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을 읽자> 2월 16일 목요일 발제: 하얀
김시종, 김정례옮김, <광주시편>, 푸른역사, 2014.
생존자의 범위
한때 나는 죽은 자들을 죽인 자들, 3부에 나오는 <그리하여 지금>, <미친 우의寓意>의 ‘공수부대 병사들’이나 <돌고 돌아서>의 ‘호시야마’(정확하게 이것이 박정희인지, 전두화이지, 혹은 그 둘 다 인지 알지 못하겠다)같은 이들. 이들 ‘가해자’를 이해해보려는 논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도 국가권력의 희생자라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지금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시간 세미나 발제 중 수인의 ‘생존자의 증언’이라는 말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 역시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에 갇혀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은’ 사건 속에 휘말렸던 이들을 모두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있어도 상관없을 만큼/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바래지는 시간 속>중)고 말한 김시종의 5행에서 최근까지도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 늘 없던 나는 피해자가 아니며, 평안하게 지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나도 가해자를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그것의 시공간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머나먼 과거가, 그리고 현재들이 주는 슬픔에 늘 몸을 떨어야하면서도 나는 나를 가해자라 인식했다. 혹은 아픔을 같이 하는 자로 나를 정의하기엔 그것이 연민의 말이 될까봐 어떤 행동도, 언어도 사용할 수가 없이 침묵했다. 특히 광우병 촛불 집회 이후 이러한 나의 행동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러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말과 행동이 바로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이 갖는 한계라는 것을 지난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사태라는 현장 속에서 많이들 비껴나있다. 5・18의 광주라고 하면 모두들 피해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도 다들 내가 그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복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한 사태의 현장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비껴나있다. 그것이 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니, 죽은 자가 아니니 모두 가해자인가? 이 구도를 적극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사고가 바로 생존자의 증언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생존자란 무엇인가? 김시종 역시 광주로부터, 한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에 살고 있지만 광주에 대해 시를 쓴다. 그는 <광주시편>의 도입부에 “나는 잊지 않겠다. 세상이 잊는다 해도 나는, 나로부터는 결코 잊지 않게 하겠다”고 말한다. “세월 속에서 옹이지는 것”, “가버리고 만 해에 더욱 눈을 뜨”고 “오늘의 어제를 눈여겨보”(날들이여, 박정한 저 내장안內障眼의 어둠이여)자고 한다. 어제가 포개져 오늘이고, 오늘이 포개져 내일인데 우리에게 오늘과 내일 속 어제들의 옹이가 끊임없이 발에 걸린다. 발에 걸리는 옹이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자, 그것이 생존자이다. 그리고 그 옹이를 펼쳐낼 때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이 비로소 운용된다. 멈춘 우주 속에서 자위하며 살지 말 것, 아니, 그렇게 살더라도 시간의 옹이를 몸으로 기억하는 것, 그래서 다른 옹이를 마주할 때 옹이들의 시간을 다시 펼쳐내는 것, 그것이 시간의 옹이가 갖는 힘이자, 시간의 옹이를 감각하는 자인 시인이 하는 행위이며, 생존자는 다시금 시간의 불을 지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