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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세미나) 『도덕의 계보』 첫 번째 에세이 <선과 악> <우와 열> 요약정리

20190825 muse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특히 도덕 그 자체의 존재 의미를 따져 묻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기존의 도덕철학이 ‘도덕적 현상’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고 ‘도덕의 정당화’를 목표로 삼는 반면에, 니체는 ‘선과 악의 도덕’이 어떤 역사적·심리적 조건 속에서(어떤 권력관계 속에서) 탄생했는지를 드러내고, 이 과정 속에서 ‘도덕이라는 가치’가 진정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다. 마침내 니체는 기존의 선과 악의 도덕은 우리의 삶에 유익하기 보다는 해로운 것임을 논증한 후, 새로운 유형의 ‘가치판단 방식’을 창안할 것을 주문한다. 니체는 도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코드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도덕비판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었다. 바로 ‘도덕의 계보’(1887년)는 그러한 니체의 도덕비판의 완결판인 셈이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54) 니체의 『도덕의 계보』 이상엽 울산대 교수

 

**주인도덕, 노예도덕: "첫 번째 유형의 주인도덕에서 '선'과 악'의 대립은 대체로 '고귀함'과 '비천함'의 대립을 의미한다.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전전긍긍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같은 아첨꾼, 그리고 특히 거짓말쟁이 등을 경멸한다. 평민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모든 귀족들의 기본 생각이다.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은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 진실한 사람들'이라는 식의 말투를 사용했다. …두 번째 유형의 도덕인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다르다. 학대받고 억압받고 부자유하고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며 피곤한 자가 도덕을 유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강자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반면에 고통 받는 자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각광받고 찬양 받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존중되는 것은 연민, 자비롭고 친절한 손길, 온정, 인내심, 근면성, 겸손함, 친밀함 등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괴로운 삶을 견뎌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예도덕은 본질적으로 유용성에 입각한 도덕이다. 저 유명한 '선'과 '악'의 대립 개념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예의 느낌 속에서 권력, 위협적인 것,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세련된 것,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등은 모두 '악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노예도덕에 따르면 '악한' 인간이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이다. 그러나 주인도덕에서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그러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바로 '선한' 인간이며 반면에 경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된다.

-『선악의 저편』 260에서

 

*도덕의 배후: 니체는 도덕이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목적과 대립되는 다른 실제적인 목적이 도덕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도덕의 발생사를 해명하려고 한 영국의 심리학자들에 언급하면서 시도한 점은 감사하지만, 그들의 시도가 오히려 자신이 수수께끼로 느껴질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도덕이라는 전례의 환상을 깨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는 것이 니체의 의도인 듯 보인다. (그러한 진리(비록 기대하는 진리가 아니어도 분명히 있는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소망을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 좋음이란 단어의 가치판단: 니체는 도덕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역사적 정신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좋음이란 개념과 판단의 유래를 탐구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을 한다. 원래 비이기적 행위란 그 행위가 표시되어 즉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입장에서 칭송되고 좋다고 불렸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칭송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고 비이기적인 행위가 습관적으로 항상 좋다고 칭송되었기에 그 행위를 그대로 좋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마치 그 행위 그 자체가 좋은 것인 것처럼...

스펜서는 ‘좋음’은 ‘공리적’ ‘합목적성’이며 공리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오직 공동체를 보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좋음’이란 원래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좋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니체는 ‘좋음’이라는 말이 ‘귀족적인 것’을 뜻하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어느 언어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 <귀족적 영혼의>, <고귀한>, <고결한 영혼의><특권 지닌 영혼의>등 ‘좋음’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이 인간의 양심을 압박하게 된 것은 귀족의 몰락을 계기로 해서 이다.

귀족들이 하층민을 대할 때 원한의 감정이 없다. 오히려 고귀한 자들은 하층민의 무능력을 동정했고 평민을 나타내는 단어는 ‘불행한’, ‘불쌍한’이라는 뜻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은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되었다. 그 유래가 어떻든지 간에 모든 것은 눈에 띄게 유대화되고 그리스도교화되고, 천민화되어 가면서 가치의 전도가 생겨났다. arya, 에스틀로스, 아가토스, 보누스, fin, gut - 힘의 우월성, 명령하는 자, 지배자, 정복자, 전사, 주인, 부자, 성실한 자, 존재하는 자, 진실한 자, 귀족적, 정신적 고귀함

*카코스, 데이로스, 마루스, 메라스 - 천민, 비겁함, 거짓말하는, 어두운 피부색

정치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은 언제나 정신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옮겨간다. 선악의 기원은 이타주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 어원의 관점에서 좋음의 의미: 니체는 어원학적 관점에서 좋음이라는 명칭을 살피는데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 이 기본개념이며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등의 좋음이 발전해 나왔다고 본다. 이런 발전과 평행해서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에서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 이란 개념이 나쁨이란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고 하면서 그가 예를 든 것이 독일어 슐레히트schlecht(bad) 이다. 이 단어는 원래 아무런 비난의 의미도 없이 단지 귀족과 대조되어서 소박한자, 평민을 지칭했었는데 30년 전쟁 무렵에 오늘날의 관습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아침놀』231 아포리즘: 어떤 민족이 소박한 schlicht것을 열등한 것schlecht으로 소박한 인간을 열등한 인간으로 평가했을 때,이 민족은 위엄. 신분. 의상. 화려함고 사치 등에 매인 노예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독일인의 도덕적인 오만에 항상 이 ‘열등한’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주어야할 뿐, 그이상의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 좋음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과 어근에는 고귀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야말로 좀 더 고급의 인간이라고 느끼는 주된 뉘앙스가 아직도 다채롭게 비춰지고 있다. 힘이 강한 자, 주인, 명령하는 자, 혹은 이런 우월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에 따라 부자, 재산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혹은 전형적인 성격의 특성에 따라 자신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리스 귀족이 자신을 성실한 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스어에서 성실한 자는 원래 에스틀로스esthlos란 어원에서 유래하는데 어근에 따르면 성실한 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자, 현실성을 지닌 자, 실질적인 자, 진실한 자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단어가 성실한 자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하는 평민과 구별하기 위한 말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리스시대의 귀족이 몰락하고 나서는 원래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서 정신적 고귀함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검은>의 뜻이었던 niger도 불운함을 의미하게 되었고 사악함을 뜻하게 되었다. 반대로 candidus는 하얀, 밝은, 아름다운, 순결한 악의 없는 등등의 뜻이 되었다.

*최고의 세습적계급 caste 이 동시에 성직자 계급이며, 따라서 그 계급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그들의 성직자 기능을 상기시키는 술어를 선호하게 되는 경우 정치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이 언제나 정신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옮겨간다는 규칙에는 예외가 없었다. 예를 들어 순수와 불순이란 말이 신분표시로 대립되다가 나중에는 신분을 나타내지 않는 다른 의미로 변하는 것이다. <순수한 자>는 원래 단순히 몸을 씻는 자, 피부에 질환을 가져오는 음식을 금하는 자, 더러운 여자와는 동침하지 않는 자의 의미였다.

다른 한 편 생각해야 할 것은 일찍이 대립된 평가가 위험한 방식으로 내면화되고 격화될 수 있었는가의 문제인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직자적 귀족주의의 전체 성격에서 밝혀진다고 보았다. 그들의 행동을 기피하고, 부분적으로는 침울하고, 부분적으로는 감정을 폭발하는 습관 속에는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의 결과로 성직자들은 내장질환과 신경쇠약증이 나타난다. ...니체는 여기에 덧붙여 본질적으로 위험한 생존형식의 기반위에서 비로소 인간 일반은 흥미로운 동물이 되었고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좀더 높은 의미에의 깊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반어적인가?)

* 니체는 기사적 귀족적 가치 평가방식에서 성직자가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특히 전쟁 시 가장 사악한 적이 성직자이고, 그들은 무력감에서 증오심을 갖게 된다. 기사들에게, 그리고 이런 증오야말로 가장 정신적이고 독이 있는 것으로 성장하며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증오자들은 항상 성직자였고 그 예로 유대인이다. 유대의 가치전환의 유산을 상속한 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다. 저 반란의 배후에 2000년의 역사가 있으며 그것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반란을 볼 수 없게 된다.

*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로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복수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설파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기독교의 교리야 말로 유대교식의 복수를 세련된 형태로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신적인 복수 행위이며 새로운 사랑은 유대적 증오의 대립물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는 유대적 가치와 이상 혁신의 유혹이며 우회로였다. 니체는 유럽역사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고귀한 가치들을 대치하는 일에 성공했고, 힘없고 약하고 평범한 것들의 가치가 드높여져서 가장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선량한 불행한 자, 선량한 약자들을 만들어낸다. 강자들이거나 행복한 자들에 대한 복수보다 더한 복수는 없다. 그것에게 활기를 주고 그것을 인도하는 유태교의 원한의 힘없이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이겠는가? 기독교의 사랑은 유대교의 원한의 대립자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그거의 결론 그거의 완성이다.”) 『니체와 철학』 p. 219

 

*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거기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된다. "원한의 인간은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근본개념으로 하여 그것의 잔상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너는 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선하다'는 공식이 노예가 자기긍정에 도달하기 방법이다. 이는 모든 귀족도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서 자기와 타자를 비교하여 타자를 악으로 정립함으로써 자신을 선으로 산출하는 방식이다. 나의 선함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너의 악함'에서 나오는 노예도덕, 다시 말해서 '나의 선함'이 완전히 외부에 의하여 우연적으로 된다. 그리스 귀족은 하층민을 자신들과 구별하기위해 끊임없이 연민, 동정, 관용이 혼합되고 가미된 결과 평민을 지칭하는 모든 단어들이 불행한, 가련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 고귀한 종족과 그들의 이상을 모욕하고 제압하는 반응 본능과 원한 본능에서 유래한 인간을 길들이는 도구가 바로 문화의 의미이다. 문화의 도구는 인류의 치욕이며, 오히려 문화 일반에 대한 회의이며 반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을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달갑지 않은 인간, 피로하고 왜소하고 쇠약해진 인간, 야성이 제거된 인간이 바로 문화에 길들여진 인간이다. 왜소화되고 평균적인 인간의 모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위대한 인간, 행복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두려움을 주는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함께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외경, 인간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의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인간을 본다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싫증나게 만든다. 이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 미덕, 숭고한 자기기만: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한 존재가 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이다.” 하고 스스로 설득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죽은 척하여 위기를 넘기는 곤충이 갖는 영리함과 무력감과도 같다. 이러한 수동성은 절대 주체적 행위가 아니다. 이런 자기기만 덕분에 체념하며 미래로 미뤄진 천국의 보상과 심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맹금은 악의가 있다. 그런데 나(어린양)는 맹금과는 반대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첫 번째 전제인 맹금은 악의가 있다는 표현은 맹금이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음을 가정한다. 맹금은 자신의 힘을 억제하지 않았기에 악의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 양에게는 억제되어 있는 동일한 힘이 맹금에게는 억제되지 못하고 공격을 통해 피해를 주기에 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리를 들뢰즈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어떤 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허구이며, 그러한 허구 덕분에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힘들의 관계를 전복시키고, 적극적인 힘들에 대립하며 반응적인 힘들을 우월한 것으로 만든다. 행동하지 않고 억제하는 것이 찬양받을 만한 것이 된다.” 『니체와 철학』 p. 221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이고 불안한 천박함은 ‘겸허’가 되며 가련한 자들은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영예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그들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음 속에서’, ‘사랑 속에서’, ‘희망 속에서 사는 것이다.

*영리한 무력감은 체념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미덕이라는 화려한 의상을 입었다. 이것은 마치 약함 자체가 하나의 임의적 수행 능력이며, 의욕된 것, 선택된 것, 행위, 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차가지다.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는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곤 하는자기 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서 선택의 자유를 지닌 중립적인 '주체' 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주체(영혼)는 최상의 신조였을 것이다. 죽어야 하는 수많은 인간 존재, 모든 종류의 약자, 억압받는 자로 하여금 약함 자체를 자유로 해석하고, 그들이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모습을 공적으로 해석하는 저 숭고한 자기기만을 가능하도록 했다.

*로마인은 강자이며, 고귀한 자이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탁월한 원한을 품은 성직자적 민족

이며, 유례없는 민중 도덕의 천재성을 구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우선 로마와 유대 가운데

누가 승리했는가? 로마가 의심할 여지없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유대는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근본적으로 천민적인 원한 운동 덕분에 다시금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유대는 또 한 번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고전적 이상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유럽에 있었던 17,18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고귀함은 민중의 원한 본능 아래 붕괴되고 말았다. 다수의 특권이라는 원한의 낡아빠진 허위적 구호에 대해서, 인간을 저열하고 비굴하게 만들며 평균화시키고 하강과 몰락으로 가져가는 의지에 대해서 소수의 특권이라는 무섭고도 매혹적인 반대 구호가 예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단순하게 진지하게 울려 퍼진 것이다. 일찍이 존재했던 인간 가운데 가장 유일하고 뒤늦게 태어난 인간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그 자체는 문제로 살아났다. 나폴레옹, 이 비인과 초인의 종합인 존재

* 모든 과학은 이제부터야 말로 철학자들의 미래의 과업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과업이란 가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가치의 등급을 정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포리즘 45.

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선과 악의 개념에 이르기까지는 이중적인 경위가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서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한다.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선하다고 한다 ; 반면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선한 사람으로서 ‘선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가진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이 보복심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들. 아무런 공통된 감정이 없는 종속적이고 무력한 무리에 속해 있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의 배타적인 사회 계층이고, 악한 사람들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한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 같은 관계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적을 악하게 보지 않는다 : 그는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에게는 모두 선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아니라 경멸스러운 자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선은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유전된다 ; 나쁜 사람이 아주 좋은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선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여러 구실을 생각해낸다. 예를 들면 신이 선한 사람을 현혹과 광기로 몰아넣었다고 말함으로써 신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두 번째 경우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모든 다른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악은 인간, 나아가 인간이 가정하는 살아 있는 존재, 예컨대 신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 인간적, 신적이라는 것도 악마적, 악한 것이라는 것과 같다. 호의, 자선, 동정의 표시는 간계, 무시무시한 결말의 서곡, 마취와 계략, 즉 세련된 악의이며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개별 인간이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곳에서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다. 기껏해야 가장 미숙한 형식의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견해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개인과 종족과 인종의 몰락이 가까이 있다.—우리들의 현재의 윤리는 지배적인 종족과 배타적인 사회 계층의 땅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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