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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임에서 저희는 <존재와 시간> 제40절을 읽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절을 전부 읽지는 못하고 184쪽부터 189쪽까지 여섯 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것만 읽는데 만도 무려 네 시간이 걸리더군요. 

다 끝내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저희는 뭐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요.


세미나를 마친 다음, 

이진경 선생님과 이미라 선생님을 같이 모시고 

연구실 근처에 있는 <樂樂>이라는 중국식당에 가서 맛있는 중국요리를 맛보며,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소박한 뒤풀이 시간도 가졌습니다. 

좀 있으니까 최진석 선생님도 합류하셨지요. 

그리고 뒤풀이 시간에 빠져서는 안 될 음료수를 역시나 우리의 호프 김현석 선생님께서 준비해오셨습니다.

天下第一의 名酒, 水 井 坊 !!!



제40절. 현존재의 탁월한 개시성으로서의 불안 : 근본 심정성


본 절의 제목에서 불안은 탁월한 개시성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개시성은 내-존재인 심정성과 이해에 근거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불안은 탁월한 심정성이라는 말인데, 과연 어떤 점에서 불안은 그런 심정성으로 기능할까요?


우리의 논의는 바로 앞 장의 뒷부분에서 수행하였던 ‘빠져있음’의 분석에서 출발합니다. 

빠져있음, 곧 (세상)사람들 안에 몰두하고 ‘세계’ 곁에 몰두함이란

‘현존재의 자기 자신 앞에서의 도피Flucht’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때 현존재가 도피하는 자기 자신이란, ‘본래적인 자기-존재-가능’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피의 현상은 불안을 탐구하기 위한 현상적 지반으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입니다. 

개시성은 심정성에 근거하고 있고, 

불안은 탁월한 심정성으로서 현존재를 그 전체적 구조에 있어서 개시해주는 것임에도, 

이 같은 도피에서는 오히려 현존재가 자신을 곧바로 자기 자신 앞으로 데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앞으로 데려오기는커녕 이런 도피의 이탈Abkehr은, 

빠져있음의 가장 고유한 특성에 맞게, 본래적 현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의 인상은 존재적-실존적 성격지음과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혼동하는 데서 빚어지는 오해일 뿐입니다. 

존재적-실존적 차원과 존재론적-실존론적 차원을 잘 구별하면 우리는 오해를 피할 수 있습니다.


실존적-존재적 관점에서 보자면, 

빠져있음의 현상에서는 본래적 자기 존재가 폐쇄되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존론적-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폐쇄성이란 실은 개시성의 결여태일 뿐입니다. 

즉, 빠져있음 속에서는 개시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단지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또 하나의 양태가 눈에 띄는 것일 뿐이지요. 

빠져있음 속에서 본래적 자기 존재가 존재적으로 폐쇄되고 감추어져 있으려면, 

그 속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 앞에서 존재적으로 도피해 있으려면, 

존재론적으로 우선 먼저 현존재는 본래적 자기 자신 앞에서 개시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실존적-존재적으로는 폐쇄성이 개시성에 우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는 반대로 개시성이 폐쇄성에 우선하며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입니다.


현존재가 도피하는 그 대상, 곧 본래적 자기 자신은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언제나 이미 개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현존재의 ‘뒤에’ 항상 따라 붙어 다닙니다. 

우리는 이 본래적 자기 존재를 현존재로부터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존재는 언제나 이미 잠복 중입니다.


물론 빠져있음 안에서 본래성으로부터 이탈하게Abkehr 되면 도피의 대상은 포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탈하지 않고 비본래성의 쪽으로 향한다Hinkehr고 해서 그 대상이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탈에서도 향함에서도 도피의 대상은 현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래적 자기 존재는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이 일어나는 순간 이미 “거기에”da 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실존적-존재적 빠져있음의 이탈은 이러한 개시성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도피의 대상 자체를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파악할 가능성을 현상적으로 제공해줍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분석이 빠져있음의 현상에서 출발한다고 하여 

우리는 이 현상 속에서 개시되는 현존재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그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해석은 바로 이 현상에 있어서 현존재에 대한 임의적이고 작위적인 자기 파악에 

내맡겨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해석이란 현존재 자신이 존재적으로 개시해준 바를 

단지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현상학적 존재론이란 우리의 현상학적 시선 앞에 드러난 바, 곧 현상 자체를 보여지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지, 

우리의 임의적 상상에 따라 기존에 없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학문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해석은 심정적 이해의 범위 안에서 현존재와 함께 가고Mitgehen 그를 따라가는Nachgehen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더욱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행 속에서 방법적 측면에서 ‘개시하는 심정성’으로 기능하는 현상이 근원적이면 근원적일수록, 

우리가 현존재의 존재로 육박해 들어갈 가능성은 그만큼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불안이라는 심정성이 그런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불안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한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의 제30절에서 그것과 유사한 현상인 두려움Furcht에 대하여 이미 분석해본 바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불안과 두려움이 어떤 존재론적 관계에 있는지는 아직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현상이 현상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려움이 불안으로 불리기도 하고 불안이 두려움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니 말이죠.


우리는 현존재의 빠져있음을 현존재의 자기 자신 앞에서의 “도피”—비유적 의미에서—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런데 ‘~ 앞에서 물러남’이나 ‘~로부터 이탈’이라고 해서 전부 다 반드시 도피—본래적 의미에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러남이 도피—본래적 의미에서—의 성격을 가지려면, 그것은 두려움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두려움이 개시하는 것, 즉 위협하는 것 앞에서의 물러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의 제30절에서 두려움을 심정성으로 해석하면서 다음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두려움의 대상Wovor은 언제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라는 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정한 방역Gegend—‘방역’은 공간적 관점에서 본 세계의 구조이죠—에서 나와서 

현존재 가까이 다가오는 위협적인 존재자, 더욱이 현존재와 직접 마주칠 수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세계 내부적 존재자라는 점 말이지요. 

즉 본래의 도피 속에서 현존재는 위협적인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부터 몸을 피하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빠져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아니라 본래적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합니다. 

이러한 이탈 내지 물러남의 대상Wovor은, 일반적으로 ‘위협한다’는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물러나는’ 존재자라는 존재 양식을 가진 존재자이며, 따라서 현존재 자신에 해당합니다.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존재요, 물러나고 있는 것도 현존재인 셈이죠. 

그런데 물러남이 직면하는 그것은 현존재 자신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두려운 것”으로서는, 즉 하나의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는 파악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란 언제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그 대상으로 하니까요.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위협이란 언제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져있음의 이탈을 세계 내부적 존재자 앞에서의 두려움에 근거하는 도피와 구별해야만 합니다. 

두려움에 근거하는 도피라는 성격은 이탈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탈은 본래적 자기 존재로부터 이탈하여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함’으로서 규정되며,

그리하여 그것은 바로 그런 존재자의 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죠.

빠져있음의 이탈Abkehr은 사실은 향함Hinkehr인 셈입니다. 

본래적 자기 자신 앞에서의 이탈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의 향함입니다.

오히려 빠져있음의 이탈은 도피가 아니라 불안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런 불안이 존재론적으로 두려움을 비로소 가능하게 합니다.


현존재는 세계와 (세상)사람들에 빠져있는 가운데 자기 자신 앞에서 도피한다,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에 해당하는 세계-내-존재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의 대상Wovor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의 대상은 결코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사용사태도 가질 수 없지요. 

우리는 불안의 대상을 가지고mit 어떤 목적을 위하여bei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불안의 위협은, 마치 어떤 돌멩이가 갑자기 우리를 위협하며 날아오듯이, 

그러한 특정한 유해성의 성격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불안의 대상은 일체의 규정성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무규정적입니다. 

여기서 무규정성이란, 

어떤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현존재를 위협하는지를 현사실적으로 결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세계 내부에 있는 어떠한 용재자도 어떠한 전재자도 불안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존재자들이 함께 모여 이루는 사용사태 전체도 불안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존재가 불안을 느낄 때,

그 사용사태 전체는—곧, 사용성의 관점에서 본 세계의 구조—는 스스로 붕괴되고 마는 것이죠. 

그리하여 세계는 완전한 무의미성Unbedeutsamkeit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세계가 사용사태들로 충만해 있을 때 그 구조는 유의미성Bedeutsamkeit으로서 드러났지만, 

세계 속에서 어떠한 사용사태도 중요하지 않게 될 때 그 구조는 무의미성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불안에 사로잡힌 우리는 사용사태를 가질 수 있는 어떠한 특정의 위협적인 것도 만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nothing.


불안의 대상이 특정한 이것, 특정한 저것으로 규정될 수 없다면, 

불안은 위협하는 것이 접근해오는 특정한 장소, 즉 특정한 “여기” 내지 “저기”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불안 속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그 속에서 위협하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nowhere. 

존재자의 무규정성과 더불어 장소의 무규정성이 불안의 대상을 성격 짓고 있는 것이죠. 

그 대상은 어떤 것이라고, 어느 곳에 있다고 딱 규정될 수 없기에, 

그것은 또한 인식 가능한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도 없다’고 해서 완전한 무(無)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무규정성을 무존재성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곳에도 없다’는 말은 ‘여기에 있다’ 혹은 ‘저기에 있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지, 

‘아무 곳에도 없으니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안이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여 ‘아무 곳에도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곳에는, 

오히려 방역Gegend 일반이, 즉 세계의 개시성 일반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서 방역을 방역 자체로서, 세계를 세계 자체로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안 속에서 위협하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지만, 이미 “거기에”da 있습니다

불안 속에서 위협하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지만, 이미 우리의 숨을 조이며 바싹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nothing and nowhere. 

물론 그것은 순수한 무(無)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음’의 현상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불안의 대상은 세계 그 자체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특정하게 존재자를 규정할 수 없고 

‘이곳이다, 저곳이다’, 라고 특정하게 장소를 규정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순수하고 완전한 무존재도 아니라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전체로서의 존재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안이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이 ‘전체로서의 존재’, 즉 ‘세계 그 자체’입니다. 

불안 속에서는 특정한 이것, 저것도 특정한 이곳, 저곳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특정한 것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져 버리기 때문에, 

세계가 완전한 세계 부재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무의미성을 근거로 하여 세계가 그 세계성에서 솟구쳐 오르게 됩니다. 

세계가 세계 자체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세계의 구조인 사용사태 전체성, 유의미성, 방역이 모두 무의미해져버리는 때, 

곧 현존재가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뿐입니다.


불안 속에서 우리를 바싹 압박해 오는 것은, 모든 용재자의 가능성, 곧 세계 자체입니다. 

하이데거에게서 가능성은 현실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적인 범주입니다.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는 것도, 무엇보다 그가 가능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불안의 대상이 세계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은 세계의 현실성이라기보다는 세계의 가능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불안이 누그러지고 가시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건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어.” “es war eigentlich nichts.” 

하이데거는 여기서 아주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이러한 일상적 어법이 전혀 우연이 아님을 포착합니다. 

어째서 우리는 불안의 대상을 다른 수많은 낱말을 놔두고 하필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nichts’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일상적 어법은 중요한 핵심을 존재적 차원에서 적중시키고 있습니다. 

곧 불안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말은 존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상의 언어는 용재자에 대한 배려와 논의에 몰입하고 있지만,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은 그러한 세계 내부적 용재자의 성격을 갖지 않습니다(nichts von ...). 

이러한 용재자의 성격을 갖지 않음, 용재자의 없음(Nichts von ...)은 

그러나 완전하고 전적인 무(無)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용재성의 없음은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 즉 세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존재론적으로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여 있습니다. 

세계 없는 현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현존재 없는 세계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세계를 세계 자체로서 개시하는 존재자는, 세계 자체로서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자는, 

오직 현존재뿐이니까요. 

이처럼 세계가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여 있다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님Nichts이, 즉 (역설적으로) 세계 그 자체가 불안의 대상으로 드러난다면, 

이는 다음의 사실을 의미합니다.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이처럼 불안해함은 근원적으로, 직접적으로 세계를 세계로서 개시해줍니다. 

불안은 심정성의 근본 양상으로서 세계를 세계로서 비로소 처음으로 개시해줍니다. 

물론 세계의 개시가 세계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념적 파악은 개시 작용을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불안은 ‘~ 앞에서의vor 불안’, 곧 대상을 갖는 불안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 또한 하나의 심정성이기에 ‘~ 때문에um 불안’, 곧 이유를 갖는 불안이기도 합니다. 

앞의 제30절에서 불안과 유사한 현상인 두려움이 ‘~ 앞에서의 두려움’과 ‘~ 때문에 두려움’으로 분석된 바 있었죠. 

모든 심정성은 그 대상(과거), 그 이유(미래), 그리고 그 행위 자체(현재)라는 

세 가지 구조 계기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이 특정한 이것 내지 저것, 특정한 이곳 내지 저곳이 아니듯이, 

불안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 양식과 가능성이 될 수 없습니다. 

불안의 위협은 그 자체로 무규정적입니다. 

그렇기에 그 위협은 현존재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이 존재 가능’ 내지 ‘저 존재 가능’을 겨냥하여 

현존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이 불안해하는 이유Worum는 세계-내-존재 자체입니다.


불안 속에선 환경세계적 용재자가, 모든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침몰하고 맙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현존재에게 “세계”는 이처럼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타인의 공동현존재도 그런 현존재에게 아무런 역할을 해주지 못합니다. 

불안에 빠진 현존재에게는 세계도 타인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불안은 현존재가 빠져있음에 의거하여 자신을 이해할 가능성을 그에게서 박탈하여 버립니다. 

즉, 빠져있는 가운데 “세계”와 (세상)사람들의 ‘공공적 해석되어-있음’[곧 상식]에 의거하여 

자신을 이해할 가능성을 빼앗아버립니다. 

오히려 불안은 현존재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향하여, 

즉 그의 ‘본래적인 세계-내-존재-가능’을 향하여 현존재를 다시 되던집니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본래적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향해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안은 현존재를 그의 세계로부터, 그의 (세상)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킵니다. 

그리하여 불안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세계-내-존재를 향하여 단독화 시킵니다. 

물론 이 세계-내-존재는 이해하는 세계-내-존재이기에 

본질상 현존재의 여러 가능성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기투하고 있지요.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만 홀로 서 있는 단독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불안은 불안이 불안해하는 이유Worum—곧, 본래적 현존재—로써, 

현존재를 가능 존재Möglichsein로서, 더욱이 단독화 속에서 단독화된 자로서, 

즉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존재 가능한 자로서 개시하여 줍니다. 

불안은 현존재를 ‘단독적인 존재 가능한’ 자로서 개시하여 줍니다.


불안은 현존재에게 그의 존재가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Seinkönnen에 대한 존재’라는 점을, 

즉,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포착하는 자유를 위한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현존재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더욱이 본래적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하는 때만, 그는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안은 현존재를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 앞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그것인 그런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본래성’을 위한 ‘자유로운 존재’ 앞으로 말이지요. 

하이데거는 ‘가능성’, ‘본래성’, ‘자유’라는 세 가지 개념을 항상 연관 지어 사유하는 듯합니다. 

적어도 <존재와 시간>에서의 전기 하이데거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는 그 자체로 현존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의 자유 존재 또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현존재는 그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일 뿐, 

태어나기도 전부터 선험적/본래적으로 ‘나는 가능한 존재가 되어야지, 나는 필연적 존재가 되어야지,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지, 나는 구속된 존재가 되어야지’라고 

선택하거나 결정하여 태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에 맡겨져/위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에 맡겨져 있는 존재자이기에,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이기에, 피투성의 존재자이기에, 

또한 자신의 자유 존재에 맡겨져/위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존재가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마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하면, 

그는 그야말로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주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이데거와 헤겔의 입장이 가장 확연하게 갈리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불안이 불안해하는 이유worum와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wovor은 

동일한 하나의 세계-내-존재로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은 심정성의 세 번째 구조 계기인 행위 자체, 

곧 불안해함Sichängsten 자체에까지 관계하고 있습니다. 

불안해함도 그 자체로 심정성으로서 세계-내-존재의 근본 양식 중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이죠. 

결국 불안의 현상에서는 그 대상과 그 이유와 그 행위 자체가 ‘세계-내-존재’로서 동일합니다. 

이는 두려움의 현상에서는 그 대상과 그 이유와 그 행위 자체가 상이한 것과 대조적이죠.


하이데거는 이상의 논의를 다음의 한 문장으로 (장황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개시하는 것과 개시되는 것이 실존론적으로 동일하다는 점

[곧 개시하는 것도 세계-내-존재이고 개시되는 것도 세계-내-존재라는 점], 

더욱이 이러한 개시된 것 속에서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되어 있고, 

내-존재가 단독화된, 순수한, 피투적 존재 가능으로서 개시되어 있다는 점은, 

불안의 현상이라는 탁월한 심정성이 우리의 존재론적 해석의 주제로서 자격이 충분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불안은 현존재를 ‘solus ipse’로서, 즉 ‘단독적 자기’로서 단독화하며 그렇게 개시합니다. 

물론 이러한 실존론적 ‘유아론Solipismus’은 근대 철학의 유아론과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유아론은 주체라는 전재적 사물이 완전히 고립되어 

자신 앞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세계의 공허함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존재를 아주 극단적 의미에서 곧장 세계로서의 자신의 세계 앞에 직면시키며, 

이와 더불어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자기 자신 앞에 직면시키는 그런 유아론을 말하지요. 

자신의 세계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서의 현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유아론입니다.


우리는 현존재에 대하여 일상에서 행해지는 해석과 말 속에서 

불안이 탁월한 근본 심정성으로서 현존재를 단독자로서 개시해준다는 사실을 

가장 선입견 없게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존재와 시간> 제29절에서 심정성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있는가wie einem ist’를 밝혀준다고 하였습니다. 

심정성이 속하여 있는 내-존재란 또한 ‘어떻게-있음’을 의미하며, 

‘어떻게-있음’이란 또한 ‘어떤 기분 속에 있음’을 뜻하니까요. 

우리가 어떤 기분에 있는지를 심정성은 현존재에게 개시하여 주는 것이죠. 

그렇다면 불안이라는 심정성은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개시하여 줄까요? 

불안 속에서 우리는 “뭔가 섬뜩하고 낯설다unheimlich”.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특유의 무규정성을 경험합니다.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음das Nichts und Nirgends’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때 불안의 ‘섬뜩한 낯설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음’ 외에도 

동시에 마음이 ‘집처럼-편안하지-않음Nicht-zuhause-sein’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섬뜩한 낯설음’이라고 번역하는 Unheimlichkeit라는 독일어 낱말은 

원래는 ‘집, 가정’을 뜻하는 ‘Heim’에서 나온 낱말입니다. 

집에 있을 때처럼 편안하고 안정되고 친숙한 기분, 이것이 heimlich이죠. 

반대로 집이 아닌 낯선 곳에 처해 있을 때 느끼는 뭔가 불편하고 섬뜩하고 으스스한 기분, 이것이 unheimlich이죠. 

불안 속에서 갖게 되는 기분은 바로 이러한 Unheimlichkeit입니다.


우리는 <존재와 시간> 제12절에서 처음으로 ‘내-존재’를 현존재의 구성틀로서 현상적 관점에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내-존재를 실존범주로 규정하면서, ‘내부성’이라는 범주와 구별하였지요. 

현존재가 세계에 내-존재하는 것은 책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내부적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전혀 상이한 사태로 밝혀졌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내-존재의 실존론적 의미를, 

‘~에 거주하다’, ‘~와 친숙하다’, ‘~에 몰입해서, 즉 친숙한 세계에 몰입해서 머무르고 있다’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제5장 B절에서 내-존재의 이런 성격을 (세상)사람들의 일상적 공공성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고요.


(세상)사람들은 안정된 확실성과 자명한 ‘집처럼-편안함Zuhause-sein’을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적 삶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불안 속에서는 (세상)사람들이 전해주는 그러한 ‘집처럼-편안함’은 전혀 존립할 수 없습니다. 

불안은 현존재를 세계 속에 빠져있는 몰입으로부터 본래적 자기 존재로 되돌려 줍니다. 

일상적 친숙함, 즉 ‘집’은 여기서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지요. 

이제 내-존재는 ‘~에 거주함, ~와 친숙함’의 양상에서 빠져나와 ‘편치않음Unzuhause’의 양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집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아이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기분은 그야말로 ‘섬뜩한 낯설음’의 기분이겠지요.


이제 도피로서의 빠져있음이 무엇 앞에서 도피하는 것인지 현상적으로 분명해졌습니다. 

빠져있음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 앞에서vor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향하여zu 도피하는 것입니다. 

일상적 배려는 이렇게 도피하면서, (세상)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편안한 친숙함 속에 머무를 수 있지요. 

결국, 세계에 빠져있는 가운데 (세상)사람들의 공공성의 집처럼-편안함Zuhause 속으로 도피함이란, 

편치-않음Unzuhause 앞에서, 즉 섬뜩한 낯설음 앞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뜩한 낯설음은 현존재 속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투적인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속에,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위임된 그런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속에 이미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섬뜩한 낯설음은 끊임없이 현존재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사람들 속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상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섬뜩한 낯설음의 위협은, 현사실적으로 보면, 평균적 일상성의 안정이나 만족과 얼마든지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는 도중에도 언제든지 그런 섬뜩하고 불안한 기분을 가져볼 수 있지요. 

그것은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찾아오는 기분이 아니니까요. 

또한 불안은 아무런 위험이나 해가 없는 상황에서도 솟아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어둠마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완전한 절대적인 무(無)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세계는 여전히 또한 더욱 집요하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죠.


물론 일상생활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편치-않음의 기분을 ‘차광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차광이 현존재가 섬뜩한 낯설음을 이해하는 일상적인 방식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일상적인 도피가 현상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다음의 사실입니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적 구성틀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성틀은 실존론적 성격을 지니기에 결코 전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로 언제나 현존재의 현사실적 양상인 심정성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언제나 심정성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구성틀에 불안이 근본 심정성으로서 속해 있다.’ 

따라서 현존재의 Heimlichkeit는 그의 Unheimlichkeit의 한 양상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곧, ‘편치-않음Un-zuhause’은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보면 

‘집처럼-편안함Zuhause’보다 더욱 근원적 현상으로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불안(不安)이 안정(安定)보다 더 근본적인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불안이 언제나 이미 잠재적으로, 즉 더 근원적으로 세계-내-존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내-존재는 두려움의 기분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안은 두려움의 존재론적 가능 근거입니다. 

두려움은 불안의 한 양상, 곧 세계에 빠져있는 불안, 비본래적 불안, 두려움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그런 불안입니다. 

두려움이 불안으로서 규정되는 것이지, 반대로 불안이 두려움으로서 규정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인 25일에는 <수유너머N>의 새로운 연구공간을 축하하는 개소식(開所式)이 열리는 날이죠. 

그래서 저희 <하이데거강독> 팀도 한 주 쉬기로 하고, 개소식에 다 같이 참여할 예정입니다. 

뜻 깊은 시간이 될 듯 하여 벌써부터 설레네요. 

아직 새로운 공간에 가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꾸며놓았을지 많이 기대되기도 하고요. 

저희 팀도 언젠가는 새로운 공간에서 공부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실제로 공부하는 세미나는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저녁 7시에 합니다.

새 달의 첫 세미나 시간이므로 회비 챙겨 오시고요.


세미나 문의는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 net로 해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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