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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특별세미나] 후기 道

hector 2019.01.25 12:21 조회 수 : 90

2편에 나누어 올립니다.

1: 山高
위 한자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문 문법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산이 높다.” 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위 한자 조합을 정확히 해석할 방법은 없다. 정확히는, 위 한자조합을 해석할 방법은 앞 뒤 문맥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기에 정확히 해석할 방법이 없다.

山高 라는 한자 조합은 “산이 높다” 라는 해석외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다면, 이 한자조합은 애매성이 없고, 이 한자 조합은 문장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한자조합 앞뒤에 다른 한자가 온다면 이 한자 조합의 해석은 달라진다. 이 한자조합은 애매성이 많다.

恩山高 3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역시 애매하다. “은산(恩山)은 높다.”라고 할 것인가? 아님 “은산의 높이”라 할 것인가? 좀 더 진행해보자.
師之恩山高 5개의 한자로 이루어지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선생의 은산은 높다” 라고 해석할 것인가? 아님 “선생의 은산의 높이”라 볼 것인가.
다르게 보아보자. “스승의 은혜는 산처럼 높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山高라는 한자 조합은 “산이 높다.” 로도 “산처럼 높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산이 높다.”라는 해석에서 山은 명사로 해석한다. “산처럼 높다.”에서 山은 부사(副詞) 즉 산처럼이라고 해석한다.
山이라는 한자를 명사로 해석할지, 부사로 해석할 지는 전후에 나오는 문맥과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여야 한다.
山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글에서, 山이라는 글자가 어떻게 해석되는 지 파악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 글자가 나오는 글이 어떤 맥락이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山자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논어, 장자, 도덕경. 이 3가지 책중에서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쉬운 것은 논어이다.
논어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기에, 대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 지 계산이 나온다.
그 다음으로 파악하기 쉬운 책이 장자이다. 장자는 우화로 구성이 되어, 의미를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대화 및 강조하는 바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맥락이 나오고, 글자를 해석할 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논어 보다는 읽어야할 좌우 문장이 더 많다. 전체 한편을 읽고, 전체 맥락을 파악한 다음 글자를 해석해야 한다.

도덕경은 맥락이 안나온다. 도덕경을 읽을 때는, 읽는 사람 자신이 맥락을 정해야 한다. 이 맥락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내가 본 맥락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남녀의 성적 결합을 도덕경의 맥락이라 본 관점이다.
어떤 맥락을 택하던 그건 자기 자유이다. 자신이 정한 맥락이 맞았다 틀렸다고 판정할 기준은 없다.
자기가 정한 기준이며 그게 맞는 것이다. 자기가 정했기에 맞는 것이다.

다음은 논어 팔일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를 예로 맥락을 설명해 본다.

林放問禮之本: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었다.

이 문장에서 禮는 명사인가? 아니면 동사인가. 다르게 표현하면, 명사로 해석해야 하는가? 동사로 해석해야 하는가.
앞서 이야기 했지만, 이 문장만으로는 禮라는 글자를 명사로 해석해야 하는 지 동사로 해석해야 하는지 알 방법은 없다. 좌우 맥락을 봐야 한다.
禮라는 글자를 명사로 해석한다면 보통명사로 해석하는 것이고, 위 질문은 禮의 개념을 묻는 것이 된다.
禮라는 글자를 동사로 해석한다면 위 질문은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 마음자세를 묻는 것이며, 실천에 중점을 둔 질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서양철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이 질문을 禮의 개념을 묻는 것으로 파악하고, 禮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 What is 禮?” 라는 질문으로 치환하고, 禮라는 개념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無學)으로 서당에서 논어를 읽으신 분들은 이 질문을 “how to do 禮?” 로 파악하여 어떻게 예를 실천하는 지로 본다.

논어에서 위질문에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禮라는 글자를 명사로 해석할지, 동사로 해석할지가 나온다.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寧儉, 喪, 與其易也寧戚.”
공자가 말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를 실행하는 때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하고, 상은 질서정연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야 한다

난 다음 문장을 보고, 禮를 명사로 해석하지 않고, 동사로 해석하여 예를 실행할 때라 해석했다.
물론, 위에 제시한 공자가 대답한 문장을 보고서도 禮를 구체적인 실천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동사로 해석하지 않고, 禮를 개념으로 보고 명사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해석하는 사람 자유이다. 문제의 원인은 한문이라는 문장이 또는 한문으로 쓰여진 본래 바탕인 중국어라는 언어가 애매성이다.
본래 애매성이 많으므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논어를 다 읽은 후, 논어를 구성하는 전체적인 맥락이 보였다.
그 때 부터, 仁, 禮, 孝, 忠 등등의 글자를 만나면 난 이 글자를 구체적인 실천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모두 동사적으로 파악한다.
논어의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춘추시대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개념을 연구하던 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을 추구하던 시기이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고안해야지 개념을 명료하게 하고 세상을 설명하는 식의 활동은 곤란하다.
후대에 중앙집권시기가 되면 개념을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었겠지만, 준전시 상황, 전쟁이 일어나는게 평범한 일상이었던 시기에는 what을 추구할 겨를이 없다. How to를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한다.

2: 도덕경 해석 문제

도덕경은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 지에 대한 전후좌우맥락이 논어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하다.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논어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 문장에서 글자를 명사로 해석할지 동사로 해석할 지 애매하면, 다음 대화 내용을 보면 된다.
그러나, 도덕경은 그렇게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전후 좌우 문맥에 정보가 부족하다. 도덕경을 읽기 위해서는 도덕경을 전체를 읽고나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후에 자기 자신이 맥락을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도덕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덕경 독법이다.

道可道非常道

도덕경 첫 문장이다. 道라는 글자가 3번이 나온다.
이 글자를 동사로 볼까? 명사로 볼까? 아니면 부사로 볼까. 애매하다
그러나, 몇가지 단서는 있다. 일단, 非 뒤에 나오는 한자는 명사로 보면된다. 애매한 한문 이지만, 나름대로 규칙은 있다. 非는 명사를 부정한다고 보면 된다.
可뒤의 道는 동사로 보면 된다. 이 역시 애매한 한문에 있는 얼마안되는 규칙중 하나다.
그러면 3개의 道자 중 남은 것은 맨앞에 있는 道자이다. 이 글자를 명사로 해석할 것인가? 동사로 해석할 것인다.

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명사로 해석하면 道를 정태(靜態)적으로 보게 되며, 동사로 해석하면 道를 동태(動態)적으로 본 것이다.
난 일단 첫글자 道를 동사로 해석한다. 도덕경을 읽어 본 결과, 도는 동태적이며 정태적이니 않다고 보았기 떄문이다.
이건 내가 보는 관점에서 道이다. 이 관점이 옳고 그른가는 난 별관심이 없다. 이 관점을 취했을 떄, 내 인생이 풍요로워 지는가 아닌가가 내 관심사이다.

첫글자 道를 명사로 보는 데는 2가지 관점이 있다.
여러 해석을 살펴보면, 이 두관점은 서로 섞여서 해설되고 있다.
道를 명사로 보는 첫 번째 관점은 the way라는 보는 관점이다.
다른 관점은 the concept of way로 보는 관점이다. 영어로 써도 역시 애매해다. 설명을 이어가본다.

Good이란 단어가 있다, 그리고 goodness란 단어가 있다. Happy란 단어가 있다. 그리고 happiness란 단어가 있다.
두 단어의 차이를 고려해본다. 내가 영어 전공이 아니라 내맘대로 전개가 있을 수 있다. 이해를 위한 설명이니 양해를 부탁

일단, good 이나 happy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한다.
이 단어를 쓸 때는, 이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다.
Goodness나 happiness라는 단어가 되면, 개념을 의미하게 된다. 이 단어 자체가 의미가 있지, 이 단어와 연관되는 대상은 없다.
좀 어렵다. 좀 더 쉽게, 無라는 단어로 설명해 본다.

컵이 없다. 물이 없다. 힘이 없다. 사람이 없다. 없다라는 단어는 이렇게 대상과 연결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X는 없다. “

위 명제에서 X의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대상이 들어갈 수 있다.
컵, 물, 사람, 힘등등 대상이 들어갈 수 있다. 이 때 없다를 영어 empty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위 명제에 나오는 “없다”를 추상화하여 “없음”이라는 개념을 유도할 수 있다.
이렇게 추상화한 “없음”이라는 개념은 개별적인 대상과 관련이 없는 “없음” 그 자체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emptiness 이다.
Goodness, happiness 역시 구체적인 대상과 관련이 없는 좋음 그자체와 행복 그자체이다.

이제 원래 주제인 道로 돌아가 본다.
도덕경 첫 대목에서 道는 개별 대상과 연결된 道인가? 아님 개별대상과 연관되지 않는 추상개념인가?
도덕경에서 처음 나오는 道라는 글자는 happy, good, empty 처럼 개별대상과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goodness, happiness, emptiness와 같은 순수추상개념인가?

답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누가 옳다고 주장할 근거도 미약하다. 원래 한문은 애매하기 떄문에 해석은 난무한다.
옳은 해석을 찾기보다 자기에게 위안을 주는 해석을 찾는게 정신건강에 좋다.
자기에게 위안을 주는 해석이 없다면,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해석을 만들라.
도덕경은 종이에 쓰여진 잉크덩어리일 뿐이다. 내가 의미부여하기 나름이지, 잉크덩어리가 나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내 의견은 도덕경 처음에 나오는 道는 emptiness, goodness, happiness같은 순수추상개념으로는 해석할 여지가 없다.
 만약 순수추상개념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道也者로 표현했을 것이다. 다음 처럼 말이다.

道也者가 可道면 非常道니라.

道也者란 표현은 중용에 나온다. 중용은 개념을 다룬다. 그런 의미에서 독특하다.
도덕경, 논어, 장자등등 춘추전국시대의 글들에 덧붙여진 후대의 주석은 사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명사적해석과 동사적해석이 혼재하고, 개별대상과 연결된 해석과, 순수추상개념으로 진행한 해석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동태적이면서, 정태적이고, 순수추상개념이면서, 개별성이 있는 이상 야릇한 그 무엇이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묘하다고.
이 때 오묘하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자기가 이야기 하는 대상에 대해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뜻일 가능성이 많다.

道자 아래에 나오는 無자 역시 많은 해석에서 순수추상개념인 emptiness로 본다.
내 느낌에 노자는 순수추상개념에 관심이 없었다. 이건 내 개인의견이며, 내 의견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사실 증명할 생각도 없다.
이럴게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행복하기에 생각할 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본다. 無를 순수추상개념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그리고, 순수추상개념으로 보지 않아야 이해가 쉽다.

간단히 결론을 내린다면. 도덕경 첫글자 道는 동태적이며 개별적이다.
정태적이지 않고, 순수추상개념도 아니다.
그래서, 道라는 글자를 영어로 해석하면 명사로 번역되지 않고, to 부정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To go down his road can be said, 모 이런 정도로 말이다.

다음편에 계속

다음 주, 목요일 7시에 모여, “즐겁게 읽는 장자”라는 주제로 번외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올바르게 읽는 장자” 가 아니라 “즐겁게 읽는 장자” 입니다.
무림 정파가 아니라, 저자거리 사파입장에서 보는 장자입니다.
전 연태고량주 가지고 갑니다. 알아서 좋아하는 거 가지고 오셔서 이야기하고 다과와 술을 곁들여 이야기 해 보지요.
다음 주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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