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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 4장 원한에서 가책까지 (파란 꼬리)

 

 

1. 반작용과 원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상태에서 반동적 힘들의 역할은 작용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능동적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들며 선택된 순간에 반격을 가한다. 능동적 유형은 작용의 반작용인 참된 반작용(주인의 반응은 반작용이다)과 작용사이의 정상적 관계에 대한 표현으로서, 그것은 능동적 힘을 포함할 뿐 아니라 복종하거나 영향 받는 능력이 있는 한에서의 반동적 힘들 또한 포함한다. 원한은 반작용이 아니며, 반동적 힘들이 능동적 힘들의 작용을 거부하고 영향 받기를 중단(거부)할 때 생기는 것이다.

 

 

2. 원한의 원리

프로이트는 외적 체계의 수용과 항구적 흔적의 보존을 각각 의식과 무의식 체계에 상응시키면서 의식은 기억의 흔적(무의식)이 멈추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니체 또한 반동적인 힘들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는데, 반동적 무의식에는 기억의 흔적, 항구적 각인이 자리잡으며 적응을 위해 의식을 필요로 하고, 흔적에 대하여는 (영향을 받는) 반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동적 힘에서의 의식은 이러한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고 따라서 의식은 무의식을 따라 반응한다. 의식은 기원, 본성, 기능에 있어서 반동적이며, 이 의식으로 자각되는 흥분을 대상으로 하는 반동적 힘들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는 어떤 반작용이 발생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구별되어야 하듯, 외부의 다가오는 자극과 기억의 흔적들은 혼동되면 안된다. 능동적 힘은 의식을 지지해야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망각능력이다. 망각은 반동적인 힘들을 제동하고 완화하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능동적 힘은 의식과 무의식의 혼돈을 막는다. 외부의 자극으로서 의식되는 흥분과 무의식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기억의 흔적이 혼동되면 반동적 행위가 능동적 행위를 압도하여 무의식의 흔적들이 부상하면서 의식의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 받길 중단한다. 이제 능동적 힘들은 그것들이 할 수 있는 행위로부터 분리된다(의식이 무의식적 과정을 주시하고 처리하느라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망각능력이 약해지면 무의식적 기억반응이 활동하게 되고, 의식의 영향받는 능력은 파괴된다. 원한은 이렇게 활동은 하나 영향 받기를 중단하는 반작용의 지점에서 발생한다

 

 

3. 원한의 유형학

원한의 인간의 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 침투당한 의식이다. 원한의 인간은 흔적에만 집중하고 반응하며, 흥분과 흔적을 혼동하고 반작용을 행할 수 없다. 기억의 흔적이 자극을 대신하면서 반동적 힘들이 능동적 힘들을 이길 때 그것은 망각에서의 무능력, 기억에서의 놀라운 능력에 기댄 하나의 유형을 보여준다. 원한은 왜 복수심을 낳는가? 주체를 구성하는 상이한 본성의 힘들 속에서, 주체자신 속에 규정된 관계에 의거하여 볼 때, 원한의 인간유형은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에 집중하느라 반응하지 못한다. 그는 영향을 받는 대신 (흥분을) 느낀다. 모든 대상과 사건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증오심에 차있는 흔적들의 기억을 남긴다. 그는 흔적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질적, 유형적 무능력을 보상하고 그 책임을 전가할 비난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떤 흥분도 소화되지 않고 어떤 흔적도 망각되지 않는 “기억을 끝내지 못하는 소화”, 끝없는 지체에 대해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4. 원한의 특징들

원한은 복수의 욕망, 저항하고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복수는 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의 정상적 관계를 뒤집는 방식으로 원한의 인간인 약자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노예의 유형은 원한이라는 저항과 승리속에서 형성된다. 주인이라는 능동적 유형은 대응하는 힘으로서의 망각능력으로 정의되며, 노예의 반동적 유형은 가공할 만한 기억력과 원한의 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이 반동적 유형을 결정하는 원한의 첫 번째 특징은 감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무능력에 있다. 그들의 기억의 흔적에는 증오심과 원한이 가득하다. 그들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비난하고 감탄할 만한 모든 것을 증오하며 사랑할 만한 모든 것에 적의를 갖는다. 원인들을 비하하고 불행을 누군가의 책임으로 전가하면서 저급한 사유를 드러낸다. 두 번째 특징은 수동성이다. 원한 속에서 행복은 수동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수동성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하며, 영향받기를 중단할 때 드러나는 원한의 순간을 가리킨다. 수동성은 느슨하게 사랑받고 쓰다듬어지며 먹여지는 무기력한 노예이다. 사랑을 할 줄은 모르고 받기만을 원하는 이들로, 자신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주지 않으면 악질로 간주하고 원한을 품는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이익의 인간이다. 그들에게 이득을 얻지 못하는 사유는 정신에 대한 유일한 범죄이다. 이것이 그들의 실리의 도덕, 무사심이라는 수동적 관점을 숨긴 공리주의이다. 원한의 세 번째 특징은 잘못의 전가, 책임의 분배, 영원한 비난이다. 이것이 그들의 공격력이다. 원한의 인간은 닥쳐오는 모든 불행에 대하여, 또한 나의 실패에서만이 아니고 너의 실패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질 사람을 원한다. 그들의 원한은 죄인을 원하고 책임자를 찾는다. 그들은 타인들이 악하기를 원한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이것이 원한을 가진 노예의 근본 정식이다. 이것은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라는 주인의 정식과 대립된다.

 

 

5. 그는 선량한가? 그는 악의가 있는가?

여기에 두 개의 정식이 있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이 해석에 있어 주의할 것은 한 정식의 선량한 자는 다른 정식의 악의가 있는 자이며, 선량과 악의란 개념의 다층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첫 번째 정식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 여기에서 나는 비교하지 않는 자, 선량하길 기대하지 않는 자이다. 실행 속에서 체험된 활동, 긍정, 즐거움을 선량함이라 부르는 품위 있는 자이며, 사물에 명예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주인인 나는 저속하고 천박한 모든 것에 자기 자신을 대립시켜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간주한다. “나는” 충만의 감정, 내적인 긴장의 행복을 헌신하며 내주고자 하는 풍요의 자이므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긍정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너는 “악의가 있다” 너는 노예이다. “그러므로” 라는 공식에 의해 이 부정은 부차적 결론이 된다. 주인은 행동과 긍정의 전제들을 향유하고자 한다. 주인의 선량함이 더 큰 기쁨으로 자신을 긍정하기 위하여 정반대의 것을 찾는 것일 뿐이다. 최종적 부정(너는 악의가 있다)은 단지 전제(나는 선량하다)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두 번째 정식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이 정식은 노예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정적 전제가 본질을 구성하고 긍정은 부정에 의해 존재한다. 노예는 외관상의 긍정적 결론(나는 선량하다)을 위해 반작용과 부정,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너는 악의가 있다)를 필요로 한다. 즉, 노예의 원한은 강자의 공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비-자아를 구상하고 그것에 대립함으로써 비-자아가 되는 원한의 삼단 논법 속에 놓여있다(너는 악의가 있다, 그런데 나는 너와 반대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노예들은 악의가 있는 다른 이들을 상정한다. 그 악의가 있는 자들은 행동하고,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으며, 결과들의 관점에서 행동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이다. 선량한 자는 그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 행동하지 않는 자, 감추인 자, 악과 부딪치길 피하며, 겸손하고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제 선과 악이 태어나고 윤리적 성향으로서의 좋음과 나쁨은 도덕적 판단 하에 놓인다. 윤리학의 좋음은 도덕의 악의 있음이 되고, 윤리학의 나쁨은 도덕의 선량함으로 전복된다. 그들은 제동을 걸고 부정하면서 삶속에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모든 것을 극도로 증오하면서 선과 악이라는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한다. 종교적 가치들은 이러한 증오와 복수심에 기반하고 있다. 강자들은 악의가 있고 천벌을 받을 자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불행한 자들, 약자들, 노예들은 선량하다. 강자들에 대한 복수의 종교인 유대교와 그 완성으로서 그 자체가 원한의 힘인 사랑의 기독교. 종교의 긍정성은 외적인 긍정성일 뿐으로 그들 자신의 부정적 전제들(복수심과 원한)을 감춘다.

 

 

6. 오류 추리

원한의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다.

대전제 : 너(맹금)는 악의가 있다(맹금은 모두 악의가 있다. 악의가 있는 것은 맹금이다)

소전제 : (그런데) 나(어린 양)는 너(맹금)와는 반대이다

결론 :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소전제에서 맹금은 행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힘으로 간주되나 대전제 속에서 맹금은 자신을 억제하면서 표현이나 효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을 억제할 수 있으나 억제하지 않으므로 악의가 있는 것이다. 어린 양에게는 억제되어 있는 힘과 맹금에게 자유로운 흐름인 행위는 하나의 동일한 힘이라고 가정된다.

원한의 오류 추리는 바로 능동적인 힘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다. 이 허구에 근거하여 반동적 힘들이 승리한다. 반동적인 힘은 능동적 힘을 억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능동적인 힘과 자신의 관계를 전복시키고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표상해야 한다. 원한은 힘을 더 이상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이러한 힘을 스스로 충분히 억제하고 효과와 분리될 수 있는 힘으로 간주한다. (능동적으로) 행위 한다면 비난받을 것이고, 행위 하지 않으면 찬양받을 것이 된다. 이 오류의 내적 논리들은 다음계기들에 기대고 있다.

1) 인과성의 계기 : 힘이 자신의 표현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힘은 원인으로, 표명되는 것은 결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원인으로 간주한 후, 다시 그것을 결과로 받아들인다(번개가 친다). 의미의 실제관계가 인과성의 가상관계로 대체된다.

2) 실체의 계기 : 표현하거나 표현하지 않을 자유를 가진 주체와 그 (중립화 된) 힘의 활동으로서의 행위를 구분한다. 주체와 활동은 서로 분리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니체는 원자(에피쿠로스)나 실체(데카르트), 물 자체(칸트) 들에 숨어있는 주체의 허구를 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주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3) 상호결정의 계기 : 중립화된 힘은 주체를 통과하면서 도덕화된다. 질이 부여된 힘들 사이의 기원적 차이(좋음과 나쁨)가 실체화된 힘들 사이의 도덕적 대립(선과 악)으로 바뀌는 것이다.

능동적 힘이 활동성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기원이나 유형에 있어)좋은 것이나 주체는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므로 유죄이고, 반동적 힘이 원래 없는 힘으로 인하여 활동하지 못한다면 (유형이나 기원적으로) 나쁜 것이나 주체는 (도덕적으로) 찬양을 받게 된다.

 

 

7. 원한의 발전 : 유대교의 사제

원한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첫째로 위상학적 측면에서 반동적인 힘이 능동적인 힘의 작용들을 피하는 방식(반동적 힘들의 이동, 기억의 흔적에 의한 의식의 침입)이다. 이 단계에서 모든 것은 반동적 힘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이동). 두 번째는 유형학적 측면으로 흔적들의 기억이 전형적 성격이 되어 증오하고 비난하는 방식이다. 반동적 힘과 능동적 힘 사이의 위계가 전복되고(전복), 능동적 힘에 악한 것이라는 반동적 이미지를 투영하면서(투영), 원한의 힘들이 완전히 승리한다(투영에 의한 전복).

원한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질문.

1) 반동적 힘들이 어떻게 그 허구를 생산하는가?

2) 반동적 힘들을 생산하고 능동적 힘을 전복시키는 것은 “누구인가?”

첫 번째, 영향 받길 중단한 반동적 힘들이 전복된 이미지를 투영함으로서 세계를 왜곡하는 초감각적 세계, 삶에 대립하는 신이 생겨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허구이다. 그것은 능동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하면서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표상하고 자기긍정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세계(악)을 창조한다. 두 번째 질문 이러한 허구는 누구에 의하는가? 천재적 예술가, 원한에 형태를 부여하고 복수의 계획을 멀리까지 끌고가는 자는 바로 유태교 사제이다. 부정적 전제를 만들고 증오의 유독한 사랑을 고안한 자, “불행하고 가난한 자,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자만이 선량하고 경건하며 아름다움에 속한다”고 말하는 자, 그 대신 우아하고 강력한 자들은 나쁜 자들, 불경건하며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는 퇴행의 충동 속에서 권력을 간파하며 반동적 힘들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다. 그들의 의지는 권력의지이며, 그 권력의지는 허무주의이다. 부정하는 힘으로서의 허무주의는 반동적 힘들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그것을 승리로 이끈다.

유태교 사제들에 대한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니체의 저작들은 날조를 거쳐 나치에게 이용되었으나 니체는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왕들을 존중했으며,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경멸했다. 니체가 유태인 사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오로지 유형의 문제, 유럽사 전체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유형의 문제로서의 사제의 유형을 다루기 위함이다.

 

 

8. 가책과 내면성

실행의 물질적 조건을 박탈당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능동적 힘은 현실적으로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힘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리면서 안으로 돌아와 고통을 생산하며 내재화된다. 그것이 인간의 내면화이며 가책의 기원이다. 이 가책은 원한을 계승하면서 행복한 자들의 의식 속에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던져 넣는다. 원한 속에서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을 비난하고 자신을 투영한다. 능동적 힘의 내부로의 투사는 반동적 투영의 결과이다. 가책은 원한을 연장시키면서 멀리까지 나아간다. 능동적 힘은 반동적이 되고 주인은 노예가 되며, 한때 능동적이었던 힘에 의해 고통의 자가-수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가책의 첫 번째 정의는 힘의 내면화에 의한, 힘의 내부로의 투사에 의한 고통의 배가라고 할 수 있다.

 

 

9. 고통의 문제

이제 고통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방식으로 내면화, 감각화, 정신화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이자, 구원의 수단이며, 생겨남과 동시에 내면화 되는 것, 처벌의 느낌으로 변화된 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반작용으로서의 고통은 그 반작용을 행할 가능성속에서 능동적 힘의 외재적 요소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때 고통을 보는 주인의 관점은 단 하나이다. 고통이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 그를 모욕하거나 응시하는 자에게 쾌락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세계에서 모든 악은 어떤 신이 그것을 기뻐하는 순간에 정당화된다. 고통의 능동적 의미는 삶의 흥분제, 그것을 위한 미끼이며, 고통을 보거나 주는 것은 능동적 삶의 구조, 그 표현이다. 잔인성 선호에 대한 장구한 역사, 잔인성 없이는 쾌락도 없다. 고통의 문제를 열정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고통을 가하여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더 많은 고통으로 더 많은 구원을.

 

 

10. 가책의 발전 : 기독교 사제

능동적 힘의 내면화 다음에는 고통 자체의 내면화가 이어진다. 원한의 이 첫 번째 양상에서 두 번째 양상으로의 이행은 기독교사제가 맡는다. 기독교사제는 가책을 가공되지 않은 동물적 상태에서 보다 우월한 상태, 즉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으로 인도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원한의 인간을 위하여 유태교 사제는 능동적인 모든 것을 비난하고 원한의 힘을 외부로 돌린다(그들은 악의가 있다고). 그러나 폭발적 질료로서의 원한은 능동적 힘들을 반동적 힘들로 바꾸어 방향을 전환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려고 돌아선다. 이것이 가책이며 그 주관자는 기독교사제이다. 기독교 사제는 말한다. 너 자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며 네 자신의 원인이다. 나의 잘못과 유죄성을 지시하는 방법으로 원죄의 결과 고통이 내면화된다. 기독교에 의해 원죄가 고안되는 순간이다.

기독교는 반동적인 힘에 의한 증오와 그것에 다름 아닌 신적 사랑을 기획하여 원한의 힘으로 신에게 이르고자하는 유대교를 완성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그들의 전제를 얻어낸다. 이에 더하여 기독교는 원한의 방향을 바꾼다. 외부에서 내부로. 그것은 가책이다. 원한은 <그것이 네 잘못이다>라고 말하고 가책은 <그것은 내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원한은 능동적인 자를 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악한 것인 강한 자가 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반동적인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가책속에서 원한의 전염력은 최대치에 달한다. 가책은 사제에 의한 원한의 위상학적, 유형적 계승으로서 그것은 힘의 내면화에 따른 고통의 배가이며, 원한의 방향전환에 의한 고통의 내면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통의 내면화인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은 어떤 허구에 근거하는가? 라는 것은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11. 선(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문화는 훈련과 선택이며 인간을 훈련시켜온 잔혹한 수단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운동은 풍속의 도덕성이다. 계보학자들이 볼 때, 분리될 수 없으나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복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민족이나 종족 혹은 계급 속에서의 복종은 역사적, 자의적이면서 반동적인 힘에 의한 것임에 비해, 복종 그 자체 즉 사람들이 어떤 것에 복종한다는 그 자체는 활동이나 능동적 힘이 인간에게 발휘되면서 그를 훈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법칙은 자의적이지만 법칙들에 복종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이다. 풍속의 도덕성은 보편사에 선행한다. <선(역)사적> 이라함은 <종적(한 종류에 특유한)>을 의미한다. 문화는 인간의 선(역)사적 활동이다. 그것은 습관을 만들고 법칙들에 복종하게 만들며 반동적 힘을 행사하도록 인간(무의식, 내장, 소화에 관여하는 힘까지)을 훈련시킨다. 그러나 문화의 주요한 목표는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자극에 흥분하느라) 자주 망각하는 의식에게 (지향으로서의) 항상성과 단호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는 원초적 기억을 부여한다. 그 기억은 흔적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의 기억이며, 의지에의 기억이며 약속에의 기억이다. 약속함으로 미래를 이용하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문화의 선택이다.

문화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이 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약속을) 기억하도록 하기위해 체형은 불가피한 것이다. 목적(자유롭고 능동적인 인간)에 도달하기 전 반동적 힘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통을 교환 수단-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으로 만들었다. 이 수단에 결부된 문화는 정의로, 수단 자체는 처벌로 불린다. 인간의 근원적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이며, 정의는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회조직의 원형은 신용에 있다. 부채에 대한 책임자로 여겨지는 인간, 반동적 힘들의 책임자로 다루어지는 인간이 문화의 수단이다. 니체가 제시하는 종적 계보 1) 훈련과 선택의 기획인 선(역)사적이고 종적인 활동으로서의 문화. 2) 그 활동에 사용된 수단, 처벌의 등식, 부채관계, 책임 있는 인간. 3) 그 활동의 산물 즉 능동적이고 자유로우며 강력한 인간, 약속할 수 있는 인간.

 

 

12. 후-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선(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에서는 원한이나 가책이 나타나지 않으며, 복수나 원한이 정의에 개입하지 않는다. 고통을 가하거나 고통을 응시할 때 느끼는 쾌감(고통의 외적인 의미)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야기된 손실을 형벌이라는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갚는다는 정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통의 외적 의미의 기원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반동적 힘을 훈련시키는 것을 임무로 여기는 능동적 힘들이다. 정의는 인간의 반동적 힘들을 훈련시키고, 영향받을 수 있게 만들며, 능력에 책임을 지게 하는 종적 활동이다.

원한이 정의의 기원이 아닌 것처럼 가책은 처벌의 산물이 아니다. 처벌은 오히려 저항의 힘을 증가시키며 죄의식을 사라지게 한다. 자신의 고통을 대가로 자기의 반동적 힘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식과, 인간이 자신의 반동적 힘에 대해 죄의식과 가책을 느끼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문화나 정의에서 원한과 가책이 대립되는 것을 발견한다.

문화가 인간의 선(역)사적 요소이듯이(즉 문화는 자신의 반동적인 힘에 책임을 지는 인간을 산출하듯이), 문화 활동의 산물(능동적이고 자유로우며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의 후-역사적 요소이다. 그는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 인간, 실제적으로 반동적 힘들을 행사하고 자신 속에서 능동적 힘들이 영향을 받는 자이다. 그는 권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주권자이고 입법자이며 책임이 없는 자이다. 채권자는 주인의 권리속에 참여하여 해방되고 채무자는 육신과 고통을 대가로 해방된다.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며, 수단은 산물에서 사라지는 것. 문화의 일반이 이러하다. 법에 대한 책임, 정의의 법 자체, 문화의 수단으로서의 정의는 문화의 산물(능동적 인간)속에서 사라진다(정의의 자기파괴). 문화가 인간의 종적 활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종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그 안에서 사라진 개인을 산출한다.

 

 

13.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문화는 선(역)사 시대에서 바로 후-역사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 반동적 힘들이 사실상 승리한 역사 속에서 문화는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힘에 의해 문화라는 종적 활동대신 인종, 민족, 계급, 교회, 국가들을 제시한다. 종적활동의 자리에 그것을 왜곡하는 반동적 기생적 사회조직들-무리들이 형성된다. 정의의 자기파괴를 반대하고, 소멸하지 않고자 하는 사회가 된다. 역사는 문화의 산물로서의 주권적 개인 대신 정의의 자기파괴를 반대하고 소멸하지 않으려 하며 순종적이고 병적인 인간(유럽인)을 제시한다. 문화의 폭력은 훈련과 방향 전환, 우회, 전복을 여전히 포함하는 채로 민족과 국가, 교회들의 힘의 표명이 되며, 훈련을 통해 사람들을 순종적이고 길들여진 피조물로 만들고, 반동적 삶을 보존하고 파급하기 위해 약자들, 노예들을 선택한다. 반동적 힘들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역사에서 우연이 아니라 원리이다. 문화는 왜 반동적인 힘들에게 봉사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길들여졌고, 종적활동은 위선적 개(교회와 국가)를 위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개가 아직 후-역사적 요건 속에서 활동하는 선(역)사적 요소들 속에서, 대지의 심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문화는 그것을 반동적 힘에 봉사하게 하는 운동이나 역사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이 반동적 존재일 뿐이라면 선(역)사와 후-역사적 종적활동을 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반동적이며, 그러므로 그 종적활동은 자신의 목적에 실패한다. 문화활동은 인간을 훈련시켜 반동적인 힘을 능동적인 힘을 위해서 쓸모 있게 만들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반동적인 힘들이 국가나 교회와 같은 반동적 힘에게 봉사하게 하고 그것에 능동성과 정의의 외관을 제공한다. 반동적 힘들은 인간의 종적활동에 달라붙어 문화를 그 근원적 의미로부터 분리시킨다.

 

 

14. 가책, 책임성, 죄의식

이와 같이 반동적 힘들이 종적활동에 이식될 때, 종적 활동 고유의 계보는 중단되고 부채가 들어선다. 종적 활동의 관점에서 반동적인 힘들은 법정에서 자신의 반동적인 힘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반동적 힘들은 문화의 훈련과정을 통해 서로 결집하고 무리를 형성한다. 반동적 힘들의 결집은 반동적 심급들의 부채를 동반한다. 인간의 해방에 관여했던 부채(타인에게 진 부채를 형벌로서 탕감하는)는 끝이 없고, 지불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며, 기독교적 대속에 의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이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갚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는) 고통이 아니라, 그것에 자신을 묶고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만들 무엇이 된다. 채무- 책임성에서 죄의식-책임성으로. 채권자(신)는 자기를 위해 부채를 취하고 그 탕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서 인간을 완불할 수 없는 채무 속으로 던져 넣는다.

채무-책임성은 문화의 활동을 기원으로 하고, 그 활동의 수단일 따름이며, 고통의 외적인 의미를 가지고 무책임성으로 사라진다. 죄의식-책임성은 원한에 의한 비난을 기원으로 하고, 모든 것이 반동적이며, 고통을 내재화하고, 원한의 방향전환을 야기하여 가책을 일삼는다. 여기에서 질문하나, 원한은 어떻게 증오와 복수의 속성을 지키면서 방향을 전환하는가? 첫째, 종적 활동의 결집된 반동적 힘들 중 일부(국가나 교회)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듯하고 다른 것들은 질료로서 봉사한다. 둘째, 이 속에서 가책의 윤곽이 드러난다. 부채는 갚지 못할 채무자와 그 이자도 퍼 올리지 못할 채권자의 관계가 되고, 신성함에 대한 부채가 된다. 여기서 원한은 방향을 바꾼다. 채무자의 고통은 내면화되고 부채의 책임성은 죄의식이 된다. 죄인은 밖에 있지 않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신에 대해 죄인이라는 것. 셋째, 기독교사제는 이러한 중독을 조직화하고 내면화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한다. 그것은 외관상의 활동과 외관상의 정의, 신에 대한 봉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가책의 인간은 원한의 특징들-유독성과 증오심을 유지한 채 죄의식이라는 전염병을 퍼트릴 복수의 수단을 발전시켜 나간다. 가책은 종적 활동의 우회, 그 활동의 침해, 부채의 투영에 근거한다.

 

 

15. 금욕적 이상과 종교의 본질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 관계가 없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신들(즐거운 예수는 원한과 가책이 없다), 다양한 힘들에 의해 다수의 의미를 지니는 종교들, 강자들의 종교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종교는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 힘들과 유사성이 있어서, 그것이 다른 본성의 힘들로 간주되는 동안 자신의 우월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반면 동일한 본성의 힘에 의해 정복되어 있을 때는 우월한 단계와 더불어 자신의 본질속에 거한다. 철학자에게 주어진 선택과 방법으로서의 종교처럼 다른 본성의 힘들에 종속되어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없을 때는 문제가 되지만, 종교가 스스로 주권자로서 행동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자신의 무겁고 끔찍한 값을 치르면서 자신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책과 원한 모두에 연결되어 있다. 원한과 가책은 종교 자신이 새로운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복하고 개발해낸 반동적 힘들이며, 종교 자체의 우월한 단계들이다.

종교가 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종교가 반동적 힘들을 승리하게 하는 의지에 의해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반동적 힘들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금욕적 이상을 보자. 그것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서 서로를 교차시키고 강화시킨다. 또한 원한과 가책을 견디고 전파할 수단전체, 반동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드는 의지를 표현한다 (반동적 힘들과 권력의지 사이의 근본적 결탁이 발견되는 지점). 반동적 힘들은 반동적 이미지를 투영하기 위해, 원한과 가책의 방법들에 동원된 것으로서 삶과 모든 능동성을 비하하고 무의 가치를 부여하는, 저 세상이라는 허구를 필요로 한다. 역으로 무의 의지 또한 반동적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반동적 형태로만 삶을 견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삶이 부인되고 무화되는 수단으로서 반동적 힘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욕적 이상은 허무주의와 반동적 힘들의 유사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허무주의를 반동적 힘들의 동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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