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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것

Ⅰ. 계보학의 개념

창조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면서 삶을 경쾌하게 만드는 것이고 삶에서 부담을 없애는 것이다. 칸트는 삶과 세계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전통형이상학의 주장을 부당한 월권으로서 고발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인식이라는 이상 자체를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전통철학에 대해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계보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통철학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나 순수한 도덕법칙의 정초 등을 목표로 하지만 니체는 모든 현상들에서 나타나는 가치평가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경우 가치평가는 가치들이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자들의 존재방식이다. 힘에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이 있는 것처럼 가치평가에는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고상한 것과 저속한 것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가치들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들의 기원에 해당한다.

계보학은 모든 현상들에 숨겨져 있는 의미에 해당하는 능동적인 힘이나 반동적인 힘과 가치평가의 방식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니체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삶과 세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니체는 삶과 세계 전체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 전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삶과 세계에서 벗어나 삶과 세계를 대상으로서 고찰해야 하지만 이는 삶과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삶과 세계 전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어떠한 철학도 사실은 그 철학자의 삶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니체 식으로 표현하면 모든 철학은 철학자들의 가치평가가 표현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니체의 계보학은 가치들의 기원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치들을 비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양면적인 투쟁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성스러움이나 진선미 같은 기성의 가치들을 기준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투쟁이며, 다른 것은 단순한 사실들, 즉 이른바 ‘객관적 사실들’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려는 자들에 대한 투쟁이다. 전자는 칸트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의 노동자들’에 대한 비판이며, 후자는 공리주의자들, ‘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계보학은 어떤 가치들을 근저에서 규정하는 가치평가의 저열함이나 고귀함을 문제 삼는다. 계보학은 보편타당하거나 모든 사람들에게 유사하게 타당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평가하는 자들의 저열함이나 고귀함에 따라서 각각 존중되는 가치들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Ⅱ. 힘과 의지

들뢰즈는 물리 현상이든 생물 현상이든 그리고 인간적인 현상이든, 모든 현상들의 의미는 그것들에서 표현되어 있는 힘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본다. 다양한 현상들은 그것들에서 표현되어 있는 힘의 기호이며 징후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니체는 현상과 의미의 상관관계라는 도식으로 가상과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의 이원적 도식과 원인과 결과라는 과학적인 도식을 대체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니체가 똑같이 사랑이라는 가치를 내세운다고 해도,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을 규정하는 힘은 반동적인 것임에 반해서 니체가 말하는 사랑을 규정하는 힘은 능동적인 것이다. 모든 대상과 현상은 힘의 표현이다. 이러한 힘은 항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며, 그것은 다른 힘과 관계하는 식으로만 존재한다. 힘과 마찬가지로 힘의 미분적 요소인 의지도 의지와 관계하는 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세계는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지 의지와 비의지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힘이 복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도 복수적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의지를 단일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복수적인 것으로 보느냐로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구별한다. 의지를 단일한 것으로 보는 쇼펜하우어는 이성에 의해서 의지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의지를 복수적인 것으로 보는 니체는 부정하는 의지를 긍정하는 의지에 의해 극복하려고 한다.

 

Ⅲ. 변증법

들뢰즈는 변증법적 사유가 헤겔뿐 아니라 헤겔 이후의 사유를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니체의 ‘차이’와 ‘놀이’의 철학을 변증법적 철학을 극복하는 철학으로 본다. 변증법적 사유란 자연과 역사가 순조롭게 발전한다고 보지 않고 모순과 대립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니체는 변증법의 특색을 생성과 삶을 부정하는 노동에서 찾으면서 이러한 부정의 노동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놀이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정, 대립 또는 모순의 변증법적 요소 대신에 니체는 차이의 실천적 요소, 긍정과 즐김을 내세운다. 어떤 의지가 원하는 것은 그것의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변증법의 무거운 사고와 부정의 노동을 대체하는 새롭고 공격적인 고양된 삶의 방식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는 인식과 삶의 방식을 ‘경험주의’라고 부른다. 변증법은 노동이고 경험주의는 즐김이다. 이와 함께 들뢰즈는 긍정을 변증법적 부정과 대립되는 것으로 그리고 차이를 변증법적 모순과 대립되는 것으로, 동시에 기쁨과 즐김을 변증법적 노동과 그리고 가벼움 및 춤을 변증법적 무거움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변증법을 원하는 의지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지 못한 피로한 의지이다. 그것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반작용할 뿐이다. 능동적인 힘은 자신을 심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반면 부정적인 힘은 관료주의화되어 갈수록 경직될 뿐이다. 변증법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항목으로 환원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변화와 생성을 오독한다. 계보학자의 눈에 비친 부정의 노동은 힘에의 의지의 유희들에 오직 조야한 상태로만 가까울 뿐이다. 변증법은 징후들을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외관상의 운동을 사물의 발생적 법칙으로 격상시키며 원리에 대해서 단지 전도된 이미지만을 갖는다. 따라서 변증법은 허구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Ⅳ. 비극의 문제

니체는 비극적 세계관을 변증법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에 대립시켰다. 변증법은 비극을 부정적인 것, 대립과 모순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들뢰즈는 쇼펜하우어의 영향 아래서 쓰인 니체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은 비극의 본질을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라는 원리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기에 니체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헤겔과 변증법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고 본다. 그 책은 모순과 그 모순의 해결이 고려되는 방식에서만 변증법으로부터 구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니체가 후기에 어떤 방식으로 비극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는지 고찰하기 위해서 『비극의 탄생』을 검토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그리스 비극은 염세주의와의 대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후기 사상에서 전개하고 있는 니힐리즘과의 대결을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즉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염세주의를 극복했는지를 고찰하는 방식으로 니힐리즘과 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을 병약하게 만들면서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기독교와는 달리 그리스 비극은 이 현실 세계의 욕망과 본능을 긍정하고 신성한 것으로 변용시키면서 인생의 고통과 염세주의를 극복했다. 우리는 니체를 통해 그리스인들이 이렇게 현실세계를 긍정하면서 염세주의를 극복한 방식으로 세 가지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아폴론적인 예술이고,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며, 세 번째는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결합으로서 비극이다.

아폴론적인 예술은 어떤 개별적인 현상들의 보편적이며 영원한 본질, 즉 플라톤이 말하는 바와 같은 이데아를 표현한다. 이러한 이데아적인 현상은 영원불변한 실재다. 그것들은 존재하지만 시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폴론적인 예술은 시간공간상의 개별자를 통해 개별자 배후에 있는 보편자를 보여준다. 이러한 보편자를 감상하면서 우리가 예술 작품에 몰입해 있는 동안 우리의 경험적인 자아 역시 시공간에 있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 안에 진입하게 된다. 아폴론적인 예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맛보게 되는 행복은 이러한 데서 비롯된다. 이에 반해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인 음악은 현상세계의 근저에 있는 통일적인 세계의지 자체를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의지 자체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덧없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경험적인 세계 근저에 있는 심연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아폴론적인 예술은 경험적인 세계를 넘어선 이데아 세계를 표현한다. 음악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망각하고 음악이 표현하는 세계의지와 혼융일체가 되어 버리는 반면에 아폴론적인 예술에서 인간은 개별적인 사물에 나타나 있는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이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음악 속에서 우리는 슬퍼하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도취하지만 아폴론적인 예술에서는 우리는 관조상태를 유지한다. 이 둘의 대조는 해소되어야 하며 “통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비극은 이러한 화해, 디오니소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놀랍고도 불안정한 동맹이다. 니체는 현실 세계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하는 최고의 방식을 그리스 비극으로 본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을 통해서 표현되는 세계의지의 슬픔 자체를 비극의 주인공이 겪는 운명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그러한 아폴론적인 형상을 관조하게 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한다.

들뢰즈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칸트, 쇼펜하우어, 바그너에서 보는 것처럼 모순을 재생산하면서 그것을 초개인적인 세계의지 안으로 해소하는 측면이 있지만 또한 이러한 측면을 뛰어넘는 면도 있다고 보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처음부터 긍정적인 것과 긍정하는 신으로 묘사된다. 그는 보다 높고 초개인적인 기쁨 속에서 고통을 해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고통을 긍정하면서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킨다. 디오니소스는 다수성을 통일적인 존재 안으로 해소하거나 원시적 깊이 속으로 재흡수하기보다 다수의 긍정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성장의 고통과 삶을 긍정하는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을 정당화하거나 구제하는 신이 아니라 생을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신이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에서는 삶의 긍정보다는 오히려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혀서 개인과 다수성을 초개인적인 우주적 의지로 해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니체가 자신의 마지막 저작에서 반쯤은 변증법적이고 반쯤은 쇼펜하우어적인 이론 틀을 넘어서는 두 가지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첫 번째는 디오니소스의 긍정적 성격과 삶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가장 진정한 길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두 번째는 진정한 대립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사이의 변증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의 대립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대립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Ⅴ. 디오니소스 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의 의미는 사람들은 무지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올바르고 확실한 통찰을 갖지 못한 채 오직 본능으로부터만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단지 본능으로부터만’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생각에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용기에 대해서 지적으로 아는 것보다는 실제로 용기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니체는 용기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용기에 대한 지적인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처럼 용기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하게 되면 용기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실제로는 용기가 없는 인간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모든 생산적인 인간에게는 본능이야말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힘이라고 본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서양을 장악한 이후 서양에는 본능의 힘이 약화되고 냉철한 지성과 이성이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보며, 그것이 서양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퇴폐의 천재라고 보았다. 그는 관념을 삶에 대립시키고 관념의 견지에서 삶을 판단한다. 그는 우리에게 삶은 그 자체로 욕망될 가치가 없으며 그것 자체로 경험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인식과 의식의 강조를 통해서 창조적인 무의식을 제한하고 방해하는 소크라테스의 지성주의는 존재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 천박한 수사학적 변론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는 너무나 그리스인적인 면모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니체는 자신의 진정한 적대자를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찾는다. 이와 함께 디오니소스 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대립으로 대체된다. 아폴론적인 것도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아닌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Ⅵ. 디오니소스 대 기독교

니체는 기독교를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을 지배해 온 이원론의 극단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생성 변화하는 현실을 가상이나 타락한 세계로 보면서 영원불변의 세계를 진정한 세계로 간주한다. 그것은 인간도 생성 변화하는 현실에 속하는 부분인 육체와 그렇지 않은 부분인 영혼으로 나눈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가 준수하는 모든 가치들이 신이나 순수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가치들에 따라서 생을 측정하고 제한하고 단죄한다. 생과 사유는 서로 분리되고 사유는 소위 생보다 더 높은 가치를 생에 대립시킨다. 이원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생을 건강하고 경쾌한 생으로 만들 수 있는 가치들을 창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상에 의해서 규정된 가치들을 짊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삶을 양심의 가책 또는 고통의 내면화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보는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삶과 삶에서 보이는 가장 모진 괴로움조차도 긍정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생에 대한 전폭적인 긍정으로 보는 것과 함께 비극적인 것에 대한 니체의 견해도 바뀌게 된다. 비극적인 것은 기쁨의 미적 형태이다. 이제 니체는 ‘모순의 발전, 모순의 해결, 모순들의 화해’와 같은 사고들을 멀리하게 된다. 모든 화해보다 더 높은 것은 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Ⅶ. 생성과 우연의 많은 조각들

니체는 삶과 생성하는 세계에 대한 비난과 부정은 기독교 이전에도 이미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존재자들이 자신들이 무한자에서 비롯된 것임을 망각하고 자신들을 무한자로 내세우면서 오만에 빠지지만 그에 대한 벌로서 무한자에 의해서 소멸에 처해진다고 보았다. 생과 생성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러한 이해는 생과 생성에 대한 기독교적인 부정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니체는 생에 대한 기독교적인 부정과 그리스적인 부정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죄스럽고 비난받을 것으로 보지만 아직 그러한 죄와 부당함에 대해서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기독교에 비할 때,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들이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 그들의 ‘허무주의’는 기독교적 완전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이 삶의 고통과 부당함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니체는 기독교를 삶에 대한 원한과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기독교인은 삶을 고통에 차 있는 것으로 보면서 삶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그러한 고통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따라서 니체는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삶과 세계를 비난받을 만하고 부당한 것으로 보느냐 무구한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야말로 생이 그 자체로 무구하며 정의롭다고 생각한 사상가로 보았다. 그는 세계의 이원성을 부정했고, 생성을 긍정으로 만들었다. 그는 생을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미적 현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죄의식이 아니라 놀이의 본능이 삶을 지배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을 무한한 세계에 대해서 자신을 내세운 대가로 소멸에 의해서 자신을 속죄해야만 하는 부정들의 합계로 보지 않고 무구하게 놀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영원불변한 하나가 생성하는 다수를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필연은 우연을 억압하거나 없애버리지 못한다. 니체는 우연을 다수성과 단편들, 부분들, 혼란과 동일시한다. 니체는 우연을 긍정으로 변화시킨다. 니체는 놀이할 줄 아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 - 이것들이 우리가 그 안에서 잘 놀기 위해서 필요한 확실성이다. 모든 놀이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소망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긍정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행해질 수 있다. 우연적인 것들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사태야말로 니체가 영원회귀라는 것으로 말하려고 했던 사태라고 본다. 그러나 서양의 전통철학은 영원회귀 속에서 생성의 존재 자체를, 다수성의 통일을 보지 않았다. 니체에 따르면 비극적인 것은 즐거운 것이며 순수하고 다수적인 능동성이며 역동적인 유쾌함이다. 긍정은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과 우연의 필연성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수성을 긍정하고 다수성의 필연적인 통일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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