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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세미나] 시체의 글쓰기 5

시체 2022.03.31 23:46 조회 수 : 2312

6. 근본 없는 자식

 

가족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심리 치료의 기본이다. 가족은 모든 관계의 시작이며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의 가계도는 간단명료하다. 아빠, 엄마, 동생에 나까지 단 네 명이다. 아니, 아빠 엄마는 오래전 이혼해서 남남이 됐고 남동생은 결혼해서 따로 가정을 꾸렸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제 세 가족이다. 아빠네, 동생네, 그리고 엄마와 나. 그러니 별로 간단명료하지도 않은 셈이다.

친가와 외가의 가계도를 그리는 데는 퍽 애를 먹었다. 왕래가 전혀 없고 아빠 엄마는 자신들의 부모 형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식구끼리 둘러앉아 지난날의 에피소드나 요사이 있었던 헤프닝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 없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인지 나도 식구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친척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꼭 알아야 하는 건가?’

괜한 반발심이 치밀었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정보이니 남들은 당연히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 같았다. 갑자기 근본 없는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가계도에 뚫린 빈칸을 메우고 싶었다. 실마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 엄마가 쥐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와는 따로 산 지 오래되어 어색했고, 엄마와는 쭉 같이 살았는데도 데면데면했다. 친척에 대해 묻기가 껄끄러웠다. 말을 붙이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별수 있나. 무심한 척 넌지시 물어 잘못 알았던 부분을 고쳐 쓰고 빠진 부분을 채워 넣었다. 겨우겨우 우리 가족의 대략적인 가계도가 완성되었다.

친가는 네 식구로 옛 시절 가족답지 않게 단출하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 돌아가셨는데, 남자 어른 여럿이서 꽃상여를 들쳐 메고 초가집 문간을 나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친할머니는 살아 계시는데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 증세가 있어 아빠가 요양원으로 모셨다. 아빠 위로 고모가 한 분 계셨는데 암으로 돌아가셨다. 몇 살인지 몰라도 아빠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었다. 고모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

외가는 식구가 많아 꽤 복잡하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내가 아직 배 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엄마 위로 외삼촌 하나 이모 셋이 있다고 하는데 얼굴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인지 항상 몇 명인지 헷갈린다. 실체가 없이 모호한 느낌이다. 외삼촌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큰 이모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모두 암으로 돌아가신 셈이다. 나도 각별히 암을 조심해야겠다.

아직 빈칸으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이를 테면 아빠의 큰집. 친할머니 댁이 근처라 명절이면 겸사겸사 그 댁도 방문했다. 그런데 나는 큰댁과 아빠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고 있었다.

“큰집이면 아버지의 형인가요?”

의사의 질문이 있기 전에는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빠의 형은 아니다. 그럼 큰집 사람들은 누구지? 모두가 큰집이라고 부르기에 나도 일말의 의문 없이 큰집이라고 불렀다. 단지 그뿐. 그런데 알고 보니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방문하던 댁이 정확히 누구 댁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드나들었다.

어느 날 큰집이 상을 당했다.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아는 분인가?”

“너도 여러 번 뵀잖아.”

“남자, 여자?”

“남자.”

“그럼 혹시 그 중키에 삐쩍 마른?”

“아니, 아마 적당히 살이 있었을걸.”

보통은 누구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하면 바로 알아들을 텐데. 엄마와 스무고개 같은 문답을 주고받으며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가족이 외부와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가계도를 메우며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다. 외가 쪽도 두 번 큰 상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도 혼자만 훌쩍 친정으로 건너가 상을 치르고 왔다. 친정이 같은 지역에 있는데 엄마는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을까. 당시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지 못한 나는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성한 가지처럼 주변으로 촘촘히 뻗어 있어야 할 관계는 모조리 토막 나 있었다.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내 세상은 좁은 울타리 안으로 한정되었다. 그 안에 부모는 없었다. 줄곧 부재중이었다. 뿌리와 가지를 잘려 집 안에 방치된 나는 나무토막처럼 장판 위를 뒹굴었다. 그리고 점점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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