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시즌2> 2회차 후기

 

미카엘 드 생 쉐롱,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 1992-1994』,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8, 70-174쪽.(Michaël De Saint-Cheron. Entretiens avec Emmanuel Levinas 1992-1994, Paris: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2006)

 

이 글은 기억을 붙들어놓기 위한 후기입니다.

 

<레비나스 시즌2> 두 번째 모임은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사이의 “기만적인 접선”(73)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로 시작했습니다. 오해의 싹은 레비나스가 『생각나는 신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힌 카프카에 대한 해설이었는데요. 이 해설에 앞서, 우리는 사르트르가 카프카에 대하여 “그가 불가능한 초월에 의해 끊임없이 동요되는 인생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이 초월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이 초월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정체성 자체는 (중략) 존재의 모험이 일어난 발생 자체의 순진무구함에 대해서 죄의식 없는 규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문제시된다.”

 

미카엘 드 생 쉐롱은 위의 레비나스 말을 인용하면서, 불가능한 초월과 죄의식 없는 규탄 간에 유사성을 지적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죄의식 없는 규탄’은 “6백만 명의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남았다는 정당화되지 않는 특권”에서 비롯되어, “존재한다는 게 올바른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문제시된다”라고 말했을 때, 사르트르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고무적으로 보는지, 헷갈렸습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카프카의 『법의 문』 말미에 적힌 “이곳에서 자네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네. 왜냐하면 이 문은 자네, 자네 하나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이제 난 떠나야 하니 문을 닫겠네.”라는 부분에 대해 평하기를, “이것이 바로 대자의 경우이다”라고 밝힙니다. 레비나스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자’를 긍정적으로 이해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자라 함은,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자기 의식인데, 여기에는 타자의 역할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기만적인 접선”(73)에 대해 지적한 앞 부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자의 문제는 “코기토로부터 제기되지 않으며, 그 반대로 코기토로 하여금 자아가 대상으로 포착되는 추상적 순간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타자의 존재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코기토는 타자의 문제와 관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자는 코기토를 위험으로 내몹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의 경우 타자와의 만남은 나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해석하지요. 반대로 그는  타자와의 만남이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카프카를 해석한 사르트르에 대해, 레비나스가 제기한 또 다른 해석으로 돌아왔습니다(78). 저자의 문장을 끊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존재론은 스스로 자책”한다. 이 문장은 분명, 사르트르적 해석일 것입니다. “오직 얼굴의 현현만이 타자를-위함으로 표출되지 않을 대자의 그 폐쇄를 부수러 온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레비나스적 해석일 것입니다. 레비나스에게 사르트르의 대자는 “타자를-위함으로 표출되지 않”은 채 “폐쇄”되어 있습니다. 이를 앞서 본 대로, 타자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코기토’의 자유일까요.

 

얼마나 슬픈 자유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놓은 ‘문’ 앞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폐쇄’된 자유입니다. 자기가 만든 틀에 갇혀, 현실화할 수 없는 온갖 이상 때문에 불안에 떨고 동요하며 평생을 썩어갑니다.

 

이러한 폐쇄된 삶은 결코 자기를 위함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기-위함은 어떻게 실현될까요. “그것은 타자를 위한 불안이 자신을 위한 두려움보다 앞서는 자기-위함”(78)으로 실현됩니다. 오히려 타자가 나에게 자유를 줍니다. 타자에게 대상으로 노출되는 순간, 일차원적인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타자를 위한 불안”이 “자신을 위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불가능한 초월’과 레비나스의 ‘죄의식 없는 규탄’은 유사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요. “문제시”라는 표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로 합니다. 원문을 찾아 읽을 기력도 없습니다. 짧게나마 제 삶에 대입하고 이 부분을 넘어가도록 하지요.

 

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항상 불안하고, 온갖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언젠가는 내 앞에 닫힌 문이 열릴 것이라 믿고 구원을 기다립니다.

 

어릴 적에 <영구와 땡분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영구는 강아지 땡분이를 데리고 이것저것 노동을 시도하지만 전부 실패합니다. 하지만 영구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구가 고물상에서 폐기물 처리 일을 마치고 컵라면을 맛있게 먹던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했습니다. 저는 영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바보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싶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찾아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 앞에 놓인 닫힌 문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계속 실패하는 캐릭터로 스스로를 만들어갔습니다. 20대에는 사랑의 실패자였습니다. 타자와의 사랑이 아니라, 고백하고 차이는 나 자신을 사랑한 탓에 기형적인 사랑의 자유를 누린 것입니다. 30대에는 노동의 실패자였습니다. 남들이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려 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교수가 되려 하는 그런 성장 과정을 거치는데 반해, 그러한 성장이 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비정규직 직원들과 어울렸고, 대학원에서는 겉돌았습니다.

 

얼마 전 지인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대성씨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위할 때는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것이 위협이든 불편이든 초래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두려움”의 “폐쇄”를 깨부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타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얽매인 자를 해방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날, 타자는 신보다 더 신에 가깝다는 해석을 공유했습니다. 이 해석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화가 오갔습니다. 유대교의 용서는 증여와 상관없습니다. 죄 지은 자는 노력 없이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신에게 죄지은 자라면, 회개, 고행, 시련을 통해 속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은 겸손합니다. 신 자신에게 죄지은 자라면 용서할 수 있지만, 이웃에게 죄지은 자에 대한 죄를 이웃 대신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해자는 이웃에게 직접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이 죽었다면, 어떻게 그 이웃에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에게 용서 받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용서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직접적인 관계에만 해당되겠습니까? 레비나스가 ‘죄 없는 죄의식’이라고 말한 대로, 6백만 명이 죽었는데 자기만 살아남았을 때, 과연 존재한다는 것 자체의 죄의식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죽은 자가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죄의식은 해소할 수 없습니다.

 

신에 대한 죄가 문제일 경우, 용서받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웃에 대해 저지른 죄가 문제일 경우, 절대적으로 이웃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은 나에게 전형적인 타자입니다. 인간과 다르지요. 그런데 이웃은 타자인 신에 비해 덜 타자인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 신보다 더 타자입니다(153). 전적으로 내 모든 죄는 이웃이 “자신의 자존심을 망각하면서 사죄”해야만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희생자라는 자신의 조건을 없애는 것”(159)입니다. 타자는 ‘자기-위함’을 부수며, 용서를 비는 타자에게 침입당하고, ‘희생자’라는 자신의 ‘폐쇄’된 조건을 없애는 자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쪽이든 자기 충족적 상태를 유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타자뿐입니다. 서로에게 진정으로 타자일 수 있는 자들만이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신적일 수 있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성스러운 공동체일까요. 그래서 신은 하나이면서, 여러 개일까요.

 

존재한다는 것은 죄의식을 느끼게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이웃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직결되지 않지 않나요. 다만, 용서를 비는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지요. 그리고, 살생을 극도로 경계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와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기 위해 주의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용서는 생을 길러내는 기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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