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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가장 위대한 아일랜드 영화 (베케트의 [필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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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의 필름] https://www.youtube.com/watch?v=5yAnYQGqefk

 

     #텍스트의 외부     

#문제설정. ‘지각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각불가능하게 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 비평(문학)이란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베케트의 [필름]은 ‘지각된다는 것’을 통해, ‘지각불가능하게 되기’로 나아가고 있다. 지각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생성의 표지이다. 존재를 넘어 생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어떻게 지각불가능한 것이 될 수 있나?

“네가 아직도 적대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Esse est percipi.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All extraneous perception suppressed, animal, human, divine, self-perception maintains in being. / 동물적인, 인간적인, 신적인, 모든 외부의 지각은 억제돼있고, 자기 지각은 존재 속에 유지된다. Search of non-being in flight from extraneous perception breaking down in inescapability of self-perception. / 외부의 지각으로부터 달아나 비-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자기 지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으로 인해 좌절된다." 사뮈엘 베케트 [필름] 각본 처음

“지각불능하게 된다는 것은 ‘멈춤도 조건도 없는’ 삶인 것이며, 우주적이고 영적인 출렁거림에 이르는 것이다.” 들뢰즈 [비평과 진단]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t (1906~1989) :: 아일랜드 출생.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 /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실험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그리고 시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1952) / 승부의 종말(Fin de Partie / Endgame)[4] (1957) / 오, 행복한 날들(Happy Days) (1963) //  [소설] 발길질보다 따끔함(More Pricks Than Kicks) (1934) / 머피(Murphy) (1938) / 몰로이(Molloy) (1951) : 소설 3부작 / 말론 죽다(Malone meurt) (1951) : 소설 3부작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L'innommable) (1953) : 소설 3부작 / 그게 어떤지(Comment c'est) (1964)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 (Dream of Fair to Middling Women) (1992) // [시집] 호로스코프(Whoroscope) (1930) /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Echo's Bones and other Precipitates) (1935) / 시들(Poèmes) (1968) // [비평] 프루스트(Proust) (1930) / 세계와 바지(Le monde et le pantalon) (1989)

#사뮈엘 베케트의 [필름] :: 많은 사람들이 베케트를 극작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시, 소설, 희곡, 비평, 라디오극, 텔레비전극 등 모든 장르를 실험하였다. [필름]은 베케트가 각본을 쓴 유일한 영화 (1965년 제작된 무성영화 / 알란 슈나이더 감독, 버스터 키튼 연기)

 

     1. 문제설정     

문제 > 아일랜드의 주교 버클리의 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맞다면, 과연 지각(perception)을 피할 수 있을까? (*버클리 주교 >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아일랜드의 주교. 물질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각된 것뿐이다.”)

문제의 이야기 > 이는 모든 이야기를 진저리날 정도로 지각한 버클리의 이야기다. 버스터 키튼(영화의 주인공)만 할 수 있는 역은 버클리 주교역이다. 이는 한 아일랜드인에서 다른 아일랜드인으로의 이행, 지각하고 지각되는 버클리로부터, ‘지각함percipere과 지각됨percipi의 모든 행복’을 고갈시킨 베케트로의 이행이다.

문제의 조건 > ‘지각된다는 것’은 뭔가가 참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지각된다는 것은 3자에 의한 지각이 아니라, 즉자즉인 끔찍한 뭔가가 있다. 지각하는 영원한 제3자들은 서로가 아니라 각자 자신을 위해 지각되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분주해진다.

문제의 여건 > 지각(카메라)이 인물 뒤에 있는 한 위험하지 않는데, 지각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지각)가 자기 등 뒤에서 45도를 넘을 때, 인물은 ‘지각된다는 것’을 의식한다.

 

     2. ‘지각’에 관한 영화의 3가지 이미지     

타인에 의한 지각됨 : 외부 지각, 영원한 제3자, 소멸_행동의 정지
사물에 의한 지각됨 : 외부 지각, 이중적 지각(지각하기-지각되기), 소멸_이중적 지각의 소멸
자신에 의한 지각됨 : 자기 지각, 카메라-지각(촉발의 지각), 소멸_소멸불가능 ······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타인에 의해 지각됨] 행동이미지_타인의 지각_행동의 지각 ······ 제1경우: 벽과 계단, 행동 > ①(벽) 인물은 벽을 따라 빨리 걸어감으로써 (*지각되는) 위험을 제한할 수 있다. 벽을 따라 인물을 걷게 하는 것은 근본적 영화적 행위이다. ②(계단) 계단에서처럼 행동이 수직적이고 나선적인 될 때, 그것(지각되는 것)은 한층 복잡하다. 왜냐하면 측면은 축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45도가 초과할 때마다 인물은 가던 길을 멈추고 행동을 멈추고 엎드린다. ③(행동의 지각과 소멸) 이어서 그는 무엇으로든 얼굴의 노출된 부분을 가린다. 이런 것이 제1의 경우, 행동의 지각인 것이다.(행동이 지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의 정지에 의해 약화될 수 있다.

[사물에 의해 지각됨] 지각이미지_사물의 지각_지각의 지각 ······ 제2경우: 방, 지각 > ①(방) 이것은 제2의 영화적 행위인 실내(*방)이다. 이 행위는(*방 안에서의 행위) 벽과 벽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전에는 인물이 지각주체로 간주된 일이 없었다. 행동하기에 충분한 ‘눈 먼’ 지각을 인물에게 마련해주는 건 바로 카메라이다. ②(이중적 지각: 지각되기, 지각하기) 지금 방안에서 카메라는 인물을 지각하고 있으며, 인물은 방을 지각하고 있다. 모든 지각은 이중적이 된다. 이전에 3자들(인간) 인물을 영원히 지각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카메라에 의해 약화되었다. 지금은 인물이 자신을 위해서 지각하며, 인물의 지각작용은 그를 지각하는 사물들(신을 그린 채색화, 동물, 거울, 사진, 잡다한 물건들)이 된다. (ex. 디킨슨의 작품을 보고 나서 에이젠슈타인 “주전자가 나를 빤히 처다보고 있어요.”) 사물들은 인간들보다 더 위험하다. 사물들이 나를 지각하지 않고서는, 나는 사물들을 지각하지 못한다. ③(사물의 지각과 소멸) 제2의 경우 해결책은 동물들을 내쫓고, 거울을 가리고, 가구를 덮고, 채색화를 떼어내고, 사진을 찢어버리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중적 지각을 소멸시키는 길이다. ④(과거의 처분_사진들, 현재의 존재_흔들의자) 방금전에 길거리에서 인물은 어떤 시공간을, 그리고 어떤 과거의 단편들(자신이 가지고 온 사진들)마저 마음대로 처분하고 있었다. 이후부터 그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이 때 그 현재는 모든 시공간 개념ㆍ신ㆍ동물ㆍ사물의 모든 이미지가 사라져버린 완전히 밀폐된 방의 형태를 띤다. 방 한가운데 흔들의자만 살아남아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침대 이상으로 흔들의자는 인간 이전이나 이후에도 유일한 가구일뿐 아니라, 무無-왕복운동-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긴장감 속에 잡아두기 때문이다.

[자신에 의해 지각됨] 촉발이미지_자아의 지각_촉발의 지각 ······ 제3경우: 흔들의자 촉발affection > ①(인물의 지각: 이중적 지각) 인물은 흔들의자에 앉으러올 수 있고, 지각이 스러짐에 따라 흔들의자에서 부드럽게 잠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지각은 흔들의자를 여전히 살피는데, 이때 지각은 2측면을(*지각하기, 지각되기) 동시에 사용한다. ②(흔들의자의 지각: 사물의 지각) 지금 (*흔들의자의) 지각은 부드러운 잠에 빠져있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한다. ③(카메라-지각: 촉발의 지각, 자아의 지각) 카메라-지각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결정적 각도를 초과해서 돌리고 곤히 잠든 인물 바로 앞까지 다가선다. 이때 카메라-지각은 촉발의 지각이라는 현재의 자신(자신에 의한 자신의 지각, 순수정서)을 그대로 드러낸다. 카메라-지각은 애꾸눈 인물을 쳐다보는 애꾸눈이다. 카메라-지각은 자기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끔찍한 걸 기다렸던 것이다. ④(자기 지각의 소멸불가능성) 이런 의미에서 지각은 본래 그 자체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3의 영화적 행위, 대단한 플랜이며, 정서ㆍ촉발의 지각ㆍ자아의 지각이다. 흔들의자의 움직임이 사그라들고, 인물의 죽음과 동시에 카메라-지각 역시 스러져갈 것이다. 버클리 주교가 제시한 여러 조건들에 따르면, 지각불능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하기를 그쳐야만 할까? (*‘생성하는 존재자’-되기)

 

     3. 영화의 이미지 너머,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존재ㆍ시간의 소멸, 생성하는 존재자ㆍ시간] 일반적인 해결 > ①(필름: 영화이미지의 가로지름) 베케트의 영화는 영화가 지니고 있는 3개의 기본적 이미지들(행동이미지, 지각이미지, 촉발이미지)을 가로질렀다. ②(존재의 소멸, 생성하는 존재자) 하지만 베케트에게는 어느 것 하나도 죽은 게 없다. 흔들의자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 흔들의자의 플라톤적 이데이아ㆍ정신의 흔들의자이다. 머피의 말마따나 인물은 죽어가지만, 벌써 정신세계를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대양 위를 떠도는 병매개와 같아, 그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어떤 요소 안에 있다. ②(시간의 소멸, 생성하는 시간) 현재는 더이상 어둠이 없는 텅빔 속으로, 상상가능한 변화가 더이상 없는 생성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방은 자신의 벽을 잃어버렸으며, 비인칭적이지만 특이한 원자를 (자신을 스스로 식별해서 타인과 혼동하지 않기 위한 자아가 더이상 없는 어떤 원자를) 밝은 텅빔 속으로 풀어놓는다. 지각불능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멈춤도 조건도 없는’ 삶인 것이며, 우주적이고 영적인 출렁거림에 이르는 것이다.

 

 

5장 칸트철학을 요약하는 4개의 시적 표현에 관하여

*주제 : 칸트철학의 시간에 관하여

[#] 칸트의 비판철학 [철학과 굴뚝청소부]

인식에 대한 질문 :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순수이성 비판] ······ 진리와 주체에 대한 질문 
행동에 대한 질문 :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실천이성 비판] ······ 인간의 행동당위도덕에 대한 질문 
목적에 대한 질문 :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판단력 비판] ······ 인간의 목적개념에 대한 질문

[#] 칸트의 선험적 조건: 칸트는 경험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한다.

① 선험적 감성형식(대상을 받아들이는 선험적 형식) : 시간과 공간
② 선험적 지성형식(대상을 판단하는 선험적 형식) : 범주(크다/작다, 우연성/필연성 등) 
③ 선험적 주체 : 선험적 감성능력(대상을 인식(시간ㆍ공간)할 수 있는 감성능력)과 선험적 지성능력(대상을 판단(범주)을 합해서 ‘선험적 주체’라고 부른다.

 

[1. 칸트철학: 시간의 전복]    햄릿의 ‘빗장풀린 시간’ ··· [순수이성비판]의 ‘시간의 순수질서’   

“시간은 탈구되었다. The time is out of joint” 셰익스피어, [햄릿]

“시간은 경험에 선행하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시간은 텅빈 형식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 시간의 순수질서 (선험적 감성형식으로서의 시간) :: 시간과 공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선험적 감성형식이다. 대상은 (공간)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하며, (시간) 어느 시점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경험에 선행하며, 모든 인간의 인식에 필수적이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경첩에 매인 시간과 아라스토텔레스의 시간: 주기적 운동에 종속된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 > 경첩은 문이 회전하는 축이다. 시간이 자신의 경첩 안에 있는 한, 시간은 외연적 운동에 종속된다. 고대철학에서 시간은 회전문처럼 세계의 순환운동에 종속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 :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척도를 수립하는 주기적 운동으로 태양의 운동을 든다. 태양은 규칙적으로 지구 둘레를 도는데(지구의 자전), 한 바퀴 도는 것이 하루라는 시간의 척도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식으로 측정되는 수가 바로 시간이다. 이처럼 주기적 운동은 시간의 척도를 제공해 주며,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주기적)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 시간이 순환적이길 멈출 때, 시간은 해방된다.)

빗장풀린 시간과 칸트적 전도: 주기적 운동을 조건짓는 시간. 아이온의 시간 > 헝클어진ㆍ탈구된ㆍ빗장풀린(out of joint) 시간, 경첩을 벗어난 문은 칸트적 전도를 의미한다. ①(주기적 운동을 조건 짓는 시간) 운동이야말로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시간은 자신을 측정하는 (*주기적) 운동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주기적) 운동이 자신을 조건짓는 시간에 돠우된다. ②(직선적 시간, 아이온의 시간) 시간은 모든 운동에 자신의 한정을 부과하는 한, 자신에 의해서-자신 속에서 시간은 단계적이 되고 직선적이 된다. 시간의 직선화. 시간은 자신을 운동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신에 의해 더 이상 왜곡되지 않는다. 시간은 더 이상 기수적이 아니라 서수적으로 변하며 텅빈 시간의 서수가 된다. 더 이상 원이나 나선이 아니라 순수직선(단순냉혹하고 무서우리만큼 신비로운 선)이다. ③(햄릿, 시간의 빗장을 풀어버린 자) 시간으로부터 해방을 달성한 것은 힘릿이다. (*시간의 빗장을 풀어버린 자는 햄릿이다) 햄릿이야말로 행동하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던 최초의 주인공이다. 기원적 운동으로서 시간을 체험하는 아이킬로스의 영웅이나, 방황하는 행동으로서 시간을 체험하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④([순수이성비판]은 햄릿의 책) [순수이성비판]은 북쪽 나라의 왕자 햄릿의 책이다. 칸트는 전도의 모든 범위를 포착하게 해주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있다. 시간은 초자연적기원적 운동의 우주적 시간도, 부차적 운동의 농촌적 시간도 아니다. 시간은 도시의 시간이 되었으며, 시간의 순수질서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⑤(시간은 변화ㆍ운동의 형식)  연속이 시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은 운동을 연속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영속성ㆍ동시성ㆍ연속은 시간의 양태 혹은 관계(지속duree, 계열serie, 전체ensemble)이다. 이것들은 시간의 파편이다. 따라서 시간을 연속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공존이나 동시성으로 정의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전혀 새로운 한정(*규정)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있다. 하지만 시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시간은 영원한 것도 아니다. 시간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의 형식이긴 하지만, 영원하지 않는 것의 형식, 변화와 운동의 불변형식이다.

크로노스Chronos와 아이온Aeon: 그리스신화의 신.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이라면, 아이온은 우주의 신, 하늘의 신(원, 뱀의 형상) 
크로노스: 원환적 시간(해ㆍ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시간) vs 아이온: 직선적 시간(사건의 시간, 영원회귀의 시간, 직선의 시간: 반복할 때마다 다른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가는 시간의 직선, 무한히 많은 방향으로 열려있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사건의 시간)

 

[2. 칸트철학: 주체의 전복]    랭보의 ‘나는 타자’ ···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주체’   

“나는 타자이다. Je est un autre” 랭보 [1871.5월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1871.5.15. 데므니에게 보낸 편지]

“선험적 주체는 시간에 의해 규정되며,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 선험적 주체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객관적 주체) : 선험적 감성능력(대상을 인식(시간ㆍ공간)할 수 있는 감성능력)과 선험적 지성능력(대상을 판단(범주)을 합해서 ‘선험적 주체’라고 부른다. 선험적 주체(칸트)는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인 주체이며. 따라서 경험적인 개인을 넘어선다는 뜻에서 ‘객관적 주체’이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영혼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 > 시간을 사고방식이나 영혼의 강도적 운동mode de la pensée ou mouvement intensif de l’âme(영적이고 수도사적 시간)으로 보는 고대의 시간개념이 있다.(*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을 비판하면서. “시간은 ‘세어진 수’가 아니라 ‘세는 영혼’에 관련된다.”)

데카르트의 세속화. 주체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 >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런 시간관을 세속화시킨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순간적 규정인데, 이는 규정되지 않은 현존 나는 존재한다’를 함축하며, 미규정의 현존을 생각하는 실체로 규정한다(나는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 je suis une chose qui pense). 어떤 식으로 시간이 규정가능한지를 말할 수 없다면, ‘미규정적인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칸트의 세속화.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선험적 주체 > “미규정된 실존이 규정가능성을 찾는 것은 오직 시간 안에서, 시간의 형식 아래에서 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는 시간을 변용시킨다(affecte). “나는 생각한다”는 시간 속에서 변하며 매순간 의식의 전도를 보여주는 어떤 자아(un moi)를 규정할 뿐이다. 따라서 규정가능성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영혼의 강도적 운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순간에 있어서 의식을 강도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시간에 의존한다.” 이것이 칸트적 세속화로 이루어낸 ‘시간의 두번째 해방’이다. 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는 영혼’에 주목했는데, 사실은 영혼이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선험적 주체는 어떻게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가? 자아(le Moi)와 나(le Je) > 자아는 시간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시간 속에서 변화를 겪는 수동적인, 보다 정확히 말해서 수용력이 풍부한 자아이다. (*반면) 나는 나의 존재(나는 존재한다)를 능동적으로 규정하는 어떤 행위(나는 생각한다)이다. 자아는 수동적인 반면, 나는 능동적이다. 니체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순수한 수동적 태도에 의해 정의된다. 햄릿은 순수이성에 도전하는 위험한 힘을 자신에게 주는 타자처럼, 자기사고의 능동성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이다. 칸트적 자기성격! 나는 시간의 형태에 의해, 나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매순간 자신의 종합을 실행하면서 시간의 형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며, 자아는 이러한 형식 속의 내용처럼 나로부터 반드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주체의 광기는 빗장풀린 시간과 일치한다. 이는 시간 속에서의 자아와 나의 이중적 전환과도 같다. 이러한 전환은 나와 자아를 철저히 관계맺는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줄이다. ...... 우리에게 내재하는 것이 시간이 아니며, 시간에 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3. 칸트철학: 윤리의 전복]    카프카의 [소송] ······ [실천이성비판]의 정언명령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법들에 의해 지금 지배받고 있다는 이 크나큰 형벌! ...... 이렇듯 법의 특성은 그 내용에 대한 비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카프카, [만리장성]

“법이 말하는 것이 곧 선이다. Le Bien, c’est ce que dit la Loi. 법은 순수하고 텅빈 형식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네 의지의 준칙이 또한 보편적인 입법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실천이성비판]

*칸트의 정언명령 > 가언명령假言命令(가언명법)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적용되고 요구되는 조건부 명령이라면, 정언명령定言命令(정언명법) 상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요구되는 단언적 명령이다.

선과 법에 관한 통념: 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고, 그래서 법이 된 것 ······> 선은 법의 기초(근거)
칸트의 선과 법 개념 : 선은 입장에 따라 다르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 힘들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선이듯, 법으로 정한 것을 지키는 것이 선 ······> 법이 선의 기초

 

고대의 법들: 법은 선의 대리자, 선의 모방자 > 법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법들이 구별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의 의식들은 법들에 관해 말한다. 법들은 이러저러한 조건 속에서 선이나 최선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한다. 즉 법은 자신이 유래한 선이 무엇인지 말한다. 법은 선善의 대리자로서 제2의 방책이며, 인식의 관점에서 선善의 모방자이다.

[실천이성비판]의 정언명령: 법은 순수하고 텅빈 형식이다 >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법과 선의 관계를 뒤바꿔놓았으며, 순수하고 텅빈 단일성에로까지 법을 끌어올렸다. 법, 그것은 법에 의존하는 선이다. 제1원리로서 법은 내면성도 내용도 없다. 모든 내용은 법이 그 모방인 선에게 법을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순수형식이다. 또한 법은 대상이 없기에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상관없이 어떤 주관적인 법칙을 따라야할지를 말해준다. 따라서 법은 보편성의 순수형식으로 정의된다. 의지는 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을 추구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지만, 도덕적이기 위해서 어떤 형식을 띠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법은 선(순수명령)의 파괴를 무릅쓰고라도 ‘~해야 한다’는 말만을 우리에게 할 뿐이다. 법은 인식되지 않는다. 법 속에는 인식해야 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법은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순수 실천적 한정의 대상이다. 법은 우리의 마음과 몸에 남긴 자국과 혼동되지만, 우리의 과실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법이 우리에게 명한 것은 ‘의무로 행하라’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송] > 법은 우리를 의무로부터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법은 우리의 미덕 뿐 아니라 우리의 악이나 과오로부터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매순간 허울뿐이 무죄석방만 있을 따름이다. 도덕적 의식은(*~해야 한다) 진정되기는커녕 우리의 거부로 더욱 강화되며 더 강한 충격을 준다. 무죄석방은 ‘이성의 무능력을 치유하는’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이 끝없는 연장(*연기)은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이미 우리를 현세의 지옥에 가둬놓는다. 그러한 연장은 우리에게 불멸성을 예고한다기보더누느 ‘일종의 완만한 죽음’을 만들어내며 쉴새 없이 법의 판단을 미룬다. 시간이 자신의 경첩에서 나올 때, 우리는 완만한 죽음이나 연기된 판단, 끝없은 빛으로 향하는 끝없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죄와 속죄의 낡은 순환을 거부해야 한다. 시간은 카프카의 [심판]에 나오는 것 같은 법적 대안 말고는, ‘표면상의 무죄방면’이나 ‘무기연기’말고는 별다른 대안을 우리에게 내놓지 못한다.

 

[4. 칸트철학: 감각의 전복]    랭보의 '감각의 착란' ······ [판단력비판]의 '부조화하는 일치'   

“모든 감각의 착란를 통해 미지에 도달하라. …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한 착란.” 랭보, id

모든 기능이 착란으로 실행되고 있는데, 이는 [판단력비판]에서 보여준 낭만적인 제4의 정리일지도 모른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지배하는 것은 상상력의 종합을 매개하는 ‘오성’이었고, [실천이성비판]을 구성하는 것은 법의 순수한 보편성을 구성했던 ‘이성’이었다. 칸트는 이러한 기능들이 저마다 끝까지 가면서도 다른 기능들과 조화가능성을 계획하는데, 이것이 낭만주의 기초로서의 [판단력비판]이다. 상상력과 이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뿐 아니라, 오성과 내적 감각 사이의 투쟁, 주체 속의 어떤 깊은 구렁의 내부로 불어대는 폭풍이 있다. 하지만 다양한 기능들이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조화들을 서로에게 준다. 그 결과 기능들은 부조화적 일치를 이룬다. 부조화와 모순으로부터의 해방, 서로 조화되지 않는 일치는 [판단력비판]의 위대한 발견이자 칸트의 최후의 전복이다. 결합하는 분리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제시한 제1테마였지만, 결국 칸트는 일치시키는 불일치ㆍ부조화를 발견한다. 미래철학을 정의하게 될 모든 기능의 지나친 실행(랭보처럼 모든 감각의 무절제)은 미래의 시를 정의해야 했다. 부조화로서의, 부조화하는 일치로서의 새로운 음악, 그것야말로 시간의 원천이다.

 

 

6장 니체와 성 바울, D.H. 로렌스와 사도 요한

*주제: 니체의 바울 비판로렌스의 요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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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보좌에 앉아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위) 일곱개의 봉인을 열고 있는 어린양(예수) / 마티아스 게롱, <요한의 하늘나라 환상>. 16C 독일 하인리히 성경의 삽화.
(아래) 일곱번째 봉인을 열자, 일곱 천사들이 일곱개의 나팔을 불기 시작하고, 최후의 심판이 시작된다.

 

#로렌스의 [아포칼립스], [요한게시록]의 현대적 패러디 : [요한게시록]의 종말론적 서사를 현대적으로 비틀어 재해석한 작품. 패트모스의 요한의 폭로는 주로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영향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이 이야기에서 로렌스는 감정화된 이데올로기의 표면적 서술 뒤에 숨어 있는, 좌절된 다수의 힘에 뿌리를 둔 파괴에 대한 욕망을 발굴한다. 패트모스의 요한의 서사를 뒤집고 간섭함으로써, 서사의 확립된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수정함으로써 로렌스는 가상과 실제의 관계를 재조립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와 해방의 새로운 서사를 구성한다. 요한계시록의 본문에 대한 감정적인 적응에서, 로렌스는 결국 텍스트 리듬을 새롭게 구성하고 본문에서 현재와 같은 비구체성을 만드는 새로운 종류의 비판을 촉발한다.

#[요한계시록]과 니체의 긍정적 패러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개의 봉인은 세계파멸, 최후의 심판을 상징한다. 요한이 자신이 본 세계파멸, 인류멸망의 계시를 적은 기록. “일곱개의 봉인과 나팔을 불면서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닥치는 재앙”이 나타난다. 요한게시록의 일곱개의 봉인이 세계파멸과 최후의 심판을 계시한다면, 영원회귀의 일곱개의 봉인은 세계의 영원한 생성과 긍정을 계시한다.

 

1. [요한복음서]와 [요한묵시록]  

[복음서]와 [묵시록]을 쓴 저자가 동일한 요한인지를 묻는 토론에 로렌스는 ‘동일한 요한이 아니며, 동일한 요한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서]는 귀족걱이고 개인적이며, 부드럽고 사랑 가득하며, 퇴폐적이고 교양있는 것이다. 반면 [요한묵시록]은 집단적이며 대중적이고, 교양이 없으며, 증오 가득하고 야만적이다. 이미 복음주의자와 묵시록주의자는 동일인이 될 수 없다. 요한은 복음주의자의 가면도 그리스도의 가면도 쓴 일이 없다. 다만 우리의 선택으로 그는 그리스도 가면을 벗거나 그리스도 가면과 겹치는 또하나의 가면을 창안하고 만들어낸다. (*니체의 퍼스펙티비즘. “이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해석이다.”) 사도 요한은 우주적 공포와 죽음속에서 활동하는 반면, [복음서]는 인간적 영적 사랑을 부추긴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종교(믿음이 아니라 삶의 방법과 실천)를 만든 반면, [요한묵시록] 권력의 종교(믿음과 무서운 심판)를 갖다주었다. [요한묵시록]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무한한 빚인 셈이다. [요한묵시록]은 삶, 생존, 판단의 방법을 일깨워준다. [요한묵시록]은 자신을 살아남은 자로 여기는 사람들(좀비들)의 책이다. 로렌스의 현실성은 [요한묵시록]의 현실성을 거부한다.

 

2. 니체와 로렌스

①(니체. 그리스도와 바울의 대립) 니체에게 중요한 대립은 그리스도와 바울의 대립이다. 그리스도는 타락한 자들에 대해 연민과 자비를 베풀고, 사제들의 지배로부터-죄ㆍ벌ㆍ보상ㆍ심판ㆍ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복음전파자로서 바울은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를 지키는 우울한 성자 바울에 의해 배가된다. 그는 예수를 끊임없이 십자가로 안내했으며, 예수를 부활시켰으며, 모든 중심관점을 ‘영원한 삶’에 두었으며, 이전 사도들보다는 한층 더 가혹한 새로운 유형의 사제들(불멸에 대한 믿음, 심판의 교리)를 만들어냈다.

②(로렌스. 그리스도와 요한의 대립) 로렌스는 그리스도와 묵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을 대립시킨다. 로렌스는 니체의 화살을 다시 주어담아, 이전과는 다르게 매달고, 다른 곳을 향해, 다른 대중 속으로 다시 쏘아올린다. 로렌스는 바울이 아니라, 사도 요한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니체의 시도를 다시 시작한다.

 

3. 사도 요한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창조: 약한 자, 집단적 영혼, 집단적 자아

그리스도의 계획은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것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문제는 무엇보다 구약성서적 성직, 유대교적 성직, 그 권력체계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은폐물(*성직이라는 권력체계)로부터 개인적 영혼을 구해내고자 함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사도들과 제자들을 끊임없이 실망시켰다. 그는 주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기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말 그는 제자들과 섞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혼자였다.” [아포칼립스]. [요한묵시록]이 강조하는 것은 ‘가난한 자’나 ‘약한 자’의 요구와 주장이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은 빈천하거나 불행한 자들이 아니라, 위험한 사람들이며 집단적(*무리적) 영혼들이다. 로렌스의 신의 어린 양에 관한 것. “사도 요한은 거기에 희생양처럼 있는 어떤 양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양이 희생양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희생양) 인류를 무수히 제물로 바치는 걸 본다. 마침내 그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조차도 피는 그의 피가 아니다(*제물들의 피).” 정말이지 기독교는 적敵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수차레 걸쳐 기만했으며, 억지로 그리스도에게 집단적 영혼을 부여한 반면, 집단적 영혼에게 표면적인 개인적 모습(어린 양)을 부여했다. 사도 요한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가난한 자, 약한자)의 기초를 마련했다. 물어뜯는 어린 양, “제발 살려주세요! 어떡하란 말이예요!‘라고 외치는 어린 양, 그것은 당신의 행복과 우리의 공동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사자가죽으로 뒤덮여있으며, 커다란 이빨이 달린 이 어린 양들은 사제의 습관이나 구세군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많은 표현방법과 수많은 대중적 힘을 획득한 것이다.

 

4. [요한묵시록]은 새로운 권력이미지를 창안: 약한 자들의 복수(심판의 체게, 복수의 의지)

집단적 영혼이 원하는 바는 권력(*무리의 권력, 약자들의 권력. ex.파시즘)이다. 집단적 영혼은 권력의 파괴를 원하며, 권력과 권능을 증오한다. 사도 요한은 케사르나 로마제국을 증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집단적 영혼(*약자의 파토스)이 권력의 미세한 구멍 안으로 들어가 중심영역을 넓히고 전세계로 확대되길 원한다.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권력이미자(심판의 체계)를 [요한게시록]과 더불어 창한한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그림은(*최후의 심판을 그린) “난 심판하고 싶어요, 나는 심판해야만 합니다.”라고 울부짖듯 외치면서 밤마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괴에의 의지, 구석구석 들어가려는 의지, 영원히 최후의 말이고자 하는 의지는 3중의 의지(성부, 성자, 성령)인 것이다. 집단적 영혼의 나르시시즘적 기도은, 로렌스-니체의 말처럼 복수와 자기찬양이다. 복수와 영광의 리스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목들이 들어있는지.

 

5. 사도 요한은 새로운 유형의 사도를 창안: 집단적 영혼의 영웅(예수) 

집단적 영혼을 위해, 새로운 유형의 사도를 만들어내야 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집단적 영혼의 영웅으로 만들어 다시 집단적 영혼에게 되돌려주려 했다. 기독교는 예수가 항상 증오했던 것(집단적 자아와 집단적 영혼)을 그에게 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그리스도에 접목된 기괴한 자아로, 사도 요한은 모든 노력을 아까지 않았다. “사랑의 타이틀이 아닌 권력의 타이틀들.... 그리스도는 언제나 정복자이며, 전능하며, 번쩍거리는 칼을 쥐고 있는 파괴자이며, 피가 말들의 재갈에 이를 때까지 인간의 파괴자이다. 구원자 그리스도는 결코, 결코 아니다. 새롭고 무서운 권력을 갖다주러 [요한묵시록]의 사람의 아들은 이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권력, 끔찍한 권력 ... 사람들은 여전히 그 권력에 아연실색해 있다...” 예수는 그것(*약자들의 권력, 집단적 영혼)을 위해 부활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며,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마저 당할 것이다. 심판하지도 않았고 삼판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그리스도를 가지고 심판의 체계에서 본질적인 톱니바퀴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약한 자들의 복수(새로운 권력)는 심판이 영혼의 주기능이 될 때, 겨우 분명해진다. [요한묵시록]은 승리했다. 우리는 심판의 체계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6. 새로운 시간의 질서 ‘지연된 운명’과 복수정신

유대인들은 시간의 질서 속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지연된 운명이었다. ‘선택받은 민족’은 자기의 야망 속에서 좌초했으며, 기다리기 시작했고 결국 ‘지연된 운명의 민족’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에 들어있는 기다림은 광적인 프로그래밍의 대상이 된다. 작은 죽음ㆍ큰 죽음, 일곱봉인ㆍ일곱나팔ㆍ일곱성배, 제1의 부활ㆍ밀레니엄ㆍ제2의 부활최후의 심판, 이것들은 기다림을 충족시키고 가다림에 몰두하게 한다.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호수와 천당이 공존하는 일종의 스펙타클이다. 모든 것은 약한 자들이 길다란 복수를 은밀하게 계획한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것은 ‘복수정신’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박해받은 영혼들은 스펙터클이 시작되기 전에 순교자들이 충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까지 30분이라는 작은 기다림, 1000년 동안의 큰 기다림이 있다. 특히 종말은 프로그래밍 되어야 한다. 이 ‘약한 자들’ 이 원한의 인간들은 복수의 그날을 기다리며 어떤 지속성을 즐긴다.

 

7. 사도 요한의 [요한묵시록]과 로렌스의 [아포칼립스]

① 요한의 [요한묵시록] 기획: 로마제국의 쇠망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우주 전체를 다시 짜맞추고 소집하고 되살려내야 하며, 또한 요한이 로마제국을 이끌고 잔해 아래로 로마제묵을 파묻을 수 있또록 로마제국을 파괴해야 한다.

② 로렌스의 [아포칼립스] 기획: [아포칼립스]는 자신의 궁극적 권력과 천국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세계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 이교만이 [아포칼립스]에게 어떤 세계, 어떤 우주를 마련해준다. [아포칼립스]는 이교도 세계를 되살려 그 세계와 결합하며, 그 세계에 대해 환각적인 파괴를 행한다. 로렌스는 단순한 방법으로 우주를 정의한다. 우주는 생명을 이루는 위대한 상징의 처소이자, 살아있는 결합의 처소이며, 개인적 생멍 이상의 생명이다. 여전히 살아있는 이교도적 세계는 우리의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힘차게 살아갈 것이며, [아포칼립스]는 그 세계를 위무하고 그 세계를 향해 기도하며 다시금 활력을 준다. 우주는 이미 수많은 충격을 겪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포칼립스]와 더불어 우주는 죽는다. .... 파괴는 정당한 것이다. 파괴에의 의지가 정의와 생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아포칼립스]의 공헌이다. [아포칼립스]는 강제수용소(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하늘나라의 예루살렘)의 군사, 치안, 민생의 중요한 안전장치이다. [아포칼립스]의 현대성은 재앙의 예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찬양의 프로그래밍, 새로운 예루살렘의 영광스런 제도, 궁궁적 심판적 도덕적인 어떤 권력의 기묘한 제정에 있다.

③ 그리스도와 [아포칼립스]의 대립: 그리스도와 [아포칼립스]의 대립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종교(영혼의 개인적 부분을 지닌 귀족적 문화)를 만들어 냈다. [아포칼립스]는 권력의 종교(영혼의 집단적 부분을 지닌 무서운 대중적 문화)를 만든다. [아포칼립스]는 그리스도에게 잡단적 자아를 조달하고 집단적 영혼을 부여한다.

 

8. 개인적 영혼 뿐 아니라, 집단적 영혼을 어떻게 원할 것인가?

니체는 기독교에 맞서는 그의 방법으로 [안티그리스도]를 끝맺는다. 로렌스는 일종의 선언으로 [요한묵시록]에 대한 그의 설명을 끝맺는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사랑이 결코 극복할 수 없을 어떤 결정’과 사랑의 심판을 대립시키기. 가지는 것밖에는 줄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더이상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지점에 이르기. 더 이상 사랑하지도 주지도 갖지도 않기. 이처럼 자기 자신이 개인적 부분을 구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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