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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세미나] 고양이 신부전 간병기

lavabo 2022.04.21 20:18 조회 수 : 1330

2021. 10. 14 목요일 <입원>

요다가 몇 차례 토했는데, 고양이는 체질상 잘 토하는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요다가 밖에 잘 안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 잠만 잤는데 그것도 날이 추워져서 그러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밥을 안 먹는 걸 보고서야 어디가 아프구나 싶어 J가 병원에 데려갔는데, 병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 전화가 왔다. J가 울먹이며 택시 타고 빨리 병원에 오라고 했다.

각종 검사결과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의사와 마주 앉았다. 영문과 숫자가 빽빽하게 적힌 혈액검사 자료, 엑스레이와 초음파 사진들. 내가 그것들을 본들 이해할 리 없는데도 의사는 굳이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려놓고 화면이 꺼질 때마다 다시 켜 보여줬다. 모니터 가득 길쭉한 타원이 보였다. 콩처럼 팥처럼 생긴 그것이 요다의 신장이라고 했다. 타원 한가운데 커다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데칼코마니로 찍은 것 같은 나비 문양. 의사는 건강한 신장에는 아무 문양이 없다고 피가 통하지 않아 석회화된 부위가 그렇게 보이는 거라면서, 한번 석회화된 부위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비 날개가 신장을 절반 이상 덮고 있었다. 요다의 신장이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신부전이라고 했다. 고양이가 신부전에 잘 걸리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신부전의 주요 증상이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뒤로 나는 요다의 물 마시는 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느 날인가 요다의 물그릇이 너무 성큼 비어있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J에게 말할까 하다가 괜히 병원 데려가 검사한다고 돈만 쓸까 봐 말하지 않았다. 그때 병원에 데려갔으면 병이 덜 진행됐을까.

의사는 상태가 위중하다면서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다는 신부전 합병증으로 빈혈이 있었다. 의사는 빈혈이 심해 요다가 치료를 견디기 힘들 거라면서 수혈을 권했다. 의사는 수혈 여부를 우리에게 결정하라고 했는데, 수혈용 피는 구하기가 쉽지 않고 가격이 비쌌다. 피를 주문하면 대구에서 올라오는데 가격이 120만 원이라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대구에 살고 있을 공혈묘를 떠올렸다.

“수혈을 안 하면 어떻게 되나요?”

내가 물었다. 공혈묘 때문이 아니라 비용 때문이었다.

“꼭 위험하게 되거나 그러지 않을 수는 있어요. 근데 애가 좀 힘들고, 고생하겠죠.”

의사가 대답했다.

“비용을 최소한으로 해서 치료했으면 해요.”

내가 말했다.

“수혈을 안 하고 버텨보자는 말씀이신 거지요?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에요.”

의사가 말했다.

“아니에요. 수혈할 거예요. 제가 요다 적금 들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깨면 돼요.”

J가 말했다. J는 올 초 요다의 노후를 대비해 적금을 들었다. 적금 통장에 든 돈은 90만 원. 한번 수혈할 돈이 안 됐다.

“나머지 치료비는 어느 정도 드나요?”

내가 물었다.

“하루 입원비는 25만 원인데 거기에 검사비가 추가될 수 있어요.”

의사가 대답했다.

“그럼 하루에 35만 원 정도면 될까요?”

J가 물었다.

“넉넉잡고 그 정도 예상하시면 될 거에요.”

의사가 대답했다.

“해야죠. 수혈하고 입원도 할 거예요.”

J가 말했다.

“아까 왜 그런 말을 했어?”

대기실에서 J가 말했다.

“.......”

“요다는 내가 꼭 살릴 거야. 적금 깨면 돼.”

요다 적금이 아니라 다른 적금을 말하는 거였다.

“.......”

“그걸로 안 되면 집을 줄여서 이사하자.”

 

10. 19. 화요일 <면회>

매일 요다를 면회 갔다. 요다는 처음 며칠은 잠만 자다가 차차 기운을 찾더니 나를 보면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다른 고양이가 내는 소린 줄 알았다. 요다는 평소 잘 안 울고 울어도 짧고 가는 소리로 야옹하고 만다. 그런데 요다가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요다는 내가 입원실 유리문을 열어야 울음을 그쳤고, 유리문을 닫고 돌아서면 또 울었다. 예전에 딱 한 번 요다가 그렇게 우는 걸 본 적 있다. 새끼 때 요다를 혼자 두고 집을 비웠는데 사흘 만에 집에 들어가니 요다가 뛰어나와 내게 매달리며 울었다. 한참이나 큰 소리로 울었다.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불안했던 것이다. 뒤늦게 마음이 짠했다.

진료실 한쪽 벽면에 2층으로 여섯 개의 유리 상자가 놓여있는데 거기가 고양이 입원실이다. 요다의 병실은 아래 칸. 병실이 낮으니 보호자용 의자도 낮았다. 목욕 의자에 앉아 요다를 무릎에 앉혔다. 요다가 무릎에서 바로 내려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앉아 세수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요다는 내 무릎에 올라와 앉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억지로 붙잡아 앉혀도 바로 내려간다. 그런데 요다가 내 무릎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요다의 입원실엔 입원실이 미어지게 큰 보료방석이 놓여있었다. 요다의 체취가 밴 물건이 있으면 병실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집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보료방석이 유리 병실을 견디는 데 의지가 됐을까.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보료방석보다 더 요다의 체취가 구석구석 밴 요다 꺼로 그곳에 놓여있었다. 삭막한 병실, 낯선 고양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낯선 사람들이 오가는 속에서도 요다는 내 무릎 위에서 편안했다.

요다를 무릎에 앉히고 시간을 보내는 건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 그런데 등받이 없는 목욕 의자에 무릎을 세운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요다는 세수를 오래도 했다. 세수를 마치면 내려가려니 했는데 세수를 마치자 요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똬리를 틀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다가 깰까 봐 몸통을 고정한 채 고개만 돌려 벽시계를 봤다. 좌석 노릇을 한 지 1시간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목 허리 무릎 발목이 다 결렸다. 보료방석과 임무 교대하기로 했다. 요다를 들어 보료방석에 눕히고 유리문을 닫았다. 요다가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21일 목요일 <퇴원>

“퇴원하면 보호자께서 하실 일이 많아요.” 의사가 PPT 자료를 띄워놓고 퇴원 후 보호자가 해야 할 일을 30분 넘게 설명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처방식을 먹인다. 둘째 보조제를 먹인다. 셋째 피하수액을 주사한다. 우리 몸에서 신장은 음식이 소화되고 남은 쓰레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청소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신장이 망가져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면 몸속은 음식물 쓰레기로 뒤덮이게 된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치는 쓰레기를 덜 만드는 것으로 먹는 음식을 쓰레기가 덜 생기는 처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도 생겨나는 쓰레기는 임시 청소부를 투입해 그때그때 몸 밖으로 내보내는데, 수액과 각종 보조제가 그 역할을 한다.

“보조제 먹이고 피하수액 놓는 걸 매일 해야 돼요?” 내가 물었다.

“네. 매일 하셔야 돼요.” 의사가 대답했다.

“언제까지요?” 내가 물었다.

“걔네들의 장점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다는 건데, 단점은 치료제가 아니라서 계속해야 한다는 거예요.” 의사가 대답했다.

“계속이라면......살아있는 한 계속이요?” 내가 물었다.

“그렇죠.”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피하수액 주사 놓기를 실습했다. 의사가 요다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살이 노인네 살갗처럼 쭉 늘어났다. 고양이는 사람과 달리 피부와 근육 사이 피하에 여유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수액을 주입한다. 보호자 중 한 명이 요다의 목덜미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했다. 의사가 주삿바늘을 내밀자 J가 내 뒤에 숨었다. 의사 앞에서 서로 안 한다고 싸울 수가 없어서 주삿바늘을 받아들고 요다의 목덜미에 꽂았다. 주사기의 피스톤을 누르자 요다의 목덜미가 혹부리 영감처럼 부풀어 올랐다.

처방식, 각종 보조제, 수액과 주사기가 든 보따리를 양손 가득 들고 병원문을 나서며 마음이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앞으로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세월을 아침저녁으로 요다에게 약 먹이고 주사를 놓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다의 살에 주삿바늘을 찔러넣어야 하는 간병 일이 끔찍이 하기 싫었고 그 일에 묶여 단 하루도 집을 비울 수 없을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나와 달리 J는 요다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기만 했다. “요다야, 잘 이겨냈어. 김지현 환갑 때까지 같이 살자.” J가 가슴에 안은 이동 가방을 토닥이며 말했다. 환갑까지 요다를 간병하며 살아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10월 22일 금요일 <자가치료 첫날>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벽에 붙여놓고 순서대로 아침 처치를 시작했다.

1. 항생제(식전 1시간)

요다의 입을 벌려 캡슐을 집어넣었다. 요다가 캡슐을 뱉어냈다. 다시 집어넣었지만, 또 뱉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캡슐이 침에 젖어서 물렁했다. 비싼 약을 버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은 뒤 요다의 턱을 꽉 붙잡고 입을 벌려 캡슐을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뱉어내지 않았다. 삼킨 것이다.

2. 유산균(식전 1시간)

추르에 유산균 가루를 섞어서 줬더니 추르만 먹고 유산균을 안 먹었다. 결국 유산균은 못 먹였다.

3. 피하수액 100cc

J가 요다를 붙잡고 내가 요다의 목덜미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런데 피스톤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몸에서 피스톤을 밀어내는 압력이 굉장히 셌다. 힘을 주다 바늘이 빠졌고 바늘을 갈다가 손가락을 찔렸다. 역할을 바꿔 내가 요다를 붙잡고 J가 피스톤을 눌러보았지만, 그래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J가 주사기를 거꾸로 뒤집어 피스톤을 바닥에 대고 주사기를 온몸으로 내리누르다가 주사기와 수액을 연결한 호수가 빠지면서 수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그 바람에 요다가 참을성을 잃고 몸부림치면서 바늘이 또 빠졌다. 간신히 정해진 양의 수액을 주사하고 나서 주사기를 치우는데 끝내 바늘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4. 인 흡착제(식사와 동시)

5. 아침 식사

요다가 처방식 냄새를 맡더니 입도 안 대고 고개를 돌렸다. 입을 벌려 억지로 먹였지만 삼킨 것보다 뱉어낸 게 더 많았다.

6. 레나메진(식후 1시간)

 

이렇게 아침 처지가 끝났다.

저녁에 피하수액만 빼고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10월 23일 토요일 <자가치료 둘째 날>

유튜브의 집사들은 혼자서도 수액주사를 잘 놓는다. 고양이는 한 손으로 컨트롤이 될 만큼 얌전하고 피스톤은 바닥에 대고 약간의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 쑥쑥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둘이 매달리는데도 안간힘을 써야 수액주사를 놓을 수 있었다. 주사기 피스톤은 심해 같은 압력으로 버텼고 요다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주사를 다 놓고 요다를 잡았던 손을 놓으면 손가락과 손목이 아팠다. J에게 무슨 사고라도 나서 나 혼자 이 일을 하게 되면 어쩌나 덜컥 걱정됐다. J도 같은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사고가 날까 봐서는 아니고 내가 힘들어 못 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J가 내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췄다.

 

10월 24일 일요일 <자가치료 셋째 날>

요다가 밥을 입에도 대지 않고 잠만 잤다.

 

10월 25일 월요일 <자가치료 넷째 날>

요다가 계속 잠만 잤다.

 

10월 26일 화요일 <숨바꼭질>

아침에 방문을 여니 바닥이 휴지로 난장판이 돼 있었다. 요다가 음식물을 닦아 버린 휴지를 휴지통에서 꺼내 거기 묻은 걸 먹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였다. 요다가 밥을 달라고 내 종아리에 감기며 야옹거렸다. 며칠째 새 모이만큼도 안 먹었으니 왜 배가 안 고프겠는가. 요다의 식욕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1초라도 빨리 밥을 주고 싶었지만, 밥 먹기 한 시간 전에 항생제를 먹이는 게 먼저였다. 항생제를 먹이고 나서 한 시간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요다는 먹을 걸 찾아 싱크대와 식탁을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멸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바닥을 킁킁거리고 다녔다. 몇 번이나 시계를 봤을까. 시간이 되자마자 준비해놨던 처방식을 줬다. 그런데 요다가 냄새를 맡더니 입도 대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 먹던 동원참치를 줘봤지만, 그것도 좁쌀만큼 먹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는 수 없이 강제로 처방식을 먹였다. 요다가 밥을 뱉어내며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싫다는 걸 억지로 먹여도 되는지 자신 없어서 요다를 놔줬다. 요다가 매 맞는 아이처럼 나를 피해 구석에 숨었다.

오후에 J가 요다를 데리고 나갔다가 놓쳤다. 요다가 목줄을 한 채 도망쳤다고 했다. 요다를 찾아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 계단에 앉았다. 가을볕이 따뜻했다. “요다! 요다!” 멀리서 J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다도 어딘가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볕을 쬐고 있을 터였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나는 요다에게 속삭였다.

 

10월 27일 수요일 <동물의 고통>

요다와 밖에 나갔다. 또 도망칠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요다는 팔순 노인처럼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이유. 날이 추워서 밖에 안 나오셨는가 봐. 그래도 추울 때에 비하면 아주 푹해진 거유.” 아랫집 할머니가 마당에 있다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네. 날씨가 좋아요.” 내가 말했다.

“괭이를 끈을 맸네.”

“고양이가 아파요. 많이 아파요.”

“말도 못 하는데 어떻게 아픈지 안디야.”

요다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프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야생에서 아픈 동물은 곧바로 포식자의 타겟이 되기 때문에 아픈 걸 일부러 숨긴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신부전이 4기에 이르도록 나는 요다가 아프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신부전 진단을 받고 나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요다는 기운 없어 보였을 뿐 그밖에 다른 신체적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줄 때문일까. 요다가 몇 걸음 가다 멈춰 서고 또 몇 걸음 가다 멈춰 서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코가 창백했다. 요다의 코가 원래 저렇게 창백했었나. 예전의 코 색깔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빈혈 때문에 코가 창백해진 걸까. 요다가 또 걸음을 멈췄다. 왜 자꾸 멈춰 서는 것일까. 혹시 어지러운 걸까. 그렇다. 요다는 어지러운 것이다. 나는 그제야 요다가 어지러울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빈혈이 있으면 어지럽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나는 요다가 수혈을 해야 할 정도로 빈혈이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요다가 어지러울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의사가 수혈을 안 하면 요다가 힘들 거라고 했을 때, 길게 고민해보지도 않고 수혈을 안 하겠다고 한 건 그래서였다. 요다가 하루가 멀다고 토했는데, 그걸 보면서도 속이 메스꺼울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요다가 나와 똑같이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낄 거라고 상상을 못 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고통을 못 느끼는 기계로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동물에게도 고통을 주면 소리를 내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피아노도 치면 소리가 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명 철학자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물이 토하긴 해도 메스꺼움을 느끼지 못하고 빈혈로 죽긴 해도 어지러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여기다니, 사실상 고통을 못 느낀다는 게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동물이 고통을 못 느낀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얼마 전 식용 개를 파는 업자가 식용 개는 집에서 키우는 개와 달리 둔해서 고통을 잘 못 느낀다고 방송에서 주장하는 걸 듣고 어이없어했는데, 인제 보니 동물의 고통에 대한 이해는 그나 나나 오십보백보로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요다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뭔가에 시선을 뺏긴 것도, 방향을 바꾸려는 것도, 앉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요다를 안아 들었다. 너무 가벼웠다.

 

10월 28일 목요일 <강제급식의 기술>

내가 준비한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기를 이토록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식사 때마다 입맛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도록 여러 브랜드의 처방식을 준비했고 준비에 부족함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음식을 날랐다. 요다가 접시로 향하는 동안 나는 숨죽였다. 요다의 식욕은 비누 거품처럼 연약해서 작은 숨소리에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요다는 결코 음식에 선뜻 다가서는 적이 없다. 요다의 코끝이 접시로 향하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 요리사가 사력을 다해 만든 음식을 음식 평론가에게 선보인 뒤 그 반응을 살피는데, 평론가가 포크를 들어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짧은 순간이 요리사의 시점에서 영원처럼 길게 편집된다. 그런데 요다의 코끝은 아무런 영화적 효과 없이도 그보다 더 천천히 음식으로 향했고, 나는 숨을 참고 그걸 지켜보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한 마리 고양이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게 그의 별점에 식당의 성패가 걸린 평론가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것만큼이나 간절할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는 음식을 맛보더니 차가운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요다는 냄새를 맡아보고는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요다 스스로 밥을 먹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강제로 먹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요다와 몸싸움을 하다시피 해가며 밥을 먹이고 일어나서 보면 입에 들어간 것보다 바닥에 떨어진 게 더 많았다. 유튜브에 ‘고양이 강제급식’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유튜브에는 거의 모든 분야의 고수들이 상시 대기 중이다.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영상을 클릭했다. ‘고양이 없는 사람 누구입니꽈아아아’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중년 여자가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티스푼으로 유동식을 떠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식탁 예절을 잘 교육받은 아이처럼 얌전히 앉아서 주는 음식을 날름날름 받아먹는 게 아닌가. 나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고양이가 고분고분 밥 먹는 모습이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여자가 힘 하나 안 들이고 고양이를 다루는 기술은 경이롭기만 했다. 여자는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 수더분한 말투로 강제급식의 기술을 전수했는데, 평범한 모습에서 오히려 심상치 않은 무공이 느껴졌다. “베테랑 집사와 초보 집사는 애들이 뱉는 걸 속수무책으로 당하느냐 막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요령은 뱉으려고 할 때 손으로 아래턱을 살짝 밀어주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신기에 가까운 미묘하고 섬세한 손기술이 필요하고, 이것은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강제급식에 재도전했다. 먼저 그가 하는 대로 요다를 등이 보이게 앉혔다. 그전까지 나는 요다를 마주 앉혀 놓고 밥을 먹였는데, 등이 보이게 앉히는 것만으로 밥 먹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강제급식에 있어서도 바른 자세가 기본인 것이다. 한 동작씩 그를 따라 했다. 그가 하듯 일련의 동작을 물 흐르듯 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툴게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밥을 뱉어내는 양이 반의반으로 줄었다.

 

11월 2일 월요일 <2인 3각 경기>

아침저녁으로 목줄을 해 요다를 데리고 나갔다. 목줄을 하면 목에 줄을 맨 요다뿐 아니라 손에 줄을 쥔 나도 그 줄에 묶인다. 둘이 짧은 줄에 묶여 같이 다니는 건 한쪽 발을 상대와 묶고 뛰는 2인 3각 경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체 크기, 보행 속도, 습성이 크게 다른 사람과 고양이가 한 팀을 이루다 보니 경기는 쉽지 않다.

요다와 나는 평소 다니는 길부터가 다르다. 나는 대문으로 드나들지만 요다는 개구멍으로 드나들고, 나는 길로 다니지만 요다는 길가의 철조망 밑으로 다니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다닐 수 있는 길로는 요다도 다닐 수 있지만 거꾸로는 불가능하므로 같이 다니기 위해선 내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다녀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걸 요다도 쉽게 이해했다. 요다는 처음에 한두 차례 실랑이를 한 뒤로 현관문을 나서면 개구멍이 아니라 대문을 향했고 철조망 앞에선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다.

보다 어려운 문제는 서로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다. 사람은 다닐 때 최저속도와 최고속도에 별 차이가 없다. 마지막으로 뛰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내 경우는 더 그렇다. 그런데 고양이는 다닐 때 최저속도와 최고속도의 차이가 크다. 사람이 구사하는 속도가 좁은 음역대에 머무는 음악이라면 고양이의 그것은 저음에서 고음까지 폭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음악이라고나 할까. 요다는 아랫집 할머니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다가는 바로 다음 순간 바람처럼 내달린다. 나로서는 일정 속도 이하로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속 터지는 걸 참아가며 보조를 맞출 수는 있는데 바람의 속도로 내달리는 건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요다가 뛰면 엉겁결에 나도 따라서 뛰게 됐는데 뒤뚱거리기만 하지 전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자꾸만 평소 자신의 속도로 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 의해 제지됐고, 결국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누구의 것도 아닌 어색한 속도로 서성댔다.

고양이와의 산책에서 주요 활동은 걷기가 아니라 서 있기다. 서 있기 애매한 장소를 골라 옮겨 다니며 서 있기. 요다는 나 혼자라면 절대 갈 일 없는 곳을 골라 다니면서 나 혼자라면 절대 멈춰 설 일 없는 곳에 멈춰 섰다. 요다가 둔덕을 오르다가 끈이 짧아 중간에 주저앉았다. 나는 둔덕 밑에서 요다의 둔부를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아 자세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요다가 일어서길 기다리다 안 되겠어서 요다를 들어 평평한 곳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머물 자리를 정하는 건 내가 아니다. 요다는 그 자리에 안 있고 구석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요다가 좋아하는 곳은 밭일하는 이들이 오줌 누기에도 좋은 곳이라 거기선 지린내가 진동했다. 나는 여러모로 그 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바닥이 경사져서 앉아 있는 엉덩이가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시야는 답답하게 막혀 있었다. 자리를 조금만 옮기면 탁 트인 전망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련만, 그런 건 요다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눈 둘 곳을 찾아냈는데, 요다 뒤로 국화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11월 17일 수요일 <가족>

아침에 요다와 산책하는데 아랫집 할머니가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했다.

“저번에 총각이 어디 갔다 오냐니까 괭이가 콩팥이 아파서 약 사러 갔다 온다 그러는데 괭이가 콩팥이 아픈지 어떻게 안디야?”

“병원에서 검사받았어요.”

“병원에서 고양이가 콩팥 아픈 걸 알 수 있어?”

“예, 동물병원이요.”

 

저녁에 요다와 산책하는데 또 아랫집 할머니가 지나갔다.

“괭이가 상전이네. 괭이가 상전이야.”

“모시느라고 힘들어요.”

“부모를 저렇게 모셨으면 효자 소리를 듣겄네. 괭이가 상전이야요.”

할머니는 ‘괭이가 상전이야요’를 노랫가락에 실어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 칭송받지만, 고양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면 비웃음 산다. 내가 할머니의 비웃음에 고양이를 모시느라고 힘들다며 맞장구친 건, 내 비록 고양이를 모시고 다니긴 해도 그런 짓이 우스꽝스러운 줄은 아는, 할머니와 같은 상식을 지닌 사람이란 걸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연배로 내가 초등학생이던 70년대에 나만 한 아이들을 줄줄이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가정에 전통적 위계가 살아 있어서 집안에서 아버지가 제일 높고 그 아래가 어머니나 아들, 그 아래가 딸, 맨 아래에 개 고양이가 위치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위계는 먹이 앞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밥 먹을 때면 아버지가 제일 상석에 앉았고 아버지가 먼저 젓가락을 든 뒤에야 나머지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 수 있었다. 아버지 국그릇엔 더 많은 고기가 담겼고 조기 같은 귀한 음식은 아버지 앞에 놓였다. 아버지 다음으로는 아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딸은 눈치껏 귀한 음식을 피해 젓가락질을 해야 했고 어머니는 상을 물린 뒤 남은 음식을 먹었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은 개 고양이의 몫이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 그 질서는 나의 무의식 깊이 각인됐다.

그 시절에도 개를 집안에서 키우면서 개에게 옷을 입히고 끼니마다 고기를 먹이는 부잣집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 집을 여간 못마땅해하지 않았는데, 자고로 개는 밖에서 키워야 한다면서 개를 집안에 들이는 걸 비난했고, 사람도 못 먹는 고기를 개에게 먹이는 것에 분개했으며, 개에게 옷을 입힌 걸 보고는 별 우스운 짓을 다 한다며 조롱했다. 요즘은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할 것 없이 동물을 집안에서 키우면서 끼니마다 고기를 먹이고 옷을 입혀 데리고 다닌다. 나도 예외가 아닌데, 나는 그런 짓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짓을 비난하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요즘은 동물을 밖에서 키우고 싶어도 마당이 없어 그럴 수가 없고, 옷을 입히는 건 예쁘게 꾸미려는 게 아니라 날이 추워서이며, 고기는 값비싼 생고기가 아니라 건사료를 먹이는데 건사료는 값이 정말 싸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요다 병원비로 요다 드레스룸을 차려주고 매끼 한우를 먹이고도 남을 돈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요다가 아프기 전까지 나는 동물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비싼 병원비를 쓰는 이들을 못마땅해했다. ‘나 때는 말이야’라면서 나 어릴 적을 기준 삼았고 그때가 자연스러웠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때는 동물이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저절로 나으면 사는 거고 아니면 며칠 앓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때는 동물만 병원에 안 가는 게 아니라 사람도 병원에 잘 안 갔다. 특히 노인들은 고집스럽게 병원에 안 갔는데, 이가 빠지면 잇몸으로 살고 뼈가 부러지면 저절로 붙을 때까지 기다리고 중병에 걸리면 참다 죽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었지만, 그때의 노인들처럼 사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작년에 나는 낙상으로 98회나 병원치료를 받았다. 요즘은 건물 하나마다 병원 간판이 서너 개씩 붙어 있을 만큼 병원이 흔해졌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데다 건강보험이 잘돼있어 아픈 걸 참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요다가 아프니 자연스럽게 병원에 데려가게 됐고, 의사가 권하는 치료를 받게 됐다. 동물은 보험 적용이 안 돼서 병원비가 비쌌지만, 그 돈을 어디에 쓴 들 요다를 치료하는 것보다 가치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같이 사는 동물을 가족이라고 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위선적으로 들렸는데, 그들이 동물을 진짜로 가족처럼 아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러니까 남도 그런 줄 안 것이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긴 해도 동물을 위해 내 걸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요다가 아프자 나는 아침잠을 안 자고 일어나 요다에게 밥을 먹이고 주사를 놓게 됐고, 하루에 몇 번이나 하던 일을 중단하고 요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으며, 요다의 병원비를 아끼지 않고 치료를 받았다. 요다를 위해 포기해본 적 없던 걸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것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요다가 가족이란 걸 느꼈다. 애니메이션 영화 ‘아빠가 필요해’가 떠올랐다. 소설 쓰는 늑대가 영희라는 아이와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다. 우리는 가족을 혈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혈연을 벗어난 또 다른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의 모습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같은 사람이라도 피가 섞이거나 결혼을 해야만 가족이 될 수 있는 법인데, 사람과 동물이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가족을 혈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제 보니 요다와 내가 바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가족이 아닌가.

요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요다 밥부터 먹인다. 숟가락을 든 채 요다가 음식을 삼키길 기다리고 있노라면 내 안에 사는 오래된 목소리가 무슨 우스꽝스러운 짓이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나는 변명하지 않고 맞받아친다. 우스꽝스럽기로 치면 70년대에 아버지와 아들을 떠받들던 식탁 풍경이 덜하지 않다고 말이다.

 

11월 22일 월요일 <요다가 물에 빠지면>

“나랑 요다랑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야?” 내가 물었다. “요다는 내 자식이야.” J가 대답했다. 요다를 구하겠다는 뜻이었고 진심이었다. 나는 놀랐다.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무조건 J를 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J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다와 전두환이 물에 빠져도 아마 나는 전두환을 구할 것이다. 전두환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귀하지만, 동물의 목숨은 그렇지 않다. 나는 수많은 경로를 통해 그것을 배웠는데 거기에는 옛날이야기가 포함된다. 옛날이야기에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는 동물이 많이 나온다.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지네와 맞서 싸우는 두꺼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종에 자기 머리를 부딪치는 까치 등등. 반면에 옛날이야기에는 동물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도 동물을 구하는 경우가 있지만, 제비 날개를 고쳐준다거나 잡은 잉어를 놔주는 식으로 큰 수고를 들이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하는 거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동물을 구하는 사람은 없다. 귀하디귀한 사람을 위해 하찮은 동물이 희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거꾸로는 바보짓인 것이다. 사람을 구하고 죽은 동물은 이야기 밖 현실에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오수의 개인데, 사람들은 의견비까지 세워 개의 희생을 기린다. 그런데 이야기 밖 현실에는 동물을 구하고 죽은 사람도 있다. 나 어릴 적엔 겨울철이면 얼음물에 빠진 개를 구하고 죽은 아이들 기사가 신문에 실리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오수의 개를 대할 때와 180도 달랐다. 누구도 아이들을 의인이라 칭송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죽음은 개죽음으로 여겨졌다.

나는 사람과 동물이 물에 빠지면 당연히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다와 내가 물에 빠지면 요다를 구하겠다니, 나는 J의 대답에 크게 놀랐다.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내 또래는 대체로 나와 같은 선택을 했는데 나이가 어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한테 더 소중한 존재를 구할 거 같아요.” 서른한 살의 S는 말했다. “그래도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되물었더니 S는 “요다를 안 구하고 전두환을 구하겠다니 너무해요.”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기에게 더 소중한 존재를 구하겠다는 그의 선택 기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며 무조건 사람이 우선이라는 나의 기준보다 그의 기준이 좀 더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땐 요다가 아니라 전두환을 구하겠다는 좀 전까지의 나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즈음 ‘무인도그’라는 유튜브를 보게 됐다. 유튜버 덕곡은 스물아홉 살의 청년으로 11마리의 개와 같이 남해안의 무인도에 살고 있었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 그러고 사는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튜브 대문에 사연이 적혀있었다. 그의 집에서 키우던 암캐 두 마리가 동시에 새끼를 낳았는데 도저히 집에서 다 키울 수는 없고 분양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개들을 데리고 있을 곳을 찾아 무인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뭍에서의 삶을 포기했다면 훌륭한 청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강아지들을 돌보겠다고 무인도로 들어가다니, 나는 그의 선택이 이상하기만 했다. “젊으나 젊은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고양이만 끼고 시간 낭비해서 되겠니.” 엄마가 맨날 나한테 하는 잔소리다. 엄마는 자신도 동네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고 고양이들 밥 시간에 늦을까 봐 어딜 가든 집에 들어가기 바쁘면서도, 동물을 돌보는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고양이를 끼고 시간 낭비’ 운운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참 듣기 싫은데 그게 그렇게까지 듣기 싫은 건 나 역시 엄마와 같은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와 똑같은 시선으로 덕곡을 보고 있었다.

덕곡과 개들은 어린왕자의 소행성만큼이나 작은 섬에 산다. 섬 생활은 빡세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섬이라 생필품 일체를 배로 실어와야 하고, 실어온 물건은 섬 꼭대기의 텐트까지 져 날라야 한다. 일은 덕곡 혼자 도맡아 하는데, 덕곡은 운반해온 닭을 삶아 일일이 뼈를 발라 개들에게 먹이고, 텐트를 수선하고, 밤에는 자는 개들의 옷을 꿰맨다. 개들은 일하는 덕곡을 쫓아다니며 장난치고 훼방만 놓는데, 그런 개들을 타이르는 덕곡의 경상도 말씨가 다정하다. 덕곡은 개들과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정말 그래 보인다. 개를 구하려고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아이들이 30년 후 다시 태어난다면 덕곡과 같은 모습일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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