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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1장 비극 ​

* '힘에의 의지' 관련 목차 : 2. 의미, 3. 의지철학

* '영원회귀' 관련 목차 : 7. 디오니소스와 예수, 11. 주사위 던지기, 12. 영원회귀를 위한 결론들, 16. 시금석

 

          2. 의미          

 

[1] 의미와 힘

*주제 :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힘이다! 사물의 의미는 힘의 작용이다.

힘 :: 현상과 의미의 상관관계 “현상이 갖는 의미는 힘에 의해 해석된다.”  만약 우리가 사물을 소유하는 힘, 사물을 이용하는 힘, 사물을 독점하는 힘, 사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현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ex. 산업자본(힘)이 소유하는 기계(사물)는 노동시간 연장을 의미하고, 정보자본(힘)이 소유하는 기계(사물)는 노동시간 축소를 의미한다.) 하나의 현상이란 외관apparences이나 출현apparitions이 아니며, 실제적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signe이며 징후syntome이다.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며, 과학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 니체는 현상과 의미의 상관관계외관과 본질의 형이상학적 이원성을 대체하며, 원인과 결과의 과학적 관계도 대체한다.

힘은 현실의 소유ㆍ지배ㆍ이용 “지각은 자연을 소유하는 힘의 표현이다”  모든 힘은 다수의 현실의 소유ㆍ지배ㆍ이용이다. 지각perception조차 자연을 소유하는 힘의 표현인데, 자연 자체가 역사를 가짐을 의미한다. 한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동일한 대상ㆍ동일한 현상은 그것을 소유하는 힘에 따라서 의미가 변화한다.

 

[2] 복수주의          

*주제 : 복수주의 (하나의 사물이 여러 의미를 갖는다.)

           퍼스펙티비즘 (관점에서의 복수주의. 관점에 따른 복수의 가치)

           의지철학 (힘에서의 복수주의. 힘은 다른 힘과 관계 속에 있다. 힘의 존재는 복수이다.)

복수주의=철학적 사유방식  니체철학은 본질적으로 복수주의를 고려해야 한다. 복수주의(경험주의)는 철학 자체와 하나이며, 철학에 의해서 고안된 철학적 사유방식이다. 즉 복수주의는 구체적 의식 속에서의 자유의 유일한 보증이자, 폭력적 무신론의 유일한 원리이다. 신들은 죽었고, 유일신도 죽었다. 신의 죽음은 그 의미가 다수인 하나의 사건이다. 그래서 니체는 소란스러운 위대한 사건’(*하나의 의미)이 아니라, 각 사건들의 조용한 복수성’(*복수적 의미)을 생각한다.

의미의 복수주의  의미가 다수가 아닌 어떤 사건ㆍ현상ㆍ말ㆍ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사건ㆍ현상ㆍ말ㆍ생각)은 때로는 이것이고 때로는 저것이며, 때로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신들)에 따라서 더욱 복잡한 어떤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여러 의미를 가진다는 복수주의적 생각 속에서 우리는 철학의 쟁취와 철학의 성숙을 본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의 평가, 사물들과 각각의 의미들의 계량, 한 사물과 다른 것들 간의 관계를 매순간 정의하는 힘들의 평가, 그 모든 것은 철학의 가장 고귀한 기술인 해석의 기술에 속한다.

사물을 독점하는 힘 & 사물과 유사성을 드러내는 힘  ① (사물을 탈취할 수 있는 힘과 ······ 의미) 거기서 본질의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취하는데, 모든 의미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물은 그것을 탈취할 수 있는 힘들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ex. 산업자본, 정보자본, AI, 로봇은 모두 기계를 탈취할 수 있는 힘들이며, 기계는 그 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② (사물을 독점하는 힘) 사물은 중립적이지 않고 사물을 독점하고 있는 힘들과 다소간 유사하다. 사물에 제한적 의미와 부정적 가치를 제공할 때만, 어떤 것을 독점할 수 있는 힘들이 존재한다. (*ex. 목수는 망치(사물)를 도구(힘)로서 독점하며, 살인자는 망치(사물)를 흉기(힘)로서 독점한다.) ③ (사물과 유사성을 드러내는 힘)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모든 의미들 가운데서, 그 사물과 가장 많은 유사성을 드러내보이는 힘을 사물에 제공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망치와 가장 많은 유사성을 드러내는 힘=도구를 본질이라고 부른다.)

종교에게 절대권한을 제공하는 힘  니체의 인용. 종교는 차례로 다수의 힘을 이용하기에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와 최대한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이 종교를 지배하거나 종교가 그 힘을 지배할 때, 더 이상 누가 지배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그 힘이 무엇인가? (니체는 종교에게 절대권한을 제공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 성직자!) 모든 것에 있어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량의 문제이고 철학의 섬세하지만 엄밀한 기술이며 복수주의적 해석이다. 

 

[3] 의미와 해석

*주제 : 새로운 힘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때 가면을 정복할 수 있다. 해석은 가면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다

새로운 힘의 생존기술로서 가면  처음에 새로운 힘은 대상을 점령한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그 대상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처음에 스마트폰은 ‘첨단 휴대폰’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사용자를 획득했다) 여기에 해석의 복잡성이 있다. 가면이나 속임수는 자연의 법칙이며, 따라서 가면이나 속임수 이상의 어떤 것이다. 처음에 생명은 물질을 모방해야만 하는데, 어떤 힘이 앞선 힘들의 얼굴을 빌리지 않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의 생존기술로서의 사제의 가면  철학자는 이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금욕적ㆍ종교적인 사제의 관조적 태도를 지닐 때만이 생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혜와 금욕의 벗으로서의 현자-철학자의 이미지만이, 사제의 관조적인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철학이 성장함에 따라 금욕적 가면을 던져버리지 못하게 된다. 철학은 반종교적인 힘이라는 참된 본성이 새로운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할 때, 비로소 자신의 가면을 정복할 수 있다. 해석의 기술은 가면을 꿰뚫어보는 기술이고, 누가 가면을 숨기며 어떤 목적에서 가면을 고쳐쓰는지를 밝히는 기술이다.

 

[4]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

*주제 : 철학의 우월한 단계 (사람들을 극복하게 하고, 스스로 극복되는)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  계보학이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누군지를 찾으면서 무수한 오해를 무릅쓴다. 기원 내에서의 차이는 특별히 훈련된 눈이나 멀리보는 눈, 노인의 눈이나 계보학자의 눈을 제외하고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는다. 철학이 성장했을 경우만, 그것의 본질이나 계보학을 파악할 수 있고, 처음에 자신과 혼동되는 데 호의적이었던 그 모든 것(*철학)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렇다. “모든 것 중에서,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 계보학으로 이해된 기원이 우월한 단계와 관련해서만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타자성 :: 나를 극복하게 하는 자  철학이 처음으로 우월한 형태에 도달하고 동양 사제의 힘과 목적을 이용할 때조차, 그것들과 혼동되지 않는 자신의 참된 힘과 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에서였던 한에서, 철학은 그리스적이다. 필로소포스Philosophos(*철학자)는 현자가 아니라 지혜의 벗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기를, 벗은 항상 나je(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와 자아moi(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자아로서의 나) 사이의 제3자인데, 나로 하여금 나를 극복하게 하고 극복되게 하는 자이다. (*위버멘쉬의 타자성. ex. 소수자_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 

철학의 자기극복 :: 새로운 힘으로서의 철학  지혜의 벗은 지혜를 내세우지만, 사람들은 그(가면) 속에서는 생존하지 못할 가면을 내세우는 것 같다. 즉 철학자들은 지혜를 이상하고 위험하며, 지혜롭지 못한 새로운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들며, 지혜가 스스로를 극복하고, 극복되길 원한다. (*위버멘쉬의 자기극복의 원리. 모든 사물은 내부에 자기극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들은 철학자의 본질ㆍ반反지혜ㆍ비도덕성ㆍ우정에 대한 입장을 공격한다. 새로운 힘으로서의 철학에 의해 겸손ㆍ가난ㆍ순결 같은 지혜롭고 금욕적인 덕들이 다시 포착될 때, 그 덕들이 갖게 되는 의미를 짐작해보자.

 

          3. 의지철학          

 

[1] 힘과 힘의 관계: 의지

대상(현상)과 상이한 힘들  계보학은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도 한다. 지금까지 부동인 대상과 관련해서 상이한 힘들이 투쟁하고 교체하듯이 상황을 제시하였다. (*ex. 신체는 힘들의 복합체) 그러나 대상 자체는 힘force이고 하나의 힘의 표현이다. 그래서 대상과 대상을 독점하는 힘 사이에는 어느 정도 닮은 점까지 존재한다. 소유되지 않는 것은 대상(현상)이 아닌데, 그 이유는 대상이란 그 자체로 외관이 아니라 어떤 힘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힘의 복수성과 미분적 요소  그래서 모든 힘은 다른 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다. 힘의 존재는 복수이며, 힘을 단수로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능동적ㆍ적극적인 힘···반동적ㆍ반응적인 힘 / 긍정하는 힘ㆍ긍정적 의지···부정하는 힘ㆍ부정적 의지) 힘은 지배하는 것이지만, 지배되는 대상이기도 하다.(*지배하는 힘, 지배되는 대상) 여러 힘은 거리를 두고 영향을 주고받는데, 거리distance는 각각의 힘 속에 포함되어 있는 미분적(*차이나는, 차이에 근거하는) 요소이며, 미분적 요소에 의해 각각의 힘이 다른 힘과의 관계를 갖는다. (*ex. [산업기계-노동시간 연장] 산업자본-힘 & 노동계급-힘 <······> [정보기계-노동시간 축소] : 정보자본-힘 & 노동계급-힘)

맑스의 원자론 비판  ① (니체의 자연철학 원리) 니체에게서 자연철학의 원리는 그와 같다. 원자론에 대한 비판은 자연철학의 원리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원자론 비판의 목적은 원자론이 힘에게만 속하는 본질적인 복수성과 거리를 물질에게 부여하기 위한 시도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오직 힘만이 다른 힘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② (맑스의 원자론 비판) 맑스가 원자론을 해석하면서 원자들은 원자들 자신에 있어 유일한 대상이며, 오직 자기 자신들과 관계맺을 수 있다(*원자개념의 본질적 관계)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원자라는 개념이 원자의 본질 속에서 원자에 부여하는 본질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원자라는 개념은 원자 대신 힘을 생각할 때만 논리적이게 된다. 왜냐하면, 원자라는 개념은 자신 속에 본질적 관계의 주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차이, 본질 속에서의 차이, 본질에 따른 차이를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은 태동하고 있는 역동론을 위한 하나의 가면일 것이다.

힘에의 의지와 의지철학  따라서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이 측면에서 힘은 의지volonte로 불린다. 의지(힘에의 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힘을 가지려는 의지는 다른 힘과 차이를 만드는 요소이다.) 그로부터 의지철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의지는 근육과 신경에 신비롭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일반적인 물질에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힘 ≠ Kraft), 필연적으로 다른 의지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문제는 의욕과 비자발적인 것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 있다. “의지는 의지에만 작용하지, 물질(ex. 신경)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결과를 확인하게 되는 모든 곳에서, 의지는 의지에 작용한다는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의지철학과 복수주의  ① (니체-의지철학의 복수주의) 의지는 원하는 한에서만 복종되길 원하지만, 의지만이 명령하는 것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에, 의지는 복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수주의는 의지철학 속에서 직접적인 확증과 선택의 영역을 발견한다. ②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동일성) 그리고 이것이 니체와 쇼펜하우어 사이의 결렬이 놓여있는 지점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바로 의지가 하나인지 다수인지를 아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우선 그가 의지의 통일성을 생각한 까닭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는 본질 속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사형집행인은 자신이 자기희생자와 일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연민ㆍ도덕ㆍ금욕주의 속에서 의지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고 자멸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의 동일성에 대한 자각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적 신비화’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는데, 사람들은 의지의 통일성ㆍ동일성을 주장할 때 필연적으로 의지를 부정해야만 한다.

 

[2] 기원과 서열

원자론과 힘 / 이기주의와 의지  니체는 영혼, 자아, 이기주의를 원자론의 최후의 은신처로 고발한다. <모든 의지에서, 다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집단적 구조 안에서 명령하고 복종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니체가 이기주의를 찬양할 때는, 항상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방식을 통해서인데, 무사심(*비이기주의적) 덕에 반대해서이다. 그러나 원자론이 힘의 그릇된 해석인 것처럼, 이기주의도 의지의 그릇된 해석이다. 이기주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한 자아ego가 존재해야 한다.

기원과 서열  명령하기 위해서건 복종하기 위해서건, 모든 힘이 다른 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기원의 행로 위에 놓는다. 즉 기원은 기원 속에서의 차이이고, 기원 속에서의 차이는 서열(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의 관계이며 복종시키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능동적 힘이 반동적 힘보다 높은 서열이고, 긍정적 의지가 부정적 의지보다 높은 서열에 있다.)

계보학과 서열  계보학과 분리할 수 없는 서열은, 니체가 <우리의 문제>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서열은 원초적 사실이고, 차이와 기원의 정체성이다. 왜 서열의 문제가 정확히 <자유로운 정신>의 문제인지 고려할 때, 우리는 계보학의 임무로서 의미에서 가치로의 이행, 해석에서 평가로의 이행을 지적할 수 있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사물 속에 표현되어 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11. 주사위 던지기          

 

[1] 두 시간

주사위 던지기의 두 탁자  주사위 놀이에는 두 순간(주사위를 던지는 순간과 주사위가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니체는 주사위 던지기를 두 탁자(주사위들을 던지는 대지, 주사위들이 떨어지는 하늘) 위에서 놀이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언젠가 내가 신들과 더불어 대지라는 신성한 탁자 위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을 때, ······ 대지가 창조적인 새로운 말들과 신성한 주사위 소리에 의해서 흔들리는 신성한 탁자라는 점 ······ 내 위에 있는 하늘. 너의 순수성은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루바닥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의 신성한 탁자니라.>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두 시간  그러나 두 탁자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두 시간ㆍ두 순간, 즉 정오와 자정, 주사위를 던지는 시간과 주사위가 떨어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삶을 잠시 방기하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삶에 잠시 고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생성을 긍정하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한다.

 

[2] 우연과 필연 : 이중의 긍정

이중의 긍정 : 우연의 긍정, 필연의 긍정  주사위의 수 때문에, 동일한 조합을 재생산할 수 있는 여러 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생산된 조합의 수 때문에, 있는 그대로 재생산할 수 있는 단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다. 무수한 주사위 던지기가 어떤 조합의 반복을 낳는 것이 아니라, 조합의 수가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을 낳는다. 한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주사위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존재가 생성에 의해 긍정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필연은 우연에 의해 긍정되며, 하나는 다수에 의해 긍정된다.

우연을 긍정하지 못하는 경우  “우연히 던져진 주사위들이 12라는 승리의 조합을 필연적으로 낳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놀이하는 자가 우연을 긍정할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가 다수를 제거하지도 부인하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이 우연을 제거하지도 파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 > 니체는 우연을 다수ㆍ단편들ㆍ부분들ㆍ혼돈과 동일시하는데,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 하늘 그 자체는 ‘우연한 하늘, 결백한 하늘’로 불린다. 차라투스트라의 군림은 ‘위대한 우연’으로 불린다. <우연히, 그것은 세계의 가장 오랜된 고귀함이고, 나는 그것을 모든 것들에게 되돌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목적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 나는 지복의 확실성을 발견하였고, 지복은 우연의 발로 춤추기를 더 좋아한다. ······ 내게 우연이 오도록 내버려두라, 그것은 어린애처럼 순결하다.> 니체가 필연(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파괴가 아니며, 우연의 조합이다.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필연은 우연에 의해 긍정된다. (···?··· p63 마지막) 놀이꾼이 주사위 던지기를 한번 더 하게 하는 수를 낳기 위해서는 일단 우연을 긍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3] 주사위 던지기와 기회계산 간의 대립

놀이에 서투른 자의 기회계산  ① (기회계산) 우연을 긍정할 줄 아는 것은 놀이를 할 줄 아는 것이다. 놀이에 서투른 자들은 여러번의 주사위 던지기, 무수한 주사위 던지기에 기대한다. 그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조합을 낳기 위해서 인과성과 확률성을 이용하며, 바람직한 조합을 인과성 뒤에 숨겨진 획득해야 할 목적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영원한 거미, 이성의 거미줄’이다. “인과성의 거대한 망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있는 지상명령이자 최종목적인 거미! ······ 나는 보편의 universelle 거미와 싸운다.” 인과성과 목적성의 집게발로 우연을 잡고 파괴하는 것, 우연을 긍정하는 대신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에 기대하는 것, 필연을 긍정하는 대신 목적을 흐릿하게 하는 것, 이것이 놀이에 서투른 자의 놀이방식이다. ② (거미의 복수심 :: 반복 속에서의 원한, 신념 속에서의 가책) 그것들은 이성 속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성의 뿌리는 거미의 복수심이다.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 속에서의 원한, 그것은 목적에 대한 신념 속에서의 가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럴듯한 상대적인 수 이외에 결코 아무것도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니체적 주사위 던지기  사람들은 한번에 우연을 충분히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사위 던지기에서 실패한다. (···?··· p65 중간) 니체는 인과성과 목적성, 확률성과 목적성의 쌍, 이 항들의 대립과 종합, 이 항들의 거미줄을 우연과 필연의 디오니소스적 상관관계, 우연과 운명의 디오니소스적 쌍으로 대체한다. [ⅰ] 여러번 되풀이하는 확률이 아니라, 단 한번의 우연이며, [ⅱ] 욕망되고 의욕되고 소망된 최종조합이 아니라, 운명적인 조합(가장 사랑하는 운명적인 조합=Amor Fati. 운명적 사랑, 운명에 대한 복종)이고, [ⅲ] 주사위 던지기 횟수에 의한 어떤 조합으로서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획득된 수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다.

 

          12. 영원회귀를 위한 결론들          

 

[1] 우연의 가열

주사위던지기의 두번째 시간  던져진 주사위들이 우연을 긍정할 때, 떨어지는 주사위들은 (주사위 던지기를 한번 더하게 하는) 운명을 긍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의 두번째 시간(*떨어지는 주사위들)은 시간의 통일이거나 그 통일을 위해 가치있는 놀이꾼이다. 영원회귀는 두번째 시간, 필연의 긍정, 우연의 모든 부분을 다시 모으는 수이지만, 또한 영원회귀는 최초시간의 회귀, 주사위던지기의 반복, 우연의 재생산이자 재긍정이다. 영원회귀 속에서의 운명은 또한 우연의 <환영>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우연을 끓인다  ① (차라투스트라의 에피소드) <나는 나의 솥 안에서 우연적인 모든 것을 끓인다. 그것은 내가 우연으로 내 양식을 삼기 위해 우연이 익을 때뿐이다. 여러 우연이 솥 안에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우연에게 너무도 명령하듯 말했고, 우연은 피난처를 제공하고 따뜻하게 대접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_차라투스트라 3부 왜소한 덕>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② (우연의 파편들의 간청. ex. ‘끔찍스러운 우연의 파편들’) 자신이 해당(*선택)되길 열망하는 우연의 많은 파편들이 있다. 우연의 파편들은 자신의 확률성에 근거하며, 주사위던지기에 놀이꾼이 되기를 간청하고, 주사위던지기로 단순한 확률이 된 우연의 파편들은 주인처럼 말하고 싶어하는 노예들이다. _차라투스트라 2부 속죄에 대하여. ③ (차라투스트라의 입장)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놀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반대로 우연의 모든 파편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서,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수를 긍정하기 위해서, 단 한번에 모든 우연을 긍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기 손 안에서 주사위들을 데우는 놀이꾼처럼 주사위들을 끓이고 익도록 해야 한다.) 그 때만이 우연은 운명이 영원회귀에게 보장하는 운명의 친구이다.

 

[2] 혼돈과 순환적 운동

니체의 혼돈과 순환  <최후의 성격을 띤 모든 활동을 배제하는 보편적 혼돈은 순환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환의 관념은 단지 비합리적 필연성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혼돈과 순환, 생성과 영원회귀를 결합시켰지만, 그것들이 대립되는 두항을 위태롭게 하는 듯 생각했다.

플라톤의 혼돈과 순환  플라톤에 의하면, 생성 그 자체는 (순환 속에 놓여지기 위해서 그것을 강제로 굴복시키며 그것에게 한계나 관념을 모형을 강요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작용을 겪게 할 필요가 있는) 무제한적 생성, 광적인 생성, 과도하고 유죄인 생성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생성혼돈이 모호하고 기계적인 인과성에게서 거부되고, 순환이 밖으로부터 강요된 목적성에게로 되돌려보내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혼돈은 순환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순환은 자신의 법칙이 아닌 법칙에 생성이 종속하도록 강요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혼돈과 순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 헤라클레이토스만이 생성이 <심판받지> 않고, 심판받을 수도, 심판받아서도 안되며, 자신의 법칙을 다른 곳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정의로우며>,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만이 혼돈과 순환이 대립하지 않음을 꿰뚫어보았다.

순환적 운동(순환)과 혼돈(힘의 덩어리)  혼돈을 다시 데려오는 수나 필연성(비합리적 필연성이지 목적성은 아닌)을 동시에 긍정하기 위해서 혼돈(우연이지만 인과정은 아닌)을 긍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처음에 혼돈은 없었다. 모든 형태들의 규칙적이고 순환적인 운동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혼돈이기는커녕 영원하고 생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힘들의 혼돈이 존재했다면, 혼돈이 영원했고 모든 순환 속에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순환적 운동(순환) 생성되지 않았고, (힘의 덩어리(혼돈)가 원초적 법칙이듯이) 그것(*순환적 운동) 역시 원초적 법칙이다. 모든 생성은 순환(순환적 운동)과 힘의 덩어리(혼돈)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힘에의 의지』 2권, #325>

그리스 고대철학 비판  니체가 고대의 선배들 저작 속에서 영원회귀의 관념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의 선배들은 영원회귀 속에서 생성 그 자체의 존재, 다수의 하나, 모든 우연에서 나온 필연적인 수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생성의 복종, 부정의 고백, 부정의 속죄 같은 대립자를 보기조차 했다. 그들은 <생성 속의 법칙의 현전, 필연 속의 놀이의 현전>을 보지 못했다.

 

 

[니체와 철학] 1장 비극.... 질문들

          [1] 8. 비극의 본질  (p46 아래 ~ p47 위)          

  "다수의 긍정이나 복수적 긍정은 비극의 본질이다."

  "비극은 불안이나 혐오 속에도,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향수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은 긍정 그 자체의 복수성, 다수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비극을 정의하자면, 비극은 다수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이다. 

  비극이란 기쁨의 미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의학적 처방이나 고통 공포, 연민의 도덕적 해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들뢰즈가 말하는 비극이란 무엇이고, 비극은 다수성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 비극은 힘에의 의지 혹은 영원회귀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2] 10. 현존과 결백 (p57, p72)          
“(p57-6째줄) 결백은 다수의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힘과 의지의 철학원리에서 나온다. ······

어떤 힘에 의해서 해석되고 어떤 의지에 의해서 평가되도록 두지 않는 것은,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또다른 의지 및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또다른 힘을 요구한다. ······

(p57-끝부분) 우리는 현세를 평가(검토)할 수 있는 의지도, 현존을 해석할 수 있는 힘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p72-7줄) 경구만이 의미를 말할 수 있고, 경구는 해석과 해석의 기술이다. 시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기에 평가와 평가의 기술이다.

그러나 가치와 의미는 너무 복잡한 개념들이라서, 시는 평가되어야 하고 경구는 해석되어야 한다. 시와 경구는 해석의 대상, 평가의 대상이 된다.”

- 해석하는 힘 ··· 평가하는 의지 :: 힘은 해석과 의지는 평가와 연결되는가?

- 경구는 의미를 말하는 해석의 기술이고, 시는 가치를 말하는 평가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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