013년 내가 맡은 반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정신없고 시끄러운 반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 반 분위기가 이상해 살펴보면 저쪽 아이와 이쪽 아이가 싸워 모두가 눈치를 보고있는 중이었고, 종례 시간 시끄러운 교실을 들어가면 오전과는 또 다른 쌍의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반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달려와 불평과 불만을 가득 담아 소리소리 지르는 아이, 수업 시간인데도 조용히 찾아와 눈물 흘리는 아이, 항상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주한 나를 두고 이런 말도 저런 말도 하지 못해 서성거리는 아이로 나뉘었는데 그 아이는 마지막 세 번째 부류의 아이였다.

덜커덩거리며 시작한 새학기가 두어 달 쯤 지났을 무렵 학교에서 아이가 사라졌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학교에서 아이가 사라지는 일은 정말 큰 일이었기에 나는 두 시간이 넘게 온 건물 구석구석과 학교 주변을 뒤지고 다녔다. 아이는 강당 2층 방송실 옆 작은 공간에서 발견되었다. 아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앞에 선 나를 당황스럽게 보고는 고3이 되어 맞딱뜨리게 된 진로에 대한 고민과 밖으로만 나도는 오빠와 엄마와의 갈등에 대한 걱정, 그리고 같은 반 아이에 대한 감당치 못할 복잡한 마음 상태 때문에 혼자 있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담임이 되어 처음으로 아이의 고민을 듣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느꼈다. 밤늦은 시간까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 하루가 너무 힘이 들었는지 나는 다음날 몸이 아파 출근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아이는 예전보다 밝아지기는 했지만 따로 불러 무언가를 묻지 않으면 먼저 와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아이의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자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크게 생각할 줄 몰랐었다고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시간이 되면 나타나겠지와 같은 태도로 자신을 찾아다니지 않았을 텐데 열심히 학교를 뒤지며 아이를 찾아다닌 내가 아이에게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자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렇게 신경을 쓰고는 다음 날 쓰러진 걸 보니 앞으로는 선생님 앞에서 힘든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고 말했었다고 전해주셨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아들로 인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이의 상태, 그로 인한 어머니의 개인적인 힘듦까지 모두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배려하느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주치면 배시시 웃음만을 먼저 보이던 아이와 내게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셨다.

그 해 아이들은 찬바람이 불어 입시를 치를 때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심지어 한 아이는 두 학교의 수시가 모두 합격을 하고도 어느 학교를 가야하는지 내게 결정을 하라며 수업을 가야하는 날 붙잡고 울며불며 등록 마감 시간 직전까지 진을 빼기도 했다. 와중에 아이는 그 해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간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다며 졸업하고 한 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이유였다.

긴긴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겨울 방학을 맞아 모처럼 편안히 숨을 쉬며 여유를 가지던 어느 날.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는데 공항에서 갑자기 내가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그곳 사람들을 만나 많이 배우고 느끼고 돌아오라고 격려하고 전화를 끊었다.

꿀같은 휴식의 시간은 금방 끝나 개학을 했다. 곧 졸업을 앞둔 아이들은 한창 졸업식 준비로 분주했고 이제 떠나갈 때가 되었는지 서로 으르렁거리던 아이들도 그 시간만큼은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있는듯했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나도 아이들과의 이별과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졸업식을 이틀 앞둔 새벽. 개학 이후 계속 감기 기운으로 몸이 안 좋다던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고 열이 올라 대학 병원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우리 학교는 충남 시골에 있었고, 아이의 부모님은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던 나는 의사에게 증상을 물으랴, 아이 어머니와 계속 전화하랴, 아이의 상태를 살피랴 정신이 없었다. 나는 의사에게 아이가 얼마 전 아프리카에 다녀왔는데 혹시 말라리아일 수도 있냐고 물었다. 의사는 말라리아 검사는 지금은 할 수 없고 아침에 다시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이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 서울에서 병원을 갔었는데 의사가 말라리아일 리는 없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울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해보시는게 어떻겠냐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는 평생에 한 번 있는 졸업식인데 아이가 참석하지 못하면 슬플 것 같다고 하셨다. 수액을 맞고 시간이 흘러 아이의 얼굴빛이 돌아오고 열이 내렸다. 아이는 이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며 졸업식 끝까지 있고 싶다고 말했다.

졸업식 전날.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한 아이의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다른 아이들과 노래와 춤 연습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괜찮아지기 만을 기도했다. 드디어 졸업식 날. 우리 학교의 졸업식은 길기로 유명했다. 졸업생들 그리고 재학생들의 공연, 교사들의 공연과 편지, 학부모님들의 편지, 떠나보내는 말들.. 3-4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는 끝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마지막 반별로 모이는 담임과의 시간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결국 서울로 올라가 그날로 서울의 한 대학 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선생님! ㅇㅇ이가!!....”

입원한 아이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학교 본관 건물 앞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전화를 받고는 순식간에 다리가 무너져 내림을 경험했다. 온 학교가 들썩였고 전교사가 급히 옷을 갈아입고 서울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의 머리는 새하얀 상태였다. 걷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가 움직이는 것인지 다른 존재의 움직임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다. 장례식장에 들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면서도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몸부림치는 아이의 어머니와 마주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뒤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리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어느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한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샘 잘못이 아니에요..

아이는 말라리아로 죽었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걸린 말라리아의 종류가 희귀해 한국에는 백신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어디든 자식을 잃은 슬픔의 화살을 쏘아야 했으므로 제대로 된 양호실이 없었던 학교를 원망하셨다. 그리고 이런 광경은 그 병원 주위를 맴돌며 기사 거리를 찾던 한 기자에게 먹잇감이 되었다. 그날부터 기자는 아이의 죽음의 원인을 학교에서 찾기 위해 아이들과 담임을 인터뷰하겠다며 학교로 밀고 들어오려 했고, 교무실로 전화해 아이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기를 요구했다. 학교에서 관리를 부주의하게 한 것이 아니냐, 담임이 방학 동안 학생이 해외에 나가는 사실에 대해서 알았냐, 왜 담임은 학생이 방학 동안 아프리카를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냐 등과 같은 공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받던 교감 선생님은 분노를 참지 못하셨고 당신들 맘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결국 기자는 뉴스를 내보냈다. 모든 원인을 담임이었던 나의 학생 관리 부족 탓으로 돌리는 내용이었으며, 새벽에 아이를 진찰했던 대학 병원의 응급실 의사는 본인은 말라리아 검사를 꼭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괜찮으니 그냥 데려가겠다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 인터뷰까지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분노라는 또 다른 감정이 나를 잠식하게 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가자 교감 선생님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시며 약을 먹기 시작하셨지만 정작 내가 울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기 싫어하셨다. 조금이라도 처져 있는 내 모습을 보면 호통을 치며 정신 차리라고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셨다.

나는 그 해 일 년 내내 잠을 자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워 깜빡 잠이 들려고 하면 캄캄하고 깊은 수렁이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고, 순식간에 주변이 수많은 목소리들로 가득 찼다. 그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의 수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고 출근을 하고, 수업을 하고, 아이들과 학부모를 만났다. 다행히 그 해 만난 아이들은 천사 같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내가 괜찮은지 찾아와서는 어두운 모습을 드러낼 틈이 없게 애교를 보여주거나, 먹을 것들을 가져와 쓸데없는 수다를 떨고 가곤 했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수업이 많아 유난히도 바빠 뉴스 한 줄 보기 힘들었던 그날. 잠시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왔을 때는 학생들을 실은 배가 침몰했지만 구조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종례와 아이들과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 수많은 목숨을 돌이킬 수 없게 된 때였다.

세월호 사건과 함께 내 안의 응축된 슬픔과 분노는 더 똘똘 뭉쳤다. 자주 숨을 쉬기 힘들었고, 콕콕 쑤시는 심장의 통증이 찾아왔다. 교무실과 교실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과를 보내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밤새도록 울었다. 그 와중에도 새벽이면 죽고 싶어 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전화통을 붙잡고 있기도 했고, 분노조절장애로 성질을 부리고 화내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이를 붙잡고 차분하게 이야기해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을 하나의 지나간 이벤트로 생각하는 듯 했다. 여전히 힘들고, 슬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직도 그것 때문에 힘드냐고 말하면서 마치 너무도 약하디약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고 말했다. 아마 이 말은 세월호 유가족들 또한 수없이 들은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2014년 이후 매해 봄이 되면 나는 정신이 힘들고 몸이 아팠다. 올해 봄. 인생에서 또 한 번의 큰 사건을 겪고 나니 이제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얼마 전부터 큰 결단을 내리고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상담 첫 시간을 마무리하며 선생님이 내게 “얘기로 듣기만 해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왜 분노를 참으세요? 왜 그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세요? 지금 현재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라고 질문했다. 그러면서 ‘내가 감정을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봐 그렇게 감정을 무디게 하는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한 발짝씩 과거로 내딛는 걸음 속에서 나는 같은 해에 일어난 아이의 죽음과 세월호 사건이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가지게 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나는 그때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고, 내 마음 또한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고,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감시당하고 부정당했었다.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내가 약한 존재임을 그들에게 내보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감정을 드러내도 그들의 반응은 심드렁하거나 순간을 위한 공감뿐이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어떤 감정을 가져다 이용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감정 표현에 대해 무력하게 되었고, 포기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떤 사건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친다. 반면 누군가는 같은 사건에서 스스로 조용히 그 사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어떤 것이 더 용기가 있다 없다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방식의 선택이든 그것이 나에게 좋은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든 사건과 모든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감정 표현에 대해 포기와 무력의 방식을 선택했다. 포기나 무력과 같은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선택이 잘못된 선택인가 하는 판단은 또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스스로 죽지 않고 스스로 살기 위한 방법을 넘어 나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오늘을 살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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