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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미나] 이제 낭만주의시대로 들어갑니다!

이파리 2011.07.18 13:52 조회 수 : 1290

지난주에는 새뮤얼 존슨의 라셀라스를 읽었습니다.

다소 엉성한(?) 구조의 작품이라 소설로 보기는 힘들지만,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지요.

근대 철학의 모순들에 대해서, 또한 앞으로 예고될 낭만주의 시대 배경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갔었습니다.

 

이번주에는 드디어(?) 영문학의 꽃! 낭만주의 시대로 진입합니다.

영미문학길잡이 중 '낭만주의 시대 개관'부터 '바이런, 셸리, 키츠' 장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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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남자가 되려면 일단 잘생기고 봐야한다!)

 

 

근대 초 산업혁명 이후, 거리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빈민들을 위해 시를 썼던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훗날 '바이런 적 인물' 즉 '오리지날 나쁜 남자'를 전 세계로 유행시킨 바 있는 바이런까지

영문학 낭만주의의 주요 시인들을 말그대로 '주욱' 훑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놏치지 마세요!

 

읽으며 참고할 시들은 반장이 지난 시간에 배포한 프린트 물들을 참고하시면 됩니다만..

사실 인터넷 발품을 조금만 팔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들이니,

새로 오실분들은 부담없이 오시면 되겠습니다요!! ㅋ

 

끝으로 지난 시간, 라셀라스 발제문을 첨부합니다.

금요일 저녁, 모두 건강한 몸으로 반갑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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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행복의 골짜기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이야기의 시작부터 되짚는다.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게는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의 골짜기가 문제의 시발점이다. ‘행복을 위해 구축되고 유지되는 행복의 골짜기에서 그것도 그 구성원들 중 가장 상류 계급에 속하는 신분으로 살아가면서도 라셀라스는 그곳에서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까닭에 라셀라스는 풍요로운 골짜기를 떠나 폭풍우로 물보라가 치솟고 거센 소용돌이로 들끓는 바다와 같은세상으로의 탈출을 모색한다.

 

작품의 문제적 공간인 행복의 골짜기는 그간 전형적인 유토피아로 그려지던 공간이 아니다. 겉으로는 풍요와 안전이 보장되는 낙원의 공간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감옥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행복의 골짜기가 그곳의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유토피아라 인식되는 이유는 일종의 훈육의 효과다.

 

온갖 방법과 기술이 동원되어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기뻐하고 만족스러워하게 했다. 그들을 가르치는 현인 학자들은 그들에게 바깥세상의 생활에 대해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들만을 이야기해 주었으며, 산 너머에는 불행과 재난만이 가득 찬 곳, 싸움이 늘 들끓고 인간이 서로를 잡아먹는 그런 곳뿐이라고 설명해 주곤 했다. 지극히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고취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이 행복의 골짜기를 주제로 하는 노래들이 그들에게 들려졌다. (...)

이러한 방법은 대체로 성공적이어서 거의 모든 왕자들은 골짜기 너머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전혀 없이, 인간이 만든 것이든 자연의 산물이든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갖춰져 있따는 확신에 가득 차서 보냈다. (p. 14)

 

더 나아가 시인 이믈락은 행복의 골짜기에 살면서 행복해하지 못하고 있는 구성원이 비단 라셀라스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주입된 유토피아로서의 행복의 골짜기의 이면에는 온통 불행한 이들 투성이었던 셈이다.

 

진실로 여쭙건대 제가 알기로 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이 은둔의 처소에 들어온 날을 한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특히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과 늘 얼굴을 대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더 시기심과 악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이 골짜기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참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리로 유혹하며 초청하는 것은 바로 절망적인 불행 속에서 자연스레 품게 된 악의 때문이랍니다.”(p. 71)

 

까닭에 <라셀라스>라는 이야기를 일반적인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세상)로 이동하는 디스토피아적 구조라 단정짓기란 쉽지 않다. 문제의 시작인 행복의 골짜기를 허구의 유토피아, 나아가 모순과 부조리가 숨겨진 절망의 공간, 즉 디스토피아로 여기게 되면, 오히려 <라셀라스>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유토피아적 구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현실이라해도 그 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겠다는 라셀라스 왕자 일행의 의도는 유토피아를 향한 상상이자 의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은 이러한 왕자의 희망을 아무것도 없는 결론으로 귀결지으며 당대 통상적이던 유토피아적 구조마저 부정한다.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에서 출발한 여정을 디스토피아로의 회귀로 마무리지음으로서 유토피아의 본질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디스토피아의 양면성

라셀라스가 행복의 골짜기를 불행의 씨앗으로 여긴 이유는 다름아닌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감각(p.17)’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그는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했고,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의 단상을 얻게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왕자 일행은 현실의 다양한 군상과 사건들을 겪으며, 세상에서 역시 행복의 분자는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를 통상적인 의미의 유토피아의 부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주의자, 사무엘 버틀러가 사용한 'Erewhon'이란 단어의 의미가 사실은 '아무 곳에도 없는'(no-where)뿐 아니라 '지금 여기'(now-here)라는 이중의 의미를 내포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존슨의 유토피아에 대한 결론 역시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 ‘결론이 아무것도 없는 결론을 보자. 시녀 페쿠아는 아랍인 두목에게 납치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된 수도원에서 경건한 처녀들을 데리고 있는 수녀원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공주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익혀 학문하는 여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고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며 가르치고자 한다. 왕자는 정의를 베풀며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고 이믈락과 천문학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인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자 희망한다.

 

이러한 희망은 희망의 골짜기에서는 감히 꿈꾸지 못했던 종류의 것들이다. 우악스러웠던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이들은 막연히 채워지지 않던 욕망을 ‘(xx)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으로 구체화할 수 있었던 셈이다. 현실이라는 디스토피아는 이로서 행복의 분자를 찾을 수 없는 불모지로서의 공간에서 창조의 힘을 지닌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 그들은 디스토피아(행복의 골짜기)에서 디스토피아(세상)로 이동함을 통해 그 간극 사이에 숨겨진 그 무엇을 찾아낸 셈이다.

 

아비시니아로 돌아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강물의 범람이 그친 후, 아비시니아로 돌아간 라셀라스 왕자 일행을 상상해본다. 그들 중 누군가는 가짜 유토피아인 행복의 골짜기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의 순례를 마친 후 행복이란 어느 곳에도 없더라를 확인했더라도, 아비시니아에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이야기 전반부 이믈락의 고백에서 암시된 바 있다.

 

왕자는 황홀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앞으로 펼쳐질 여행의 모든 즐거움을 기대했다. (...) 한편 이믈락은 탈출한다는 것에 매우 기쁜 마음이긴 했지만, 바깥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감은 왕자보다 훨씬 덜했다. 이미 과거에 다 경험했고 또 그것에 대해 염증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p.81)

세상에서 온갖 종류의 경험을 겪은 후, 영원한 은신을 희망해 행복의 골짜기에 몸을 의탁한 이믈락을 또다시 세상으로 떠나게 한 힘은 비단 왕자의 설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은 라셀라스 왕자만큼 설레진 않아도 탈출에의 기쁨을 공유하고 있다. 이믈락을 과거에 염증을 느낀 바 있는 세상으로 또다시 나아가게 한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들뢰즈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성질을 내재성의 유토피아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혁명이 아무 곳에도 없는의미로서의 유토피아처럼, 그 어떤 꿈이나 실현될 수 없는 혹은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본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소소한 투쟁에서처럼, ‘지금-여기로서의 유토피아를 향한 도전과 그와 연루된 '무한한 운동'만이 혁명의 속성이며, 앞서의 혁명이 배반당할 때마다 새로운 투쟁들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추동의 힘'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내재성의 유토피아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즉 가시화된 그 어떤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어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는 잠재된 힘인 셈이다.

 

사실 유토피아 나아가 행복이란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다른 이에게는 전혀 성에도 안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절대적인 유토피아나 나아가 행복을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비록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그 무엇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여기에서 무한하게 사유하게끔 강제하는 '' 내지는 '열정' 그 자체를 '유토피아' 나아가 행복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새뮤얼 존슨의 <라셀라스>는 그저 허무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아닌 행복을 향해 추동하고 그 무엇을 창조하는 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존슨이 깨트리고자 했던 그 무엇

 

<라셀라스>의 전반을 휘감는 정서는 무엇보다도 허무주의. 허무주의란 데카르트의 근대적 주체와 근대 초 과학 혁명, 경험과 관찰만이 진리에 다다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던 근대 철학을 그 극한으로 몰고 갔던 흄의 철학으로 대표된다. 흄의 회의주의는 결국 과학의 불가능성, 진리의 불가능성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그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던 주체라는 범주마저 해체한 바 있다. 한마디로, 근대 철학을 끝까지 몰고갔더니, 결국 진리란 그 어느 곳에도 없더라인 셈이다.

 

흄이 수행한 합리적 이성의 붕괴는 믿음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한 바 있다. 흄에게 인과관계란 습관에 불과한 것이며 이것이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한다고 보았는데, 그는 이 지식이 법칙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 주장한다. 흄은 기존 근대 철학에서 믿음을 다루던 전형적인 방식, 즉 그것이 허구나 허위, 비진리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어떠한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보다는 그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흄의 회의주의 안에서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참이라 믿고 있는 그러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근대 철학의 주요 문제들 (ex. 이성의 합리성, 감각의 불확실성 등등)<라셀라스>의 다양한 군상들의 발화로 재현되는데, 이 과정에서 존슨은 시종일관 이성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최고 행복의 변함없고 위대한 기획에 일치되도록 하는 것, 즉 자연 사물의 현존 체계가 지니는 일반적인 성향과 경향에 협력하여 행하는 것을 뜻한다오.”

라셀라스 왕자는 이 사람 역시 오래 듣고 있을수록 점점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는 현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p.115)

 

우리 인간의 현존하는 삶에 내재된 불확실성들 가운데 가장 두렵고 끔직한 것은 바로 이성의 불확실한 지속성입니다. (p.210)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라셀라스>에서 이성을 비판하는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점이다. 존슨이 활동했던 신고전주의 시대는 합리적 이성의 근대철학이 지배적인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인한 감수성의 문학이 등장하던 시기이다. 새뮤얼 존슨은 이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함과 동시에 지나친 감수성의 휘말림에도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네카야의 슬픔에 대한 장 참조) 대신에 그는 이성과 감성의 경계 안에서 상상력의 힘을 주시했고, 그 유산은 훗날 영문학에서의 (현실 비판적) 낭만주의 사조의 기초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어떤 비범한 업적이나 작품에 우리의 눈이나 상상력이 끌릴 때, 활발한 정신을 지닌 사람은 그는 곧이어 그 작품을 이루어낸 수단에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실례에 대한 관찰이 그 진정한 효용성을 띠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지요.(p.151)

 

상상력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일종의 갈증과 같은 것이어서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늘 뭔가 추구하는 대상을 마련해야만 하지요.(p.159)

 

한 작품을 살피는 데 있어, 작가가 부데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들과 현실들을 상상하는 일은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급속한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거리에는 빈민이 넘쳐났고 끼니를 위해 자신의 아이를 노동 시장에 내다파는 일이 당연히 여겨지던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뮤얼 존슨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유토피아를 찾고자 했을까? 그가 발견하고 싶었던, 또한 깨고 싶었던 디스토피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그가 18세기 영국 사회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절대적 행복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의 출발점을 묻는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해 옳다고 믿고 있는 착각들의 근원을 깨어내라고, 행동을 통해 보여주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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