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명론과 경험주의

경험주의를 이전의 철학적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고 그것이 데카르트가 세운 근대철학적 문제설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검토하는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주의 철학을 ‘유명론’과 근대철학의 긴장 관계속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유명론은 중세 전체를 지배한 실재론에 대한 반대로서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반대는 주로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경험적 연구나 관찰과 무관하게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신학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고 꿰어맞추는 스콜라철학과는 반대로 개별 사실들을 강조하고 그것이 원리에서 벗어난다면 벗어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 인식하자는 견해가 생겨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유명론적 전통 속에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론이 어떤 관념이나 보편원리로써 전체를 다 설명하려는 경향에 대해 해체적이고 비판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실 유명론이 가능했던 것 자체가 신학적 원리에서 벗어나는 사실들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초기의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이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으로 바뀐 것 자체가 그런 요소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론이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은 경험이나 경험적 지식에 대한 지적인 개방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접하고 경험하는 구체적 사물, 구체적 지식에 대한 개방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대개 다 알고 있을 겁니다.

2. 로크: 유명론과 근대철학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2개의 지반

첫째,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인식.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둘째, 근대초의 과학혁명/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과학주의

데카르트의 과학주의와 로크의 과학주의의 다른점

데카르트는 알다시피 경험과 관찰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이성에 내재해 있는 본유관념과 그것에 의거한 연역적인(예컨대 수학적인)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고 생각했지요. 반면 로크의 생각은 경험이나 관찰에 의하지 않은 지식이나 개념, 예컨대 신학적인 우주론은 오히려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한마디로 말해 유명론과 근대적 문제설정의 결합을 통해 로크는 중세적 유명론과도, 데카르트적 근대철학과도 다른 독자적인 흐름을 철학안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이성/진리의 개념, 보편 개념에 대해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박을 통해 로크는 본유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진리에 도달할수 있음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지식이 바로 그것이지요.

로크의 딜레마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는 근대철학 안에서 로크처럼 진리로서의 과학을 추구하려 하는 한, 물질적 실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처럼 보입니다. 결국 데카르트 비판에서 시작한 로크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실체’ 같은 보편 개념은 오직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에서 시작해, ‘실체’가 없어선 안 된다며 두 개의 실체(물질과 정신)가 있다는 ‘반유명론적인’ 주장으로 되돌아온 겁니다.

그런데 유명론이 중세에는 신학과 충돌했다면, 이제는 근대철학의 과학주의와 충돌하게 됩니다.로크는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서 근대과학의 기초를 유명론을 통해 마련하려 했습니다.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로크 역시 (인식)주체에서 출발하여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서 있었고, 그러한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 과학이란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임을 보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로크는 물질과 정신이란 실체를 다시 끌어들여야 했고, 진리가 가능함을 보증하기 위해 ‘제1성질’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이러한 실체와 제1성질이 유명론의 사고방식과 정면에서 충돌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한 바입니다. 이는 결국 근대적 문제설정(특히 과학주의)와 유명론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보여줍니다.이는 유명론이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 포섭됩으로써 생기는 ‘근대화된 유명론’의 내적 긴장이요‘모순’이기도 합니다.

버클리: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나아간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항하는, 반관념적이고 유물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흔히 유명론을 중세의 유물론이라고도 하지요. 로크의 유명론 역시 이런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근대적 문제설정안에서 딜레마에 처했다고 해도 말입니다.

반면 버클리에 와서 유명론은 정반대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그는 로크가 남겨두었던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합니다. 사실상 이는 개체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버클리는 ‘물질’이란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정신과 그 정신이 지각한 것만을 세상에 남겨두었고, 그 결과 유명론은 관념론으로 전환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 유명론의 논리를 끝가지 밀고 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불가피한 행로였는지도 모릅니다.

3. 흄: 근대철학의 극한

흄의 출발점은 로크와 비슷합니다. 그 역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려 인간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심리학에 기초해서 ‘경험적 인간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에는 일곱가지 관계가 있는데, 이중 ‘유사관계’ ‘양적 관계’ ‘질적 관계(성질의 등급)’‘반대관계’는 확실하지만, ‘동일관계’ ‘시간/공간상의 관계’ ‘인과관계’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확실한 네가지 관계는 과학에 합당하지만, 인과관계를 비롯한 나머지 세가지는 과학을 구성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모든 법칙은 인과 관계에 의해 표시됩니다.인과성 없이는 어떠한 법칙도 생각할수 없으며,법칙 없이는 어떠한 과학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결국 그는 애초의 뜻과는 반대로 과학의 불가능성을, 진리의 불가능성을 입증하고 만 것입니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회의주의’란 이러한 도달 불가능성을 표현하는 말인 셈입니다.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흄은 ‘나’ ‘주체’ ‘자아’ ‘정신’으로 불리던 것에 대해 그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건 다만 인상이나 관념이 번갈아 스쳐가는 극장, 그것도 무대조차 따로 없는 극장 같은 거라는 거죠. 결국 ‘나’라는게 ‘정신’이라는게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흄은 ‘정신’이나 ‘주체’라는 범주를 해체하게 됩니다.데카르트는 물론이고, 로크나 버클리도 자명한 것으로 간주했던 근대철학의 출발점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흄의 주장은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 버클리식의 유명론을 ‘정신’이나 ‘주체’에 대해서까지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즉 근대적 문제설정속에서 유명론을 끝가지 밀고 나간 결과,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라는 범주를 해체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의 전복

흄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해, 유명론적 사고의 해체효과를 그 내부에서 최대한 작동 시킨 것이며, 그 결과 근대철학의 한계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한계선이란 출발점과 이어져 있는 것인데, 결국은 한바퀴의 원을 그리면서 출발점에 다시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출발점 자체를 근대철학의 내부로부터 해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탈출도, 귀환도 아닌.......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믿음’에 대한 흄의 이론입니다. 흄에게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즉 참된 지식이나 진리 대신에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흄의 견해는 그것을 다루는 극히 새로운 사고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흄은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게 아니라-이것은 근대적인 물음이지요-이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왜냐하면 흄이 보기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에 대한 흄의 논의는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에 대한 철저한 해체에 이르러 얻은 새로운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진리)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참으로 믿고 있는 그러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거죠. 나아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라는, 결코 근대적이지 않은 질문까지 했다는 것입니다.흄은 이제 근대적 한계의 외부로까지 나간 것입니다.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고 다시 근대 안으로 회귀합니다.앞서 그가 난감해 하는 모습도 보았지만,여기서도 그는 “믿음이고 추론이고 다 거부하고 싶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진리를 찾아야 하는데 결국 ‘진리는 없다’로 판단되었던 셈이고, 진리를 찾고 싶은데 진리가 아닌것만 있다는 이야기밖에 못했으니, 이런 논의 자체를 자기는 다 거부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근대의 외부로 나가자마자 다시 내부로 회귀하고 마는 것입니다.

4. 근대철학의 위기

유명론과 경험론의 관계에 대해서,그리고 로크.버클리.흄의 사상을 유명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결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경험적 지식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 경험주의는 그 반대물로, 즉 경험이라는 것은 도대체 믿을수 없고 진리를 형성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물로 전화되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철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회의주의’는 극한에 선 근대철학, 극한에 선 유명론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흄은 근대적인 문제설정 안에서 유명론적 관점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근대적 문제설정의 끝에 도달합니다.그런데 그곳은 바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흄은 거기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결코 자명하거나 확실한게 아니라 취약하고 불확실한 것을 절감하면서 이것을 폭발적으로 드러냅니다.그리고 거기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라는 개념,진리라는 개념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스피노자와 달리 흄이 근대철학의 위기를 야기했으며, 스피노자에 비해서 쉽사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제기한 문제와 대결하게 만들었던 것은, 흄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했고 여전히 그안에 머물며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곳에서 멈추어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근대적인 문제설정 자체를 비껴가고 애초부터 그 외부에 섰기 때문에 대다수의 근대철학자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고, 외면당했던 것입니다.

셋째. 흄에게 믿음은 단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어떠한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되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들을 포섭하고 움직이는가를 사고하기에는 흄의 이러한 탈근대적 요소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믿음을 형성하는 사회-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론 역시 아직은 사고하기 힘들었음은 물론입니다.

반면 믿음을 ‘주체’인 개인이 갖고 있는 관념이라고 본 점에서 그는 여전히 근대철학의 내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결국 흄이 근대철학의 외부로 나가면서 찾아냈던 탈근대적 요소는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개인들이 가진 관념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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