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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 6강예습 쪽글

floor 2018.10.18 14:22 조회 수 : 68

1장 비극 tragic

 

1.계보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니체는 철학에 의미sense와 가치value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의미와 가치의 철학>은 비판적이다. 그의 <가치 철학>은 참된 비판의 실천이며 가치 개념은 비판적 전복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의 평가는 가치를 전제하는데 그 가치로부터 현상을 평가한다. 역으로 가치도 평가를, 평가의 관점을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가치들의 가치, 가치에서 파생되는 평가, 그리고 이것들의 창조의 문제이다.

⦁평가는 무엇인가? 상응하는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미분적 요소가 비판적이며 창조적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요소와 결부된 평가가 가치는 아니다. 그들은 가치에서 파생된 미분적 요소일 뿐이다. 고귀함과 저속함, 우아함과 비루함 들이 그러하다.

⦁계보학은 기원의 가치이면서 가치들의 기원을 동시에 의미한다. 가치 그 자체가 파생된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를 의미한다. 우아함과 비루함이라도 기원속의 그것들은 계보학 속에 들어 있다. 미분적 요소만으로, 가치들의 가치만으로 비판적이지 못하다, 비판을 작용action으로 간주 할 때만 그들은 창조적으로 된다.

 

2. 의미는 결국 해석이다. 단지 복수주의적 해석이다.

⦁하나의 <현상>은 실재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이며 증후symptom이다. 그렇다면 철학도 기호학이자 징후학이다. 단지 외관-본질 혹은 원인-결과 로 이해되기 보다는 현상-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미를 해석함에 절대적 진리가 있을까? 하나의 사건도 의미는 다수이다. 모든 현상, 모든 말은 의미가 다수이다. 하나의 사물이 여러 의미를 가진다는 복수주의적 생각은, 동일한 것에 여러 가지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 속에서 한 사물과 그것과 다른 것과의 힘들 간의 평가가 철학의 해석의 기술이다. 이런 복수주의적 해석이 본질을 변화시키진 않는다. 의미만 차이가 나는데 한 사물을 탈취, 독점 할 수 있는 힘들 만큼 차이가 난다.

⦁가면과 속임수는 자연의 법칙이다. <한 대상을 이미 점령했던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쓰면서, 새로운 힘은 모습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해서 앞선 힘들의 얼굴을 빌리지만 그것은 가면이고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만 그 가면과 속임수를 극복할 수 있는데, <복수주의의 해석의 기술>을 통해 가면을 꿰뚫어보고 누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 왜 쓰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기원내의 차이의 본질을 파악하는 계보학을 통해서 철학은 성장하고 그럴 때 그 가면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다른 힘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힘의 미분적 요소가 의지will 이다.

⦁대상은 힘이고 힘의 표현이다, 상이한 힘들이 대상과 투쟁을 하면서 그 대상을 점유하고 탈취한다. 힘에 의해 소유되지 않은 대상(현상)은 없다. 힘의 존재는 그래서 항상 복수이다. 지배당하거나 지배한다. 이때 힘들은 거리를 두고 acting을 한다. 이 거리가 힘들의 미분적 요소이다. <복수성, 거리>는 힘의 본질이다.

⦁힘들간의 차이, 미분적 요소가 의지will 이다. 의지는 다른 의지에만 작용한다. 그러나 의지는 다른 의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른 의지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 한다. 힘관계에서만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 다른 힘을 온전히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지배/통제가 불가능하면, 힘들은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의 현실을 구성하지 못한다.p27

⦁복수주의는 <의지철학> 속에서 자신의 직접적인 확증과 선택의 영역을 발견한다. 복종하는 의지와 복종시키는 의지 사이의 차이는 서열Hierarchy 이다. 계보학 때문에 우리는 의미에서 가치(차이를 내포)로 이행할 수 있고 해석에서 평가(차이 포함)로 이행할 수 있었다.

 

4. 니체는 변증법을 싫어한다. 아주 많이

⦁니체는 힘이 다른 힘을 취할 때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대상으로써 취한다고 했다. 지금의 내 삶도 다른 종류의 삶과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관계는 복수주의적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복종시키는 힘과 복종하는 힘의 관계가 그렇게 보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복종하는 힘이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종하는 힘조차도 관계 속의 힘의 차이를 긍정하고 이를 향유한다. 관계 속에서 다른 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변증법주의자들의 의지를 살펴보면 ⓵차이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지 못한 고갈된 힘이고, ⓶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반응하는reactive to 힘만이 존재하고, ⓷ 자신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며, ⓸ 그 부정을 자신의 본질과 현존의 원리로 삼는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자체가 변증법적이라기보다 그 관계를 변증법화 한다. 곧 노예의 관점에서, 주인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변증법화 한다. 주인- 노예 관계에서의 권력은 권력의 의지로 이해되지 않고, 의지는 <권력의 표상, 우월성의 표상>으로서 재인식된다. 투쟁이 끝나면 권력을 기존 가치들에 결부시켜버린다. 이는 노예의 의지이다. 헤겔이 제안하는 <주인의 초상>은 니체주의적 귀족은 아니다. 헤겔의 주인은 단지 <주인의 이미지만을 가진 출세한 노예>이다,

 

5. 니체가 <비극Tragedy>라고 명명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 원초적 통일과 개별화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 <의욕과 외관> 사이에도, <삶과 고통 >사이에도 모순이 존재한다. 이런 모순은 삶을 반대하며 삶을 비판한다. 이런 삶은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다. 변증법주의자들과 기독교주의자들은 <고통과 모순>에 의해 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니체는 모순과 비극을 관련시키지 않는다.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거기서 이해되는 방식은 변증법과 다르다.

⦁모순은 <디오니소스-아폴론>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모순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고 있지, 자체로 대립하는 건 아니다. 아폴론은 조형적 이미지의 관조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직접적 재생산 속에 또 의지의 음악적 상징 >속에 그 방식이 있다. 이 두 사람의 반테제는 해소되어야만 한다. 비극은 그런 화해이다. 거기서 유일한 인물은 디오니소스 여야한다. 비극은 아폴론적인 이미지의 세상을 자신 밖으로 투영시키면서 스스로 펼쳐나가는 디오니소스적 합창단이다 라고 할 수 있다.

 

6. 니체의 발전Evolution을 만날 수 있다.

⦁「비극의 기원」에서의 첫 번째 디오니소스는, 원초적 모순의 해결 방식에서 나온다. 두 번째 디오니소스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식이 완전 새롭다. 그는 우월하고 초-인격적인 쾌락 속에서 고통을 해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⓵ 고통을 긍정하고, ⓶ 그 고통을 누군가의 쾌락으로 만들며, ⓷ 원초적 존재로 귀착되거나 원초적 기초 속에서 다수를 소멸시키기보다, 다수의 긍정으로 스스로 변신한다 ⓸ 그리고 개별화의 고통을 재생산하기보다 생장의 고통pains of growth를 긍정한다.

⦁첫번째 디오니소스는, 초-인격적supra-personal 요소를 동반함으써 두 번째 디오니소스보다 특권을 가지려 한다. 영원회귀의 전조가 바로 그 요소이다.

⦁비극의 인간은 순수 긍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요소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적도 발견해야 한다. 니체는 이를 현실화시킨다.

 

7.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둘사이의 대립보다는 이 둘의 변증법과의 대립이 중요하다.

⦁기독교에서는 삶의 고통에 대해, 그래서 삶은 정의롭지 못하고 본질에 있어서도 부정의nonjustice하다고 보았다 그런 삶의 부정의는 고통에 의해 갚아지고, 대속되어진다고 이야기한다.saved by suffering. <양심의 가책과 고통의 내제화>가 기독교의 두 측면이다. 하지만 스스로 정당화 되어야지 고통에 이해서 정당화 되지 않는 법이다.

⦁변증법주의자들은 이런 기독교적 해석을 자기들의 반테제anti-thesis로 놓는다. 하지만 이런 반테제 설정은 마치 꽃이 잎을 반박하는 것처럼 사랑이 증오를 반박하는 격이다. 그 사랑은 증오로부터 나왔는데 말이다.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은, 두 종류의 고통과 두 종류의 고통 받는자의 대립이다. ⓵ 디오니소스적인 자들은,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운 자들이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인식한다. ⓶ 기독교적인 자들은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십자가의 죽은같은 고통으로 삶을 비난하며 삶에 반대하는 수단을 만들어 정당화하고 모순을 해결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모든 화해보다 고귀한 것, 즉 긍정을 소리친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치 전환>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대립이 아닌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이다.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이 그 특별한 형태에 반대하는 미분적인 긍정이 바로 그것이다.

 

8.비극의 본질은 결국 다수의 긍정, 복수의 긍정이다.

⦁과연 모든 것이 긍정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려면 특별한 수단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극이다. 그런데 불안이나 혐오 속에서는 그런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은 <단지 긍정 그 자체의 복수성>, <다수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니체의 저작에 불안과 혐오가 나타날 때에는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때이다.

⦁니체는 비극에 대한 본질적 무지를 고발한다. 그런 무지의 사람들은 병적인 청자聽者이다. <비극의 부활>은 예술적 청자의 부활이다. 바그너의 극적으로 표현된 비극을 니체는 비판하고 영웅적 표현, 디오니소스적인 영웅, 명랑한 영웅을의 권리를 주장한다.

⦁일반적인 변증법은 비극적 세계관이 아니다. 현대적 변증법은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이며 이들은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의 노동에 종속한다.

 

9.현존은 의미를 갖는가? 라는 질문은 가장 경험적이고 실험적, 고귀한 질문이다.

⦁우리의 현존은 의미를 갖을까? 이 질문은 변증법이나 기독교에서나 비극적 사유에서나 모두가 갖는 질문이다. 결국 해석의 문제이고 평가의 문제이다. 니체의 전 작품도 이 질문에 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변증법적 해석으로는 현존은 잘못돤 것something faulty 이다. 이런 해석에는 신이 꼭 필요하고 이런 삶은 속죄받아야 한다. 과연 삶이란 그런 것일까?

1)현존에 대한 니체적 사유에서 현존은 성스러울 것이 없다. 단지 <현존>은 <고통을 포함한 긍정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비극적 방식으로 의미를 갖는다.

2)현존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는, 현존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만들고 거대한 부정의immence injusrice 와 속죄atonement 를 현존에게 부여한다. 도덕주의자들이 행복과 덕을 말하는 동안 그들은 철학을 노파로 만들었다. <잘못과 책임의 전가, 가시돋힌 힐난, 영원한 비난, 원한>이 그들의 현존에 대한 해석이다.

3) 현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사유방식에서는, 현존은 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책임은 신에게 있지 인간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유죄의 현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존의 유죄, 무죄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현존의 Innocence 이다.

 

10. 결백은 다수의 진리이다.

⦁모든 것은 어떤 힘에 의해서 해석되고, 어떤 의지에 의해 평가되도록 되어 있다. 모든 힘은 스스로 할 수 있고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긍정하고 긍정된다. 이런 것은 결백하다. 하지만 현존과 관련된 우리의 상황은 우리의 현세를 평가할 의지나, 현존을 해석할 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현존을 부인하고 비하하고 그런 비하를 해석, 평가하는 방식을 써 왔다. 현존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진다. 결백이야말로 현존의 힘이고 의지의 놀이이다.

 

11. 우연의 바다와 필연의 하늘- 주사위 던지기

⦁권력의지에 의한 힘관계의 우발적 생성은 주사위를 하늘로 던지는 것이고, 이러한 힘관계에 의한 현실의 필연적 생성은 주사위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초인에 있어 이 둘의 긍정, 우연과 필연의 긍정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런 반복이 영원회귀이다. 이런 영원회귀 속에서는 매번 <다른 힘관계>가 형성되기에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일한 조합을 재생산하는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가 아니다. 생산된 조합의 수 때문에 있는 그대로 재생산 할 수 있는 <단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이다. 사람들이 한 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 긍정된다. 일단 우연을 긍정해야 놀이꾼이 한 번 더 주사위를 더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조합을 낳기 위해 무수히 던지는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다. 우주는 목적도, 이식할 원인이나 소원할 목적도 없다. 단 한번의 우연이며, 운명적인 조합, 가장 사랑하는 운명적 조합이다. 아모르 파티이다.

 

12. 혼돈과 순환, 생성과 영원회귀

⦁최후의 성격을 띤 모든 활동을 배제하는 보편적인 혼돈은 순환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관념은 단지 비합리적인 필연성 때문이다. 혼돈을 다시 불러오는 수나 필연성을 동시에 긍정하기 위해 혼돈을 긍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혼돈은 없었다. 순환만이 약간 있었으나 언젠가 힘들의 혼돈이 존재한다면 그 혼돈은 영원했고 모든 순환에서 나타났다. 모든 생성은 순환과 힘의 덩어리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13. 니체의 상징주의적 표현들 모음

⦁주사위가 탁자위에 던져졌을 때 탁자는 요동하고 갈라진다.

⦁다수와 우연은 익히고 끊인 경우에만 좋은 것이다. 솥 안의 비등은 놀이꾼의 손 안에서 주사위의 부딪힘과 같고 다수나 우연을 긍정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는 우연에 다시 불을 지피게 하고 우연을 다시 익히게 하는 불을 유지시킨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 중에 가장 충분한 이유는 우연이라는 특별한 이유이다.

⦁혼돈- 불- 성좌 의 이미지 놀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의 모든 요소들을 결집시키고 있다.

 

14 니체와 말라르메의 공통점은 사유는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이며 그 우연으로부터 필연이 긍정되며 어떤 다른 수 일 수 없는 유일한 수를 낳게 된다고 생각했던 점이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니체와 달리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키고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15. 현존을 비난하고 비하해야만이 인간인가? 니체의 비극의 사유,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다.

⦁허무주의는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려는 시도이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은 허무주의의 형태들이고 그 형태들 모두를 복수주의라 부른다. 기독교에서는 이 허무주의 역사적 사건이 아닌 역사적 의미로 만든다. 복수의 충동느 <심리학, 역사, 형이상학, 도덕>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힘이다. 니체의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의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이제까지 사유가 의존하고 있었던 원한과 가책의 원리에서의 전복, 계보학적 원리의 재건과 전환이 니체의 새로운 사유 방식이다. 그것은 긍정의사유이며 모든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는 사유이다.

⦁긍정은 비극적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비극적이다.

 

15. 니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들의 시금석이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허무주의는 모든 니체주의자들의 시금석이다. 시금석이라는 말은 거기서 그가 비극의 참된 의미를 이해했는지를 잘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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