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여기에서 덴까지 From Here to Den
- 태초에는 말씀이 있었다. 그 전에는 무가 있었다.(621) 말씀 이전에는 맹목적인 회전운동을 하는 충동들의 혼돈-정신병적 우주가 있었으며, 말씀(the Word)이 언명되어 이 충동들의 순환을 억압하고 영원한 과거 속으로 던져버릴 때, 태초가 발생한다. 제대로 된 태초the Beginning proper는 결의 Resolution, 결단의 행위an act of Decision를 고집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구별함으로써 이 결단의 행위는 충동들의 회전운동의 긴장을 해소한다. 참된 태초는 “폐쇄된” 회전운동으로부터 “열린” 진보로의 이행, 충동으로부터 욕망으로의 이행,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실재로부터 상징계로의 이행이다.(622)
- 우리는 회전운동에서 창조행위로 바로 이행할 수 없으므로 그 사이에 모종의 것(something)이 발생해야 한다. 즉 무정형의 원초적인 심연이 순수한 무됨pure Nothingness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원초적 심연의 무됨(비인격적 신성, 제대로 된 신이 아님)과 수축의 원초적인 제스처라는 무됨과 구별해야 하며, 신성의 심연으로서의 무됨으로부터 자기의 공백으로서의 무됨으로의 이행에는 필연성이 있다. 이는 잠재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의 이행의 필연성이다. 신적 공백은 오직 악의 점으로 위장한 상태로만 자기 자신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순수한 잠재성a pure potentiality이다. 이 악을 넘어서 이동하는 방법은 아들-말씀을 낳는 것이다.
- 헤겔이 『논리학』 서두에서 말한 “존재, 순수한 존재-어떤 규정도 없는“Being, pure being—-without any further determination””에서 존재의 반복은 일상적 언급들을 반복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최초의 헤겔식 반복은 최소치의 이상화를 도입하는 반복이다. 이 최소치의 반복에서 발생하는 것은, 우리가 “무보다 작은 것‘에서 무로 이행하는 것이다.
덴과 클리나멘 사이 Between Den and Clinamen
- 파르메니데스(BC 510-450)와 데모크리토스(BC 460-380)의 대립은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전추의 최고 실례를 보여준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로고스)는 동일한 것으로서 서로 연관된다. 나아가서 오로지 존재만이 존재하는 반면,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에게는 비존재도 존재 못지않게 존재한다. 비존재는 존재의 본래적인 균열original split로서 존재에 내속적inherent인 것이다.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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