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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3

 

20세기가 끝을 향해 치달으면서 이 집의 서식자들 역시 세기말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20대 중반에 만나 뜨겁게 연애하다 결혼한 남녀는 서른 후반을 향해 가고 있었고 자칫하면 따분해질 수도 있는 안정을 거부했다.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자였던 여자는 다시 시작한 영화 일에 몸과 맘을 바쳤고, 영화판에서 어느 때보다 각광받는 위치에 있던 남자는 그 일을 하루 아침에 때려치고 스스로 몰락의 길을 택했다.

작은 방 한 칸을 차지한 채 담배를 피워대며 밤낮 없이 시를 쓰던 남자는 겉으로는 당당했지만 생활비를 벌어다주지 못하는 남편이자 아비였기에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탓하거나 돈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으나, 아이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릴 때 큰 소리로 화를 내었다. 그때마다 더 큰 소리로 아내를 제압하곤 하던 남자는 북한산을 다니다가 지리산으로, 속초 아바이 마을로 떠돌다가 집을 떠났다.

덩치 큰 남자가 없어진 집에는 귀여운 아들과 싱글맘 같은 엄마가 남았다. 집안을 짓누르고 있던 어둡고 무거운 기류가 사라지자 아이와 엄마는 마음껏 까불며 놀 수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에서 가끔 편지를 보내왔다. 담배갑 안의 은박지 뒷면에 ‘돌이에게’로 시작하는 글이 써 있었다. 아이가 읽을 만한 내용은 엄마 말 잘 듣고, 밥 잘 먹고, 똥 잘 싸라는 거였고, 나머지는 아이의 엄마를 독자로 삼은 듯한 일기 같은 글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기 보다는 글로 썼고, 그의 글을 좋아하는 여자는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그만큼 슬픔도 컸다.

여자도 어딘가로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아야 했기에 어느 여름밤, 하릴없이 안방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불현듯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소설에서 읽은 정동진으로 꼭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정동쪽 바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지만 한번 꽂힌 생각을 접을 수는 없었다. 우산을 받쳐든 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멀리 청량리역으로 갔다. 하지만 한산할 거라 생각했던 밤기차는 입석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서서 가긴 힘들 것 같아 돌아서는데, 광장 저 끝에 정동진행 관광버스가 승객들을 모으고 있었다. 봉고차 납치, 인신매매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살짝 두려움이 있었지만, 바다를 보러가는 젊은 남녀들,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군인들이 타고 있는 걸 보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둠 속을 달려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가는 심야버스에서 아이는 금새 잠이 들었지만, 아이 엄마는 뜻하지 않은 일탈의 즐거움을 느끼며 동해 바다에 대한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후진해수욕장으로 엠티를 갔던 일. 바다만 생각하면 설레이는 마음...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새벽 세 시도 되기 전 컴컴한 정동진에 당도했다.

서른 중반의 여자는 그 무렵 이런저런 글을 썼다. 단편영화 시나리오 ‘편모슬하’는 써놓기만 하고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밖에서 일하며 술을 마시고 구토를 하는 엄마와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의 이야기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닌 백사장엔 드문드문 파라솔이 있을 뿐이고 젊은이들 서너명만이 보였다. 여기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바다에 들어가 아이와 함께 발이라도 적시려면 해가 뜨길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밤새도록 불을 켠 천막 매점이 있어 컵라면을 사먹었지만 새벽이 될수록 바람은 불고 추웠다. 더구나 아이는 졸음이 쏟아졌다. 바람을 막기 위해 우산을 펼쳐놓고 백사장에 앉아 무릎에 아이를 눕혔지만 움직이지 않으니 더욱 추웠다. 준비해간 겉옷도 없어 아이를 덮어줄 수도 없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정동진 간이역으로 갔다. 그나마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딱히 앉아 있을 벤치도 없었지만 바람은 막을 수 있었다. 등에 아이가 붙어 있으니 서로의 체온으로 온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여섯 살 아이의 무게를 계속 지탱하고 있기에 여자의 몸은 왜소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역무원이 출근하고 딸랑딸랑 소리와 함께 강릉행 새벽 기차가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 ‘백학’이 기찻길 위로 울려퍼지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보니 그곳은 모래시계의 배경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날이 흐려서 일출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와 함께 어둠은 물러가고 영화와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모래시계 촬영지 기념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백사장으로 몰려 갔다. 여자와 아이도 바다로 갔다.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바닷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여자는 해변에 앉아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온몸에 모래를 묻힌 아이를 역사 앞의 수도꼭지에 매달린 호스로 물을 뿌려주니 아이는 간지러움에 까르륵댔다.

돌아올 때는 영월태백선을 타고 바깥에 펼쳐지는 햇살 가득한 풍경을 보며 꿈결처럼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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