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니체의 영원회귀] 9강 예습글

유택 2018.11.14 23:40 조회 수 : 53

이번 9강 텍스트가 여태까지 수업들중에서 제겐 제일 어려운거 같아요..

냥 읽으니 도저히 파악이 안 되어서 본문 내용을 베껴 쓰면서 혼자 되뇌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을거야..'  '이해했다..' '근데 뭘 말하고 있는거지.?'

강의를 들어야 좀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

 

+++

제 4장 원한에서 가책까지  2018-11-15

 

1).반작용과 원한

정상적이거나 건강한 상태에서 반응적 힘들은 항상 작용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작용을 분열시키거나 지체 시키며 우리가 그 결과를 감수하는 어떤 다른 작용과 관련해서 그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반대로 적극적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할 어떤 유형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지체 시키는 반작용과 반작용을 재촉하는 작용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적극적 유형은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들[반응적 힘들]이 복종하는 능력이나 영향 받는 능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그 같은 상태에서이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 힘들과 반응적 힘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데, 그것들[반응적 힘들]은 스스로 영향 받는다.

원한을 만들기 위해 반작용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한은,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을 이기는 어떤 유형을 가리킨다. 원한을 어떤 반작용의 힘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 받길 중단한다.

-적극적 유형 : 주인 (적극적 힘들이 반응적 힘들을 이긴다. 반응적 힘들은 영향을 받는다)

-반응적 유형 : 노예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을 이긴다. 그것들은 보다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함이 없이 승리한다)

 

2). 원한의 원리

나체는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 즉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한다.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첫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 두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은 의식과 구분되지 않는다. ; 즉 그것들은 항상 새로운 수용성에 의해서 항상 재생되는 껍질,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의 새로운> 영역이다.

여전히 반응적 힘들의 두 체계나 두 종류의 반응적 힘들이 구분되어야 한다. 여전히 흔적들은 의식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구별되고 대표로 위임된 적극적 힘은 의식을 뒷받침해야 하고 매 순간 그것의 새로움, 그것의 유동성, 그것의 가볍고 동적인 화학적 요소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그 초-의식적인 적극적 능력은 망각 능력이다. 심리학의 잘못은 망각을 부정적인 성향으로 다루어서 그것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특징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동시에 반작용은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 그 까닭은 그것이 의식의 흥분을 대상으로 삼고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무의식 속에서 지각될 수 없는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 힘, 그것은 활동을 통해 반응적 힘들에게 파견된다. 그것은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를 서로 혼돈하는 것을 막는 <수위>, 혹은 <감시관>의 구실을 한다.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것은 두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에게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빌려야 하고, 그 에너지를 의식에게 반환하기 위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을 어떤 식으로 이기는지 보게 된다.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할 때 반작용 자체가 작용을 대신하고 반작용은 작용보다 우세해진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일반적으로 질병을 정의하는 간단한 표현이다. 니체는 원한을 하나의 질병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질병 자체가 원한의 한 형태이다.

 

3). 원한의 유형학

반응적 힘들의 위상학이 존재한다. 원한의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기억의 흔적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이다. 의식이 어떻게 자기에 맞게 기억을 재단할 수 있으며, 흔적들에 더 이상 근거하지 않는 거의 적극적이면서 영향 받는 기억을 구성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프로이트에게서처럼 니체에게서도 기억 이론은 두 기억들에 대한 이론일 것이다. 우리가 첫번째 기억에서 멈추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원한의 순수 원리의 한계들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원한의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반작용을 행할 수가 없다.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을 이길 때 그것들 자체는 하나의 유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왜 원한이 복수심인가? 수용된 흥분의 힘이 어떻든지, 주체 자신의 전체 힘이 어떻든지, 원한의 인간은 전자에 집중하기 위해서만 후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도 또 흥분에 반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원한의 인간은 <반응하지> 못한다. 그는 흔적 이외의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그것에게 전가 시키기 때문이다. 원한의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이다. 흔적들의 기억은 자신속에서, 스스로 증오심에 가득 차 있다.

 

4). 원한의 특징들

정신은 복수를 의도로, 실현되지 않은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복수에게 수단을 제공한다. 주인의 유형(적극적 유형)은 대응하는 힘으로서의 망각 능력에 의해서 정의된다. 노예의 유형(반응적 유형)은 놀랄 만한 기억에 의해서, 원한의 힘에 의해서 정의된다. 감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무능력. 흔적들의 기억은 스스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원한의 인간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의 악의가 아니라, 그의 혐오스러운 적의, 그의 경멸하는 능력이다.

니체의 저작 속에서 수동적은 비-적극적을 뜻하지 않는다. 비-적극적, 그것은 반응적이다. 그러나 수동적은 영향 받지 않는 을 뜻한다. 수동적인 것은 단지 영향 받지 않는 한에서의 반작용이다. 수동적은 반작용의 승리, 영향 받길 중단할 때 그것이 소위 원한이 되는 그 순간을 가리킨다. 원한의 인간은 이득의 인간, 이익의 인간이다. 노예들의 도덕을 가지고 있고, 그 도덕은 실리의 도덕이다. 본래적 도덕은 공리주의의 관점을 숨긴다. 공리주의는 수동적 제3자의 관점, 주인들 사이로 개입하는 노예의 의기양양한 관점을 숨긴다.

잘못의 전가, 책임의 분배, 영원한 비난.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노예의 근본적인 정식이 그러하다. 그것은 유형학적 관점에서의 원한의 본질을 표현한다. 노예는 우선 타인이 악의가 있음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

 

5). 그는 선량한가? 그는 악의가 있는가?

우리는 <나는 선량하다>라고 말하면서 시작하는 자는 누구인지 묻는다. <나는 선량하다>라고 말하는 자는 소위 선량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그렇게 자신을 부르고, 명명하며,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 선량함은 실행 속에서 체험된 활동, 긍정, 즐거움에 성질을 부여한다. 선량함은 주인을 지시한다. 악의가 있음은 결과를 의미하고 노예를 지시한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 주인에게서 긍정적인 것은 전제 속에 있다. 주인은 하나의 부정을 만들기 위해서 두 개의 긍정 명제를 필요로 하며 최종적인 부정은 단지 전제들을 강화 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인 어떤 삼단 논법에서 자기를 재인식한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그래서 니체는 원한과 공격성을 구별하기를 몹시 바랬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이 정식 속에서는 바로 노예가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자의 관점에, 그 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가장 날카로운 관점에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행동 하면서가 아니라 행동에 제동을 걸면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긍정 하면서가 아니라 부정으로 시작 하면서 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창조되지 않은 것, 신성한 것, 초월적인 것, 삶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유대교의 원한의 대립자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그것의 결론, 그것의 완성이다.

 

6). 오류 추리

너는 악의가 있다. 나는 너와는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오류 추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원한의 오류 추리는 바로 어떤 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 그 허구 덕분에, 반응적 힘들이 승리한다. (1) 인과성의 계기 : 사람들은 힘을 둘로 나눈다. 힘이 자신의 표명에서 분리될 때, 사람들은 그 표명을 그들이 구별되고 분리된 원인으로서의 힘에 결부시키는 결과로 만든다. (2) 실체의 계기 : 사람들은 그것을 표명하거나, 표명하지 않을 자유가 있을 주체속에, 기체 위에, 그처럼 둘로 나뉜 힘을 투사한다. 사람들은 힘을 중립화시키고, 그것을 또한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주체의 행위로 만든다. (3) 상호 결정의 계기 : 사람들은 그처럼 중립화된 힘을 도덕화한다. 힘들이 허구적 주체 속으로 투영 되자 마자, 그 주체는 자신이 유죄이거나 찬양 받을 만함을, 즉 적극적 힘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활동성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유죄이며, 반응적 힘이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찬양 받을 만함을 입증해 보인다.

 

7). 원한의 발전 : 유태교의 사제

원한, 그것 자체는 두 측면 또는 두 계기를 가지고 있다. 동물 심리학의 의문인 위상학적 측면. 유형학적인 두번째 측면. 첫번째 경우에 모든 것은 반응적 힘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이동). 두번째 경우에는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을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지만, 어떤 허구에 의해서, 어떤 신비화에 의해서(투영에 의한 전복)이다. 우리가 원한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1) 반응적 힘들이 어떻게 그 허구를 생산하는가? (2) 그것들이 어떤 영향 아래서 그것을 생산하는가? 말하자면, 누가 반응적 힘들을 첫번째 단계에서 두번째 단계로 가도록 만드는가? 누가 원한의 질료를 공들여 만드는가? 누가 그 원한에게 형태를 주며, 원한의 <예술가>는 어떤 자인가?

<도덕 계보학>은 사제의 첫번째 심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원한에 형태를 부여하는 자, 비난하고 항상 복수의 계획을 더 멀리 까지 추구해 나가는 자, 감히 가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자, 그는 바로 사제이다. 그는 부정적인 전제들을 만들어내는 자이다. 그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보장하고 그는 그 승리를 필요로 하지만, 그는 그 반응적 힘들의 목적과 혼동되지 않는 목적을 추구한다. 그의 의지는 권력의지 이고 그의 권력의지는 허무주의이다.

사제가 어떻게 유태 민족사속에서 형성되었는가? 그는 어떤 조건에서 형성되었는가? 그 조건들은 유럽사 전체에 있어서 결정적일 것이다.

 

8). 가책과 내재성

두 측면에서의 원한의 대상이 있다. 즉 적극적 힘에게서 그것의 실행의 물질적 조건을 박탈하는 것과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절대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적극적 힘이 왜곡되고 자기의 실행 조건이 박탈되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되는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안으로 돌아서면서,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 내재화하기, 자기에게서 등돌리기, 바로 그것이 적극적 힘이 현실적으로 반응적이 되는 방식이다. 원한 속에서 반응적 힘은 비난하고 자신을 투영한다. 적극적 힘의 내부로의 투사는 투영의 반대가 아니라 반응적 투영의 결과이자 귀결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될 때 적극적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그것은 고통을 생산한다.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않고 고통을 생산하는 것이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지배 받는 대신, 고통은 과거의 적극적 힘에 의해서 생산된다. 가책의 첫번째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힘의 내부로의 투사에 의한 고통의 배가이다.

 

9). 고통의 문제

가책의 첫번째 측면, 내재성은 복잡한 개념이다. 우선 내재화되는 것, 그것은 적극적 힘이다. 그러나 내재화된 힘은 고통의 생산자가 된다. 두번째로 사람들은 고통에서 새로운 의미. 내적인 의미, 속뜻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고통을 원죄, 잘못의 결과로 만든다. <잘못, 공포, 처벌의 느낌으로 변화된 고통>이 바로 가책의 두번째 측면, 그것의 유형학적 계기이며, 이때의 가책은 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우리는 고통받는 자의 관점에 서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 서 있다. 고통의 적극적 의미는 다른 관점에서 나타남을 이해하자. 고통은 삶을 반박하는 논증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삶의 흥분제, <삶을 위한 미끼>, 그것을 위한 논증이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적극적 삶으로서의 삶의 구조, 삶의 적극적 표현이다. <…잔인성 없이는 즐거움도 없다…>

가책은 고통을 위한 새로운 의미, 내적 의미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잘못의 결과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다. 또 그들은 보다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하면서, 그것을 훨씬 더 내재화하면서 고통에서 회복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잊는다. 비극은 드라마가 내적 투쟁이 됨과 동시에, 고통이 내재화됨과 동시에 죽는다. 그러나 누가 고통의 내적 의미를 고안하고 원하는가?

 

10). 가책의 발전 : 기독교 사제

가책을 가공되지 않은 상태나 동물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기독교의 사제, 바로 그는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한다. 그는 비난하고, 삶 속에서 적극적인 모든 것을 비난한다. 원한의 힘은 전적으로 다른 이를 향하고, 다른 이들에 반대한다. 적극적 힘들을 반응적이 되도록 만든다. 지금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반응적 인간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제는 원죄의 개념을 고안해 낸다. 잘못이란 단어는 지금 내가 저지른 잘못, 나 자신의 잘못, 나의 유죄성을 지시한다. 바로 여기에 고통이 내재화되는 방식이 있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완성이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결과이며 거기서 그것의 모든 전제를 발견하고, 그것은 그 전제들의 결론에 불과하다.

가책의 첫번째 측면의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고통의 배가이다. 두번째 측면의 정의는 원한의 방향 전환에 의한 고통의 내재화이다.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고통의 내재화, 가책속에서의 원한의 방향 전환은 어떤 허구에 근거하고 있는가?

 

11). 선(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문화는 훈련과 선택을 의미한다. 니체는 문화의 운동을 <풍속의 도덕성>이라고 부른다. 풍속의 도덕성은 보편사를 선행한다. 문화는 종적 활동.

<선(역)사적>은 <종적>을 의미한다. 문화는 인간의 선(역)사적 활동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항상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는 것, 그에게 법칙들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 그를 훈련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문화는 의식에게 외관상 망각의 능력과 대립되는 새로운 능력, 즉 기억을 부여한다. 감성의 기억이 아니라, 의지의 기억이다. 그것은 흔적들의 기억이 아니라, 발언들[약속들]의 기억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약속하는 능력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효과이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인간들의 관계는 등식에 의하자면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관계로서 결정된다. 정의는 인간을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훈련이나 교육의 과정 속에서 문화의 활동을 표현한다. 선(역)사적 활동에 상응하는 그 관계 자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며, <개인들 사이에서 가장 원시적인> 관계이고, <모든 사회 조직의 기원에> 앞서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니체는 우리에게 다음의 종적 계보를 제시한다. (1) 훈련과 선택의 기획인, 선(역)사적이고 종적인 활동으로서의 문화. (2) 그 활동에 사용된 수단, 처벌의 등식, 부채 관계, 책임 있는 인간. (3) 그 활동의 산물, 즉 적극적이고 자유로우며 강력한 인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다.

 

12). 후-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가책도 원한도 문화와 정의의 과정 속에 개입하지 않는다.  정의가 원한을 기원으로 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벌이 가책을 산물로 삼지 않는다. 처벌의 의미의 다수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처벌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의미가 있다. 처벌은 죄인에게 잘못의 감정을 상기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종적 활동은 반응적 힘들의 책임자로서의 인간을 구성한다. 즉 부채-책임성. 그러나 그런 책임성은 단지 훈련과 선택의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반응적 힘들의 영향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늠한다. 종적 활동의 최종산물은 책임 있는 인간 자신도, 도덕적 인간도 결코 아니고, 자율적이고 초-도덕적 인간, 다시 말하자면 실제적으로 반응적 힘들을 행사하는 자 그리고 자신 속에서 모든 적극적 힘들이 영향을 받는 자이다.

문화의 산물은 법에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책임이 없는 자이다. 자율적개인은 법정 앞에 선 반응적 힘들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이 없고, 그것의 주인이며, 주권자이고, 입법자이며, 창안자이고 행위자이다. 바로 그는 말하지 대답할 필요는 없다. 문화는 인간의 종적 활동이다. 하지만 그 모든 활동이 선택적일 때, 그것은 종적인 것 자체가 그 속에서 제거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개인을 낳는다.  

 

13).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된 문화

역사속에서 문화는 완전히 다른 본성의 힘들에 의해 사로잡힌 채로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는 아주 다른 의미를 받아들인다. 역사는 그 변질 자체이고 그것은 <문화의 퇴행>과 혼동된다. 종적 활동 대신, 역사는 우리에게 인종들, 민족들, 계급들, 교회들 그리고 국가들을 제시한다.

역사는 반응적 힘들이 문화를 독점하거나 그것을 그 힘들의 이득으로 우회 시키는 행위로서 나타난다. 반응적 힘들의 승리는 역사 속에서의 한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보편사>의 원리와 의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다. 아무튼 그래도 인간의 종적 활동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목적에 있어서는 실패하고 길들여진 인간에 도달하면서 변형된다.

반응적 힘들의 결집들은 종적 활동에 이식되고 그것[종적 활동]을 필연적으로 자신의 의미에서 등을 돌리도록 만든다.

 

14). 가책, 책임성, 죄의식

그렇게 반응적 힘들이 종적 활동에 이식될 때 그것들은 그것의 <계보>를 중단시킨다. 게다가 어떤 투영이 개입한다. 그것은 부채이며, 투영되고 그 투영 속에서 본성을 변화시키는 채권자-채무자 관계이다. 고통은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은 죄의식-책임성이 되었다. 사제는 원한의 방향을 바꾸면서 고통을 내재화하는 자이다. (1) 종적 활동을 위해서 그리그 그 활동을 침해하면서, 반응적 힘들은 결집들(무리들)을 구성한다. (2) 종적 활동에서 배제된 부채는 반응적 결집 속에서 투영된다. 채무자의 고통은 내재화되고, 부채의 책임성은 죄의식이 된다. (3) 사제는 우리를 다수화 되고 내재화된 고통에 견디도록 만드는 수단들을 고안한다. 그는 그가 투입한 유죄성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원한의 방향을 바꾸면서 가책의 인간들은 복수를 더 잘 만족시키는 수단, 전염병을 더 잘 확산시키는 수단을 발견했다. (4) 가책의 형태가 원한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허구를 함축하고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가책은 종적 활동의 우회, 그 활동의 침해, 부채의 투영에 근거한다.

 

15). 금욕적 이상과 종교의 본질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들이 있음을 말한다. 종교는 그것을 독점할 수 있는 힘들이 존재하는 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니체가 우리에게 적극적 종교, 강자들의 종교, 원한도 가책도 없는 종교에 대해 말할 때마다, 종교가 자신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의 힘들에 의해서 소위 종속되어 있어 자신의 가면을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문제이다. 니체에 의하면, 종교는 가책, 원한 쌍방 모두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의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가책의 인간, 원한의 인간인 성 바울이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를 가리킨다. 금욕적 이상이 반응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드는 의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금욕적 이상속에서의 저 세상의 허구, 그것이 바로 원한과 가책의 방법들에 동반 되는 것이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게 하는 것이고, 세계에 외관이나 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반응적 형태 아래서만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삶이 모순되고, 부인되고 무화 되어야만 하는 그 수단으로서 반응적 삶을 필요로 한다.

 

16). 반응적 힘들의 승리

니체는 그 유형학을 관통해서 (그에 의하면)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고 인간과학들에게 새로운 토대를 제공해야만 하는 어떤 철학을 발전시킨다. 즉 계보학적 철학, 말하자면 권력의지의 철학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4
705 [니체의 영원회귀] 9강 니체의 철학 제4장 원한에서 가책까지 발제 파란꼬리 2018.11.15 112
» [니체의 영원회귀] 9강 예습글 유택 2018.11.14 53
70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결석계 [1] 김수진 2018.11.12 57
702 [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1] file minhk 2018.11.12 344
701 [니체의 영원회귀] 8강 강좌후기- 3장 비판 [2] 도치기 2018.11.11 104
700 [니체의 영원회귀] :: 8강 예습쪽글 - [니체와 철학] 반동적 과학과 능동적 과학 oracle 2018.11.08 60
699 [니체의 영원회귀] 8강 예습쪽글 floor 2018.11.08 47
698 [니체의 영원회귀] 쪽글_8주차_니체와철학_3장 미라 2018.11.08 60
697 [니체의 영원회귀] 8강 "니체와 철학" 제3장 비판 발제문 file david77 2018.11.08 51
696 [니체의 영원회귀] 7강 후기 [2] 조영권 2018.11.06 94
695 [니체의 영원회귀] 8강 예습글 유택 2018.11.06 87
69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공지 : 휴강!! [1] 케이 2018.10.31 119
69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결석계 [1] 경호 2018.10.29 76
69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늘하고 다음주까지 어려울 것 같아요 [1] 선완규 2018.10.29 96
69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모호한 문장들 수정번역 [2] wonderland 2018.10.29 449
690 [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1] file minhk 2018.10.29 1382
689 [니체의 영원회귀] 7강 "니체와 철학" 제2장 발제문 [1] 달공 2018.10.25 165
688 [니체의 영원회귀] 7강 쪽글입니다. sora 2018.10.25 41
687 [니체의 영원회귀] :: 7강 예습쪽글 - [니체와 철학] 영원회귀의 2차원 oracle 2018.10.25 396
686 [니체의 영원회귀] 인사원_니체_쪽글_7주차_니체와철학_2장 미라 2018.10.25 59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