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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 덕질하는 마음

날날 2021.12.23 21:15 조회 수 : 2365

덕질하는 마음 

맑고 조용하게 신호를 보내는 일에 대하여

 

 ㅇㄴㄹ. 이름처럼 팔랑거리는 나는 한 가지에 진득이 머무르는 법이 잘 없다. 그런 내가 근 이 년째 꽂혀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채사장이라는 사람이다. 팟캐스트'지대넓얕' 채널을 운영하였고, 같은 제목의 책으로 삼백만 부를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 유명한 사람이지만 BTS니 블랙핑크니 하는 아이돌처럼 '덕질' 당할만한 인물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수시로 카페에 들어가 새 글을 체크하고(채사장님이 만든 카페 이지만 팬들만 활동한다), 최근 새 책이 나와 SNS에 열심히 새 책과 관련된 글을 올리거나 관련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인터넷 서점에 서평을 쓰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지난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몇 번이고 다시 듣기 하며 목소리를 음미(!)하고, 강연이나 그가 쓴 문장들을 곱씹으며 관련된 책을 추가로 찾아 읽거나 분석하며 덕질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전 강연의 질의응답에선 유튜브 활동을 왜 안 하냐는 질문에 '시어머니들이 많아서 눈치 보느라 너무 힘들다'라는 답변을 듣는데 허를 찔린 것 같이 마음이 덜컹하고 서운했다. '난가? 나 같은 사람들 때문인가??'하고 말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변태스럽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런 내가 싫은 건 아닌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붙들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만한 것 같다.
 
 
  처음 채사장의 책을 만난 건 2018년, 아버지 방을 정리할 때였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줄여서 지대넓얕)이라는 제목을 보고 아버지가 읽을 만한 책이네, 하고 비웃었던 생각이 난다. 조금은 호기심을 느끼기도 했고. 그 책과 함께 치우던 책들이 떠오른다.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초>, <풍수와 풍수지리>,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좋은 생각>, <건강 다이제스트>.... 책 목록의 특징을 멋대로 요약하자면 '남들 앞에서 책 읽는 체는 하고 싶은데 책 읽는 게 별로 즐겨지지는 않고, 짧고 쉽게 엑기스만 쏙쏙 뽑아 놓은 책' 이 정도가 될까. 그중에서도 지대넓얕은 가장 두꺼운 책이었는데 펼쳐본 흔적조차 없었다. 우리 아버지. 고정 수입은 없어도 말쑥하게 차려입고 거드름 피우는 것을 좋아하고, 대장암 진단을 받고도 담배와 커피와 고기를 즐기시던. 평생 같이 살지도, 챙겨보지도 않은 딸을 죽을 날을 받아 놓고 불러서 뒷바라지시키면서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끝끝내 아무런 말도 들려주지 않았던 천둥벌거숭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낯선 그 집에서 가지고 온 몇 안 되는 물건 중에 지대넓얕이 있었다. '이런 책은 돈 주고 사서 보기 아깝지. 그래도 신간인데'라며 우리 집 책장에 꽂아두고는 잊어버렸다
 
  자주 다니는 지역 도서관에서 채사장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쩐지 아는 사람처럼 느껴져 덥석 신청한 것은 작년 초였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동안 운전할 때나 시간을 보낼 일이 있을 때 지대넓얕 팟캐스트를 상당히 재미있게 들었는데 3년 동안 이어졌던 팟캐스트가 종료되면서 많이 아쉬웠다. 팟캐스트가 종료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다른 패널의 질문에 채사장은 '티벳에 다녀오고 싶다'라고 했었는데 정말 다녀왔을까?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던 채사장이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고 성장하기"라는 거창한 강연 제목을 걸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팟캐스트를 통해 내가 알던 채사장님은 외계인과 51구역을 지저세계를 이야기하며 '말도 안돼~'를 '그럴싸한데?'로 둔갑시키는 유머러스한 신비주의자이자 철학, 사회, 종교의 여러 면면을 다가가기 쉬운 이야기거리로 풀어내는 유쾌한 소피스트였다. 채사장 개인 강연을 처음 접한 나는 그런 가벼운 교양과 예능사이의 어떤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강연에서 채사장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중심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채사장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충격과 함께 덕통사고 당하고 말았다. (덕통사고는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듯 예상치 못하게 덕질에 푹 빠져드는 계기를 이르는 말이다.) 팟캐스트에서 그가 연출하고 내보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을 구하는 인간 채사장님이 있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세계관이 한 개인을 어떻게 짓누르는지, 지금 우리가 가진 사상이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지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철학 흐름을 짚어가며  설명하고, 동서양의 성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여정에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 세계는 무엇인지 스스로 탐구하는 여행자가 되라고 격려하면서 말이다. 자기 역시 이런 이야기를 대중 앞에서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노라고 고백하는 모습에 나는 홀딱 넘어갔다. 잠깐, 이것조차 강연용으로 연출된 모습 아닐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를 더 알아가야만 했다.
 
   내가 궁금해했던 티벳에 다녀온 이야기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진작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강연 온라인 중계 유튜브의 대화창에서 지대넓얕이 아닌 채사장의 카페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읽기 모임을 조직하고, 그의 책을 모조리 구입하고, 그야말로 순조롭게 덕질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일은 힘들고, 식구들과는 투닥거려 낮의 삶이 힘에 부칠 때 조용히 노트북을 열고 채사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깨달음에 대해 수다를 떨고, 의식 너머를 감각하며 이 세계에 발 붙인 내가 더 단단하고 홀가분해져 갔다. 이런 덕질이라니, 세상을 이롭게 하는 멋진 덕질 아닌가.
    
  이 글쓰기 모임에 오게 된 것도 어쩌면 채사장님 덕분이다. 채사장의 글 중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영 읽히지 않는 책이었다.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 채사장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조금 더 가 닿고 싶은 마음은 관련 강의를 찾게 하고, 도서관 인문학 강연 목록에서 니체를 발견하게 했다(들뢰즈 다음이었다). 거기서 니체 강연을 맡아주셨던 분이 류재숙 선생님이었는데 강연 말미에 '수유너머'라는 공부모임을 홍보하셨다. 어라, 최근에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라는 책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책을 쓰셨던 고영주 선생님도 같은 곳에서 공부하신다고 하지 않았었나? 수유너머에 뭔가 있나? 이렇게 홈페이지에 들어왔다가 마침 글쓰기 세미나의 새 식구 모집 글을 보게 되었다. 어라, 이것은 계시?? '나 같은 사람이 끼어도 괜찮을까요' 수줍게 문을 두드렸을 때 생강님과 다른 분들이 흔쾌히 맞아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렇게 덕질과 아버지 이야기로 첫 글을 선보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채사장의 글과 이야기를 통해 나의 세계가 확장되고, 나의 작은 울타리를 넘어 실제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나의 덕질을 사랑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채사장의 글과 이야기가 채사장이라는 사람과 포개져 한 사람을 깊이 알아가는 일이 나에게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세계가 너무나 궁금한데, 그 세계 안의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가 너무나 중요한데 그것을 미궁 속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내가 제멋대로였던 아버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가족이라서 져야만 하는 책임 같은 것으로 뭉개 두었기 때문이다. 늘 뒷모습만 바라보게 만드는 그의 태도가 나의 입장에선 이기적이고, 이기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래서 밉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물리적 생존을 위한 상호성 외에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확인하기 어렵다면 도대체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응답과 반영이 있는 세계. 내가 어떤 몸짓을 하면 세계가 바뀌는 경험. 내가 바란 것은 사실 아주 유아적인 자기 인정일지도 모른다.  
 
  채사장이라는 인간도 나와 다르지 않다. 아마 그를 인문학자,라고 부르기엔 진짜 인문학 연구자들이 비웃을 것 같고, 최근 신간이 소설이었으니 소설가,라고 부른다면 진짜 소설가들이 화를 내려나.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나는 이게 궁금해' 이렇게 삶과 생각을 표현하는 이가 있었던가? 이런 그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하나.
 그가 해석하여 전하는 니체와 부처와 파드마삼바바, 체 게바라와 톨스토이, 마르크스와 소마의 이야기를, 결국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견한다. 오히려 살냄새 나는 생활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라서, 그가 이야기하는 실존의 이야기가 깨끗하게 전달된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내 삶 안에서 채사장님과 나의 경험을 해석하고 살아나간다. 요약하자면 나는 채사장님을 통해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 아버지와 나누고 싶었던 관계를 대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고 우스운 것은, 아버지와 내가 보통의 부녀지간으로 살아왔다한들, 우리 아버지가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신 아버지를 넘어서는 어떤 것들에 대해 열망하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했겠지. 결국 아버지가 계시면 계신 대로, 안 계시면 안 계신 대로 아버지라는 존재에 얽매여 있다. 그 얽매임을 지켜보고 있으면 결국 나와 세계의 관계, 온 세계를 표상하는 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고민이 자기의 고민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왔던 이가 채사장님이었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에 태어나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 채사장님의 존재는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중요한 존재이다. 그저 삶을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자조모임의 멘토로서 말이다.    
 
  이런 팬이 있다고 하면 그는 기뻐할 것인가, 소름 돋아할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덕주(덕질하는 대상을 이르는 말이다)와 팬의 관계는 분명 상호적이긴 한데, 그 관계를 누리는 방식은 아주 일방적이기도 하다.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거르고 걸러 공들여 다듬은 뒤, 공적인 언어로 그와 나의 교집합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는 이 덕질이라는 게 진심으로 예의를 다하는 정중한 사랑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과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다는 점에서 (남들이 볼 땐) 쓸데없이 수고스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채사장님이 우리 이웃집으로 이사 와서 쓰레기 버리러 갈 때마다 인사 나누는 그런 관계로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관계가 실제의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마음의 안식처- 내 속도로 진리를 쫓을 수 있던 내면의 보호구역은 필요 이상의 정념과 번뇌로 쑥대밭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다만,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알려주고 싶다. 당신이 기울이는 노력이 무용하지 않노라고.  
 
  '나'라는 우주에 갇혀 있는 내가 '타인'을 통해 좀 더 삶에 다가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열리는 새로운 우주가 궁금하다. 혹시나 성덕으로서(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차 한잔 마시면서 나누고 싶은 욕심이 있다. 채사장님도 그래서 글을 쓰고 사람들과 만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가 나는 여기에 있어,라고 조용히 발신하는 신호가 나에게 닿았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나는 덕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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