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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세미나] 시체의 글쓰기 4

시체 2022.03.17 17:29 조회 수 : 1391

4.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느낌

내가 다니던 병원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냥 작은 동네 의원이었다. 10여 분간 환자의 고충을 듣고 알맞은 약을 처방하는 곳으로 결코 모든 사람에게 심층 상담을 권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겐 상담을 권한 것일까. 당혹감, 고마움, 의구심. 세 가지 감정이 차례로 밀려왔다. 그래도 환자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업이면 또 어떤가. 가격이 정말 합리적이었다. 너무 솔깃했다.

일반 상담과 달리 심층 상담은 예약제. 예약 시간은 오후 1시로 딱 병원 점심시간이었다. 심층 상담으로 바뀌고부터 더는 대기실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른 환자와 맞닥뜨릴 일도 거의 없었다. 가급적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간호사의 시야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러나 의사의 점심시간을 빼앗는 기분이 드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내 돈을 내고 진료를 받는데도 엄청난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의사 본인은 괜찮다고 했다. 시간 자체를 의사가 정했다. 그런데도 미안함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고 남아 나를 계속 괴롭혔다.

어두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또한 미안했다. 결코 유쾌할 리 없는 이야기를 1시간 가까이 듣고 앉아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까. 정신과 의사는 상담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나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했는데도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고 보면 미안함도 병인지 모른다.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줄 알면 되는데 그러질 못하고 걸핏하면 사과한다. 그 사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위기만 어색해질 뿐이다.

무의미한 사과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뚝 멈췄다. 계기는 역시 공교롭게도 미안함이었다. 전말은 이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 낸 나는 어김없이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런 이야기, 죄송해요. 듣고 있으려면 분명 괴로우시겠죠?”

또 사과해 버렸다.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이었다. 의사는 평소와 같이 자신은 전문적인 수련을 쌓아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자꾸 사과하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헛되이 하는 거예요. 어쩌면 그게 더 미안한 일이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그랬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 외려 미안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야말로 참 미안한 일이었다. 그 후 미안하다는 말은 목구멍 속 깊숙이 꾹꾹 밀어 넣게 되었다.

진정으로 미안해하지 않게 된 것은 좀 더 나중 일이다. 의사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했던 이야기를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이 다시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지난번 했던 이야기를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시치미를 뚝 떼고 되풀이해야 했다. 마치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지난 이야기를 되짚어 주듯이. 가족 관계 같은 간단한 인적 사항부터 과거에 있었던 복잡한 사건까지. 어쩌면 거듭 상기시켜 트라우마를 극복케 하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번 말하려니 괴로웠다. 유쾌할 것 없는 기억을 들추고 들추고 또 들추고. 상담을 마치고 나면 넋이 나가 온종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또 섭섭했다. 어떻게 매주 이야기하는데 매주 잊을 수가 있지.

다행이기도 했다. 모든 환자의 사연을 일일이 가슴속에 담아 두면 아무리 전문가일지라도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어두운 사연일랑 상담이 끝나는 즉시 얼른 잊어버리는 게 좋으리라. 아마 의사가 쌓았다는 전문적인 수련에는 망각 기술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죄책감의 배경에는 낮은 자존감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찮고 시시콜콜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구구절절 늘어놓기가 참으로 미안했다. 낯간지러웠다. 듣는 사람도 분명 힘들겠거니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전혀 하찮지 않았다. 누구의 이야기도 결코 하찮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과 의사란 이야기를 허투루 듣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모든 이야기가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5. 진도를 빼고 싶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뭐든 자유롭게 이야기해 줘요.”

상담은 언제나 이 말로 시작됐다. 나는 발표 준비를 앞둔 학생마냥 늘 할 말을 준비해 갔다. 병원을 향해 걷거나 뛰는 몇 분 동안 한 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봤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등 떠밀려 내키지 않는 진료실에 뾰로통하게 앉아 있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한 시간을 멀뚱멀뚱 앉아 헛되이 흘려보내기에는 병원비가 아까웠다. 말없이 있는 동안 무겁게 내려앉을 침묵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무슨 소리라도 지껄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다. 항상 긴장했고 진땀을 흘렸다. 반면 의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일일이 맞장구를 치는 편도 아니라서 어떨 땐 혼자 퍼포먼스를 펼치는 기분이었다. 그런 만큼 내게는 한 시간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적극적인 옹호자나 주도자가 아니라 은근한 방관자며 유도자였다. 한 발짝 물러서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다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포착하면 그제서야 은근슬쩍 전면에 나섰다.

“방금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볼래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동을 걸곤 했다. 스치듯 흘린 말을 낚아채 캐물을 때면 당황스러웠다. 대체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생애 초기부터 현 시점까지 기억을 더듬어 나아가고 있다는 것.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들은 치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과거 점검이다. 그렇다면 목표는 분명했다. 이야기가 현재에 도달하면 상담은 종료되겠지. 머릿속에 자동으로 진도표가 그려졌다. 앞에는 유아기, 소년기, 사춘기, 청년기 등 특정 시기를 가리키는 낱말이 적히고 그 뒤에는 빈칸. 해당 시기가 언급될 때마다 빈칸에 체크 표시를 해 나가는 이미지를 연상했다.

대략 반년이면 진도를 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내 삶은 그저 그랬으니까. 이야기를 하려고 들면 아주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할 말이 넘쳐 나는 것도 아닌, 적당히 고단하고 적당히 무난한 삶. 그리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진도는 좀처럼 앞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이미 언급했던 시기로 거듭 거슬러 올라가 나를 떨구어 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때 부모님은 어땠나요?’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죠?’

사건 하나하나에 그런 질문을 던졌다.

애가 탔다. 감질났다. 좋았던 기억은 그렇다 쳐도 나빴던 기억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떠올리기조차 싫다. 한데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상담은 1보 전진 2보 후퇴의 연속. 흡사 고문이었다. 나는 과거의 몇몇 시기로 번번이 연행되어 모진 문초를 당했다.

얼른 이실직고해 놓여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기억이 흐릿했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나는 옛일을 좀처럼 시간순으로 늘어놓지 못했다. 많은 일이 한데 뒤섞인 채 과거라는 이름의 무덤 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 있었다. 별로 소중하지 않고 별로 애틋하지 않아 한꺼번에 싸잡아서 폐기 처분한 기억들. 두터운 먼지와 곰팡이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썩어 가던 기억들. 냄새나는 그것들을 밖으로 하나씩 끄집어내는 것도 일이지만 올바른 순서대로 늘어놓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니 상담은 진도를 빨리 빼려야 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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