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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1.

아리송

 

어릴 적부터 나는 읽기를 좋아했다. 한 번 손에 든 책은 마지막 장에 다다를 때 까지 놓지 않았고, 그렇게 하루에 문학전집 두 세권씩의 책을 읽어치운 적도 있었다. 주말에는 집 앞 계단에 앉아 해를 쬐며 책을 읽었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두꺼운 한국단편문학집 같은 책을 들고 읽으며 등교를 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집안에 있는 동전을 모두 셀 정도로 끔찍하게 돈을 아끼셨기 때문에 밤 11시가 되기 전 온 집은 불이 꺼져야 했다. 나는 매일 밤 내 방밖으로 세어나가는 작은 빛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작은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그래도 동물 같은 육감으로 빛을 감지한 어머니에게 종종 들켰고 한바탕 잔소리를 듣는 일들이 이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그렇게 책을 읽고 싶어 하던 딸을 왜 그렇게까지 막았을까 후회하곤 하셨지만 그땐 그런 시절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기피했던 시조집까지 섭렵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좋은점이 하나 있었다. 수능 언어 영역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지문을 읽고, 빨리 문제를 풀어 언어 영역 시험 시간은 항상 20분 정도가 남았다. 꾸준한 읽는 행위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막대한 양의 대입 시험 준비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읽는 행위를 멈췄다. 읽는 일과는 거리가 먼 전공을 하게 되면서 읽는 행위 보다는 보는 행위가 더 많아졌고, 보는 것에 익숙해진 눈은 읽는 것을 어렵게 했다. 항상 일은 바빴고, 몸은 피곤했다. 읽기를 생각할만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 이후 10년 넘게 읽기의 공백이 생겼다. 그 세월동안 세상에는 손쉽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미디어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현란한 화면들만 따라가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책 한 번 펼쳐보지 않고, 문서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은 하나도 보지 않아도 하루는 금방금방 지나갔다. 나름 머릿속으로는 책 한 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만 담아놓은 채 하루, 이틀, 한달, 두달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히도 뒤늦게 공부를 해보겠답시고 진학한 대학원은 나의 의지로 선택해서 하는 읽기가 아닌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읽기의 세상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무얼 하고 살았나, 와 이렇게 무식한데도 내가 선생이란 이름으로 살아왔다니 이게 기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이 주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매일 매일이 나를 깨는 과정이었고, 그것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읽기가 주는 묘한 쾌감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책을 사들였고, 다시 읽기가 주는 재미를 찾게 되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자꾸 치고 들어온다. 예상하지 못한 일, 억울한 일, 대비하지 못한 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 등. 요 몇 년간 삶은 이런 일들로 가득차 있었다. 삶에 찾아드는 무게 때문에 무기력으로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고, 떨어진 집중력과 떠나버린 정신은 한 시간에 책 한 장을 넘기기에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왜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부조리하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가. 뱅뱅 도는 답없는 질문의 시간 속에서 읽기는 이제 구원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고 문장을 남긴다. 문득 문득 살고 싶지 않을 때 그 문장들을 꺼내본다. 그러면 어렴풋이 살아볼까 하는 마음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 아지랑이를 낚아채 삶이라는 바퀴를 다시 굴려본다. 삶의 행복. 살아있다는 찬란함. 기쁨.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이미 삶이란 것이 빛이 바래 버린지 오래다. 다만 문장들이 나를 여전히 살아있게 할 뿐이다. 현재의 나에게 읽는 행위는 지식의 축적이나 정보의 습득,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살기 위해 읽을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운 마음의 상태가 되고 나니 내가 살아야 할 이유보다는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을 먼저 찾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어찌저찌 이어져 온 사소한 행위 하나. 그 행위 하나가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놀랍기도, 한편으론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삶이란 가장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기. 살아보기. 살아내기. 모든 것이 뒤엉켜 때론 그저 살고, 때론 살아보기도 하며, 그리고 때론 억지로 살아내면서 삶 자체를 발견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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